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위한 역사 기행
금년 여름방학 때 나는 우리 학교 동료 선생님의 시골 농가를 빌어 그곳에 가 독서하고 글을 쓰며 보냈다. 나 혼자 즐기는 것 같아 식구들에게 적이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마침 경기도중등국어연구회(이하, ‘국어연구회’)에서 주최하는 ‘삼국유사 문학기행’ 재 답사를 계획하고 있던 터여서 겸사겸사해서 식구들과 아랫녘을 다녀오리라 생각했다.
금년에 대학에 들어간 딸은 안성의 기숙사에서 올라와 방학 내내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방학 전에는 같은 과의 나이 많은 언니와 부산 여행을 하겠다고 해서 잘 됐다 싶었는데 도중에 무슨 영문인지 취소되어 집 밖을 잘 나다니지 않는 것이었다.
대학 시절 내내 수많은 곳을 찾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혀 왔던 나는 일찍이 여행의 힘을 알고 있었기에 지금처럼 시간 여유 있을 때 아무데라도 나다니라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방학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나라도 데리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8월 9일부터 1박2일간 실시한 국어연구회의 하계 세미나 행사차 성남 본가에 갔다가 하루 쉬고, 다음날부터 아내와 함께 세 식구가 3박4일간의 여정 길에 올랐다. 스물 여섯 난 아들은 직장 일 관계로 동행하지 못했다.
2014년 8월 12일 오전, 첫 목적지인 충주 탄금대로 향했다. 먼 여행길에 어울릴 것 같았던 나의 RV 차량은 어떤 길이든 안정감이 있었고, 우리 세 식구가 이동하는 데 불편함이 없어 좋았다.
탄금대에 도착하자마자 주차장 근처의 숲속에 앉아 집에서 준비해 온 점심을 먹었다. 전날 저녁 때 딸이 밥을 너무 많이 지어 놓아서 아내는 남은 밥을 버리지 않으려고 감자채에 버무려 볶아 쉬지 않게 했다가 가져온 것이다. 한적한 잔디 밭 위에서, 공기가 맑아서인지 밥이 꼴딱꼴딱 잘 넘어갔다.
하늘을 가득 메운 나무들이 몸을 비틀며 공중으로 계속해서 치뻗어 오르고 있었다. 햇살 속으로 조금이라도 더 높이 고개를 디밀어 제 몸 성장시키는 데 모든 집중력을 쏟고 있었다. 볕이 들지 않는 그늘 밑으로는 보잘것없는 식물만 바닥을 기어 다닐 뿐 제대로 생겨먹은 수목이라곤 거의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길게 이어진 보도를 따라 대문산을 한 바퀴 돌았다. 악성 우륵 선생 추모비, 탄금대비, 충혼탑, 팔천고혼위령탑, 감자꽃 노래비, 조웅 장군 기적비가 차례대로 나타났다.
길을 살짝 내려갔다가 계단을 타고 오르자 갑자기 나타난 널따란 강 풍경이 우리를 압도했다. 남한강 상류와 달천(達川) 합수머리에 위치하여 경관이 뛰어나다는 곳이었다.
열두대에 세워진 ‘신립 장군 순절비’가 강 아래를 굽어보며 애처로이 앉아 있었다. 신립 장군은 임진왜란 때 8,000여 장병과 함께 북상하는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패하자 자결했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이곳에 배수진을 치고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것이다.
뒤로는 가야국에서 신라로 귀화한 악사 우륵이 가야금(琴)을 탔다(彈)는 ‘탄금정’이 있었고, 그 근처에는 삼국 시대에 축조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토성 흔적이 드문드문 있었다.
해발 108미터밖에 안 되는 이 야트막한 대문산에는 한반도 중원 역사의 숨결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순국선열의 원혼들이 우륵의 가야금 소리에 실려 남한강 주위를 맴도는 듯했다.
이어, 충민공 임경업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忠烈祠)로 이동했다. 사당은 낮은 산자락에 아담히 자리하고 있었다. 장군이 평소 썼다는 칼 추련도(秋蓮刀)와 좌에서 우로 읽도록 돼 있는 현판 글씨의 배열이 좀 특이했다.
밖으로 나와 100미터쯤 가자 단호사가 나왔다. 대웅전 불상이 금도금으로 인해 철불(鐵佛)인지 모른 채 지내오다가 1968년에야 밝혀졌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충주가 철의 산지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대웅전 앞에는 용트림하는 듯한 모습의 큰 소나무가 부처님 봉양에 관한 전설을 간직한 채 서 있었다.
