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D7Z8BbhBLG0?si=5b0Tg2_JLZFVkEAK
2.28
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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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n1smxVrq40g?si=s5F7uLAiWwZrCYjo
두류공원 인물동산(두류동 585-12)
두류공원 중 일부는 ‘인물 동산’이라는 색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 인물동산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 것은 이상화 시인, 우재룡 지사, 조기홍 지사, 백기만 시인, 박희광 지사, 현진건 소설가, 최양해 시인 등의 인물상, 공적비, 시비 등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박희광朴喜光(1901∼1970) 지사는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결심으로 12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 단원이 되었다. 1924년 의열단 단원들과 함께 친일파 단체 보민회 회장 최창규를 암살하기 위해 그의 집을 습격, 최창규는 피신하고 없었지만 장모와 사위 박원식을 처단했다. 지사는 그 후에도 독립군 군자금 모금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끝내 일경에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18년 동안 투옥되었다. 1943년 출옥한 그의 공훈을 기려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최양해崔穰海(1897∼1978) 시인은 23세이던 1919년에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아 줄곧 피신하던 중 1940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일로 결국 경주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많은 한시 작품과 고전 번역서적를 남겼다.
현진건玄鎭建(1900∼1943)은 ‘술 권하는 사회’, ‘빈처’, ‘운수 좋은 날’ 등의 주옥같은 단편소설을 남긴 소설가이다. 계산동2가 169의 생가는 멸실되고 없지만, 인물동산에는 그의 단편소설 ‘고향’의 한 부분을 돌에 새긴 작품비가 세워져 있다.
소설가로서의 지명도 외에 현진건을 기억나게 하는 유명한 사건이 한 가지 있다. 흔히 ‘일장기 말소 사건’이라 부르는 1936년의 일이다.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마라톤 종목의 우승을 차지했다.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어 있는 일장기를 없애버린 사진을 8월 25일자 신문에 실었다.
중구 달구벌대로 2178 사대부고, 다혁당 투쟁지
대구사범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대구사범학교는 19 29년에 개교했다. 대구사범학교는 개교 초기부터 상당수 학생들이 짙은 민족의식을 가지고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학교 학생들은 ‘역사와 조선어 강의를 담당했던 김영기 교사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사회주의 사상을 지녔던 현준혁 교사의 영향으로 항일 조직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1기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서 모임인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 1929년부터 1934년까지 활동했다. 하지만 단순한 독서회가 아니었다. 비밀 결사였다. ‘민족 해방과 우리나라의 독립’을 목표로 단체를 세웠고,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준비’하려고 계획하였다. 사회과학연구회는 ‘대구사범 심상과 민족운동의 시초’로서 ‘그 이후의 다혁당과 조선어연구회로 끝맺는 큰 뿌리’(미주1)였다.
사회과학연구회의 조직과 활동 이외에도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항일 운동에 열성을 다했다. 개교 이듬해인 1930년 3월 31일에는 항일 비밀 결사 ‘주먹대’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32년 1월 26일에는 현준혁 교사가 학생들에게 항일 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주의 사상을 고취한 일이 드러나 37명이 검거되었다.
1939년 7월에는 왜관 철도 보수 공사에 200여 명 동원되었던 4∼5학년 심상과 학생들이 의거를 일으켰다. 이때 연습과 학생 200여 명도 함께 출동했다. 연습과는 중학교 5학년 졸업 후 입학하는 1종 훈도(교사) 양성 제도로 대부분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미주2)
7월 26일 밤에 ‘왜관 학생 항일 의거’(미주3)가 일어났다. 며칠 전 양국 학생들 사이에 시비가 빚어졌을 때 일본인 교유(교사)들이 불공평하게 처리한 적이 있었다. 심상과 5학년(7기생)들은 일본인 교유들 중 가장 악질적인 세 사람을 힘으로 규탄할 것을 결의했다.
학생들은 밤 10시 30분쯤 강본岡本 교유와 좌구간佐久間 교유를 모기장으로 덮어씌워놓고 집단 구타했다. 구타 대상으로 지목했던 셋 중 전원前園 교유는 도망을 치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이 일로 조선인 학생 고승석, 김재수, 김중정, 김희원, 박영섭, 정기현, 정인용 7명이 퇴학당하고, 그 외에 11명이 정학 처분을 받았다. 나머지 학생들은 근신 처분을 받았다.
일제는 사건이 알려질까 봐 ‘쉬쉬’하였다. 그 결과 대구사범 학생들 중에도 사건이 일어난 줄 모르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4∼5학년에 이어 1∼3학년들이 같은 왜관 소학교(초등학교)에 근로 봉사대로 차출되어 오면서 소문은 번졌고, 민족적 의분이 일어났다.
8월 16일 밤, 권쾌복權快福, 배학보裵鶴甫(신암선열공원 안장), 최태석崔泰碩(신암선열공원 안장), 김성권金聖權, 조강제趙崗濟, 최영백崔榮百, 문덕길文德吉 등 20여 명이 왜관 소학교 앞 낙동강 백사장에 모였다.
