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 그늘은 붉지 않다 / 김석윤
1.
꽃섬(花島)이라 부르는 섬이 있었다
꼬막 껍데기 같은 스무 채 집이 엎드려 있는
그 섬엔 유난히 목이 긴 사람들이 살았다
먼 곳에 눈길 준 새들의 가느다란 목이 그러하듯
한결같이 섬 밖으로 고개 내밀어 뭍을 응시했다
바람이 없이도 물결은 출렁이고
섬의 발은 늘 그리움으로 젖어 있었다
소년은 새벽 별을 보고 학교에 갔다
저녁 별을 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십 리 산길을 걸어 나룻배를 타고,
청해국민학교 화도분교를 거쳐
읍내의 중학교와 광주의 고등학교로
자취방을 옮겨가며 한 발짝씩 뭍으로 나아갔다
그러는 동안 상장들이 집안을 채워갔다
마침내 소년은
섬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대학생이 되었다
온 섬이 잔치 분위기로 들썩거렸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인 형은 웃지 않았다
그날 밤, 아버지의 밭은기침 소리에 잠이 깬 나는
여순반란사건*과 연좌제란 생소한 말들을 들었다
자는 척 마른침을 삼키며
사실은 아버지 형제가 오 형제였다는 것과
그동안 이름 없이 지낸 제사의 주인이
여수에서 죽은 막둥이 삼촌이라는 것과
형이 육군사관학교에 붙고도 떨어진 이유를,
형은 분명하게 진로 변경을 선언했고
각혈을 쏟는 아버지 곁에서
어째야 쓰꺼나! 어째야 쓰꺼나!
엄니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 해, 오월
광주로부터의 모든 연락이 끊겼다
엄니는 일손과 함께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큰 섬 당골을 찾아 형의 생사를 다짐받곤
밤낮으로 서낭당에서 비손하다
기어이 광주로 향했다, 닷새를 걸어
도착한 광주 바닥 어디에도 형은 없었다
자취 집 주인도 반 부모 아니다요!
선상님은 부모 대신 아니다요!
지 나라 백성한테 총질하는 군인이 어딨다요!
하나님의 어린양이 아니요! 묻고 다녔지만
누구 하나 대답해 주는 이가 없었다
달포 만에 엄니는
형의 옷가지와 책을 챙겨 섬으로 되돌아왔다
끝내 바다에 빠져 죽지 못했으므로,
이후 마을 사람들은 형의 이름 대신
내 이름을 붙여 엄니를 불렀다
어쩌다 형의 이름을 거명할 때면
입에 손가락을 대고 주위를 살폈다
그때까지 형의 옷을 물려받고 자란 나는
형의 기대도 대신 물려받고, 삼 년 후
외항선 선장의 꿈을 섬에 남겨둔 채
광주의 고등학교로 진학해야 했다
2.
여름 방학을 이틀 앞두고
고향 갈 채비를 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어둠을 밀치며 그림자 둘이 들어섰다
지 형을 똑 빼닮았네!
낯선 아낙이 대뜸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돌려 외면하려 했으나
귀기(鬼氣) 서린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증심사(證心寺)가 어딘지 아느냐?
엄니는 안부 대신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두 여인이 묻혀 온 알 수 없는 냉기에
좁은 자취방이 금새 싸늘해졌다
봄 소풍 기억을 더듬어 무등산에 도착해서야
바리바리 챙겨 온 무구(巫具)들이 비로소
엄니와 아낙의 행동에 관해 설명해 줬다
집총(執銃)한 경찰들이 신분을 확인하곤
길도 없는 산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치마끈을 동여맨 엄니는
신발이 벗겨진 줄도 모른 채 버선발로
일행보다 앞서 너덜겅을 헤쳐 나갔다
엄니의 고무신을 양손에 한 짝씩 챙겨 들고
나는 숨을 헐떡이며 뒤를 따랐다
구덩이 속에 주검 넷이 웅크리고 있었다
한글을 배우지 못한 엄니는
내게 형의 이름을 다그쳤다
내가 교련복 명찰을 가리키자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유해를 더듬기 시작했다
이윽고 넝마가 된 교련복을 부둥켜안고
형의 이름을 크게 몇 차례 부르곤 까무러쳤다
능선을 거쳐 골짜기를 돌아온 메아리가
길게 이어지는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몇 해 전 잃어버렸다던 엄니의 금가락지가
형의 어금니 안쪽에 메꿔져 있었다
산역꾼들은 삭다 만 옷과 살점을 발라내고
하나하나 뼈를 추리기 시작했다
육탈된 뼈들을 살피던 엄니는 또 한 번 오열했다
어릴 적 달고 다니던 부스럼 딱지처럼
두개골의 정수리께가 움푹 패어 있었다
복날의 개뼈다귀를 보고도 뒷걸음친 나는
니 성(兄)이다! 건네준
사람의 뼈를 난생처음 만져 보았다
골수까지 붉은 물이 들었을 것이란 말과 달리
씻골을 끝낸 뼈들이 너무도 하얘서 눈물이 났다
하얀 소복의 매무새를 다듬은 당골이
천천히 두 손을 들어 하늘을 받들고
땅을 어루만지는 자세로 네 번의 절을 올렸다
자신이 모시는 주신(主神)께
상제님과 태모님과 천지신명께
무등산 산신령과 집안의 조상님께
형을 의탁할 때마다 엄니도 합장하며
머리 숙여 손을 이마에 대고 예를 갖췄다
제를 올리는 내내 나는
형이 좋은 세상으로 갈 거라는 당골의 말도
미신이라 여겼던 엄니의 신앙도 믿기로 했다
3.