대웅전 옆으로 가자 어느 아늑한 가정과 같은 풍경이 나왔다. 그네가 있었고, 유머러스한 조각상이 있었으며, 댓 평짜리 연못 주위로는 야생화가 빼곡하게 피어 있었다.
다음은 하늘재로 향했다. 하늘재는 충주와 수안보면 사이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뭘 착각한 것인지 내 거주지를 지나 산속으로 계속 꼬불꼬불 올라갔다. ‘월악산 국립공원’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월악산은 다음에 등반 일정을 제대로 준비한 후에 찾을 요량이었는데, 지금 얼떨결에 그곳에 도착하고 만 것이었다.
월악산은 산세가 완만한데다 숲이 울창하여 일견 평화롭다는 인상을 주었다. 차를 세워 놓고 외길 따라 15분쯤 가다 보니 미륵리 절터가 나타났다. 신화 속에 나오는 거대한 운석이 떨어진 듯 움푹 패인 공지에는 큰 규모의 석굴식 법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종교적 색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지명답게 이곳에 서 있노라면 서방극락정토에 온 기분이 들었다.
석굴의 목조 건축물은 원나라 침입 때 불에 타 없어졌고, 지금은 석축물만 남아 있었다.
안내판의 설명이 흥미로웠다. 석불입상은 이곳의 주존불(主尊佛)로서 석굴의 웅장함과 달리 표정이 소박하고 머리의 갓(보개)이나 엉성한 옷 주름 표현 등으로 보아 고려 시대 충청인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단다. 어수룩하면서도 잔정 많은 충청도 사람의 유전인자가 예전부터 그런 모습으로 전해져 내려왔던 것 같아 절로 웃음이 북받쳤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그러한 충청인의 기질을 빗대어 ‘핫바지’라고 표현했었다. 핫바지는 남녀노소가 체형에 관계없이 아무나 끼어 입어도 몸에 맞는 수더분한 서민용 바지이다.
바위로 된 석굴은 한국에서 석굴암과 이곳뿐이란다. 내 키보다 더 큰 웅장한 거북 조각상을 근거로 절의 원형을 찾으려 했지만 전쟁으로 불 타 없어진 흔적은 끝내 발견할 수 없었다. 고려 시대 초기에 창건됐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곳에서 하늘재는 걸어서 두 시간 거리에 있었으나, 다음 날 코스가 많이 걸어야 하므로 딸이 피곤해 할 것 같아 포기했다.
귀갓길에 수안보 온천에 들렀다. 최근에 내가 이곳 온천물로 피부 질환에 효험을 보았으므로 가족들에게도 그 효과를 보게 해 주고 싶었다. 피부가 좋지 않은 딸에게 되도록이면 온천탕 안에 오래 앉아 있으라고 했다.
지금 내가 기거하고 있는 수안보면 수회리 농가로 이동하여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오전에 대구시 달성군에 있는 비슬산을 향했다. 창녕과 맞닿아 있는 대구 끝자락이어서 거리가 좀 먼 편이었다. 국어연구회에서 지난 5월에 이미 사전답사를 다녀갔지만 꼼꼼히 챙겨보지 못한 구석이 있어서 모임 간사인 나는 불안한 마음에 다시 찾아온 것이다.
도성암(道成庵)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참선 수행 중 출입 통제’라는 나무 팻말이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럴 때에는 여자가 나서는 게 적격이었다. 아내와 딸이 절간으로 올라가 사정 이야기를 했다. 비구니 스님의 출입 승낙을 받고 나서 주지 스님의 공양(식사) 마치기를 기다렸다.
“요즘 이 근처 절들이 서로가 삼국유사와 관련돼 있다고 주장하는데, 기록적 증거는 없지만 이곳 도성암이 유력한 편입니다. 얼마 전에 불교방송에서도 그런 내용을 촬영해 갔어요. …… 국어연구회에서 시월에 문학기행 오시겠다니 환영합니다.”
34년을 이곳에서만 수도했다는 주지 스님의 말씀엔 힘이 있었다.
칡덩굴처럼 꼬불탕꼬불탕 뻗어 올라간 산길을 차로 슝 하고 날아가듯 올라갔다 왔으나 보통 사람 걸음으로는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딸은 아침에 “대구 가면 아빠가 졸업한 대구대학교는 반드시 들르겠지?” 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었다. 나는 그 말을 꼭 기억해 두었으므로 도성암 다음 코스를 원래 계획에 없던 나의 모교로 잡았다.