이들은 7기 선배들의 일본인 악질 교사 구타와 그 후 퇴학 등 처분을 받은 일의 진상을 알아볼 것과, 향후 대책을 강구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 자리에서 9기(3학년) 학생들은 ‘백의단白衣團’이라는 이름의 비밀 결사체를 조직했다. 이들은 ‘비밀을 엄수한다. 명령에 복종한다. 자기 책임을 끝까지 완수한다. 친목과 단결을 도모한다.’ 등 백의단의 강령을 채택하고 다음날 새벽 4시쯤 해산했다.
백의단은 1년 6개월 동안 활동을 이어오다가 ‘다혁당’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다혁당 출범에는 이미 결성되어 활동해온 ‘문예부’와 ‘연구회’가 큰 힘이 되었다.
문예부는 이전부터 우리나라 역사와 문학 작품 등을 윤독하는 모임을 유지해오던 학생들이 결성했다. 1940년 11월 23일 봉산정 127번지 이태길李泰吉의 하숙방에 모인 5학년 박효준朴孝濬, 이태길, 박찬웅朴贊雄, 강두안姜斗安, 4학년 류흥수柳興洙, 이동우李東雨, 문홍의文洪義, 3학년 김근배金根培 등 8명이 창립 총회를 가졌다. 이후 4학년 박호준朴祜雋, 이주호李柱鎬, 조강제도 가입했다.
기관지 《학생》까지 발간하며 활동하던 문예부는 1941년 2월 중순 5학년(8기생)의 졸업을 앞두고 향후 활동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졸업생들은 소학교 교사로 부임하는 즉시 활동을 개시하여 아동과 학부모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활동 상황을 매월 1회 박효준 동지에게 보고하며, 각자의 작품도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9기생들은 조직을 계승,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그 무렵 8기생 사이에는 문예부보다 두 달 뒤인 1941년 1월 23일 동인동 소재 이무영李茂榮의 하숙집에 모인 임병찬林炳讚, 장세파張世播, 안진강安津江, 김영복金榮宓, 최낙철崔洛哲, 윤덕섭尹德燮, 이태길, 강두안 등 9명이 창립하고, 며칠 뒤 오용수吳龍洙, 이원호李元浩, 윤영석尹永碩, 박제민朴濟民, 양명복梁命福 등이 가입한 ‘연구회’도 활동하고 있었다(이태길과 강두안은 이때 문예부에도 가입해 있었다).
연구회는 동인동 251번지 박제민의 하숙방이나 대구 근교 솔밭에 모여 여섯 차례 발표회도 가졌지만 이내 졸업을 맞았다. 회원들은 경북 의성 안평 소학교(장세파), 충북 황간 남성 소학교(오용수), 강원도 영월금 소학교(이태길), 함경북도 나진 약초 소학교(최낙철) 등에 배치 받아 학부모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 함양에 몰두하다가 그해 7∼8월에 모두 구속되었다.
졸업을 앞둔 연구회 회원들은 학교를 떠나기 전에 후배인 9기생 류흥수(문예부 회원)에게 연구회의 계승을 부탁했다. 류흥수는 1941년 2월 10일 같은 학년 문예부 회원들인 이동우와 박호준의 남산정 681의 12번지 하숙방에서 문홍의, 이주호, 조강제 등과 모여 이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1941년 2월 15일 오후 7시쯤 류흥수와 이주호의 봉산정 242번지 하숙방에 류흥수, 이주호, 권쾌복, 배학보, 최영백, 김효식金孝植, 김성권, 이도혁李道赫, 문홍의, 최태석, 이종악李鍾岳, 서진구徐鎭九, 문덕길, 이홍빈李洪彬, 박호준 등이 모였다. 대부분 백의단과 문예부의 회원이었던 이들은 이날 백의단, 문예부, 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되 그 활동과 전통을 이어받는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했다. 다혁당이라는 이름은 이홍빈이 제안했는데 ‘茶’는 영웅은 다색茶色을 좋아한다, ‘革’은 혁명革命을 일으킨다는 뜻을 담았다. 당수와 부당수는 백의단의 당수 권쾌복과 부당수 배학보가 그대로 유임했다.
다혁당은 독서 모임을 내부 활동으로 전개했다. 이는 백의단 때부터 해오던 일로 문예부장 이동우가 실무를 맡아 이끌었다. 회비를 모아 우리글로 된 역사 문화 서적을 구입하여 읽었는데 봉산정 108의 1번지 배학보의 집에 두었다가 뒷날 대전 검찰청에 모두 압수되어 소각되었다. 당시 쓴 감상문들도 함께 불에 태워져 없어졌다.
