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우창 자서전
나 심우창은 2004년 3월 21일 노량진 청화병원에서 태어났다.
아빠는 강사, 엄마는 학생으로 컴퓨터 학원에서 처음 만난다. 엄마의 미모(?)에 아빠는 홀딱 반해 바로 사귀자고 하고 계속 엄마를 쫓아다닌다. 쫒아 다니며 귀찮게도 했지만 엄마에게 잘해주고 믿음을 주어 엄마는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게 된다. 연애하던 중 같이 유람선을 타고 데이트를 즐기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아빠는 결혼하자고 얘기하고, 엄마는 꾀를 내어 한강 다리 밑을 바로 지나가기 직전에 지하철 한 대가 지나가길래 ‘최소한 3분 뒤에나 오겠구나’ 해서 그럼 이 배가 다리 밑을 지나갈 때 지하철이 지나가면 결혼해 주겠다고 덜컥 약속을 한다. 바로 다리 밑을 지나가는데 반대편에서 지하철이 지나가서 그 상황이 너무 당황 스럽고 웃겨서 엄마는 결혼을 약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짜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아빠가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알아서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엄마 아빠는 양가 부모님의 축복 속에 2003년4월12일 강남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엄마는 어느 6월 비가 많이 내린 다음 날 친구들과 내린천 래프팅을 하러 떠난다. 래프팅 시작과 동시에 엄마는 물에 빠지고, 급류를 타고, 수십 미터 혹은 수백 미터를 떠내려간다. 물살이 워낙 세고, 물도 많고, 전날 74년생 여자 한명이 실종돼서, 실종자가 혼자 가기 외로워서 엄마를 데려 가려나 생각했다고 한다. 다행히 엄마는 잔잔한 물가로 그분(?)께 인도되어 구조되었고, 친구들과 만나 다시 래프팅을 해서 내려가는 중에 실종자가 발견되었다. 다음 날 출근한 엄마는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병원에 가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내가 엄마를 살렸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혼 한지 2개월 만이라 처음에는 얼떨떨하고, 믿어지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한편 아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에게 잘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뭔가 되게 신기한 느낌과 기대감이 있었다고 한다.
나를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자손이 귀한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아주 좋아하셨다고 한다. 5개월 때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더 좋아하셨다고 한다.
어느 날 엄마가 꿈을 꾸었는데 깜깜한 밤에 산꼭대기에 올라 밤하늘을 바라보는데 유난히 반짝이는 큰 별 하나가 엄마를 향해 떨어져 눈이 부시고 깜짝 놀라 깬다. 태몽 같아서 그때는 결혼한 지 오래되었는데 아이가 없는 둘째고모에게 만원을 주고 팔게 된다. 후에 엄마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다시 만원을 주고 가져왔다는 해프닝이 있었다.
엄마는 입덧이 너무 심해서 회사도 그만두게 되었다. 꽃게탕과 샐러드로 간신히 입덧을 달랬는데 나를 임신했을 때의 입덧은 입덧도 아니었다는 것을 동생 임신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입덧이 끝나고 임신5개월쯤 주로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나 아빠가 동화책을 읽어 줄때 내가 많이 움직였다고 한다.
내가 태동을 할 때 엄마는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좋았다고 한다. 발로 차면 튀어나온 발을 아빠에게 보여주기도 하고 발을 잡기도 하고 발을 쓰다듬기도 했다. 그저 신기했다고 한다.
엄마는 모든 일에 있어 아주 조심스러워졌다. 엄마가 좋아하던 운동도 그만두고, 태교를 위해 아빠와 함께 라마즈호흡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기도 하고, 지나가는 아기들을 보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 신체적 변화로는 초기에 입덧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중후반으로 갈수록 몸이 무거워져 자다가도 다리에 쥐가 나고, 엎드려 자거나 똑바로 자는 것은 불가능 했다. 배에는 임신선이 생기고, 작은 배가 늘어나서 살이 트기도 했다. 조금만 먹어도 체한 것 같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찼고, 하루 세 번 가던 화장실도 열 번 넘게 다녔다고 한다.
아빠는 나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함께 사러 다니고, 태교 동화책과 CD를 사서 많이 들려주고, 읽어주고, 계절마다 여행을 다녔다. 아빠가 출산 준비를 위해 라마즈 호흡을 배우러 함께 다녀준 것이 엄마는 가장 고마웠다고 한다.