대구대학교는 1956년 개교한 이래 줄곧 대구시 대명동에 있었고, 나의 학창시절은 거의 다 그곳에서 보냈다. 만여 평 될까 하는 좁다란 부지에 건물들이 다닥다닥 밀집해 있었다. 군대 갔다 와서 가끔씩 경산 캠퍼스를 이용했으나 그때는 땅이 온통 흙 진창이고 도로도 제대로 나 있지 않았으므로 학교 한번 가기가 만만찮았다. 과대표가 “내일은 경산 캠퍼스에서 강의한대.” 하면 담당 교수를 향해 욕을 한 무더기씩 내뱉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푸른 잔디 위에 서 있는 초현대식 건축물들이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냈다. 160만 평의 교지(‘문천지’ 호수 50만 평 포함) 위에 펼쳐진 아득한 캠퍼스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호쾌한 기상이 몸 안으로 전해오는 것 같았다.
내가 1984년 여름학기에 졸업했으니 에누리 없이 딱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아내와 대학생 딸을 대동하고 찾아온 것이다. 나는 가슴이 터질 듯한 감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딸은 녹음으로 우거진 캠퍼스를 거닐며 연신 탄성을 질러댔다. 나도 속으로는 엄청난 발전에 적잖이 놀랐다. 한때는, 영남대학교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계 은퇴하면 총장 자리에 앉는대서 ‘왕립 대학교’로 불렸었다. 박 전 대통령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고 정권을 이어 받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번엔 대구대학교에 눈독 들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대구(大丘)라 하여 온전한 지명을 못 쓰던 교명을 대구(大邱) 대학교로 개명하면서 경산시 하양벌에 엄청난 규모의 신판 왕립 대학교 건설이 시작되었다.
나는 본관 건물에서 약간 주저했다. 3층 박물관에서 내려오니 엘리베이터 앞에 2층에 총장실이 있다는 글귀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홍덕률 총장은 인천남중학교 동기동창생으로서 나랑 각별한 사이이다. 그는 51세 때 교직원 직선제로 총장에 선출된 이래 작년에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사회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8개월간 공백기를 두었다가 지난달에야 승인 받아 정식으로 총장이 되었다. 그는 지난 재임 기간 중에 전국 대학 평가에서 행정학과 1위, 사회복지사 배출 1위, 임용고사 합격자수 2위를 했고, 교육부 지원금 1위인 560억 원으로 2위 한양대 260억 원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치적을 이룩했다.
전화 한 통이면 쪼루르 달려 나와 막걸리 한잔 할 수 있는 사이이지만, 지금은 달라진 위상과 그의 체면 때문에 꾀죄죄한 여행복 차림의 우리 식구들은 자진하여 발길을 돌렸다.
캠퍼스를 차로 한 바퀴 돌면서 나는 딸에게 설명은 피하고 가만히 감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딸은 이곳저곳을 눈여겨보며 아빠의 과거를 연상하는 듯했다. 농과 대학 근처의 한적한 길에서는 뱀이 지나가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내려 실내까지 둘러보고 학생회관으로 향했다. 광활하면서도 푸르름으로 가득한 골프 연습장을 보니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힐링 여행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커피 전문점에서 차 한잔 하고 있으려니까 대학 동창생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오전에 전화했을 때, 자기네 모임에서 합천 해인사에 가 있는 중이라고 했었다. 대학 시절에 가난했던 나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을 안겨 주었던 친구는 30년 세월이 흘렀지만 가벼운 전화 한 통화에도 만사 제쳐두고 달려오는 성의를 보였다.
시지 신도시에서 만난 후 동창생과 우리 식구들은 내 차로 서문시장 옆에 있는 계성고등학교로 갔다. 정문 들어서자마자 100년 전통의 학교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올라가는 계단 양옆으로 심겨진 나무가 얼마나 울창한지 하늘에서 희미한 빛 몇 줄기가 좁은 공간을 간신히 비집고 흘러내렸다.
본관인 핸더슨기념관은 5대 교장인 핸더슨이 1931년에 지은 건물이다. 그 양 옆으로 100년 된 건물이 여럿 있다. 시인 박목월, 소설가 김동리, 작곡가 현제명 등이 이곳 출신이다. 김재엽 선수를 비롯한 유도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세 명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국어연구회의 문학기행과 관련하여 이곳 교장 선생님과 만나기로 했다가 서로의 일정이 맞지 않아 취소한 상태였다.
