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암집 제25권 / 묘지명(墓誌銘)
증 이조판서 이시명(李時命)의 부인 장씨(張氏) 광지(壙誌) - 갈암 이현일의 어머니
선비(先妣) 증(贈) 정부인(貞夫人) 장씨는 안동부(安東府) 금계리(金溪里) 사람이다. 그 선조는 본주(本州)의 저명한 성씨이다. 부(父) 휘 흥효(興孝)는 학문에 독실하고 행실에 힘써 학자(學者)의 스승이 되었고, 이조에서 천거하여 능서랑(陵署郞)을 삼았는데, 은명(恩命)이 이르기 전에 졸(卒)하였다.
금상(今上) 기사년(1689, 숙종 15) 겨울에 영가(永嘉)의 선비들이 소(疏)를 올려 진청(陳請)하여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권씨(權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만력 26년(1598, 선조31) 11월 을사일에 부인을 낳았다. 부인은 성품이 총명하고 인자하였으며 19세에 우리 선군(先君)의 계실(繼室)이 되었다.
선군의 휘는 시명(時命)이고 자는 회숙(晦叔)이며, 성은 이씨이다. 시부모를 섬김에 있어 삼가고 정성스러워 과인(過人)한 행실이 있었고, 전부인(前夫人)의 자식을 돌봄에 있어 자기가 낳은 자식과 차이가 없었다. 선군이 일찍이 재랑(齋郞)에 제수되고 품계가 선교랑(宣敎郞)이었기 때문에 의인(宜人)에 봉(封)해졌고, 뒤에 또 셋째 아들 현일이 조정에 벼슬하였기 때문에 추은(推恩)하여 지금의 호(號)가 있게 되었다.
57년 동안 선군을 섬기면서 예의와 공경이 지극하였고, 또 내조한 공이 많았다. 자식들을 대할 때에는 자애로움이 지극하였으나 가르치고 경계함이 매우 엄하였으며, 비복(婢僕)을 대할 때에는 관대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금상 경신년(1680, 숙종 6) 7월 갑오일에 영해부(寧海府) 석보촌(石保村)의 집에서 돌아가시니, 수(壽) 83세였다.
선군이 7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상일(尙逸)이니 장릉 참봉(長陵參奉)이고, 장녀는 사인(士人) 여국헌(余國獻)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전부인 김씨의 소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부인의 소생이다. 부인 소생의 장남은 휘일(徽逸)이니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이고, 차남은 현일이니 이조 판서이고, 3남은 숭일(嵩逸)이니 의령 현감(宜寧縣監)이고, 다음은 정일(靖逸), 융일(隆逸), 운일(雲逸)이다. 두 딸은 사인 김영(金碤)ㆍ김이(金怡)에게 시집갔다.
상일이 아들이 없어 융일의 장자 은(檼)을 후사로 삼았고, 딸이 넷인데 정시석(鄭時錫), 조옹(趙顒), 박서(朴湑), 이덕순(李德純)이 그 사위들이다. 휘일이 아들이 없어 현일의 둘째 아들 의(檥)를 후사로 삼았다. 현일이 4남을 두었는데, 천(梴), 의(檥), 재(栽), 심(杺)이다.
세 딸은 사인 김이현(金以鉉)ㆍ홍억(洪億)ㆍ김대(金岱)에게 시집갔다. 숭일이 2남을 두었는데 식(植), 직(樴)이고, 딸이 하나인데 생원 권두기(權斗紀)에게 시집갔다. 정일이 2남을 두었는데 억(檍), 력(櫟)이다. 딸이 둘인데 장녀는 사인 정후흥(鄭後興)에게 시집가고, 막내는 어리다. 융일이 6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바로 은(檼)이고, 다음은 경(桱), 만(槾), 영(栐), 삼(槮)이고, 막내는 어리다.
딸이 셋인데, 사인 권동무(權東茂)ㆍ김경렴(金景濂)에게 시집갔고 막내는 어리다. 운일이 1남을 두었는데, 수(檖)이고, 딸이 둘인데 사인 권진명(權震鳴)ㆍ정욱(鄭頊)에게 시집갔다. 증손자는 모두 21인인데, 지익(之熤), 지후(之㷞)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돌아가신 해 9월 15일에 안동부 수동(壽洞)의 동쪽 기슭 정향(丁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선군의 묘 뒤로 겨우 30보 떨어져 있다. 아, 선비의 훌륭한 범절로 볼 때 마땅히 명(銘)을 지을 사람을 구하여 돌에 새겨 묘에 세워야 하는데 지금 겨를이 없어 불초한 아들 현일이 감히 광중(壙中)에 이와 같이 기록한다. 하늘 같은 은혜 다함이 없으니, 아, 애통하도다.
ⓒ한국고전번역원 | 홍기은 (역) |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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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吏曹判書李公夫人張氏壙誌
先妣贈貞夫人張氏。安東府金溪里人。其先爲本州著姓。父諱興孝。以篤學力行。爲學者師。吏曹薦爲陵署郞。恩命未至而卒。今上己巳冬。以永嘉多士上疏陳請。贈司憲府持平。娶權氏女。以萬曆二十六年十一月乙巳。生夫人。性聰明仁恕。年十九。以繼室歸于我先君。諱時明。字晦叔。姓李氏。逮事舅姑。謹愼誠篤。有過人行。撫視前夫人子。無間己出。以先君嘗拜齋郞階宣敎。封宜人。後又以第三子玄逸竊位于朝。推恩錫命。有今號。事先君五十有七年。禮敬備至。又多將順裨贊之益。母臨多子。慈愛雖至。敎戒甚嚴。遇婢使。寬而有制。今上庚申七月甲午。終于寧海府石保村墅。享年八十三。初先君有子男七人女三人。男長曰尙逸。長陵參奉。女長適士人余國獻。皆前夫人金氏出。餘皆夫人出。男長徽逸慶基殿參奉。次玄逸吏曹判書。次嵩逸宜寧縣監。次靖逸,隆逸,雲逸。二女適士人金碤,金怡。尙逸無子。取隆逸之長子檼爲後。女四人。鄭時錫,趙顒,朴湑,李德純其壻也。徽逸無子。取玄逸之第二子檥爲後。玄逸有子男四人。曰梴,檥,栽,杺。女三人適士人金以鉉,洪億,金岱。嵩逸有子男二人。曰植,樴。女一人適生員權斗紀。靖逸有子男二人。曰檍,櫟。女二人。長適士人鄭後興。季幼。隆逸有子男六人。長卽檼。次曰桱,槾,栐,槮。季幼。女三人適士人權東茂,金景溓。季幼。雲逸有子男一人曰檖。女二人適士人權震鳴,鄭頊。曾孫男凡二十一人。曰之熤,之㷞。餘皆幼。以卒之年九月十五日。葬于安東府壽洞東麓丁向之原。去先君兆後僅三十擧武。嗚呼。如先妣壼儀閨範。宜求銘作者。刻石幽堂。今旣不暇矣。不肖子玄逸敢竊記壙中如此。昊天罔極。嗚呼痛哉。<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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