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온 인류의 아버지를 기리는 미사> 한결같은 보조교사 증언(46:43)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식구님들!! 반갑습니다.
저는 2018년 10월 12일 무형의 성전, 마리아처럼에 가입하였으며,
2019년 3월 15일 서울 삼성산에서 봉헌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2023년 4월 16일에 보조교사 임명을 받은,
닉네임은 한결같은 이고요,
이름은 김유미 로사라고 합니다. 73년 소띠, 51살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증언을 준비하면서 힘들다고 여긴 순간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영광의 도구 되기 위한 것이었음을 느끼며,
이 시간을 통하여 온전한 회복으로 이끌어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김유미라는 이름이 참 싫었습니다.
자아를 의식한다고 할까요. 아니면 사춘기의 고민이 시작이었다고 할까요.
정확한 느낌은 기억나진 않지만,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유미라는 이름이 이쁜 이름인데 저는 싫었어요. 그냥 참 싫었어요.
차라리 유경이든 유정이든 다른 거였음 좋겠다고 수만 번을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시작된 저의 이름에 대한 마음은 작년 11월 끊지기 피정까지 계속 이어지게 돼요.
그리고, 지리산 마리아처럼, 끊지기 피정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왜 제가 그렇게도 이름이
싫었는지 알게 해 주셨어요.
아버지 안에서 새롭게 받은 이름의 역사를 오늘 여러분께 들려 드리겠습니다.
저는 부산 영도 태종대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과 1남 6녀 중 넷째, 위로 언니 셋, 밑으로 여동생 둘, 막내 남동생이에요
그래요. 아들 낳으려고 그렇게 줄줄이 낳으셨어요.
언니 셋을 낳고 제가 아들인 줄 알았는데, 또 딸인 걸 알고 부모님께서
참 많이 실망하셨는지, 키우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으셨던지, 죽으면 죽고 살면 살으라고
마당 변소 옆에 수챗물 내려가는 도랑 옆에 저를 놓으셨다가,
하늘 아버지의 도우심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신 두 분 중의 누군가가 저를 방으로
들이셨데요. 그게 서로 본인이라고 우기시던 두 분의 모습을 바라보던 제 마음은 오직
아버지만이 아실 겁니다.
그렇게 처음부터 조금 어긋나버린 저의 시작에 부모님의 따스함이 없었습니다.
손을 잡아준 기억도, 품에 안아주신 기억도, 머리 쓰다듬은 기억도 없기에.
그래서 저 역시도 부모님에 대한 애틋함을 가지지 못했어요.
부모님 두 분 다 제주도 분이고요. 엄마가 제주 해녀셨어요.
해녀이신 엄마가 물질을 다녀오면 성게랑 함께 여러 가지를 잡아 오면
그것을 다 손질을 해야 하는데 동네 해녀들이 우리 집으로 다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 해녀분 들 것까지 전부 손질해야 해요.
몇 시간이고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서 일을 하다 보면 무릎이 펴지질 않아요.
손도 물이 들어 아프고, 허리도 끊어질 것처럼 아프고…. 그런데 그게 수입이었어요.
아버지께서 평생을 무직이셨거든요. 그래서 일손이 필요하니 무조건 해야 했어요.
엄마의 수입으로, 할머니까지 계셨으니 아홉 식구 먹고살기가 참 힘들었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바다에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무속이 참 강합니다.
온갖 굿에 용왕제에, 그리고 무당이셨던 고모의 영향으로 신줏단지가 집에 모셔져
있기도 했구요. 부모님께선 평생을 무당이신 고모가 모시는 그 신에게 빌었어요.
부모님이 매를 많이 드셨는데, 그중에서 유독 제가 참 많이 맞았어요.
어느 날은 해녀들이 온 줄 모르고 낮잠을 자다가 일 안 하고 잔다고 신발이 얼굴로
날아와서 맞은 기억도 있고, 밥 먹다가는 왜 맞았는지 모르겠는데 밥 먹다가도 맞고,
책 읽으면 책 읽는다고 맞고, 언니랑 싸우면 대든다고 맞고, 동생이랑 싸우면 다 큰 년이
동생이랑 싸운다고 맞고, 세상에 그런 천덕꾸러기가 어디 있을까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저를 때리다가 벽에다 집어 던졌는데
벽에 머리를 박고 기절을 했어요.
그때 정신을 차릴 때 제 왼쪽 팔에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면서 팔을 움직이다가 제 팔을 찌르던 그 주사의 따끔함이
가시처럼 박혀 제 기억에 정확하게 남게 되었어요.
차라리 기억이 없었더라면 좋았을까요?
그 뒤로도 참 많이 맞았고, 중, 고등학교 때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나와 혼자 살면서 참 많이 힘들었어요.
방황도 하고 마음 둘 데도 없던 저를 일본에 살던 큰 언니가 소식을 듣고
저를 일본으로 데려갔어요.
혼자 있는 동생이 안쓰러워서 데려갔는데 공부가 제 길이 아니었는지,
결국 끝까지 가진 못했습니다.
언니가 일본에서 장사를 했어요. 식당도 하고 클럽도 하고, 언니 일 도와주면서
굳이 안 봐도 되는 것들과, 안 들어도 되는 것들을 겪으면서 애 늙은이처럼 까져만 갔어요.
언니와 의견 충돌로 결국 공부는 중도에 포기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직장 생활을 하던 중에,
천주교 신자인 남편을 만나 불교에서 개종을 하고
2001년 12월 세례를 받은 후 2002년 3월 결혼을 했습니다.
아들 둘을 낳아 지금 큰 아이는 22살 군 복무 중이고, 작은아이는 중3이에요.
결혼한 첫해에 큰아들을 낳고 살다가 남편이 하던 일이 잘 안되서
그만두게 되면서 참 힘들었어요.
처음 실패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던 남편과 저는 정말 많이 싸웠어요.
그 사이에서 큰 아이가 겪은 그 두려움을 내맡김을 하면서 느끼게 되어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참 많이도 아버지께 내맡겨 드렸어요.
8년이 넘게 겨우 첫 번째 실패의 빚을 정리 하고 나니, 다시 또 새롭게 일을 시작해 보고
싶다는 남편의 말에 시댁과 친정 언니의 돈까지 가져와 장사를 시작했어요.
예.. 결국 다 실패하고 빚더미에 다시 앉았고, 두 번째는 정말 힘이 들었어요.