계명대학교가 이곳에 있는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가 모태였다는 사실을 여기서 처음 알았다. 그동안 나는 대구의 효성여자대학(현 대구가톨릭대학)과 계명대학 이름이 모두 ‘계명성, 효성, 샛별, 금성’을 뜻하는 같은 어원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계명대 부속 동산병원을 거쳐 ‘대구 근대 문화의 거리’ 탐방에 나섰다. 아내와 딸을 감동시킬 최적의 장소에 동창생이 나서서 해설사 역할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동창생은 이곳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편이었다.
청라언덕에서 우리는 선교사의 집, ‘동무 생각’ 노래비, 제일교회, 90계단의 3․1운동 길 등을 둘러보고 계산성당으로 향했다. 100년 된 성당은 교황 방문으로 매우 들뜬 분위기였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라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동창생은 종교인이 아니었으므로 성당에 얽힌 이야기보다 이곳에서 결혼한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의 결혼식 비화 쏟아 내기에 바빴다.
대구 약령시 골목은 아직도 번창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울의 경동시장, 금산의 인삼약초시장과 더불어 국내 3대 약령 시장으로서의 명성에 걸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지은 이상화 시인과 ‘국채 보상 운동’을 시작한 서상돈의 고택을 둘러보았다.
그 근방에는 이상화 시인의 형인 독립운동가 이상정 장군의 고택이었다는 곳도 있었다. 지금은 ‘바보주막’이라는 술집으로 바뀌어 있어서 ‘술에 취한 독립 운동’이라는 묘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경주와 일본 교토에 비교할 바 아니지만 한국 근대사를 보고 이해하기에 이 정도면 매우 알차다는 느낌을 주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소용돌이치는 세계사 속에서 한국은 아주 위태로운 지경에 있었다. 지리적으로 동아시아 중심지였던 탓에 서구 열강들은 한반도를 선점하고자 온 국력을 쏟아 부었다.
중국이나 미국에게 점령당했다면 소수 민족이 모여 사는 한 개의 자치구나 주 정도로 부속되어 자율권을 행사하며 그럭저럭 살았을 것이다. 독립에 대한 의지는 지금의 티베트나 필리핀 정도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식민지 상황이 이어졌다면 최소한 언어 문제 하나만큼은 혜택 받았을 것이다.
러시아는 타 민족을 핍박하는 데 일본과 비슷한 성향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북쪽으로 시베리아 철도 등의 교통망을 만들어 최소한 물자 수송로만큼은 확실하게 했을 것이고, 남북이 분단되는 상황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부동항(不凍港) 확보가 절실했던 러시아로서는 한반도를 태평양 밖으로 진출하는 최적지(最適地)로 여겨 한민족과 각별한 사이를 유지하며 투자에 집중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본이라는 최악의 나라로부터 지배를 당하게 되었다. 나는 타 민족을 무시하고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일본인의 더럽고 악랄한 민족성이 무섭고 싫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배자를 선택할 권리는 없었고, 그것은 국가적 재앙으로 이어졌다.
대구 근대 문화의 거리는 동아시아의 총체적인 난맥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한쪽 손엔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엔 무기를 감춘 채 우리나라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종교를 미끼로 계성학교, 계산성당, 제일교회 등 그럴듯한 유산을 남겼으나 실상은 이 땅을 점령하지 못해 무척 아쉬워했을 것이다.
저녁 뉴스에, 교황이 방문한 대전 공설운동장에서는 5만여 신자들이 모여 하느님이 강림한 듯 날뛰고 있었다. 관중석에서 파도타기 하는 신도들의 모습이 낯 뜨거웠다. 김연아 선수가 한국 팬들에게 피겨스케이팅 장에서 파도타기나 삼삼칠 박수치며 응원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매너가 아니라고 했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라는 말이다.
특정 종교인이 광분하는 모습은 자기네끼리는 단합이지만 타인에게는 배척당한다는 인상이 강하다. 종교 간의 알력이 심한 우리나라에서는 자칫 종교 전쟁으로까지 비화될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글로벌한 세계 외교에서 종교가 다른 나라에게는 편협한 인종이라는 시각을 보여 주어 손해 볼 수도 있다.
과유불급! 무엇이든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하다고 했다. 파도타기를 하지 않아도 교황은 한국 방문을 뜻 깊게 생각할 것이다.
