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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전차 여단장 '류 경수'열전.
- 1950년 6월 28일 서울 대학 병원의 대학살-
제 1 편.
올 초에 김 정일이 그의 선군 정치의 이념에 따라
‘ 근위 서울 류 경수 105 땅크 사단’ 이라는 거추장스럽게 긴 이름의
사단을 작년에 이어 또 방문했다는 기사를 보았었다.
이 괴상한 이름의 사단은 김 정일이 아직 어린 60년도부터
무려 24번이나 방문했었고 자기 아버지 김 일성이 통치의
브랜드로 들과 나왔던 주체사상에 이어 내건 선군 정치의
이념을 69년 방문했던 이 사단에서 터득[?] 했다고 한다.
김 정일의 '근위 서울 류경수 105전차 사단'
기동 훈련을 참관하는 김 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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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은 바로 김 정일이 사랑하는 사단의 이름을
남긴 유 경수[류 경수]라는 인간의 정체를 밝힌다.
기동 훈련을 위해 집결지 행동중인 북한 전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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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6.25 침공의 앞장을 섰던 북 105전차 여단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김 정일의 이모부이고 서울 점령 당일인 6.25일
서울대 병원을 비롯해서 연세대 병원과 적십자 병원에서
1,000여명의 국군 부상병들을 잔인하게 학살해버린 잔인한
범죄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을듯하다.
서울을 점령하고 분열식을 하는 북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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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서울대 병원의 대 학살 사건부터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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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북한의 학살 사건에서 세계 잔혹사에 수록할
잔인무도한 학살은 북한군이 서울에 발길을 들여 놓던
1950년 6월 28일 오전에 발생했다.
북한군은 길목의 서울 대 병원에 입원해있던
항거불능의 국군 환자들을 모조리 학살해 버렸다.
병실마다 찾아다니며 총을 난사하였으며 살겠다고 네 발로
기어서 병실을 벗어나는 중상자들을 총창으로 찔러 죽였다.
북한군은 서울 입성 첫 순간에 저지른 국군 포로 학살은
서울대 병원에서 멈추어지지 않고 당시 서울의 대 병원이었던
세브란스 병원과 적십자 병원까지 이어졌다.
지금은 이 만행도 거의 잊혀져 가고 있다.
1950년 6월 28일 아침 북한군은 붕괴 된 미아리 방어선을 뚫고
그 길을 따라 서울로 들어서서 중앙청으로 향했다.
200여명의 한 북한군 지대는 아침 9시 조금 지나
서울대 병원을 공격하였다.
서울대 병원에는 사흘간의 서울 이북 전선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무턱대고 실려 온 국군 부상환자로 만원 상태였다.
서울대 병원의 환자들은 전선이 무너진 상황에 모두 후방으로
긴급 후송이 되어야 하는데 후송대신 1개 소대가 경비 병력으로
파견되었을 따름이다.
밀려오는 대군의 적 앞에 1개 소대를 던지듯이 놔두고 남으로
도주한 짓은 6.25전 초기 국군 수뇌부가 많이 저지른 생각 없었던
행태중의 하나다.
경비 소대는 용감히 싸웠지만 한 시간도 안 되어 소대장 남 소위와
선임하사 민 중사를 포함해서 거의 전사했다
저항 병력을 일소하고 서울대 병원에 난입한 북한군들은 외곽은
물론 각 빌딩마다 병력을 배치했다.
당시의 서울대 병원은 현재 대 본관이 있는 자리에 1,2,3,5동의
병동이 있었으며 침대 수는 800석이었다.
북한군들이 학살을 자행한 네개의 병동은 지금은 다 없어지고
현재는 대형 병원 빌딩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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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병실마다 갑자기 밀려 닥친 국군 부상자와 민간인들이
뒤섞여 병실마다 아비규환이었다.
침대가 부족하여 국군 환자들은 입원실 바닥이나 복도에까지
누워서 생사를 헤아리고 있었다.
6명이 입원하는 병실의 바닥에 피 묻은 군복을 그대로 입은
국군 환자가 30여명이나 누워서 신음하기도 했다.
학살은 바로 시작되었다.
총 지휘는 북한군 중좌 놈이 했다.
어떻게 보아도 이 학살은 전투 중에 발생했던 우발 학살이 아니라
어떤 무자비한 인간의 지시에 따라 체계적으로 진행된
기획학살이었다.
이 사실은 월북했던 의사가 북한군 군의관이 되어
따발총을 매고 나타난 자를 비릇 해서 너덧 명의 잠복 좌익
부역자들이 이 학살자들을 따라 다니며 세세한 정보를 고자지해서
학살을 방조하였다.
병동의 출입구를 모두 봉한 북한군은 병실마다 찾아다니며
따발총을 난사해서 국군 환자들을 학살했다.
국군 부상병과 구분이 안가는 일반 환자들도 같이 학살했다.
환자 중에 권총을 가진 간부급들은 병실에 난입한 북한군을
총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하기도 하고 자결하기도 했었다.
1950년 7월 28알 낙동강 전선에서 중상을 입은 국군 부상병.