원래 어질고 착한 사람이라 계산에 약지 못한 남편은 사업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결국 두 번의 실패 끝에 알게 되었어요. 두 번의 실패로 경제적으로 참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두 번의 실패를 겪으며 빨간 딱지가 4번을 붙고, 경매를 2번 했어요.
집으로 찾아오는 은행직원들, 빚 독촉 전화 등, 저는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였습니다.
마음은 쪼그라들었고, 심장이 갑자기 두근두근하는 부정맥 같은 느낌도 오기도 했어요.
당연히 시부모님께도 잘하지 못하는 며느리였어요.
제가 숨쉬기도 벅차서 살피고 헤아릴 줄 몰랐거든요.
부족한 며느리를 위해 기도해 주신 시부모님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감사하다는 말 꼭 전해 드리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쌓여가던 모든 긴장과 압박감 속에서,
저도 모르던 제 안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하죠.
일본에서 겪은 지진의 공포가 드러나게 됩니다.
제가 일본에 있을 때 고베 대지진을 겪었어요.
한국으로 치면 진도 8, 9 정도의 강도였어요.
정말 태어나서 그렇게 무서웠던 적이 없었어요.
그때는 몰랐어요. 그게 그렇게 큰 공포로 다가올 줄은요.
한밤중에 천장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공포에 만약에 저 천장이 무너지면,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탈출할까 하며 밤을 꼬박 새우며 무서워서 떨었고,
갇힌 공간, 높은 곳, 뜬금없이 찾아오는 죽을 것 같은 공포심과 함께
경제적 압박감이 더해져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저를 피폐하게 만들어 갔어요.
구멍이 뚫린 주차장이나 흔들리는 밑바닥은 아예 걸어가지도 못할 정도로 무서웠어요.
길 가다가 누군가가 저를 칼로 찌를 것 같은 공포감에 주저앉은 적도 있어요.
이 칼에 대한 공포는 큰아이를 낳고 5개월쯤에 쓸개 수술을 받았는데,
그때 한 달 새에 대충 세어도 다섯 번은 넘게 새벽에 응급실에 간 것 같아요.
그때의 통증이 칼에 찔리는 듯이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위경련인줄 알았는데, 쓸개가 모두 쪼그라들어서 제 기능을 못 하는 거였어요.
그 통증의 강도는 아..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때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터지면 죽는다 였거든요. 다행히 수술이 잘 돼서 지금 살아있어요.
그렇게 버려진 상처와 맞아 죽을 뻔한 기억, 그리고 지진의 공포와 칼에 찔리는 듯한 복부의
고통까지 모두가 제 기억에 엉켜버려 제 속에 어마어마한 두려움이 자리 잡았습니다.
저도 그게 무엇인지 모르니 남편에게 말할 수조차 없었고
혼자 우울했다가 극도로 밝았다가 이상하게 변해가는 저였습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지 않는 채로 주일만 겨우 지키던 제가
큰아이의 첫영성체를 통해 본당에 정을 붙이며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던 때였어요.
십여 년 만에 혼자서 새벽 두 시까지 잠들지도 못하고,
너무나도 가고 싶어 찾아간 곳이 바로 사순시기 수난 감실 조배실이었어요.
그저 눈물만 흘렀어요.
왜 아픈지도,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체,
너무 늦게 찾아와 죄송하다고 예수님 죄송하다고 울기만 했습니다.
그 조배 이후로 정말 조금씩 아버지께로 다가가게 되었어요.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모든 것을 속으로만 감추고 살던 제게
본당 자모회 언니의 권유로 2014년 1월에 성령 묵상회를 가게 되었어요.
사실 저는 그때까지 하느님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치유고 뭐고, 다 필요 없고 계시면 계신다고 좀 알려 주시면 제가 믿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을까요,
그때부터 저는 부산 교구 성령 쇄신 봉사회의 봉사자로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2년여 간의 정말 힘든 수련 기간을 거치고 정식 단복을 입고, 분도패를 목에 걸며,
저는 제가 정말 거룩해진 줄 알았어요. 다들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속으로는 여전히 썩은 고름이 흐르는데 겉만 번지르르한 바리사이로 살았어요.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 수십만 원이 넘던 봉사자 단복과 한복까지 모두 아버지의
이끄심으로 해 주셨고. 그렇게 받은 단복을 입고 뺏지를 달며, 분도패를 목에 걸 때마다
영성의 집, 부산 교구 봉사자라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어요.
그게 교만 그 자체의 우상이 된 줄도 모르고 말이에요.
아무튼 그 당시의 저는 정말 온 힘을 다해 열심히 봉사자로 살았습니다.
그런 저를 보며 남편과 시아버님과 시어머니, 그리고 큰아이까지 묵상회를 다녀오고,
기타와 노래에 달란트가 있던 남편은 저의 후배 봉사자 되어 찬미봉사자로 봉사하고,
시아버지는 본당 기도회 회장까지 하시게 되었어요.
가족 모두가 성령 기도회 안에 머물렀죠. 그 당시의 저에겐 성령 기도회가 전부였어요.
그러나 그렇게 죽을 듯이 매달린 그곳에서도 저는 늘 갈증에 시달렸습니다.
매주 금요일 철야를 가고, 기도회를 가고,묵상회 봉사자로 본당마다 찾아다니며
봉사를 가도 그때 그 시간뿐이었고, 봉사의 기쁨 뒤엔 늘 지치고 힘든 현실에 대한
원망과 좌절이 함께 했지요.
그래서 더욱더 매달리고 살 수 밖에 없다고 여기던 제게 우연히 딸랑..
한달 먼저 가입한 언니에게, 이 책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너무 좋다 였어요.
여러분께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무형의 성전에 오셨겠지만
저는 딸랑을 읽다가 눈물이 터져 버렸어요.
좋은 부모님 밑에서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라는 어느 식구님의 글을 읽는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와 엉엉 울었어요. 왜? 왜? 이 사람은 좋은 부모를 주고,
제게는 왜 그랬어요? 라고 어마어마한 울음이 터져 나오더라고요.
그때 책을 읽은 곳이 회사 사무실이었는데 누가 들어올지도, 전화가 올지도 모르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시간 마음껏 목 놓아 울 수 있게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셨어요.
지나고 다시 읽어보니 그 부분만 그렇고 그 뒷이야기는 다른데 저는 유독 거기에
마음이 꽂혀 버린 거예요. 지금 생각하니 제 안의 가~장 큰 아픔을 건드리신 것 같아요.
그렇게 폭풍 눈물로 한바탕 울고 난 후 저는 열 받아서 가입했어요.
도대체 왜? 저한테는 왜 그랬어요? 라고요.