객지 주검이라고 입도(入島)를 꺼린 디 어짠다요?
실은, 머시냐, 그랑께, 거시기 땜에, 그래 쌌는디...
이장인 사촌의 말은 토막말로 더듬거렸다
시방, 머시 어짠다고?
택도 없는 소리 허들 마라 하소!
객지 주검이긴 혀도 초분(草墳)**은 쓴 셈이고,
하늘을 두고 잘못한 거시 없응께! 암말 말고
조카는 양지짝 큰 밭에 멧자리나 봐주소.
단호한 어조로 전화를 끊은 엄니는
끙 어금니를 깨물었다, 하믄! 하믄!
당골도 추임새로 힘을 보탰다
비포장길 완행버스는 쉼 없이 덜컹거렸다
나를 옆자리로 불러 앉힌 엄니는
유골함을 가슴에 감싸 안은 채
앞만 바라볼 뿐 미동도 없었다
자다 깨다 몇 번을 쳐다봐도
앉음새 하나 흩트리지 않았다
읍내에 도착하자 훅 갯내가 풍겨왔다
자맥질하다 코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콧속이 싸하게 쓰리며 눈물이 핑 돌았다
방학 때면 집에 온 형은
엄니 젖내 같고 살내 같다고
코를 벌름거리며 갯내를 들이마시곤 했다
바다는 고운 천을 펼쳐 놓은 듯 잔잔했다
꿈속을 가듯 배는 윤슬을 가르며 섬에 닿았다
선착장엔 사촌과 집안 어른 셋이 나와 있었다
사람들은 애먼 불똥이 튈까 먼산바라기로
상여도 없는 영정뿐인 장례를 지켜봤다
미리 파 놓은 묘혈은 깊고도 붉었다
유골함을 광중(壙中)에 앉히곤
누구도 선뜻 흙을 덮지 못했다
한참이나 허리를 꺾은 채 울음을 짓씹던
엄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해가
시나브로 수평선 너머로 잠겼다
봉분 양쪽에 어린나무가 심겨 있었다
웬 나무야? 쳐다보는 내게
잊었드냐! 속없는 니 성이
단풍나무 그늘에서 자고 있지 안튼,
니 성이 누워 있던 자리에서 챙게 왔다
한번 피어 보지도 못한 청춘인디
꽃을 보자고 꽃나무를 심겄냐?
열매를 얻자고 과실나무를 심겄냐?
그래도 두 그루잉께 덜 외롤 거시다.
엄니는 묻지도 않는 대답을 했다
내 눈에도 밭 가운데 덩그런 무덤이
앞바다에 떠 있는 무인도처럼 보였다
용오름이 일었다고 마을이 술렁거렸다
다음날부터 내리 나흘 동안
섬을 떠메고 갈 듯 폭풍우가 몰아쳤다
엄니는 수건으로 이마를 싸매고 드러누워
물 한 모금 미음 한 모금 입에 넣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귀곡성(鬼哭聲)을 들었다
신음 같기도 하고 흐느낌 같기도 한
귀신의 울음은 비바람 소리에 섞여
안방 문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폭풍우가 그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엄니는 호미를 챙겨 들고 큰 밭으로 향했다
빗물에 파인 봉분을 다독거려 손질하곤
쓰러진 참깨들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4.
섬을 떠나 뭍으로 나왔다
숭(凶)한 놈의 시상(世上)이다.