딸에게 진골목, 구암서원, 김광석 거리를 마저 보여주지 못했던 게 아쉬웠지만 동창생의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한쪽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미술거리의 중심에 자리 잡은 목공예 공방에서 또 다른 친구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간판 이름도 ‘가구 만드는 풍경’이라 하여 매우 시적이었다. 우리는 거기에서 삼겹살 파티를 벌였고, 밤 10시에는 낮에 약속해 두었던 이무열 선배 시인을 찾아 나섰다.
한창 시운전하고 있는 모노레일을 따라 끝까지 갔다. 지산동은 모노레일의 시발점이자 종점이었다. 박가분 화장품 점 안으로 들어서자 사장인 이무열 시인이 우리를 반겼고, 이어 심강우 시인과 섬유 공장을 운영하는 친구가 합세했다.
모두 생활에 바쁜 사람들이라, 나는 눈치 줄 까봐 슬그머니 전화 한번 해본 것뿐인데, 성남에서 귀한 손님 왔다며 부랴부랴 한 자리에 모여들었다. 미천한 나를 위해 이렇게 깜짝 모임을 만들어 모여 준 벗들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아내와 딸을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근처 주점에서 밤 깊도록 삼국유사 문학기행과 대학 시절을 이야기하다 헤어졌다.
자정 넘은 시각에 우리 식구들은 차가 세워져 있는 미 8군 담벼락 쪽으로 갔다. 딸이 차 안에서 자자고 했다. 뜻밖의 제안에 나는 얼떨결에 그러자고 했다. 평소 같았으면 허름한 모텔 방 하나 잡아 얼렁뚱땅 밤을 새웠을 텐데, 요새 “자본주의”라는 이상한 책을 읽고 나서 뭔가 각성하고 있던 중이었기에 생각을 달리했던 것 같았다.
“자본주의”라는 책은 자녀들에게 돈 쓰는 방법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즘 각종 자녀 교육 방법에 대한 강의를 듣던 중에 하나가 더 추가된 셈이었다. 아이들 키우는 데 무슨 교육이 그리 많은지 ‘대충 살자 주의’인 나에게는 모든 게 해골이 복잡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시대에 살면서 그런 교육들도 의미 있어 보였다. 자본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돈이 사랑보다 귀해져 가고 있으니 말이다.
딸은 겉으로 보기에는, 근검절약을 그런대로 실천하고 있는 듯했다. 대학 갈 때에도 내가 권했던 국립 2년제를 말없이 수긍했고, 용돈 받으면 최대한 아껴 쓰는 듯했다. 낮에 탄금대에서 식사할 때만 해도 궁색한 자리에 궁시렁거리는 일이 없었다.
나는 술기운으로 네 시간 이상을 잠 잘 수 있었다.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뜨자 두 모녀는 차 안에서 잠 못 들고 달려드는 모기를 쫓아내느라 살갗을 딱딱 때리고 있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새벽의 대구 거리를 거닐었다. 밤새 내리던 비는 좀체 그칠 기미가 없었다. 각자 우산을 받쳐 들고 미 8군 담벼락을 끼고 한 시간 동안 줄창 돌았다.
새벽 여섯 시쯤, 우리는 다시 비슬산으로 향했다. 지난밤에 친구들 간의 논의 끝에 국어연구회가 가는 방향이 잘못 되었음을 뒤늦게 알았고, 코스를 재조정하여 식당도 새로 잡기로 했다. 다행히 목적지에 90명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이 있었다. 오리 고기 메뉴도 마음에 들어서 당장 주인과 가계약을 했다.
이번엔 숙소 확인을 위해 팔공산 맥섬석 유스호스텔로 향했다. 숙소가 깨끗했고 회식하는 데에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나 하나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할 것이라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매니저와 가계약을 맺은 후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동화사로 향했다. 동화사는 문학기행 참가자들이 새벽 이벤트로 나설 공간이었다. 게으름뱅이는 새벽잠에 빠지고 부지런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는 보너스 혜택 장소이다.
최근, 어떤 신자가 동화사 대웅전 뒤에 금을 숨겨 놓았다는 부친의 유언을 듣고 금 찾으러 나섰다는 뉴스가 있어 TV 화면 속의 이 절을 유심히 보았었다.
1977년 대학교 1학년 때 와 보고는 처음이었다. 폭주하는 중국인 관광객과 높이 33미터의 통일약사여래대불이 인상적이었다. 계곡 따라 난 108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인간의 백팔 번뇌가 자연스레 사라질 듯했다.
