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성유전학, 라마르크의 부활?
라마르크의 부활을 기다리던 그의 사도들에게 얼마 전부터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꿈에도
그리던 신대륙으로 그들을 인도할 구세주는 바로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다. 후성유전이란 DNA 염기
서열에 변화를 수반하지 않으면서 유전자 발현 메커니즘에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 같은 변화
는 일단 일어나더라도 대개 세포나 개체의 생애 동안 유지되는 게 보통이지만 때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
지기도 한다. DNA와 그 나선 안에 파묻혀 있는 공 모양의 히스톤(histone) 단백질을 통틀어 염색질(chrom
atin)이라고 하는데, DNA가 히스톤을 감싸는 방식이 변하면 유전자 발현의 양상도 변한다. 이 같은 염색질
개조(chromatin remodeling)는 종종 DNA 메틸화(DNA methylation)에 의해 일어난다. 유전체의 염기서열
에서 시토신(cytosine)과 구아닌(guanine)이 연속적으로 번갈아 존재하는 CpG 부위에 메틸기가 붙으면
시토신이 메틸시토신으로 변한다. 아직 그 원인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특별히 메틸화가 심하게 일어
난 부분은 전사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경우 이 부위에 있는 시토신의 3~5%가 메틸화되어
있다. CpG 부위는 유전자의 전사를 조절하는 프로모터(promotor) 근처에 위치하며 CpG의 메틸화는 특정
한 유전자의 발현을 제어할 수 있다. 이 같은 후성유전의 효과는 대개 몇 세대를 거치면 사라지는
경향을 보이지만 진화의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을 듯싶다.
이러한 메틸화나 히스톤의 변형으로 일어나는 가장 두드러지는 진화적 현상은 유전적 각인(genetic imprin
ting)이다. 부모 중 어느 한 쪽으로부터 받은 유전자에만 특이하게 나타나는 유전 현상으로 메틸화 등으로
인해 한 쌍의 대립인자 중 한쪽에만 발현된다. 이처럼 생식세포 계열(germ line)에 각인이 일어나면 그 개체
의 모든 체세포에서 발현된다. DNA의 염기서열을 변화시키지 않으며 멘델의 유전법칙을 따르지도 않는 유전
자 각인은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와 곤충, 그리고 현화식물에서 관찰되었다. 인간의 경우에는 주로 베크위드-
비드만 증후군, 실버-러셀 증후군 등 유전병에 관련된 유전자 각인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포유류
전체로 보면 대체로 유전체의 1% 미만의 유전자에 정상적인 각인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버드
대학의 진화생물학자 헤이그(David Haig)와 그의 동료들에 따르면 유전자 각인은 유전적 이득을 둘
러싼 부모간의 갈등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아버지는 대개 자기 자식의 성장에만 관심을 두는 데 비해
, 어머니는 현재 양육하고 있는 자식에게 충분한 영양을 제공하면서도 장차 태어날지도 모를 자식
과 자기 자신을 위해 에너지의 일부를 비축해야 한다. 그래서 ‘부모 갈등 가설(parental conflict
hypothesis)’은 아버지 쪽으로 각인된 유전자는 대체로 성장을 촉진하는데 반해 어머니 쪽으로 각인
된 유전자는 성장을 억제하는 경향을 띤다고 예측한다.
실제로 유전자 각인은 암컷의 자식 양육 투자가 큰 태생포유류(placental mammal)에서는 일반적으로 발견되
는 반면, 새나 난생포유류(oviparous mammal)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최근 후성유전학의 발달로 인해 라마르크의 무덤을 기웃거리는 마리아들이 부쩍 많아졌다. [체세포 선택과
적응 진화—획득 형질의 유전에 관하여 Somatic Selection and Adaptive Evolution: On the Inheritance
of Acquired Characters, 1981)]와 [라마르크의 서명 Lamarck’s Signature, 1998]을 저술하며 라마르크의
수제자를 자처하는 에드워드 스틸(Edward J. Steele)과 [후성유전과 진화Epigenetic Inheritance and
Evolution: The Lamarckian Dimension, 1995)와 [네 차원의 진화Evolution in Four Dimensions, 2005)의
공저자 에바 야블롱카(Eva Jablonka)와 매리언 램(Marion J. Lamb)은 모두 후성유전을 라마르크 식의 진화
로 분석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들은 모두 역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라마르크의 진화 이론
과 후성유전의 연구 결과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존재한다. 라마르크는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얻은 생리적 적응이 후손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지 환경이 생명
체의 유전자 발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지 않았다.
후성유전도 결국 다윈의 진화 이론 안에 있다
흔히 후성유전학이 표상한다고 믿고 있는 라마르크 식의 유전은 오히려 다윈과 월리스의 설명에 더 가깝다
고 보아야 한다. 1858년 린네학회에서 월리스와 함께 발표할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1857년 하버드대학
의 식물학자 그레이(Asa Gray)에 보낸 다윈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자 이제 변화를 겪고 있는 한 나라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는 주민의 일부를 약간 다르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그들에게 선택이 일어날 만큼 언제나 충분히 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부 주민들은 제거될 것이고, 나머지는 다른 일군의 주민들의 상호 활동에 노출될 것인데 나는 이것이 각자
의 삶에 단순히 기후보다 훨씬 더 중요하리라 믿는다.” |
첫댓글 사실 진화론자들도 파생된 분야가 많기 때문에 어떤 주장이 맞을지는 시간이 흘러야 알 것 같습니다.
epigenetics를 여기서 보다니 왠지 무척이나 반갑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