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와 현대를 이은 전위비평가
일본 도쿄에서 나고 자랐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1948년 한국으로 넘어왔다. 현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상과대학에 입학, 한국전쟁 시기에는 전시연합대학에서 강의를 받다 3학년 재학 중 자퇴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부산에 정착, 일간지를 중심으로 미술비평문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1971년 '세계의 중요 미술요람', '부산의 중요 미술요람' 등을 간행했으며, 이듬해 '전위미술 용어집'을 펴내기도 했다. '조형미술연구소'와 '색채문제연구회'를 만들었으며, 별도의 '미술용어집' '디자인용어집' 등도 펴냈다. 부산평론가협회 간사를 역임했다. 결핵으로 43세의 나이에 타계. 이용길 편집의 '김강석 미술평론집'(도서출판 지평, 1987)이 발간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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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석의 논평 '1966년의 부산화단을 조감한다' 육필 원고.
김강석은 곧고 바르게 살았다. 부산미술계가 근대의 도입기와 정착기를 거쳐 현대미술로 진입하던 시기에 활동한 김강석은 '부산미술계의 금강석(金剛石)' 같은 존재다. 민주신보와 국제신보를 거쳐 부산일보, 국제신문 논설주간을 지낸 김규태는 김강석의 평문에 대해 직선적이며 건조하고 공격적인 스타일이었으며, 자극적이고 신랄한 비판은 그의 생전에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용길의 전언에 의하면, 정의롭고 강직한 품성을 가진 김강석은 작품보다 인품을 더 높이 쳤다고 한다.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독신으로 살면서 집필활동을 지속했지만, 궁핍한 생활을 견뎌야했다. 가난한 그는 더욱더 고집스럽게 비타협적인 태도와 일관했다. 그를 꼿꼿한 평론가로 살게 한 것은 오로지 예술적 신념과 열정뿐이었다.
그는 분간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1970년 부산일보에 실은 '가짜 화가'라는 유명한 칼럼에서 그는 '이발소 그림이나 해적판 추상화 같은 걸 그리면서 교수나 단체장을 맡아 으스대는 풍토'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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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석의 비평문 '그 작품은 분명히 모방이다-김인환 씨의
반박에 답한다' 육필 원고.
반면 그는 선배 미술평론가인 이시우나 김종식, 이석우, 하인두 등과 같은 반듯한 예술가들과 인간적으로 교류했다. 병으로 쓰러진 청초 이석우의 입원비 모금 전시회인 '난류전'을 기획함으로써 따뜻한 인간미를 보여주기도 했다. 송주섭, 차동수, 정철교, 예유근 등 그의 제자와 후배들은 이후 부산미술계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그의 사후에 김종식을 비롯한 100여 명의 미술가들이 유족을 돕기 위해 모금을 했을 정도로 김강석은 부산미술계에 매우 중요하고 아까운 인재였다.
그는 평론의 역할이 무엇이고 삶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자기확신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김강석은 예술가가 근대적 각성을 통해 예술가 주체로 거듭난 지식 생산자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동시대의 작가들에게서도 늘 느끼는 문제이지만, 김강석의 수십 년 전 평문 속에서 '내적 필연성'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발견하면서, 예나 지금이나 왜 작업을 하는지, 작품을 발표하는 행위가 얼마나 엄정한 공공영역을 형성해야 하는지를 새삼 실감할 수 있다.
그는 비평을 통해서 예술공론장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예술을 통해 공론장을 형성하는 일은 근대적 예술의 이상이다. 그는 예술생산과 소통이 근대적인 공론장을 여는 매우 중요한 기제라는 점을 신뢰하는 근대인이었다. 시각예술작품은 시각적인 기표들을 통해 정보의 소통을 매개한다. 근대 이전에는 매우 기능적인 차원에서 도상을 이용한 정보 소통에 머물렀지만, 근대는 예술생산을 공론장을 견인하는 지식생산으로 전환했다. 김강석은 이러한 근대의 이상이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피어나길 열망했다.
해방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한 부산의 미술계가 아직 전근대적인 예술인식을 가지고 구태를 답습하거나 왜곡된 문화를 반복하고 있을 때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비판했다. 그의 비평은 사각 프레임 내부에 머물지 않았다는 데 큰 시사점이 있다.
그는 예술 제도와 정책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많은 평론가들이 작품 비평에만 관심을 둔 나머지 미술계를 둘러싼 안팎의 제도적 장치와 문화적 관행들에는 무감한 채 무기력한 주례사 비평에 빠져있다는 지적을 받곤 하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현명하고 선구자적인 시각을 가진 평론가인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유기적인 지식인이었다. 거의 모든 평문의 머리글이나 마무리 지점에 한 두 마디 이상의 단점이나 보완점을 담아 날카로운 지적을 하곤 했다. 보통 수사적인 차원에서 기대와 희망을 담기 마련인데, 그는 직설화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곤 했다. 때로 김강석은 어두운 밤길에 화가들로부터 물리적인 폭력을 당한 적도 있다고 하니 그의 필봉에 화가들이 얼마나 심리적으로 위축당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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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부산미협의 상황을 기록한 김강석의 노트.