옛날에는,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의 버스 종점에서 내려 한 시간쯤 걷다 보면 파계사가 나오고, 또 두어 시간을 더 걸어 이곳에 왔었던 것 같다. 예쁜 누나와 함께 보조 맞춰 가며 걸으니 힘든 줄 몰랐었다. 그 누나는 나랑 같은 현 씨여서 친척처럼 대해주었고 자기 집에까지 초대하여 극진히 나를 아꼈는데, 언제 어디서 왜 만났는지 몰랐고, 그 후 어디서 왜 헤어졌는지도 몰랐다.
이놈의 차가 꿈과 낭만을 앗아간 것 같았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사뿐사뿐 걸었던 이 길도 차량 문화로 인해 삶의 멋이 단숨에 날아가 버렸다. 흘러가는 냇물이나 맑게 개인 하늘을 바라볼 틈도 주지 않았다.
차는 우리에게 필요한 곳만 찾아다니게 했다. 이번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풍경은 구미시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 생가 터였다.
박 대통령 생가 앞에 서니 갑자기 많은 생각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1982년 가을이었던가, 군 제대하고 대학교 복학한 후 신문에 나온 여당과 야당 간의 분쟁 관련 기사는 나를 혼란 속으로 빠트렸다. 예전에 신문 1면 상단에 자동으로 찍혀 나오던 대통령 사진과 관련 기사는 없고 여당이 야당의 반대에 부딪쳐 곤경에 처한 모습이 나왔는데, 나는 여야가 다툰다는 게 무척 생소하다고 생각했었다. 대통령 정당이 야당의 힘에 밀려 합의하려는 모습은 거의 보아오질 못했었다. 그 이후로는 무슨 공사가 중단되는 일이 종종 벌어졌는데, 그것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 대통령 시절에는 무슨 공사든 시작만 하면 무조건 성공하는 줄로만 알았었다.
집권 기간인 18년 내내 산업 성장에만 매진했던 외골수 대통령, 그로 인해 때때로 많은 지식인들의 인권이 유린되고 야당이 탄압받았지만 끝내 부국강병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아내와 딸도 나만큼이나 감동하는 것 같았다. 아내는 아득한 기억을 끄집어냈고, 딸은 자기가 밟고 있는 이 땅 위에서 저런 역사가 벌어졌으리라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입구 널따란 빈 터에는 전직 대통령을 기념하는 사진이 일렬로 쭈욱 전시돼 있었다. 중화학 공업 육성, 농업의 기계화, 새마을 운동, 애림녹화 사업,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이 눈길을 끌었다. 모두 내가 직간접적으로 마주쳤던 세계였다. 월남전 파병 시 LST 함정 위에 빼곡한 군인들과 그들을 향해 손 흔드는 여고생들 그리고 가족들의 모습이 가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겉으로야 자유 진영을 위해 싸우러 간다지만 속으로는 피 뿌린 대가로 돈 벌어 올 요량이었고, 그 돈은 결국 산업화 자금으로 쓰여졌다.
기념관 안에서 서비스로 설치해 놓은 대통령 내외와 사진을 촬영하고 허름한 생가를 둘러보았다. 밖으로 나오자 딸이 300여 미터 떨어진 대통령 동상을 보러 가자고 보챈다. 궂은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서 그냥 가버리려고 하다가 딸의 부름에 못이기는 채 따라나섰다.
딸은 박 대통령이 몹시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을 사람들은 왜 독재자라고 하는 거야?”
“그분 머릿속엔 오직 조국의 산업 발전만 있었고 나머진 깡그리 무시했었던 거지. 가령, 1965년 한일협정 맺을 때만 해도 각계에서 반대 데모로 들끓었는데도 그냥 밀어부쳤지. 그 과정에서 반대파들은 온갖 탄압을 받았어. 그분은 그 후 일본에서 받아 온 일제 강점기 때의 피해 보상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했어. 그런데 너무 급히 서둘렀던 바람에 오늘날의 독도 문제나 정신대 할머니 문제가 생겨난 거야. 근본적인 문제를 묻어 둔 채 보상금 받아내는 데만 급급했던 것이지.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배 불리 먹고 살게 된 걸 다행이라 여기면서 그분의 독재가 그때로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여기고 있어. 현재의 박근혜 대통령도 아버지에 대한 그런 추억이 같은 시대를 살았던 노년층에게 짙은 향수로 남아 당선된 것인 듯해. 지금도 은근히 박정희 대통령 팬들이 많아.”
