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잃은 아비의 애절한 고통과 절망을 승화시킨 애도시(哀悼詩),
회한(悔恨)과 상실(喪失)
*고영화 2023.08.07. <재경거제시향인회>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3편의 애도시(哀悼詩)는 죽은 딸에 대해 느끼는 아비의 슬픔과 인생무상을 그려낸 작품들이다. 아비에게 딸아이란? “생애 동안 영원히 짝사랑해야 할 운명의 여인”이다.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딸아이를 애도하다(悼小女)>와 조선전기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추도소녀(追悼小女)> 그리고 조선 초기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 1439~1504)의 <딸의 죽음을 슬퍼하다(悼女)>는 모두 딸을 잃은 아비의 심정을 읊은 애도시(哀悼詩)로, 애절(哀絶)한 고통과 단장의 아픔(斷腸之哀)을 구구절절 그려내었다.
특히 먼저 보낸 딸에 대한 아빠의 회한과 반성을 담은 시를 읽다보면 가슴을 찌르는 듯 아프게 내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아빠로 살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애교와 순박한 아양을 오직 딸 외에는 느껴보지도 받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와이프나 아들에게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딸아이만이 가진 천사 같은 본성이다.
애지중지(愛之重之),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키운 딸이자, “생애동안 영원히 짝사랑해야 할 운명의 그 여인, 그 숭고한 사랑, 그리워하는 정(情)“이야말로 이 세상 어느 것보다 가장 지극한 정성일 것이다. 그래서 딸을 잃은 상실감은 더욱더 애절하다.
그런고로 딸을 잃은 고통은 아비가 눈을 감아야 끝날 것 같다. 딸을 잃은 아픔을 가슴에 새기고 사는 아비, 이별의 슬픔과 상실의 아픔이 큰, 자식의 죽음 앞에 마주한 아비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 감히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상상도 안 간다.
◉ 옛날 왕조 봉건시대에는 자식을 생기는 대로 낳았다. 보통 할머니 한분이 10명 이상은 낳았지만 약30% 정도는 유아기 때 사망했다. 우리 할머니도 11명을 낳았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아이는 8명이었다. 각종 질병과 감염, 굶주림, 전염병, 오염된 음식섭취와 여러 보건의료의 취약성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여러 악조건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서 현대보다 훨씬 더 자식 잃은 아픔을 표현한 기록물(문학작품)이 많이 전해옴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 옛날에는 아이가 죽으면 집안의 남성이 시신을 낡은 옷이나 천으로 둘둘 싸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산에 묻었다. 애장터·애촉·애처구덩이·아장단지·애기장 등 이름은 지역별로 달랐지만, 1970년대까지는 마을마다 죽은 아이를 묻는 특별한 장소가 있었다.
예전 내 고향 마을에도 아동 사망이 워낙 흔한 일이라 그저 일상사 같았다. 생각해보니 나의 고향 마을의 공동묘지 약 150m 아래에, 바위와 돌덩이가 많은 야산을 동네 사람들이 ‘애기장’이라 불렀다. 아이가 죽으면 아이가 들어갈 수 있는 옹기 단지에 시신을 넣은 후, 뚜껑을 덮고 바위 틈 사이에다 고정시키고 큰 돌 여러 개를 단지 위에 얹어 놓는 것이 장례절차의 전부였다.
어릴 때 거기에 가보니 깨어진 그릇 파편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가끔씩은 아이 뼈가 보이기도 했다. 어른들이 말하길, “여우나 늑대들이 장례날 밤에 곧장 와서 아이 시신만 빼내어 물고 간다.”고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기억건대 예전에는 아이의 무덤을 다시 찾는 이가 없었다. 그런고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아이의 죽음은 정말로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 인간 세상에는 정말 많은 고통과 슬픔이 있다. 병으로 인한 아픔, 이별로 인한 슬픔, 직장을 잃고 사지로 내몰린 고통 등이다. 특히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슬픔과 고통은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을 만큼 아프다. 그래서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힘들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다만 가슴으로 묻는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 그런데 부모가 자식을 잃었을 때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소설가 박완서는 남편보다 아들 잃은 아픔이 훨씬 더 컸다고 했다. 그래서 ‘오직 자식의 죽음만이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다.’고 말했다.