니마저 잘못되면 에미는 더는 못 산다!
엄니의 갈퀴 같은 손과 둠벙 같은 눈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던, 나는
세상을 향해 돌팔매질하지 않고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되었다
어쨌든, 살아남았으므로
일기장 속 이름들과 형을 불러내
반성문을 써야만 했다, 그것을
사람들은 시(詩)라 불렀다
*. 여수·순천 10·19사건: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군인들이 동족을 학살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제주 4·3사태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순천 등지까지 무력 점거를 한 사건. 당시에는 ‘여·순반란사건’이라 부름.
**. 초분(草墳): 시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1∼3년 동안 관을 돌축대 또는 평상 위에 놓고 이엉으로 덮어두는 매장법. 일부 도서 지역에는 살은 더러운 것으로, 땅속에 매장함으로써 땅을 더럽힌다고 생각해서 정식 매장 전에 초분을 쓰는 풍습이 있음.
첫댓글 <부기>
위의 서사(敍事)는 온전히 저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제 주변의 이야기이며 우리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신채호”라고 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만 살펴보더라도 ‘4·19 혁명’, ‘제주 4·3 사건’, ‘5·18 민주화 운동’, ‘6·10 민주항쟁’,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때마다, 국가와 정부는 부재했으며 국민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문학이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詩)를 한 줄이라도 쓰는 이라면, 올바른 역사 인식의 토대(土臺) 위에 말씀(言)의 사원(寺)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 기억해야 할 날 중의 하나라서, 묵은 일기장을 꺼내 그날의 페이지를 다시 펼쳐 읽어 보았습니다.
아릿한 역사를 시를 통해 읽습니다.
기억해야 하고
죽은 자들에게 빚 갚는 길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역사의식 살려 잘 살아가는 길입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되도록 이런 글을 올리고 싶지 않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래도 그 한 줄이라도 쓰는 사람들이
먼저 말문을 터야 하지 않을까
그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공감의 말씀 고맙습니다.
숙연한 마음으로 찬찬히 읽었습니다.
말씀의 사원을 세워야겠다는 부기도
잘 간직하고 글을 쓰겠습니다.
역사의 희생자들께 묵념합니다...
세상에나!
새벽 2시 반까지 안 주무시고
댓글을 올린 것을 아침에 확인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죄송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타깁남(김석윤) 다음엔 아침에 써야겠어요 ㅎ
우리 우주(반려견)가 많이 아파서
잔뜩 긴장한채 일주일이 되었어요.
간밤에도 구토할 것 같아 지켜보고 있다가 진정된 후였어요. 오늘은 똘똘해져가니 한시름 놓여요.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ㅜㅜ
봄에 더 아픈 상처~ 반성과 사죄가 없는 시대를 여전히 살아가고 있어ᆢ 넘 가슴이 먹먹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듯하지만
여전히 가슴이 먹먹하고
한편으론 죄스럽고 그렇습니다.
긴 글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반성과 사죄는 우리가 깨어있을 때
역사를 직시하고 기억할 때
후대에라도 반드시 이뤄지리라 믿습니다.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 읽는 내내 아팠습니다 당시 고3 동생이 집에 이틀 들어오지 않아 얼마나 가슴태웠었는지~~~ 걸어걸어 땅끝에 왔었어요
선생님 반갑습니다.
이 코너에서는 처음 뵙습니다.
고향이 해남인가 봅니다.
저는 이웃 완도가 고향입니다.
그날을 몸소 체험하셨으니
더 말하지 않더라도
저보다 더 잘 아실 듯합니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이 5.18 어제까지만 해도 땡볕이더니 오늘은 하늘도 울먹울먹 / 광주는 비가 오나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늘은 비도 오고
여야 인사들도 많이 왔는가 봅니다.
그리한들 정작 그날의 그분들은
함께할 수 없으니 슬프지만요.
공감의 말씀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말 한마디도 혹여 가벼워질까 삼가지는 마음입니다. 말씀의 사원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또 새기겠습니다.
매번 챙겨서 읽어 주시고
공감의 말씀 한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창작실 방의 작품들이
기존과 달라졌다고 느낀 것은
저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올려주신 작품들 잘 읽고 있습니다. *^^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다시금 참담한 마음이 들어서요
문학인도 시대상을 기록하고 고발할 의무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도 선생님이 마무리인가요? ㅎㅎ
공감의 말씀과
문학인의 자세에 대해 함께 생각해 주셔
고맙습니다.
더불어,
노제(路祭)의 선명한 영상과
오월의 기억 공감하며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