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25대 왕 철종(哲宗) 비 철인왕후(哲仁王后) 인물화가 사실일까?
신혜선이 연기한 철인왕후(tvN 퓨전 역사 드라마 <철인왕후(哲仁王后)>에서)
1851년 철종은 안동 김씨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데 그녀가 철인왕후(哲仁王后 金氏, 1837년 4월 27일~ 1878년 6월 12일)이다.
철인왕후는 왕비가 된 지 8년 만인 1858년 유일한 적장자 이융준을 낳았으나 생후 6개월 만에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은 후 그 뒤로는 후사가 없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고 1878년 42세에 폐결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哲仁王后, 1837년 4월 27일 ~ 1878년 6월 12일)에 대한 역사기록은 매우 우호적이다. 야심 많은 캐릭터로 그려진 드라마와 달리 실제로는 조용하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효심이 깊은 현모양처였다고 한다.
조선 25대 왕 철종(哲宗) 비 철인왕후(哲仁王后) 초상화
돈녕부영사 영은부원군 김문근(金汶根)과 흥양부부인 여흥민씨 사이에 1남 1녀 중 장녀(남동생 김병필)로 태어난 철인왕후 김씨는 본래 그녀가 왕비가 된 것은 안동 김씨 집안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비가 없던 철종에게 자기 집안의 사람을 왕비로 맞아들이도록 해,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비리를 고착화시키고 부를 축적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철종이 승하한 후 고종 때에 대비(大妃)가 되었고, 1878년 창경궁 양화당 에서 42세로 죽었다. 철인왕후는 평소 친정을 두둔하지 않았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말이 적고 자신의 감정을 내면에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15세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철인왕후는 당시 조선 최고의 금수저였지만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여인이었다. 양순을 잊지 못하는 철종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했고 집안과 남편 사이에선 늘 긴장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다행히 그녀는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고 말수가 적은 조신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의 철인왕후는 그녀의 친정인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지속적으로 옹호하다가 끝내 철종에게 신임을 잃고 이로 인해 철종은 죽을 때까지 철인왕후를 다시 찾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으로는 그녀는 남편(철종)이 요절해 27세에 미망인이 됐고, 둘 사이에 낳은 하나뿐인 아들도 생후 6개월 만에 잃는 등 불행한 개인사를 보냈다.
결론적으로 철종과 철인왕후, 둘 모두 왕과 왕비라는 명예는 얻었으나 그에 반하여 짧은 생존기간동안 불행한 생애를 보냈다.
사실 철종에게는 강화도 시절 미래를 약속한 여인이 있었다. '양순'이라는 천민 출신의 여인이다. 갑자기 왕이 되어 한양으로 온 힘없는 원범은 양순을 무척 보고 싶어 했다. 매일 밤 그리워하며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물론 궁으로 데려오려고도 했으나 당시 세도가인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등의 권력자들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조에서 역대 왕들의 초상화는 도화서 출신의 화공들에 의해 매번 제작되어 어느 부분에서는 그런대로 어느 정도는 남겨져 있으나, 조선 유교사상으로 남존여비 영향인지 모르나 왕의 비인 왕비(왕후)들의 초상화는 별로 남겨진게 없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조 말기이라 할 수 있는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비인 명성왕후의 초상화조차도 지금 현재 정확하게 남겨진 자료가 없을 정도이다.
첫댓글 유용한 정보 되시길 기대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귀중한 자료 많은 도움과 이해가 되었다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맞습니다. 초상화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옛부터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남존여비사상으로 왕비들도 본인 이름 조차 못 남기고 누구누구 부인이나 왕후부인 등으로남 역사자료에 남겨졌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유용한 정보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철인왕후나 다른 왕후들의 초상화 자료들은 찾기가 매우 힘들답니다. 왕이나 왕후 및 왕실가족화를 많이 남기는 서양과는 달리 당시 왕 외에는 왕실가족화는 별로 그리진 않아서 그럴겁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