옛말에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서하지통(西河之痛)’이라 하는데 서하(西河)에서의 아픔이라는 말로,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가 서하(西河)에 있을 때 자식을 잃고, 너무 슬피 운 나머지 소경이 된 옛일에서 온 말이다. 이 일을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말에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머리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애절(哀絶)한 고통이라거나, 단장의 아픔(斷腸之哀)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래서 그런지 <세설신어(世說新語)> 출면(黜免) 편에 ‘단장지애(斷腸之哀)’의 고사가 나온다. 촉나라의 마지막 숨통을 죄이고자 진나라 장수 환온(桓溫)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을 때, 병사 중 하나가 강변에서 놀고 있던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납치하여 배에 데리고 왔다. 그 새끼원숭이 어미는 군사를 태운 함선을 100여 리를 쫓아오다 폭이 좁은 협곡에서 새끼를 태운 배를 향해 몸을 날렸는데, 배에 이르기도 전에 그만 죽고 말았다. 한 병사가 그 어미의 배를 갈라보았더니 어미의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환온은 새끼를 납치한 병사를 매질하고 대열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이에 자식을 잃은 슬픔을 마치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斷腸之哀)’으로 비유되고 있다.
◉ “예로부터 운명은 하늘에서 타고난다지만, 가련타! 창자가 끊어질듯, 끝없는 통곡 속에 흐르는 눈물, 참혹한 일을 당해, 갑자기 죽을 줄 어이 기약했으리요. 통곡 속에 붉은 만장 멀리 떠나고 이제는 돌아가 구천(九泉)에 누웠구나. 어쩜 그리 운명이 기구한가? 구슬픈 나의 심장이여~ 아, 석양을 마주하고, 멈춰 선 구름 속에 빨려드는 나의 눈물이여~”
● 다음 고율시(古律詩) <딸아이를 애도하다(悼小女)>는 고려시대 대문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애도시(哀悼詩)로, 일찍 죽은 딸에 대해 느끼는 부모의 슬픔과 인생무상을 읊었다. 죽은 딸아이에 대한 회상을 지난 추억을 통해 순차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녀에게 쏟은 화자의 애정의 깊이를 알게 해 준다.
‘눈송이 같은 얼굴로 총명했던 딸은 2살 때 앵무새처럼 말을 했고 3살 때 벌써 수줍음을 알았다. 올해 4살 때에는 제법 바느질도 익혔다. 그런데 얼마 전 갑작스럽게 참변을 당해 죽었다. 마치 볼품없고 옹졸한 비둘기 둥지에서 새끼가 땅에 떨어진 것 같아 스스로 자책하게 만든다. 아내의 울음은 그치질 않는다. 밭에 작물이 자랄 때 바람과 우박이 몰아치면 결단이 나듯이, 조물주가 어찌 세상에 내어놓고 갑자기 빼앗아가누. 영화와 쇠함이 덧없고 태어남과 죽음이 속임수 같다. 세상에 오고 감이 모두 허깨비 같으니 이제는 영원한 이별인지라, 인생의 허무감을 느끼게 만든다.’
1) 딸아이를 애도하다[悼小女] / 이규보(李奎報 1168~1241)
小女面如雪(소녀면여설) 딸아이의 얼굴 눈송이와 같고
聦慧難具說(총혜난구설) 총명함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네.
二齡已能言(이령이능언) 두 살에 벌써 말을 할 줄 알아
圓於鸚鵡舌(원어앵무설) 앵무새처럼 종알거렸고
三歲似恥人(삼세사치인) 세 살에 수줍음을 알아
遊不越門闑(유불월문얼) 문 밖에 나가 놀지 않았으며
今年方四齡(금년방사령) 올해 막 네 살이 되어
頗能學組綴(파능학조철) 제법 바느질도 배웠지.