그가 부산과 인연을 맺으며 정착한 것은 1960년대부터다. 김강석은 일찍이 문학평론활동을 시작했다. (1962년 폐간한)민주신보의 문화부 기자였던 김규태는 당시 김강석의 글을 부산의 평단으로 끌어들이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부산예술계에 단비와 같은 담론생산의 길을 열었다.
나이 서른 때부터 부산의 일간지에 기고하기 시작한 김강석은 짧고 굵게 살다간 10여년 동안 숱한 명문을 남겼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생철학과 칸트의 인식론을 연구했으며 도스토예프스키, 헤밍웨이 등의 소설가를 연구한 글꾼이었다. '인상과 언어의 매개문제', '최근의 일본문단 동향' 등을 비롯해 70여편의 문학평론을 남겼으며, '후진미술의 자율적 참여', '현대미술의 난해성과 지향성' 등 300여 편의 미술평론을 발표했다.
김강석 평론의 중요 논점 가운데 하나는 서구미술의 수용에 있어서 전통미술을 현대화하는 관점을 가질 것, 근대적 자각을 가진 예술적 주체로서 자율성에 입각한 창작의 관점을 가질 것을 호소하고 있다. '미술가의 자기귀화'(1961)라는 글에서 그는 '걸레 같은 헌 옷이라도 자기 몸에 알맞은 옷을 찾아 입어야 한다'고 말한 정도로 서구 콘텐츠를 우리의 것으로 소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
1972년에 남긴 글 '현대미술의 방향'에서 그는 전세계와 한국 화단의 전위미술을 소개하면서 부산 화단에서 성백주, 오영재, 하인두 등과 김구림, 김수익, 김원 등을 언급한 후, 한국 전위미술도 '미술의 중진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술의 후진국 한국에서 그것도 변방 부산의 화단을 향해 전지구의 흐름과 한국, 그리고 부산의 지위를 견주어 현황과 전망을 내놓은 것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랄 때부터 세계의 정보를 접해왔던 김강석의 안목은 부산의 지역적 특수성과 동시대의 전지구적인 보편성을 동시에 관통하고 있었다. '부산화단의 문제점'(1975)에서 그는 서구의 비판적 수용을 비판하면서 전통의 재발견과 예술가 정체성 확립을 주문하고 있다. 그는 부산미술의 발자취가 사조 없는 미술이었으며, 내적 필연성과 외연적인 입장을 가지고 자기 조형언어를 발언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서울에서 출간하는 '공간'지에 부산화단을 소개한 이 글은 너무나도 신랄하고 뼈아픈 비판이었다. 때로 그는 일본 미술잡지에 실린 그림을 표절한 작가를 정면 비판하면서 지상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삼일절기념미전'과 같은 부산미협회원전, 전국 단위 공모전 등에 대해서도 애정 어린 비판과 가능성 발견을 담고 있다. 이후작가전, 후기전, 혁동인전 등 신진과 중진에 걸친 다양한 연령층의 작가들에 대해서 분석적인 글을 남겼다. 특히 그는 1960년대 후반 이후 나타난 젊은 세대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전위예술의 씨앗을 뿌린 많은 작가들에게 이론적 리더역할을 한 김강석은 부산의 신진작가들에게 '추상화는 이미 고전'이라며 더욱 더 전위적인 혁신을 통해 전세계적인 동시대성을 획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침없는 필봉으로 화단을 종횡무진했던 그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전반기까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던 부산화단의 최첨단에서 새로운 시대의 미술을 열망했다. 부산화단에 전위예술의 씨앗을 뿌린 평론가 김강석. 한 시대를 견인하며 끊임없는 자기혁신으로 새 동력을 얻어내기 위해서 현대미술의 전위정신을 강조한 그는 자신의 삶 자체를 걸고 최전선에서 고독하게 앞서 나갔다.
김준기 : 미술평론가·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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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크랲합니다. 참 외롭게 혼자서 떠났어요 마지막에 손을 잡고 저의 손에지어준 평론 파카 만년필 지금도 저가 사용하고 있어요 말기에 같은 미술인이라해서 로댕음악실에 있을 당시부터 적극적으로 도왔으나 .그런데 마지막 장례때는 사람들이 더러 왔으나 저의 이름은 완전히 소외되고 몇몇 조의금 낸 사람들만 명단에 올랐어요.왜 하필이면 금은 보화보다도 중요한 유산인 필봉을 저에게 넘겼을까요 지금도 의문 스럽네요 .역시 대단한 자존심과 고집 있는 칼날이였기에 남들에게 언제나 욕을 들었지요. 옛날 같이지나던 시절이 생각나서 몇자 적었습니다.
저도 글보며 김강석님을 알아갑니다. 선생님과는 깊은인연이 있었네요. 금강석같은 평론은 화단의 소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