그날이 2018년 10월 12일이었습니다.
그런 불충한 마음으로 일단 들어오니 가입하고도 충실하지 못했어요.
댓글에 대한 부담감과 제 안의 올라오는 에고들을 어찌하지 못한 채,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
2019년 3월에 봉헌식을 위해 부산에서 서울 삼성산까지 봉헌식을 올리러 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멀쩡하던 둘째 아이가 올라가기 바로 전날 고열이 나기 시작했어요.
내일 올라가는데 오늘 낮부터 열이 나기 시작하는데 독감이라는 거예요.
주위에 아무도 걸린 사람이 없어요. 39도가 넘게 고열이 오르는데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그때 같이 봉헌식을 올리러 가던 언니가 저를 잡아줬어요.
어떤 엄마가 애가 열이 펄펄 나는데 그 아픈 애를 두고 갈 수 있냐고 울먹이던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잡아 준 언니에게 정말 고마워요.
아직 한창 엄마 손이 필요한 초등학생이었던 그 아픈 아이에게 해열제를 쥐여 주고
길을 떠나는데 정말 제가 종교에 미친년 같았어요.
2019년 3월 15일 삼성산에서 봉헌식을 올렸어요.
그날 봉헌식 때 제가 정말 많이 울었어요.
분도패를 목에 걸 때는 무언가 이룬 성취감과 드디어 고생 끝났다. 라는 생각이 더 좋아서
눈물 한 방울 안 났는데, 내맡김의 봉헌식 때 국화꽃을 받고는 정말 미친 듯이 눈물만이
흘렀어요. 사진에 눈이 퉁퉁 부어있어요.
봉헌식을 마치고 식구들과 식사 자리에서 신부님께서 갑자기 제 옆으로 오셨어요.
그때 신부님께 제가 올라오면서 힘든 이야기를 드렸어요.
신부님, 사실은 제가 아픈 아이를 두고 왔습니다. 하니 그때 너무도 따뜻한 눈빛으로
저를 위로 하시며, " 잘 왔어 , 너는 이사악을 내맡긴 아브라함의 믿음을 살아야 돼.” 하시는데,
잘 왔어, 하시는 그 말씀 한마디에 올라오면서 힘들었던 마음이 모두 녹아내리는 것 같았어요.
그때 정말 힘들었던 제 마음을 신부님께서 잡아주셨어요.
그 뒤로도 힘들 때마다 봉헌식 날 말씀하시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견딜 수 있었어요.
신부님 감사드려요. 그리고 사랑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렇게 열이 펄펄 끓던 아이가 봉헌식 마치고
전화하니 열은커녕 암씨롱도 안 한 거예요. 어이가 없었어요. 진짜로.
저는 그때 마귀의 방해가 정말 대~~단하다는걸 알았어요.
그렇게 봉헌식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때늦게 내리는 3월의 함박눈이 마치
아버지의 축복 같았습니다.
봉헌식이 끝난 후 저는 제가 내맡김을 아주 잘할 거로 생각했어요.
그때부터가 전쟁의 시작이었는데 말이지요.
댓글에 대한 거부감과 함께,
제 안에서는 올라오는 에고와 상처로 뒤죽박죽 엉망이었기에
끊임없는 화살기도 안에서 정말 눈물로 아버지를 부르며 걸어왔어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처절한 저와의 영적 전쟁을 벌이며 견디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제 안의 대마귀들은 저를 뽑아내려 갖은 애를 쓴 거 같아요.
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기도와 사랑이 필요할까요.
처음 시작부터 지금까지, 상처투성이 동생이 뒤집어질 때마다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붙잡아 준 무뇌어린양 보조교사 언니, 이 시간을 빌어 정말 고맙고 사랑합니다.
그렇게 저의 에고에 뒤집어지기를 반복하며 견디고 견딘 그 세월은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저를 나날이 조금씩 왕창 변화시켜 가고 있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그게 아버지께서 함께
하셨기에 이루어진 것이었음을 느낍니다.
그렇게 저는 봉사회와 거내영을 번갈아 오가며 이쪽도, 저쪽도,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지내면서 마음은 무형의 성전에 머물고, 몸은 기도회에 들어가 있는 이상한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아.. 이제는 봉사회를, 기도회를 떠나야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인간적인 마음이 더 강했던 지라 쉽게 놓아지질 않았어요.
신줏단지 모시듯 모시던 제 단복과 뺏지를 버리지 못했어요.
본당 기도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저는 봉사자라는 타이틀을 벗었을 때,
드러날 저의 부족함이 너무도 두려웠어요.
그 껍질을 벗어던지고 아버지 앞에 발가벗고 선다는 것 자체가 너무 두려운 마음이었어요.
그 당시의 부족한 저에겐 참 쉽지 않았고,
나는 왜 이렇게 안 되나 하고 아버지께 참 많이 울면서 화살기도로 내맡겨 드렸습니다.
본당 은혜의 밤 행사 때, 앞에 나서서 마이크 들고 잘난 척을 좀 두어 번 했던 경력이 있어서
그 이름표를 떼는 것도 저에겐 문제였어요.
그리고 본당에서 김유미 하면 당연히 성령 기도회가 나올 정도로 저에겐 전부였던
시간이었기에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죽도록 내맡겨 드리며 걸어온 것 같아요.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 못한 채 그저 내맡겨 드리며 지낼 때
코로나가 터지고 미사가 멈추게 되면서 당연히 교구 철야도, 본당 기도회도 멈추길래
세상에 그렇게 속이 편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전 세계적으로 모두가 힘든 시기였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코로나로 인해
무형의 성전에 조금씩 더 스며들면서 아버지께로 한 걸음 더 집중할 수 있었던,
오히려 영적으로 더없이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아버지께 내맡기고 이끌려 드리면서,
갑자기 시아버지께 창, 화살 책을 좀 드리고 싶다 하는 생각으로 이끌어 주셨어요.
창, 화살과 딸랑을 드리고 나서 이틀인가 삼일인가 뒤에 아버님께서 전화를 주셨어요.
이 좋은 걸 너 혼자 하고 그동안 말도 안 하고 있었나? 라는 아버님 말씀에
제가 너무 죄송스러웠어요. 저는 견디느라 혼이 빠졌는데, 세상에 아버님은 바로 아시네?
그러고 느껴지는 마음은 너무나 감사함이었습니다.