한때 딸은 이명박 정권을 타도한다면서 촛불 시위에 나서겠다고 해 나를 당황스럽게 했던 적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애가 뭘 아나 하고 나는 살이 떨렸었다. 광화문 가겠다는 것을 겨우 말리긴 했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딸이 정치가 무엇인지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균형 있는 시각으로 바라보았으면 했다. 그랬던 애가 지금 “나도 박정희 대통령 팬이 된 것 같아.” 하면서 동상 앞으로 우리 두 내외를 이끌고 있으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딸은 박 대통령의 동상과 뒷면에 세워진 병풍 같은 부조물 그림에서 오랫동안 시전을 떼지 않았다. 딸은 아마 대구대학교에서만큼이나 이곳에서도 뭔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행사 도중에 총 맞아 영면했을 때만 해도 온 국민이 애도하다시피 했었다. 여농야도(與農野都)라 했을 만큼 전라도 시골 마을까지 여당 편이었었고,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는 야당 세력이 득실거렸었다. 그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지역감정이라는 말이 생겨나면서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아닌 경상도 지도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쓸쓸한 감정을 뒤로 하고 이번엔 문경 새재로 발길을 옮겼다. 문경은 구미에서 차로 1시간 좀 넘는 거리에 있었다.
‘옛길 박물관’에는 우리 선조들이 동래(부산)에서 한양 가는 과정이 전시돼 있었다. 한양~동래 간 한 줄로 된 높낮이 표시에서 이곳 문경 새재가 가장 높게 솟아 있었다. 새재에 담긴 ‘새들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라는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고 있는 듯했다.
구내를 운행하는 전기 자동차를 타고 제1관문을 지나 드라마 ‘태조 왕건’ 촬영 세트장 안으로 들어섰다. 어마어마한 규모에 제압당하는 기분이었다. 오늘 밤에는 또 무슨 촬영이 있는지 스태프 진들의 세트장 꾸미기가 한창이었다.
‘생태 체험로’를 따라 내려오니 드라마 출연진들이 버스로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TVN 방송에서 나오는 인기 드라마 “삼총사”의 야간 촬영 팀이었다. 족히 300명쯤 되는 인원을 보며 문화 콘텐츠 산업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세 번째 날은 첫째 날과 같이 내가 머무는 수안보 농가로 가서 잤다. 두 모녀는 전과는 달리 벌레에 익숙해진 듯 이제는 바닥으로 벌레가 꿈틀거리며 기어 다녀도 크게 놀라워하지 않았다. 육신이 피곤해지자 금방 잠에 떨어졌고 나는 라면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 하고 천천히 잠결에 빠졌다.
8월 15일, 광복절이자 가족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제천 국제음악영화제’가 열리는 제천으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천은 ‘국제’라는 수식어에 어울릴 만큼의 화려한 도시가 아니었다. 극장 옆, 쬐끄마한 간이 천막에서 영화표를 끊고 근처 떡볶이 집에서 김밥을 먹었다.
“위로받지 못할 추억”.
나는 영화 매니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살아왔지만 이렇게 구질구질한 영화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요하네스버그에서 혼혈아(컬러드)들이 모여 만든 ‘이온’이라는 성악 그룹이 백인 정권 속에서 살아남는 모습과 그것을 기록물로 남기는 과정을 보여 주는 영화인데, 줄거리와 구성 모두가 황당했다. 그렇다고 음악영화제의 특징을 살려 음악을 제대로 들려주는 것도 아니었다.
입장료가 아까워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혹시 볼만한 장면이 나오나 싶었지만 영화는 끝까지 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화면이 흐린데다 옆으로 비스듬히 기운 이탤릭체 자막이 세로로 흘러내려서 정신을 사납게 만들었다. 생애 최악의 영화가 나의 인내심을 실험하는 것 같았다.
“관객이 총 7명뿐이었어,”
출구로 나오면서 아내는 이런 걸 영화라고 보겠다고 했던 딸과 나를 번갈아 보며 원망스럽다는 듯 투덜거렸다. 하필이면 요즘 잘나가는 방화 “명량” 관객들과 마주쳐 나를 더욱 난감하게 만들었다. 오늘이면 종전의 “아바타” 기록을 누르고 국내 영화계 사상 최대인 1363만 관객을 돌파할 예정이라는 뉴스가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명량” 관람객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만약 극장 앞에서 서비스로 주는 옥수수 하나씩 얻어먹지 못했더라면 아내는 집에 갈 때까지 뾰로통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내를 위로하려고 어제 레드카펫 행사장이었다던 청풍호로 달려갔다. 하지만 30분여를 달려간 청풍호 역시 기대만큼 찬란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교과서에 나오는 ‘청풍명월’이라는 낱말이 다소 과장되었음을 알았다.