이렇게 운신을 못하는 항거불능의 환자에게 총창짓을
한 북한군의 악마적 심사가 불가사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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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죽이던 이들은 곧 더 생산적인
살인 방법을 동원했다.
침대마다 찾아다닌 대신 환자들을 입원실 구석에 몰아넣고
사살했다.
더 쉽고 빠르게 살해 할 수가 있었다.
따발총 부대 살인조에는 긴 총창이 달린 모시 나간트 소총을
가진 놈이 한 명씩 있어서 총을 맞고 아직 죽지 않은 국군들을
가슴팍이나 목을 찔러서 확인 살인을 했다.
국군 부상병들만 죽인 것이 아니었다.
서울대 병원에는 정신 병동이 있었다.
이들은 정신 분열증의 중증 환자가 아니라 강박증이나 환청등
가벼운 심리 장애 증세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북한군은 이들의 제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곳의 살해는 특히 잔인했다.
모두 총창으로 살해해버린 것이다.
도주 할 곳이 없었던 이들은 창문에 매달려 숨어 보려고 했었다.
북한군은 이들을 총창으로 내리찍어 땅바닥으로 떨어뜨려 죽였다.
다른 병실에서 총성이 들리고 학살이 시작됨을 알아챈 국군
부상병들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병동의 앞을 지키는 북한군에게 모두 사살 당했다
그래도 요행히 병동을 탈출한 국군은 병원을 벗어나고자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북한군들이 그 뒤를 쫓으며 총을 쏘거나
총창을 휘둘러 죽이는 행위가 병원 뜰에서 피비린 나게 발생했다.
중상을 입고 움직이지 못하는 국군 장병 중에는 혀를 깨물고 자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약 세 시간 동안 광란의 살인극이 펼쳐졌는데도 아직 죽이지 못한
국군 환자들이 많다고 생각한 북한군은 다시 살상 극을 펼쳤다.
오후에는 병실과 건물마다 다시 뒤져 아직도 생존한 국군들을
찾아내서 치과 대학 앞에 집합시켰다.
집합한 국군환자들에게 따발총의 엄청난 화력이 퍼부어졌고
다 쓰러진 시체 더미를 헤치며 숨이 붙은 환자들에게
총창의 세례가 가해졌다.
이 때도 국군으로 의심되는 환자나 방문 가족이 생죽음을 당했다.
국군 부상병들을 모아놓고 집단으로 학살한 구 치과 대학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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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죽이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낀 북한군은 오후 늦게
또다시 정밀 수색으로 거동 수상자를 색출해내서 병원 보일러 실
석탄 더미에 이들을 생매장했다.
천인공노 할 살인 행위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 살인의 붉은 피가
청소되기도 전에 북한군 환자들이 소 달구지와 민간차등에 운반되어
들어와 국군이 누웠던 침대에 누웠고 강제 동원했거나 부역하는
좌익 의사들이 근무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에는 북한군에 부역하는 병원 좌익들은 시체들을 치울
생각을 안하고 병원 본관 앞에서 으쌰으쌰하면서 단합대회를
하기도 하였다..
좌익 병원 근무자들이 단합 모임을 했을 구 병원 본관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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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당한 국군의 숫자는 여러 가지다
100명설에서 1000명설까지 있는데 병동이 콩나물같이
국군 부상병들로 넘쳐 흘렀다는 설로 보아 전자보다
후자쪽에 더 가깝지 않나 한다.
그리고 1970년대 아직 기억이 생생했던 여러 관계자들을
만나 인터뷰했던 송 효순 선생이 1000명설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다.
서울 대학 병원 뜰 여기저기에 널 부러진 시체들은 팽개쳐 둔 채였다.
더운 여름 날씨에 사체들은 곧 부패하기 시작했다.
근처 거주 주민들은 더운 여름 날씨에도 문을 닫고 살아야 했다.
병원 앞을 지나다니던 행인들은 숨이 막히는 공포의 냄새에
코를 막고 뛰어서 지나가야 했다.
시체들을 20여일동안 방치하던 북한군은 자기들도 버티기가 힘들
었던지 사체들을 모두 끌어 모아 하필이면 병원 앞대로 창경원 앞과
원남동 로타리에서 시체들을 화장했다.
국군 사체의 타는 냄새가 부패한 냄새를 대신해서 주민들을
소름 끼치는 공포로 몰아넣었다
서울대에서 북한군의 만행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9.28 수복 전 자신들에게 비협조했거나 불순분자들을
100명을 또 대학병원 구내에서 학살했다.
한국의 대표적 서울대 병원은 사람의 양식으로 상상조차 할 수없는
잔악한 학살의 도살장으로 돌변해버렸다.
이 학살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문턱에서 자행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새 점령지, 특히 적 수도를 점령하면 주민의 인심 획득을 위한
인심을 쓰는 오정 정책을 실행하는 것은 전쟁 역사의 전통 방식이었다.
한나라 유방이 진나라의 수도를 점령하자 가혹한 진시황의 체제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위무하기 위해서 약법(約法)삼장을 발표
했던 것은 역사가 알아주는 일화이다.