지금은 시아버님도 기도회를 떠나셨고, 신부님께서 지어주신 하느님의앞뜰 이라는
닉네임으로 충실히 잘 이끌려 드리고 계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렇게 무형의 성전에 더 집중하며 살던 중에 코로나가 서서히 풀리게 되면서,
다시 교구 철야가, 본당 기도회가 시작되었어요.
그때 몇 년 만에 교구 철야를 갔었어요. 만날 사람도 있었고, 보고 싶은 얼굴도 있으니,
겸사겸사 오랜만에 올라가 볼까? 하는 편안한 마음에 단복을 입지 않고 갔어요.
그날 저의 눈에서 콩깍지가 벗겨졌어요.
오랜만에 본 후배를 향한 선배들의 첫마디가 “ 왜 단복을 안 입고 왔냐? ” 였어요
세상에 .. 우상이구나... 이게 우상이었구나 !! 라고 저는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잘 왔다. 반갑다. 잘 지냈니? 도 아니었어요. 만나는 선배들 모두 인간 김유미가 아니라,
제 단복을 찾았어요. 그들에겐 저보다 단복이 더 우선이었던 거였어요.
시작은 아버지의 이끄심이었으나,
저의 우상이 되어 있던 단복을 그날 마음으로 벗었어요.
그리고, 그곳은 저에게 더 이상 전부가 되지 못했어요.
제 목에 걸린 분도패가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렇게 봉사회를 떠난 후에 다음은 본당이 남더라고요.
이 본당은 봉사회랑은 또 다르게 저에게 다가왔어요. 형님들이 전화가 오니까...
힘들 때 저를 너무도 살뜰히 챙겨 주신 형님들에게 냉정하게 말을 못하겠는 거예요.
인간적인 관계 안에서 죽도록 아버지께 내맡겨 드리며 그 관계 속에서 지내기를,
몇 달이 지날 즈음 저의 기도 진행하던 날이었어요.
기도회 진행 중에 전구 기도를 합니다. 예전에 중재기도였지요.
전구 기도를 하며 심령으로 기도도 하고요.
그런데 기도 회원들이 올린 전구 기도를 하나씩 읽어 주는데 너무나도 거북한 거예요.
시험 합격, 암 치유, 내적 치유, 육체적 치유, 구마기도, 등등 순간 번쩍하고 드는 생각이
아. 정말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이 청원을 내 입으로 읽으며 기도하고 같이 아멘 ! 하고 주님을 부르고,
이게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라고 느끼는 순간 기도가 팍~~!!!!!!!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어요.
정말 벽과 벽이 팍 부딪혔어요. 정말 강렬한 느낌이었고 너무나 거북했어요.
저는 그 진행을 마지막으로 미련 없이 기도회를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가 부딪히게 되니, 정말 이제 여기서 그만!! 이라는 느낌이 너무도 강했어요.
이제 더 이상, 더는 안된다 하는 마음을 주셨어요.
그동안 저는 인간적인 관계를 떠나지 못하는 저에게,
스스로에 대해 합당한 변명을 해주었어요.
사람들과 함께하는 찬미가 좋아서, 그 으쌰으쌰 분위기가 좋아서,
봉사회는 떠났으니까, 그래도 본당 기도회는 괜찮지, 뭐~!!
어디에서든 아버지께 내맡겨 드리고 기도하는 것은 같으니까 괜찮지,
찬미로 노래하는 내 마음을 아버지는 아시니 이건 괜찮을 거야!
예.. 그렇습니다. 이게 제가 떠나지 못한 이유였어요.
그때 저는 저의 교만과 영광이 아버지의 이끄심보다 더 앞에 서 있었음을 느끼는 순간,
무릎을 꿇었고 순명으로 아버지께 응답해 드렸습니다.
제 안의 인간적인 악습에 따라 아버지의 뜻을 알면서도 따르지 못하였던 저의 마음이었어요.
일어나는 모든 일에 아버지의 뜻이라 내맡겼으나,
인간적인 에고에 휘둘린 저는 살아도 아버지의 뜻이고,
죽어도 아버지의 뜻이라 입으로만 조잘대며 마음으로, 삶으로 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분별케 하시는 아버지의 놀라운 이끄심 덕에 뒤도 돌아보지 않게 되었어요.
정말 제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마음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당 형님들과 기도회장님에게도 대충 얼버무리며 말 못 함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이끄시는 아버지께 더 충실히 살고자 거룩한 내맡김 영성,
끊임없는 기도 모임으로 나는 간다. 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어요.
제 안의 우상으로 자리 잡아 아버지의 영광을 도둑질하던,
단복도, 뺏지도, 이름표도 모두 정리를 하게 이끌어 주셨어요.
그렇게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감사 미사를 드리던 중에 아버지께서 환시를 보여주셨어요.
제가 두 다리를 벌리고 서 있었는데,
제대로 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비틀비틀하는 제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본당 신부님께서 강론 중이셨는데,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를 뻔한 입을 틀어막았어요.
제 왼쪽 귓속에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씀이 너무나도 생생하였습니다.
“ 갈라진 네 마음을 모으고, 네 두 다리를 모아 똑바로 서라!!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흔들리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어요.
그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어요. 미사 중에 갑자기 울기 쉽지 않잖아요. 많이 울었어요.
제가 우니까 본당신부님께서 당신의 강론에 감동하신 줄 아셨어요. 그게 아닌데 말이죠.
제가 기억하고 감사할 것은 모든 것이 아버지의 때에 이루어진 이끄심이었기에,
성령 봉사회에 머물며 울고 웃었던 그 모든 시간 또한 아버지 안에 살아온 행복한
시간이었음을 기억하면 되는 것임을, 그 이상 그 이하도 없음을 이끌어 주셨고,
저는 아버지께 너무 감사를 드렸습니다.
한 걸음 더 깊이 가까이 다가오라 하시는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음에 더없이 감사하고
거룩한 내맡김 영성을 통하여 지금의 나를 이끄시는 아버지만 사랑하자 내맡겨 드릴 수
있게 되었어요.
작년 10월에 몸이 안 좋아서 일을 하다가 하혈하며 피를 많이 흘렸어요.
그런데 무섭기는커녕 하혈을 하면서도 이 거룩한 피 흘림을 통하여 제가 쉬어 갈 수 있게
이끌어 주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라고 기도가 절로 나오더라고요.
오~ 거룩하고 복된 피여 !! 라고 외치던 저 자신에게도 놀랐어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렇게 봉사회와 기도회를 떠난 후 저는 정말 무형의 성전에 뼈를 묻겠다고 결심했어요.
마음이 모이니 세상에 둘도 없는 내 집이었고, 죽어도 남을 내 이름 석 자의 묘비였어요.