다혁당은 공휴일과 일요일에 앞산 정상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방학이면 고향으로 돌아가 야학을 열었다. 일제는 1939년부터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야학을 금지했다. 다혁당은 일본인이 다니는 대구중학 학생들이나 대구사범학교 연습과 학생들이 조선인 학생을 괴롭히면 ‘구타를 가하고’ ‘교내 박물 교실 뒤편 플라타너스 숲으로 불러 철퇴를 가하며 꼼짝 못하게 하였다.’(미주4)
1941년 8월 전국 각지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대구사범학교 8기 다혁당 당원들이 일제히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다혁당이 발간하던 기관지 《반딧불》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면서 활동 전모와 조직이 드러난 때문이었다. 교사들만이 아니라 재학 중이던 5학년 9기, 4학년 10기 당원들도 체포되기 시작했다. 이때 일제는 김영기 교사도 구속했고, 해외에 유학 중이던 당원까지 잡아왔다. 일제 경찰은 다혁당 당원 교사들과 친하게 지냈던 학부모들도 주목하여 전국적으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을 구속했다.
체포된 다혁당 당원들은 충청남도 경찰국 고등계에서 조사를 받았고, 1941년 12월 7∼8일 김영기 교사를 포함해 35인이 대전 형무소에 수감됐다. 지사들이 충청도로 잡혀가 조사를 받고 대전 형무소에 투옥된 것은 기관지 《반딧불》이 처음 일제 경찰에 들어간 곳이 충청남도 홍성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수감자들은 5∼8년의 실형을 구형받았고, 최종적으로 2년6개월∼5년을 언도받았다. 그 중 서진구, 박제민, 강두안, 박찬웅, 장세파 다섯 당원은 끝내 옥사하였고, 12명은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 이후 순국하였다. 다섯 분 옥사자 외 29명의 당원 명단은, 앞에서 모두 거명된 분들이지만 다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5∼7년 언도 박효준(문예부 책임자), 5년 류흥수, 문홍의, 이동우, 임병찬, 3년 6개월 권쾌복, 3년 김근배, 박호준, 2년 6개월 김성권, 김영복, 김효식, 문덕길, 배학보, 안진강, 양명복, 오용수, 윤덕섭, 윤영석, 이도혁, 이무영, 이원호, 이종악, 이주호, 이태길, 이홍빈, 조강제, 최낙철, 최영백, 최태석
당시 문예부 회원과 다혁당 당원으로 활동했던 이주호는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동지회가 1993년에 펴낸 《대구사범 학생 독립운동》에 게재한 〈3개 결사의 상호 관계와 그 학생 독립운동사적 의의〉에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이 운동의 한국 학생 항일운동사적 의의’를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이주호의 정리를 통해 대구사범학교 학생 항일 의거의 의의를 짚어본다.
첫째, 뿌리 깊은 전통 속에서 양성된 전통성과 맥락을 이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학생 운동이다. ‘권(주먹)대 사건’, ‘사회과학연구회’의 민족혼을 이어받아 기별마다 독서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해 왔으며, 7기생의 왜관 봉기가 기폭제가 되어 8, 9, 10, 11기생의 문예부, 연구회, 다혁당, 조선어연구회의 결사로 그 전통을 맥맥히 이었다. -전통성을 지닌 학생운동
둘째, 우연적, 일시적, 돌발적인 일과성을 띤 저항 운동과는 달리 의도적이며 계획적이고 조직적이며 체계적인 민족운동이었다. -조직성과 체계성을 갖춘 학생 운동
셋째, 독립운동가인 김영기 선생의 지도 원칙 아래 사제일체감으로 이루어진 학생운동인 만큼 치밀한 계획과 활력성을 띠었다. -사제일체가 되어 일으킨 사제동행의 학생운동
넷째, 재학생으로서의 학생운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재학생의 학생운동과 발맞추어 졸업생으로서의 사회 ‧ 민중운동으로 폭넓게 병행한 운동으로 확산해 나갔다. -학생운동과 사회 ‧ 민중운동을 병행한 2인3각식의 2원적인 학생운동
다섯째, 교육문화 활동을 통한 계몽운동으로 민족의식 고취를 효율적으로 폭넓게 확산할 수 있었다. -문화적 ‧ 교화적 계몽운동으로서의 학생운동
여섯째, 형사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2년 4개월이란 장기 예심 독방에서 장독과 영양실조로 35명 중 5명이 옥사했음에도 불구하고 2년 6개월∼5년 실형을 복역했고, 빈사 상태로 출옥한 후에도 독립의 굳은 신념으로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아 ’조선 사상범 보호관찰령‘에 의해 가택 구금, 군수 공장 등에서 노역에 시달리면서도 한 사람의 전향자도 없었다. -지속적이며 일관된 학생운동
미주는 모두 《대구사범 학생 독립운동》(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동지회, 1993)에 나오는 내용임
이 일로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당했다가 약 9개월 뒤인 1937년 6월 3일자로 속간되었다. 또 현진건 사회부 부장, 이길용 기자, 장용서 기자, 조사부의 이상범 화백, 사진부의 신낙균, 백운선, 서영호 기자, 자매지인 월간 신동아의 최승만 잡지부장 등 8명이 구속되었다. 구속자들은 일본 경찰에 끌려가 40여 일 동안 고초를 겪었다. 이들은 향후 언론 기관에 종사하지 않을 것, 다른 사건에 연루되면 가중 처벌을 받을 것 등을 서약하고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