그런 상식적 정치 감각과 인간 기본의 도덕을 모조리 뭉개고
서울 입성의 길목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하고 그 사체들을
20여일 간이나 내 동댕이쳐 내리는 비와 내려쏘는 태양에
훼손시키고 그 부패한 냄새로 지역을 진동케 한 잔인무쌍의
인간은 도대체 어떤 놈인가?
대단히 무지하고 잔인한 인간임에 틀림없다.
나는 오래전 6.25전 당시 헌병 소령이었고 국회의원을 지내신
송 효순 선생의 저서‘붉은 대 학살’를 읽고 서울대 병원의 학살을
처음 접하고 몸서리처지는 충격을 받았었다
나는 한국전쟁중 양민 학살은 주로 지방 적색분자들이 자행했고
북한 정규군들은 비교적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민의 군대라는 것들이 서울 점령의 첫날 해댄 것이었다.
1950년 전주에서 지방 적색분자와 북 내무서원이 같이 저지른
학살사건 - 서울대 병원의 학살은 이보다 더 큰 대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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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년에 포스팅했던 글에 북 최강연대 4사 18연대
흥망사에서 북 18연대 소대장으로 근무하셨던 김 경석 선생의
한국 참전기를 소개 했었다. [click!]
그는 18연대가 서울에 최초로 입성한 북한 부대라는 사실을 밝혔었다.
나는 그 연로하신 어른이 하시는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한국군이 북한군에게 형편없이 파괴되어 패주한
이야기를 들으니 은근히 부아가 들었다.
더구나 이 18연대는 서울에 1950년 6월 28일 최초로 서울에
입성한 부대가 아닌가?
나는 근거는 없었지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 그런 북한군 최강 부대가 서울 들어오는 날 서울 대학 병원에서
환자들을 몰살 시킨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 분은 깜짝 놀랐다.
"그런 일이 있었나?-- 절대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었을텐데 ?“
그러나 내가 이 방면에 원체 잡다한 정보들을 자주 늘어놓았기
때문에 그 분은 긴가민가 했었다.
두 번째 전화를 했을 때 그 분은 이 문제를 거론하며
강력히 부정했다.
한국전 참전 동료들에게 다 알아 보았다는 것이다.
“ 우리 부대는 중국에서부터 싸울 때부터 포로를 잘 대우하라는
교육을 뼈에 각인되도록 교육을 받았었고 조선으로 올 때도
해방군 47군 참모장에게 마지막 교훈으로 신신 당부를 받았어요.
우리 연대장 장 교덕이나 사단장 이 권무도 그럴 지시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울로 들어갔을 때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서
민가에 들어가지 않고 서울 길바닥에서 닷새나 잠을 잤어요.
학살했다면 남조선 군대 일게요!”
그 분은 화까지 내가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이 분과의 대화를 계기로 이 천인 공노할 만행을 누가
지휘했는가를 밝혀 보기로 하였다.
관심이 가면 못 말리게 치닫는 나의 호기심과 이를 해결하고
싶은 욕심이 이번에도 발동이 걸렸다.
국군 부상병들이 학살당한 병원은 앞에서 말한대로
서울대 병원과 연세대 병원과 적십자 병원이다.
인구 30만 시절의 서울 시 전역에서 병원 학살이
있었다고 보아야 했다.
이런 짓을 주도한 북한의 조직으로 사람 백정으로
불리던 정치 보위부가 가장 의심 받을만하다
그러나 학살을 자행한 부대는 정규 보병 부대였고 지휘는
앞서 말했듯 한 북한군 중좌가 했었다.
이렇게 넓은 지역에 국군환자 학살을 명령한 사람은 분명
중좌를 부릴만한 군단장이나 사단장급 이상일 것이다.
학살은 대학 병원 구내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역시 학살이 있었던 간호대학 앞. 건물 앞은 사도세자가
수원으로 이장하기전 묘소인 함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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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 서울로 진입한 북한군 사단은 세 개였었다.
앞서 말한 4사단, 3사단, 그리고 서울 점령후 사단급으로
승격된 105전차 여단이었다.
나는 이중 중국 해방군 출신인 [조선 의용군] 1군단장 김 웅과
4사단장 이 권무는 가능성이 낫다고 봤다.
모 택동은 포로 학대 금지를 심리전의 한 중요 수단으로
보고 이를 철저히 교육하고 실행했었다.
이 온정적인 처우에 모택동에게로 전향해간 장 개석 군이
대단히 많았다.
모 택동군은 일본군 포로도 죽이지 않았었고 한국전쟁 때도
전투의 열기가 극심했던[장진 호 전투]경우는 빼고 이 항자불살의
원칙만은 충실히 지켰다는 사실을 미군 기록이 인정하고 있다.
앞서 인용했던 김 선생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중국 해방군의
역사를 훑어보면 모택동의 군대의 능력 있는 간부로서
충분한 교육을 받았고 지휘자의 교양을 갖춘 북한군 1 군단장
김 웅과 4사단장 이 권무가 하필 인심을 확보해야 할
서울 입성의 중요한 순간에 이런 짓을 지시했을 가능성은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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