그렇게 감사를 드리며 지내면서, 제 마음 안에 줄곧 남아서 저를 괴롭히던 제 이름 석 자에
대한 마음이 강해졌어요. 이제 정말 이름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명하시는 분을 소개받기로 하고 지내는데 사정이 생겨 취소되면서,
갑자기 제 마음에 아버지의 이끄심에 개명할 때 하더라도,
신부님께 상담을 하고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마침 끊지기 피정도 있으니 한번 여쭤보고 해야겠다. 라고 이끌어 주셔서 기다렸어요.
그때까지도 저는 제 이름이 왜 그렇게 싫은지 몰랐어요.
제가 예전에 이름 풀이를 한 번 한 적이 있었는데 제 이름이 글쎄 참 안 좋은 거예요.
제 이름을 아버지께서 지으셨는데,
말년이 외롭고 가난하고 암튼 안 좋은 건 다 들어 있더라고요
그걸 본 후로는 이름이 더 싫은 거예요. 정말 싫었어요.
그래서 본당 자매들은 유미라고 부르지 않고 다들 로사라고 불렀어요
제가 세례명으로 불러달라 그랬거든요. 유미가 싫어서 말이지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끊지기 피정 날이 되어 반가운 언니 동생들과 신부님을 만났어요.
신부님 모시고 주방으로 들어갔지요.
여러분, 지리산 마리아처럼 주방은 참 상담하기 좋은 분위기인 것 같아요. ^^
신부님, 제 이름이 싫은데 바꿔도 될까요? 라고 신부님께 여쭈니
신부님께서 이쁜데 왜 그래..라고 하시면서 적극 권하시지 않으셨어요.
이름 풀이 그런 것도 하지 말라고 하셔서 다시는 않하겠습니다. 라고 용서도 청하고,
신부님께서 꼭 개명하고 싶으면 차라리 세례명으로 해라…. 라고,
말씀하셔서 알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나왔어요.
상담하고 나서 편안한 마음에 피정 끝나고 나면
로사든 한결이든 뭐든 바꿔야 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피정에 참가하면서 즐겁게 지내는데,
그날 밤 아가페 중에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었어요.
함께 하신 분들 기억 나시나요.
그때 갑자기 제 마음에 훅~ 하고 들어오는 느낌이 있었어요.
갑자기 “ 나는 내 이름이 아니라 내가 싫었구나….”라고 너무나도 아픈 마음이 들어왔어요.
신나게 춤추고 놀다가 갑자기 눈물이 너무 났어요.
정말 울컥 피를 토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마음은 통곡이 나올 것 같은데 모두의 흥겨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속울음을 삼키며 정말 죽도록 아버지!! 아버지!! 만 불렀어요.
저는요. 이름이 싫었던 게 아니라 저의 존재를 저 스스로 부정하며 살았던 거였어요.
시작부터 어긋나 버린 그 상처에 저는 자라지 못한 아기였습니다.
구정물 흐르던 수챗구멍의 상처가 곪아서 썩은 내를 풍기며,
그런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 마음이 느껴지는데 너무너무 아팠어요.
사람을 나타내는 가장 첫 번째가 이름인데,
저는 저를 부정하니 제 이름이 싫었던 거예요
유미가 아니라 유정이고 싶었고, 유경이고 싶었고,
아무리 좋은 이름으로 개명해도 저는 만족하지 못했을 거라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오지 못했던 이유를,
저도 모르던 제 속의 아픔이 그날 지리산 마리아처럼 엄마 집에서 드러나게 되었어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불쌍하고 아픈 내 이름이 제 마음에 들어오니까,
그 어떤 기도도 떠오르지 않았고, 가만히 아버지 안에 머물렀어요.
제가 성령 기도회를 떠나면서 들려주신 “너의 마음을 모아라 “가 떠올랐어요.
아버지의 그 부르심에 마음을 모아 내맡겨 드렸더니,
죽음의 수렁에서 저를 건져 올리셨습니다.
그날 저는 그 어두운 죽음의 수챗구멍에서 건져 올려졌습니다. 아멘!!
이미 받은 선물이었던 제 이름을 찾았습니다.
끊지기 피정을 통하여 받은 이 은혜로 저는 정말 제 이름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아버지 함께 하시니 저는 이제 두렵지 않습니다.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게 아버지의 뜻이라면 가난하면 되지요
외롭게 살아라 하시면 외롭지요.
아버지께서 함께하시는데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지금의 나를 이끄시는 아버지를 믿지 못하기에,
미래의 내가 불안하고 두려운 것임을 이끌어 주시고,
내맡긴 영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의 나를 살아가는 것이라 이끌어 주셨어요.
쟁기를 매고 뒤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내맡긴 영혼이 아님을,
저는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다 아버지께로 내맡겨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한데 모으고 온전히 내맡겨 드리세요.
저에게 주신 이 선물이 여러분에게도 드러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아멘!!
더운 날씨에 군대에서 열심히 나라를 지키는 큰아이가
저의 우울증으로 가장 큰 상처를 입었지요.
폭력의 악습을 대물림 하며 큰아이에게 저도 매를 참 많이 들었어요.
어느 순간 아버지와 똑같이 소리 지르는 저를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내맡김을 살아가면서 그 지독한 폭력의 악습을 아버지께서 끊어주셨고,
제가 아팠던 만큼 제 아이가 아팠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끊지기 피정 후에 큰아이에게 엄마가 정말 많이 미안하다고 사과하였어요.
하느님 아버지께 엄마 때문에 아팠다고 다 이야기해. 라고 말했어요.
네가 아버지 안에서 온전히 회복되고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내맡긴다. 라고
이야기 해줄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상처투성이 엄마 밑에서 너무나 바르고 착하게 잘 자라 준 아들이 너무나 고맙고,
그 모든 것을 이끌어 주신 아버지께 영광 드립니다.
밑에 둘째 아이가 지금 중 3이에요. 봉헌식 때 열나던 아이요.
게임과 공부 문제로 자꾸 언성이 높아지는 제 모습이 참 싫었어요.
아버지께서 공부도 다 내맡겨라 이끌어 주시길래 아멘!! 했어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남들은 더 못 시켜서 안달 내는 그 시기에
저는 그냥 학원 그만두고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공부해도 된다. 하고 그만두게 했어요.
두통을 달고 살던 아이가 머리가 안 아프다 하니 그동안
얼마나 하기 싫었을까 하는 생각에 참 미안하더라고요. 제 욕심이었어요.
