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역사테마공원과 성주이씨 유래(由來) 안천추천 3조회 7121.09.11 07:55댓글 3
실록각 입구
정치의 잘잘못과 왕의 선악 및 신하들의 간위(奸僞) 등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므로 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편찬은 관장사초(館臧史草)와 가장사초(家藏史草)등 시정기(時政記)를 모아 초초(初草), 중초(中草), 정초(正草), 세 단계를 거쳐서 완성하였다. 필사본, 인본(印本). 정족산본과 태백산본 등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실록각 건물
조선왕조실록 중 태백산본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을 제외한 실록이 소실되자 1606년(선조 39)에 설치한 외사고본(外史庫本) 848책으로 현재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정보센터에 보관되어있다. 참고로 시정기(時政記)란 조선시대 춘추관(春秋館)에서 관장하여 당대 정무 행정의 실상과 잘잘못을 기록한 1차적 역사 기록물로, 실록을 편찬할 때 가장 기본적인 자료가 되었다. 또한 사초(史草)란 넓게는 실록 편찬의 모든 자료를 의미하지만, 사관(史官)들이 기록한 1차 자료를 사초라 하며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관장사초(館臧史草)와 가장사초(家藏史草)가 있었다. 사관은 보고 들은 바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이를 직필(直筆)이라 하였으며, 사관의 직필은 국왕이나 고위 관원이라 할지라도 침범할 수 없도록 법령(法令)과 제도로 보장되었다.
관천대(觀天臺)
관천대(觀天臺)는 왕립 천문관측시설로 일명 간의대(簡儀臺)라고도 한다. 1432년(세종 14)에서 1434년 사이에 간의 등 천문기구를 만들었는데, 그 중 관천대(觀天臺)는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높이 31자, 너비 32자, 길이 47자의 규모로 쌓아 만들었는데 이를 본보기로 읍성 제일 높은 곳인 봉두산위에 설치하였다. 오른쪽은 읍성이 끝나는 지점이고, 왼쪽은 임정사 쪽이다
임정사 앞 봉두산(鳳頭山) 산왕대신상(山王大神像) 바위솔
이제 막 꽃을 피우는 꽃무릇
봉두산 임정사(林淨寺)
임정사 입구
가을을 알리는 석류
성주이씨 시비공원과 봉산재 전경
이 봉산재는 성주이씨 중시조인 농서군공(隴西郡公) 이장경(李長庚)이 살았던 옛 집터이다.
성주이씨 유래비와 투금탄 이야기 비
성주 이씨(星州 李氏)의 시조인 이순유(李純由)는 신라 문성왕조(840~856)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始祖) 이알평(李謁平)의 32대손(代孫)으로 경순왕조(敬順王朝ㆍ927~935년)에는 재상(宰相)까지 올랐다. 이순유는 아우 이돈유(李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의 사직(社稷)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쳐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京山里)인 이곳으로 옮겨와 숨어 살았다고 한다.
봉산재(鳳山齋) 입구
이순유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은 고려 고종때의 인물로 슬하에 다섯 아들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치자 국왕은 그에게 특별히 삼중대광(三重大匡) 좌시중(左侍中)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 상호군(上護軍)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충령왕 이후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을 따라 성주 이씨(星州李氏)라고 하게 되었다.
봉산재 전경
한편, 이장경의 손(孫) 이천년(李千年)의 둘째 아들 이승경(李承慶)은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며 공적을 세우자 원나라 황제가 그의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하였으므로 농서이씨 라고도 하였다.
사당인 상덕재 오르는 계단
명나라 때의 장수로 임진왜란 때 조선에 들어온 이여송이 그의 후손이었다. 이장경으로부터 후손들이 명문 세도 가문으로 거듭나므로 성주이씨는 이장경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후대 8세(世) 이내에 문형(文衡)이 18명, 봉작을 받은 이가 11명, 상신이 15명, 또 식읍을 받은 이가 5명, 부마가 2명, 문과 급제자가 75명이나 나왔다.
사당인 상덕사 출입문
상덕사(尙德祠)
농서군공 이장경의 묘소는 처음에는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禪石山)에 안장되었다가, 나중에 나라에서 길지를 찾아 이곳에 세종 왕자들의 태를 안치한 태봉이 되면서 세종대왕의 특명으로 이장을 명하여, 1443년 대가면 옥화리 중리마을 능골 오현으로 옮겼으며 여기에는 유품전시관과 재실인 영모재와 오현재가 있다. 한편 이장경의 신도비는 벽진면 자산리에 있다.
재실앞에 있는 성주이씨 시비공원의 이직 시비
영의정 형재 이직 시(領議政 亨齋 李稷 詩)
오로시(烏鷺詩)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이는 너 뿐인가 하노라
이직(李稷,1362~1431) 조선전기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우정(虞庭), 호는 형재(亨齋)이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1377년(우왕 3) 16세로 문과에 급제해 경순부주부, 밀직사우부대언, 예문제학등을 지냈다. 1392년에 이성계(李成桂) 추대에 참여해 지신사(知申事)로서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황희(黃喜)와 함께 충녕대군(忠寧大君: 뒤의 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 성주에 안치되었다가 1422년(세종 4) 풀려 나와 1424년 영의정에 오르고, 이 해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6년 좌의정으로 전직했다가 이듬해 사직하였으며, 저서로는 "형재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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