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주년... 삼일운동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함께한 사람들(존칭 생략)
푸른산 은사시 솔빛길 젤라토 능소화...이같또로따
단성사극장 터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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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선동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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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3.1절 행사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이다''
▲원불교 교당 삼일운동 기념행사 참여 후 받은 선물. 그리고 식권을 받아 운현궁설렁탕식당에서 전원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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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인미술관
■ 조계사 백송과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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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일 선생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며 한문을 배우고 16세에 문과에 급제한다. 이상재 김윤식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1882년 일본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와 조선 조정으로부터 정3품 위계를 받았다.
이때 일본의 개화된 모습으로부터 감명을 받고 독립신문에 개화의식과 관련한 논설을 기고한다.
1895년 내부 주사, 1898년에는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하여 1대 회장이 된다. 이 단체는 개화사상을 민중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종일은 이후 중추원 의관이라는 고위직도 맡지만 개화로 나라의 힘을 구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판단해 10개월만에 그만두게 된다. 의관직을 그만두자마자 흥화학교를 설립하고, 1905년에는 보성
학교 교장에 취임하며 30세 전후의 청년들을 모아 애국단을 조직하는 등 교육과 개화운동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종일은 이승만, 유영석과 함께 순수 한글로 된 제국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의 황성신문은
한문으로 쓰여 있었으나 이종일은 대중들에게 더 쉽게 전파하는 것을 중시했기 때문에 순수 한글로 쓰였으며,
부녀자 계층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신문이 되었다. 그는 물론 대중들을 계몽하기 위해 황성신문, 만세보, 대한민
보 등에도 참여했고, 제국신문은 1910년 폐간할때까지 사장 및 기자를 맡는다.
그는 천도교에 입보하여 천도교와 연계한 독립운동을 계획하기도 했다.
1919년 1월에는 고종이 급사하고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하자 국내의 항일운동 단체들과 민족 지도자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이종일은 독립선언일을 2월 28일로 정하고 신문사 경험을 살려 1차로 2만 5천
장, 2차로 1만장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한다. 이를 8명의 동료에게 분배하고, 손녀 이장옥(李璋玉)도 이 일을 도운
다. 당시의 이장옥의 기록에 따르면 할아버지(이종일)의 지시에 따라 선언서를 배포했는데 증표를 제시해야 선언
서를 주었다고 한다.
이종일은 남은 1만장의 선언서를 주요 도시에 배포하려고 했다. 2월 28일 이종일을 포함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
선언문에 서명을 하고 이종일은 그 자리에서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러자 일본 경찰 15
명과 경찰차 5대가 민족대표가 있던 태화관을 포위해 체포하려 들었고, 한용운이 독립쟁취를 외치자 다같이 독립
선언서를 경찰에게 던지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체포된 그는 1919년 8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경성지방 성
지병원에서 관할할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아 한동안 구금생활을 지속해야 했고, 1920년 3월 22일에서야 고등법원
에서 소위 내란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이관할재판소로 지정되었다.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
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소요 혐의에 대해 공소를 수리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받았고, 이에 공소하여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공소를 수리하지 않는다는 이전의 판결이 뒤집혀원심 판결이 취소 되었지
만 징역 3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36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2년 반만에 가출옥했고, 출옥하자마자 다시 한번 만세운동을 준비했으나 일본 경찰에게 인쇄물을 압수당
하며 실패하고 말았다.1925년 8월 31일 경기도 경성부 죽첨정1정목(현 서울특별시 중구 충정로1가) 31번지
자택에서 영양실조로 별세했다.<출처:나무위키>
채널A[역사의 현장을 가다] 3.1운동 산실-2019년 2월19일
100년 전, 해외에서 시작된 독립운동의 불꽃이 국내 3·1 운동으로 활활 타올랐는데요.
100년 전 발자취를 이상연 기자가 따라가 봤습니다.
[리포트] 서울 종로구 조계사 뒤편 작은 표석 앞에 모여...
▼로따도 짧게 나옴다. 그 보다 리포트 내용을 잘 보셔요.
https://tv.kakao.com/v/395799495
인사동 전통찻집 심우방에서 다담(茶談).80세 할머니가 친절히 맞으시고...
첫댓글 로따 지기 깃발님 !
추운 날씨에도 무릎꿇어 사진 찍으시고, 완전 수고 많으셨습니다.
익선동 골목 골목은 처음 가보았고 모르는것이 너무 많다는걸 또한번
느끼는 날 였습니다.덕분으로 함께하신 고운길벗님들과 행복한 3.1절 보냈습니다.
선조님들은 나라를 위해서 생고생하셨는데 저는 컨디션 난조로 밥만 먹고 먼저와서 죄송했습니다.
좋으신 리딩 ,깨우침 고맙습니다.명품후기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