내 뜻을 접으니 시험 때만 되면 학원, 숙제, 게임으로 싸우던 것이 사라지더라고요 ^^
시험 전날까지 맘 편하게 게임 하는 아들 뒤통수에 대고 난 이제 모릅니다.
아버지, 알아서 하세요! 하고 쿨하게 돌아섰어요. 세상 속 편합니다.
그러고, 한 달 후 기말고사 성적이 정말 반토막이 났어요.
그런데, 그 성적표를 보고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
저도 놀랐어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저를 보면서,
작은 애가 우리 학교에 엄마 같은 엄마도 없을 거라고 이야기하길래,
너는 진짜 복 받은 줄 알라고 하고 둘이 한참을 웃었어요.
그 아이들을 이끄실 아버지께 온전히 내맡겨 드리고 나니 세상에 이렇게 마음 편하게
살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진심으로 적극 추천해 드려요.
사실 카페에 아버지 미사 공지가 뜨고 얼마 뒤에 남편이 일하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어요. 시아버님도 모르시는데 놀라지 마셔요.
여러분, 제가 지금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위해 학원 실습 중이라 수입이 없는데,
남편이 실직하게 되면 수입이 없잖아요, 매달 나가는 돈들이 있는데 말이지요.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래? 아버지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내맡기고 나니 정말
걱정이 안 되는 거예요. 남편에게도 괜찮다고 아버지 알아서 하실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했지요. 남편도 제가 하도 내맡김 이야기를 해서인지 아멘 하고 내맡겨 드려요.
그러고 며칠 뒤, 주말에 남편이 가끔 아르바이트처럼 다니던 곳에서
마침 사람이 그만두게 되어서 남편이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참 신기하지요.
어찌 그리 딱 맞춰 그 자매님이 그만두시는지.. 아버지 하시는 일이 얼마나 재밌게요.
아버지께서 저희 가정을 어떻게 살게 하시던지
그냥 저는 따라 살면 되는 것임을 또 느끼는 감사한 순간이었어요.
아버지 함께 하시기에 가난함도 육의 아픔도 모두 기도가 됨을 느껴요.
물질의 가난함을 비유로 아버지께서 라자로를 떠올려 주셨어요.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짐을 이끌어 주셨어요.
저는 라자로보다 부자이거든요. 밥 굶지 않고요. 종기가 생기면 약도 사 바를 수 있어요.
물질의 풍족함 가운데 아버지를 잊어가기보다,
차라리 가난함 가운데 아버지와 함께 살자! 라고 이끌어 주시니,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찾으라 하시는 말씀을
떠올리며 거룩한 내맡김 영성을 통하여 아버지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에 저는 너무나
행복한 영혼임을 알게 되었어요.
아버지 미사 오기 얼마 전 친정엄마께서 몸이 아프셔서 수술을 하시게 되었어요.
우리 부산 식구님들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리산 마리아처럼 끊지기 피정을 마치고 난 후에,
그렇게 아프고 힘든 부모님을 향한 원망이 단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아요.
무심해졌어요. 관심이 없어서 무심이 아니라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었을까? 라는
마음의 일렁임이 하나도 없어요. 아프시다는 소리에 그저 안되고 안쓰럽더라고요.
매 맞은 기억보다 안쓰러움이 더 느껴지니 이게 치유인 거지요
아버지는 치매가 오셔서 저에게 그렇게 한 걸 잊으셨어요. 허허...
저는 이제 부모님 생각하면 자식을 사랑하지 못했던
두 분의 아픈 마음, 결핍된 두 분의 마음을 위해 기도 합니다.
혼자서 그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애쓰시던
엄마이기 이전에, 여자로서 너무나 힘들었을 엄마의 삶을 내맡겨 드리며,
친정 부모님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한 부모 밑에서 자라 똑같이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보냈을 형제들을 위해서도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려웠던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형제들끼리
서로 다독이며 살아가니 그저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내맡김을 통해 저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아팠던 육의 부모로부터의 사슬이 풀리고,
내맡김을 통하여 온전히 아버지께로 올려드린 제 영혼의 자유로움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드리고 싶어요.
그렇게 해방된 제 영혼은요,
그렇게도 저를 옥죄고 두렵게 하던 죽음이 이제 두렵지 않아요.
제가 병원에 실습한 지 석 달 정도 되는데, 그동안 제가 몇 분의 임종을 지켜봤어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보며 죽음에서 치유된 저를 느껴요.
죽으라면 죽으리오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내맡겨 드리니,
그분들의 죽음을 보면서 제일 처음 느낀 마음은 언젠가 아버지 곁에 가게 될 날을
미리 보여 주시는 듯한 느낌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평안함으로 이끌어 주셨어요.
죽음이 끝이 아님을 느끼며, 그 경계 너머에 있을 아버지의 얼굴을 뵙기 위해
더 열심히 아버지만을 뜨겁게 사랑하며 살자, 라고 이끌어 주셨어요.
아프고 힘든 상처들을 외면하고 덮어두지 않고, 벌거벗고 처절하게 소리치며 아팠다고
아버지를 부를 수 있도록 저의 모든 것을 이끌어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를 위한 영광의 도구 되기 위해 남들보다 조금 더 아팠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을까 하는 마음에 이 증언이 저에겐 또 다른 치유가 됨을
이끌어 주셨어요.
창조의 원래의 목적대로 돌아가,
지금, 이 순간을 이끄시는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만을 사랑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신부님의 따라쟁이 되어,
거룩한 내맡김 영성을 통하여 이루실 아버지의 뜻에
부족한 저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립니다.
증언할 수 있도록 이 시간 허락해 주신 사랑하는 신부님께 감사드리며,
함께 기도로 응원해 주신 보조교사 언니, 동생들 감사드립니다.
귀하고 이쁜 제 이름 김유미 로사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모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첫댓글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내맡김으로 참 자유를 얻은 한결같은님의 증언을 들으며
나이로는 동생이지만 존경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 뜻은 너무나도 질기고 질겨서
내 안에 끝까지 남아 있으려 하지만
아버지께 그 것마저 모두 내맡겨드리면
아버지께서 깨끗이 해 주시고
참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저희의 모든 것을 내맡기오니
거룩하신 뜻대로 이끌어 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한결같은 님의 증언을 들으며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어쩌면 저렇게 담담하게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리면서 사시는지?
