< 창녕석빙고, 사직단, 인양사조성비 성씨고가>
걷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점심을 배불리먹고 고분처럼 우람하게 시내한복판을 차지한 <창녕석빙고>에 들린다. 조상들의 얼음창고이다. 경상도에만 6개가 남아있고 그중 2개가 창녕에 있다. 석빙고는 불을 켜고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경사지게 녹은 얼음물을 밖으로 흘려 보낼 수 있고 지붕에는 환기창을 두었다. 석벽은 장방형으로 깊게 파고 아취를 세워 지붕돌을 덮었고 그 위에 흙을 덮고 잔디를 심었다. 언젠가 청도에서 골격만 남은 석빙고를 보았지만 이렇게 완벽한 모습을 대하니 새상 조상들의 슬기가 존경스럽다. 석빙고를 둘러보고나서 초등학교 옆으로 놓인 데크를 따라 명덕저수지를 향해 걸었다. 하늘은 푸르고 날씨는 쌀쌀하지만 화창했다. 날씨 덕은 참 많은 우리 모임 이다. 재잘재잘 걸으니 어느덧 < 창녕사직단>이 낮으마한 구릉위에서 붉은 홍살문을 두르고 나타났다. "이런 곳을 찾는 사람은 잘 없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해설사님. 그러나 우리는 국가의 근간인 사직단, 고을의 근간인 사직단을 올랐다. 토지의 신 사(社)와 곡식의 신 직(稷)에게 한해의 농사와 풍요를 비는 곳,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기우제를 드리기도 한 신령한 장소이다. 창녕사직단은 원형이 잘 보존된 곳이라한다. 홍살문 담벽에 기대어 사진을 찍고 인양사조성비가 있는 문화공원 아래편 농지로 걸어내렸다. 인양사조성비는 말 그대로 인양사 등 조성에 필요한 여러가지를 40년간 기록하여 알린 비석이다.. 특이한 것은 뒷면에 승려상을 조각하였다는 것이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둥그런 복된 얼굴과 신체표현, 쓰고있는 우람한 갓 등이 처음보는 진기한 문화재였다. 세상에서 하나뿐일 것 같은 <인양사조성비>를 관람한 후 우리의 마지막 답사지는 양파시배지가 있는 석리 창녕성씨 고가 였다.
<창녕성씨고가>는 입향조인 성규호씨가 1850년대부터 마을을 이루었다한다.. 안채인 아석헌과 튼 ' ㅁ'형의 본채 그리고 세 아들의 살림집들이 구석구석 들어차 마을을 이루고 있다. 강릉의 선교장에 못지 않고 금환지의 땅이라는 운조루와도 비교되는 경남의 대표적인 고가이다. 입향조는 이 땅을 어떻게 구입했을까 재물이 모인다는 풍수가 있는 이 집은 만석군을 이루었고 노불리즈오불리주의 대표가 되었다. 주변에 학문을 가르치고 주변의 못사는 농민들을 위해 양파채종에 온 힘을 쏟았고 드디어 성공하여 창녕을 양파의 고장으로 만들었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고가의 한국지형을 본따 만든 연못도 보고 후원의 대나무숲길도 산책했다. 산책길의 끝에는 두루마기자락을 날리며 성씨어른이 청동조각으로 서 계셨다. 영원무역의 회장인 성기학씨일까 그는 서울대학에 100억을 투자하였고 고향 창녕에 많은 투자를 한 모양이다. 창녕사람들은 양파밭에서 일을 할 때도 노스페이스를 입는다는 말이 생겼다.. 성기학의 노스페이스의류는 국내 최고의 브랜드로 성장하였는데 한편 이 집의 성유경씨는 이북으로 건너가 딸 성혜림이 김 정일과 만나 아들 정남을 얻었는데 모두 불행한 결말을 지었다. 마지막 장손인 한솔군마저 조국을 잃고 세계의 어두운 곳을 헤매고 있다니 이데올로기의 피페가 막심한 곳이기도 하니 참 안타깝다. 석리 들판에는 양파와 마늘이 쑥쑥 자라고 있었다. 한파를 견디며 자라는 이 식물들을 멀리 화왕산이 내려다본다. 자하골 탱크바위가 창녕을 굳게 지키고 있는 한 창녕은 시들지 않을 것이다.
첫댓글 따뜻함이 물씬 쓰며드는
답사회는
나의 유일한 여행팀 소속이라 뿌듯하고 행복합니다ㆍ
회장님과 운영진께
감사함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