주차장 가장자리의 잔디 그늘 속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과일 깎아 먹으며 소일하다가 일어섰다. 내비게이션으로 딸의 학교명을 찍으니 두 시간 반 거리가 나왔다.
안성 가면서도 좀 전에 본 영화 제목처럼 위로받지 못할 추억과 같은 분위기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위로해 준 건 반대편 방향의 긴 차량 행렬이었다. 충주에서 제천 가는 차량들이 어림잡아 30km 정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었다.
나는 횡재한 사람처럼 크게 소리쳤다.
“열 시 영화를 봐서 다행이지, 만약 오후 한 시 것을 선택했더라면 우리도 저 속에 끼어 꼼짝 못했을 거야.”
“대구에서 만났던 아빠 친구들이 모두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 같아 보기가 좋았어.”
내 말에 아내의 반응이 없자 딸도 머쓱해지지 않으려고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러던 얼마 후, 제대로 된 반전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안성폴리텍여자대학에 도착해서 본 딸의 기숙사 풍경 때문이었다. 1학기 때에는 3인실이었다가 이번에 2인실로 옮겼다. 성적 우수자에게 먼저 배정되었다는 사감의 딸 칭찬에 우리 두 내외는 감격했다.
방방마다 설치된 실내 화장실과 천장에 매달린 에어컨 등 마치 호텔방을 연상시키는 이곳 기숙사 시설은 아마 전국 대학 중에 최고 수준일 듯했다. 공공으로 쓰는 인터넷 검색실, 빨래방, 휴게실, 세미나실, 쓰레기 분리수거실, 체력단련실 등 없는 게 없었다. 분명, 나는 딸 때문에 호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번 여행을 통하여 한반도의 1,500년 역사를 차근차근 그리고 체계적으로 둘러보았다. 가야국에서 신라로 귀화한(552년, 진흥왕 13년) 우륵부터 시작하여(탄금대), 신라 시대의 도성암 ․ 동화사, 고려 시대의 태조 왕건 ․ 단호사 ․ 미륵리 석굴 사원 등과 만났고, 조선 시대에 와서는 임진왜란의 신립 장군 ․ 병자호란을 전후한 임경업 장군 ․ 조선 나그네들이 다니던 옛길 등과 만났다. 대구에서 근대사와의 만남이 있었고 구미에서 근현대사, 제천에서 현대사와 만났다.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우연의 일치로 시간과 장소가 순서대로 나타난 역사 기행이 되었다. 맨 마지막에 나타난 것은 딸 앞에 놓인 현실 세계였다.
아무튼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하여 딸에게 소중한 추억들을 많이 안겨준 것 같아 내심 흐뭇했다. 3박4일 내내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하면서 하늘은 한여름인데도 선선한 날씨를 선사해 주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분당 집으로 떠나기 직전에 딸 대학교의 기숙사 입구에 세워진 소망 나무 앞에 섰다. 그리고 나의 소망을 쪽지에 적어 나뭇가지에 걸었다.
“딸, 졸업할 때까지 무사히 그리고 건강하게 잘 지내거라.”
첫댓글 현간사님!! 진짜 멋쟁이세요~* 묘사와 서사가 적절히 배합된 글을 읽다보니 쓰고 계시다는 소설이 빨리 완성되었으면 좋겠네요~*
감사 ^^
훌륭한 아버지 슬하에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을 따님의 모습이 부럽기만 합니다~ 따님에게도 아버지가 자랑스럽겠지요.
원고 90장 되는 방대한 기행문인데
다 읽어주셨다니 실로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저도 함께 역사 기행을 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멋진 아버지의 모습이에요~ 저도 15개월 된 딸과 이런 여행 할 때가 오겠죠 ^^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문학기행 때 봐요.
위 글에선 안 쓴
마지막 반전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상경한 며칠 후 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빠엄마가 가고 나니까 바로 에어컨을 꺼 버리더라고요. 아마 학부모 방문 기간에만 튼 것 같아요. 그 이후로 날이 얼마나 더웠는데...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