<죽으라면 죽으리오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내맡겨 드리니,
그분들의 죽음을 보면서 제일 처음 느낀 마음은 언젠가 아버지 곁에 가게 될 날을
미리 보여 주시는 듯한 느낌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평안함으로 이끌어 주셨어요>
<2023 온 인류의 아버지를 기리는 미사> 에
모든것을 봉헌한다고 하였지만 아직도 모자란
저의 내맡김 영성이 부끄러워 집니다.
더욱 아버지를 불러야 하고 화살기도로 저를 다져야 함을
느끼며 증언을 듣는 내내 감동했습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사랑하는 하느님아버지
거룩한 증언으로 이끌얼 주셔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한결같은님~
넘넘 대견하고, 장하십니다.
두 팔 벌려 안아드립니다.
그 아픈 시간들 참으로 잘 견뎌오셨습니다.
그 아픔이 농축되어 때로는 원망의 눈물로
때로는 용서의 눈물로, 또 더러는 측은지심의 맘으로
눈시울을 적시고, 가슴을 적셔 저도 덩달아 울고 울었답니다.
도무지 지금의 그 생기 발랄한 모습에서
찾아 볼 수가 없는 고난의 시간들을 아버지 안에서 잘 견뎌주었습니다.
그 모든 순간에 함께 하셨고
사랑하는 한결같은 님을 업고 걸으셨을 우리 아버지!
한 순간도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잡은 손을 놓지 않아주심에 엎디어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한결같은의 모든 것을 세세히 이끌어 주심에 뜨겁게 감사드립니다.
당신 자녀를 너무도 사랑하시어 잠시 잠깐도 품에서 내려두지 않으시는 아버지
한결같은의 증언으로 아버지 찐 사랑을 느끼며
아버지만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기로 맘을 모아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베풀어 주신 모든 것에 감사찬미드립니다.
<거내영>의 모든 것을 통하여 아버지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완사 완영을 위하여!
사랑하는 하느님아버지,
당산의 귀한 자녀를 치유시켜 주시어 영광의 도구로 이끌어 주심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한결같은님,
그날의 감동으로 또 다시 살아나니
힘찬 박수를 보내며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씩씩하게 잘견디어 오신 유미에게
사랑을 보내며 나의 어린시절도
생각나네요.
참으로 좋으신 아빠아버지,
저의 모든 것은 당신 것이오니
내맡겨 드립니다.
어린나이에 나름 너무도 힘들고 아픈 시간 이었음을 아버지께
고백합니다.
한결같은님의 고백에 제 어리시절의 아쁨도 치유 됨을 느껴봅니다.
깊은 서랍속에서 고통스러운 그때의 기억을 아버지께
내맡겨 드리며 아버지께서 해 주셔야만 되는 일임을 알기에 꺼네 드립니다.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아버지,
당신의 보석들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주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죽을 목숨을 살려주시어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으로 아버지만을 사랑하는 영혼으로 이끌어주시어 참으로 감사합니다.
한결같은의 모든 것을 통하여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크게 드러내 주심에 찬미드립니다.
한결같은의 증언을 통하여 아버지 홀로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고난을 겪어야만 했던 한결같은님의 증언에 공감하는 사람이 우리 세대는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저 또한 그 대단한 아들이 아니어서 받았다는 고난을 받았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은총으로 젊은 나이에 이렇게 증언까지 하시는 한결같은님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오직 아버지만을 향한 그 인내와 사랑이 맺은 결실이지요.
가장 뛰어 넘기 힘들다는 자식에 대한 욕망 조차 아버지께 맡기시는 한결같은 님의 그 영성에 찬미 천사를 드립니다.
잘 살아 오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 남은 긴 여정도 아버지와 함께 하실 거라 믿습니다.
장하신 한결같은님께 아버지의 영광이 영원하시길 빕니다. 아멘!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아빠아버지, 아버지만이 주실 수 있는 참 자유와 참 평화,
참 행복에 참으로, 참으로 감사합니다!
< 아버지 함께 하시기에
가난함도 육의 아픔도 모두 기도가 됨을 느껴요. >
< 아버지를 위한 영광의 도구 되기 위해 남들보다 조금 더 아팠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을까 하는 마음에 이 증언이 저에겐
또 다른 치유가 됨을 이끌어 주셨어요. >
아멘, 아멘!
사랑하는 무척님,
수고에 진심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한결같은님,
너무나도 거룩한 증언의 빛에 이 세상 모든 어둠이 숨을 곳을 찾는 것만 같아요.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인 < 거룩한 내맡김의 삶 >의 은총을
정말 잘 증언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본받고 싶어요.
< 아버지를 위한 영광의 도구 >로 불림 받아 더 더욱
아버지의 기쁨이 되어가심을 축복하고, 마음 다해 축하드려요.
부족한 저도 사랑하는 한결같은님과 함께 더 더 더 내맡겨 드리고
아빠아버지만을 죽도록 뜨겁게 사랑하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흠숭합니다. 찬미합니다. 사랑합니다.
한결같은과 그 가정의 모든 것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아빠아버지, 아버지가 주시는 모든 것에
아멘! 할 수 있도록 이끄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게 아버지의 뜻이라면 가난하면 되지요
외롭게 살아라 하시면 외롭지요.
아버지께서 함께하시는데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물질의 풍족함 가운데 아버지를 잊어가기보다,
차라리 가난함 가운데 아버지와 함께 살자! 라고 이끌어 주시니,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찾으라 하시는 말씀을 떠올리며
거룩한 내맡김 영성을 통하여 아버지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에 저는
너무나 행복한 영혼임을 알게 되었어요. >
아멘 아멘~!!!
사랑하는 한결같은님,
님의 증언을 또 다시 듣고 읽으며 부족한 저는 그저
감사 감사 감사만 떠오릅니다.
이 아름다운 영혼이 죽지 않고 살아나
아버지를 증언하고 있구나 싶어서요.
정말 정말 장하십니다.
무형의 성전에 올려지는 님의 댓글에서 느껴지는
내공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증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고통이 그냥 고통이 아니고, 부족함이 그냥 부족함이 아님은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가 다 아시고
이끌어 주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님의 증언을 들으며
오, 복된 고통이여!
오, 복된 부족함이여! 를 외치고 싶네요.
사랑하는 한결같은님,
참으로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부족한 저도 님과 함께 아버지만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아버지의 이끄심에 충실히 이끌려 드리렵니다.
사랑하는 무척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한결같은과 그 가정의 모든 것을 통하여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마음껏 드러내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이신 아빠아버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사실을
아버지께서 해결 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십니다.