胡爲遭奪歸(호위조탈귀) 어쩌다 이런 참변을 만났는지
倏若駭電滅(숙약해전멸) 너무나 갑작스러워 꿈만 같구나.
春雛墮未成(춘추타미성) 마치 새새끼를 땅에 떨어뜨린 것 같으니
始覺鳩巢拙(시각구조솔) 비둘기의 둥우리 옹졸함을 알겠네.
學道我稍寬(학도아초관) 도를 배운 나는 그런대로 참겠지만
婦哭何時輟(부곡하시철) 아내의 울음이야 언제 그치려나.
吾觀野田中(오관야전중) 내가 보니 저 밭에
有穀苗初茁(유곡묘초출) 작물이 막 자랄 때
風雹或不時(풍박혹불시) 바람이나 우박이 불시에 덮치면
撲地皆摧沒(박지개최몰) 여지없이 모두 결단이 나더군.
造物旣生之(조물개생지) 조물주가 이미 내어놓고
造物又暴奪(조물차폭탈) 조물주가 다시 갑자기 빼앗아가니
枯榮本何常(고영본하상) 영화와 쇠함이 어찌 그리 덧없는가.
變化還似譎(변화환사휼) 태어남과 죽음이 속임수만 같구나.
去來皆幻爾(거래개환이) 오고 감이 모두 허깨비이니
已矣從此訣(이의종차결) 이제는 끝일세. 영원한 이별이네.
● 다음 ‘支’ 운(韻)의 칠언율시 <추도소녀(追悼小女)>는 조선전기 대표적 관각문인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추도시(追悼詩)이다.
‘오늘은 지난해 죽었던 딸아이의 기일이다. 나의 옷깃을 당기며 밤, 대추 따 달라고 조르던 네 모습이 생각나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린다.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아 주듯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나무속의 구슬 찾은 양호(羊祜)처럼 죽은 아이가 환생(還生)하기를 바란다. 지금도 나 홀로 가슴에 새겨 아파하다보니 나이 사십에 이르도록 다른 아이가 없다’고 한탄한다.
2) 추도소녀[追悼小女] 죽은 딸을 추도하며 / 서거정(徐居正 1420~1488)
去年此日汝猶在 지난해 오늘에는 네가 아직 있었는데
今歲茫茫何所之 올해엔 아득히 그 어디로 갔단 말이냐
那復牽衣求棗栗 어이 다시 옷깃 당겨 밤 대추 달라 하지 않느냐?
不堪流涕憶容姿 네 모습 생각나서 눈물 감당치 못하겠네.
世間䑛犢誰無性 세간에 누군들 송아지 핥는 심성이 없으랴
樹裏探環謾有期 나무속의 구슬 찾을 기약만 있을 뿐이란다.
我自悲傷人不識 나 홀로 가슴 아파할 뿐 남은 알지 못하니
如今四十更無兒 내 나이 사십에 지금까지 아이가 없는 걸.
[註 1] 세간(世間)에 누군들 없으랴 : 삼국(三國)시대 위(魏)나라의 양수(楊修)가 일찍이 조조(曹操)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뒤에 조조가 양수의 아비인 양표(楊彪)에게 왜 그토록 야위었느냐고 묻자, 양표가 대답하기를, “김일제와 같은 선견지명이 없었음은 부끄러우나, 그래도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아 주는 애정만은 아직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愧無日磾先見之明 猶懷老牛舐犢之愛)”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자식을 몹시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의미한다.