어느 수녀님의 간증을 듣고 울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술 주정과 폭력이 심한 아버지가 싫어서,
'하느님 아버지 , 왜 나는 저런 아버지를 주셨습니까?,
우리 아버지 좀 바꾸어 주세요.' 하였답니다.
순간, 큰 소리로,
' 얘야, 내가 너의 아버지다.' 하시더랍니다.
그 체험으로 수녀가 되었답니다.
나도 이 간증을 듣고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많이 풀어졌습니다.
절친인 교우들이 옆에서 지켜보니,
'똑같이 기도 하는데 하느님 은총을 유난히 많이 받는 것 같아
질투난다'의 소리를 사랑스럽게 합니다.
공감하면서 그럴때마다,
'공평하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 잘못도 없이 세상에 태어 날때부터 안고 살아가는
이 아픔을, 하느님께서 아시는 구나!'
합니다.
한결 같은 보조 교사님,
그날 증언을 들으면서 하느님 사랑
많이 받는 사람으로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천주교 신자인 집안으로 결혼한 것이
가장 큰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릴때의 그 설움 아버지께서 보상하셨다고 믿습니다.
나는 세례 이후에도 20년 동안 세상 것을 주시라고
하느님께 떼를 썼습니다.
사랑이신 아버지께서 그것도 모두 주셨지만,
진정한 하느님의 참모습이신,
사랑자체 이신 하느님의 자녀로서는 턱없이 부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51세인 한결 같은 보조 교사님.
나에겐, 그날 참 부러운 모습 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하느님의 제대로 된 길,
거내영에서, 하느님의 뜻을 펼칠 수 있으며.
동반하신 시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 가정에 하느님 사랑 듬뿍 내리시길 기도 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 거내영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나날이 새롭게 해 주시는 아빠아버지,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아버지의 완전한 영광을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무척님,
연일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니
거룩한 증언을 듣고 또 듣습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한결같은님,
거룩한 증언을 통하여 님의 온 생애를 다 보살피시고 이끌어주신
아버지께 지금 이 시간도 감사드리며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되셨으니
땅을 밟는 천국을 살으심이요, 아버지의 참자녀임이 분명합니다.
아버지께 더 할 수없는 사랑덩이이신 님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감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이 생명 다하도록 아버지만 죽도록 죽기까지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가길 열망하며 내맡겨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한결같은의 모든 것을 통하여 아버지 홀로
마음껏 찬미 받으시고 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아버지 함께 하시니 저는 이제 두렵지 않습니다.>
<지금의 나를 이끄시는 아버지를 믿지 못하기에 미래의 내가 불안하고
두려운 것임을 이끌어 주시고 내맡긴 영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의
나를 살아가는 것이라 이끌어 주셨어요.
쟁기를 매고 뒤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내맡김의 영혼이 아님을,
저는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다 아버지께 내맡겨 가고 있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사랑하는 한결같은 보조교사님!
항상 밝고 웃음이 떠나지 않아서 그런 아픔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네요
증언 말씀 조목 조목 힘이 있고 옳은 말씀 뿐입니다.
아버지 미사에서 증언하실 때 많이 망설이셨다는 그 날 그 모습이 떠오르네요.
증언을 통해 아버지께서 또 다른 치유로 이끌어 주셨다니 감사하고 축복 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한결같은의 모든 것을 통하여 아버지 홀로 찬미 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분도패를 목에 걸 때는
무언가 이룬 성취감과 드디어 고생 끝났다. 라는
생각이 더 좋아서 눈물 한 방울 안 났는데,
내맡김의 봉헌식 때
국화꽃을 받고는 정말 미친 듯이 눈물만이 흘렀어요.
사진에 눈이 퉁퉁 부어있어요. >
사랑하는 한결같은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무척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유미님,
이제 이름 실컷 불러도 되지요?
참 아름다운 이름을 되찾아서 축하드립니다.
그깟 제복 참 잘 버리셨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원히 벗겨지지 않는
하느님 뜻의 옷으로 갈아입으셨으니까요.
그 옷에 아름다운 디자인과 저마다의 칼라를 입히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이끄심"에 충실해야 합니다.
누가 더 예쁘고 아름다운 옷을 만드느냐가 우리의 할 일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유미, 유미,
아름다운 유미의 모든 것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 2년여 간의 정말 힘든 수련 기간을 거치고
정식 단복을 입고, 분도패를 목에 걸며,
저는 제가 정말 거룩해진 줄 알았어요.
다들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속으로는 여전히 썩은 고름이 흐르는데
겉만 번지르르한 바리사이로 살았어요.
단복을 입고 뺏지를 달며, 분도패를 목에 걸 때마다
영성의 집, 부산 교구 봉사자라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어요.
신줏단지 모시듯 모시던 제 단복과 뺏지를 버리지 못했어요. >
[ 위무위.보조 20.10.22 16:56
저는 지난 40년에 가까운 사제생활을 해 오면서
정말 <인타까운 신앙인>들을 적지않게 많이 보아왔습니다.
안타깝기보다 오히려 <불쌍한 신앙인>들은
교회 밖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안에
그리고 소위 열심하다는 신앙인들 안에 많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웠던 사실을 경험한 것이 지난 해의 경험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하느님을 체험했고 성령의 은사 속에 살아간다는,
그것도 짧은 기간이 아니라
10년, 20년, 30년 이상의 오랜 세월을
성령기도회에서 봉사했다는 신자들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와 <주님을 닮은 모습>은 커녕
오히려 <마귀 냄새와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다는 아니었지만
많은 봉사자들 안에는 <성령께서 출타 중>이셨습니다.
정말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제가 성+호를 긋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기본>이 안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이!
참으로 안타깝고 불쌍한 영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영성생활을 튼튼하게 하는 밑바탕이 되고,
그 위에 지식과 깨달음, 봉사, 직무 등으로 집을 짓게 될 때
성숙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미성숙한 봉사자는 <소경>에 불과합니다.
모든 신앙인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
영적성장은 절대로 공부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령쇄신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
거룩한 증언으로 또 다른이들의 치유로 이끌어주신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겉보기엔 밝아보이신것 같지만 구비구비
구석구석 아픔이 뼈속까지 사뭇쳐 있었네요.
증언을 통해 벌거숭이가 되니 듣는
저 또한 벌거숭이가 된것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와 주심에 감사하고
또 그 삶안에 계신 아버지를 제대로 느끼셔서 <거내영>의 완전체가
되신것 같아서 더더욱 감사드려집니다.
사랑하고 감사하고 장하시고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아빠아버지,
거룩한 증언을 통하여
더더더
아버지께 찬미영광 올려드립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이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