김일제는 한 무제 때의 명신인데, 무제가 일찍이 김일제의 두 아들을 매우 사랑하여 농아(弄兒)로 삼았던 관계로, 뒤에 농아가 장대해져서도 버릇이 없어 전(殿) 아래에서 궁인과 장난하자, 김일제가 마침 그 광경을 보고는 그 음란함을 미워하여 마침내 농아를 죽여 버렸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註 2] 나무속의 구슬 찾을 기약만 있을 뿐이란다 : 진(晉)나라의 명장(名將) 양호(羊祜)가 5세 적에 한번은 자기 유모로 하여금 자기가 가지고 놀던 금가락지를 가져오라고 하자, 유모가 말하기를, “너한테는 일찍이 금가락지가 없었단다.”라고 하니, 양호가 즉시 이웃의 이씨(李氏) 집으로 가서 동쪽 담장 곁의 뽕나무 속에서 금가락지를 찾아내자, 그 주인이 놀라며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죽은 아이가 잃어버린 물건인데, 왜 가져가느냐?”라고 하므로, 유모가 그 사실을 자세히 말하자, 이씨는 매우 슬퍼하였고, 당시 사람들은 그 일을 이상히 여겨 이씨의 아들이 바로 양호의 전신(前身)이었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죽은 아이가 환생(還生)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
● 다음 ‘支’ 운(韻)의 칠언율시 <딸의 죽음을 슬퍼하다(悼女)>는 조선 초기 학자이자 대표적인 문학가였던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 1439~1504)의 애도시(哀悼詩)이다. 딸아이를 낳다가 아내가 죽고 얼마 후에 딸아이마저 뒤따라가니 그 슬픔을 이루 감당할 수 없어, 저자는 딸아이에 대한 슬픔을 애도시(哀悼詩)로 남겼다.
‘딸을 낳으면 누가 가문을 일으킬 수 있다 했더냐? 문미(門楣)가 되기 전에 이미 어긋나 버렸네. 애미가 먼저 딸아이 낳고 죽어버려 아비는 부질없이 슬퍼했다. 이후 여러 날 동안 갓난아이가 젖 달라고 밤마다 울어 대니 여종이 옷깃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결국 딸아이도 죽고 말았다. 자식 잃은 슬픔을 어이 견디랴.’
3) 딸의 죽음을 슬퍼하다[悼女] / 성현(成俔 1439~1504)
誰言生女作門楣 딸 낳으면 문미 된다 누가 말을 하였던가
未作門楣勢已虧 문미가 되기 전에 형세 이미 어긋났네.
白首老翁空自悼 백발의 늙은 애비 부질없이 슬퍼하고
靑春年少竟終睽 청춘의 젊은 부부는 끝내 사별하였어라
襁兒索乳連宵哭 갓난아이 젖 달라고 밤마다 울어 대니
堂婢收衣攬涕垂 여종이 옷깃으로 눈물을 훔쳤다네.
可惜珠沈兼玉碎 애석하게 옥 깨지고 구슬 물에 잠겼으니
難堪老境喪明悲 노년에 실명하는 슬픔 어찌 감당할꼬.
[註 1] 딸아이 문미 된다(女作門楣) : 딸을 낳으면 가문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이다. 문미(門楣)는 본래 문 위에 가로댄 나무인데, 양 귀비(楊貴妃)가 한미한 집안의 딸로 현종(玄宗)의 총애를 입어 가문을 크게 일으킨 것을 본 당시 사람들이 너도나도 딸을 낳으려 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당나라 진홍(陳鴻)의 〈장한가전(長恨歌傳)〉에, 사람들이 “딸 낳았다 슬퍼 말고 득남했다 기뻐 말라.(生女勿悲酸 生男勿喜歡)”라고 하고, “그대 딸이 문미 되는 날을 보게 될 것이니.(看女却爲門上楣)”라고 노래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註 2] 옥 깨지고 구슬 물에 잠겼으니(珠沈兼玉碎) : 여자의 죽음을 비유하는 말로, 여기서는 딸의 죽음을 의미한다.
[註 3] 실명하는 슬픔(喪明悲) : 자식을 잃은 슬픔이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실명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상명지통(喪明之痛)은 눈이 멀 정도(程度)로 슬프다는 뜻으로, 아들을 잃은 슬픔을 비유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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