저체중으로 나를 임신한 엄마는 15kg이나 체중이 증가했다. 막달 순산을 위해 매일저녁 가벼운 산책을 하며 나를 기다리던 2004년3월19일 늦은 밤. 아이가 나오기전 출산이 임박했다는 신호로 이슬이 비치고 배가 살살 아파오자 걱정과 두려움으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고 아침 일찍 준비해둔 출산준비물 가방을 챙겨 아빠와 산부인과로 간다. 병원에서 아이가 나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집에 갔다가 10분 간격으로 진통이 오면 다시 오라는 말을 듣고 외할머니 댁으로 가서 가진통을 하다가 점점 진통이 강해져 외할머니, 아빠와 다시 병원으로 향한다. 병원에 입원하고 30시간동안 진진통을 겪으며 초죽음이 되어 가는데... 간호사가 내진을 하며 “1센티 열렸네요.” 하고 말하며 나갔는데 이때 아빠는 엄마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고, 외할머니는 더는 지켜보지 못하고 가족분만실을 나가시고, 엄마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때의 마음과 고통과 생각은 거의 대하소설로 써도 부족하다고 하신다. 수십 시간을 먹지도 잠을 자지도 못한 엄마는 수술을 원했고 곁에서 지켜보던 아빠도 수술을 해달라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가 태어난3월21일은 윤달 2월1일로 엄마가 입원한 20일 토요일 윤달이 되기 전 거의 모든 산모가 수술로 아이를 출산하고 3월21일(윤달2월1일) 일요일 에는 마취과며 의사선생님이며 모두 9시가 넘어서 출근하여 엄마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수술을 못했다고 한다.
입원하고 진통한지 33시간 만에 촉진제를 맞고 그 후 4시간을 더 진통 끝에 자연분만으로 오후 12시44분 몸무게 3.7kg 키 52cm. 우굴 쭈굴 엄마 반 아빠 반 닮은 심우창이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본다.
나의 우렁찬 울음소리와 손 발 모두 있다는 것을 안 엄마 아빠는 크게 안도하고, 아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의 탯줄을 자르고, 나는 엄마의 가슴위에 올려져 엄청난 감격과 기쁨을 선사 했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고 엄마에게 처음 들은 얘기는 ‘이 세상을 만나러 나오느라 애썼다.’ 라고 한다.
병실로 옮겨진 뒤 잠깐 나갔다가 들어온 아빠는 화사한 꽃바구니를 들고 엄마 앞에 나타나신다. 또 출산한지 한 시간도 안돼서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친할머니 큰고모 고모부 사촌누나 작은고모 큰아빠 큰외삼촌이 나를 만나러 오신다. 출산하자마자 오셔서 엄마는 부끄럽고 힘이 많이 들었다고 회상한다. 가족들은 저마다 내의며 기저귀며 선물을 사오셨는데 그중 큰고모에게 받은 편지가 감동을 주었고,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다. 나와 동생이 어렸을 때 처음 입었던 옷들을 아직도 몇 가지 갖고 있는데 직접 고르고 구입한 베넷저고리, 우주복, 돌 한복 등이다. 이번 자서전을 계기로 처음 보게 되었는데, 정말 작고 귀엽다. 엄마의 정성도 느낄 수 있는 시간 이였다,
외갓집에서 산후조리를 할 때 엄마는 심한 젓 몸살로 출산의 고통을 다시 한 번 느낀다. 하지만 외할머니가 사다주는 꽃과, 배냇짓을 하며 웃고 있는 나를 보며 그 시간들을 견딘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 자다가도 내가 숨을 쉬고 있는지 가슴에 귀를 대기도 하고 코에 손을 가져다 대기도 하며 나의 생사여부를 계속 확인했다고 한다. 너무 조심스러워 입술에 뽀뽀도 안하고 볼에만 했는데 내가 태어난 지 3주째 되는 날 친할머니가 오셔서 내 입술에 뽀뽀를 하여 아직도 엄마는 먼저 입술에 뽀뽀 안 한 것을 한탄하며 후회하고 있다. 그래서 동생이 태어났을 때는 제일먼저 입술에 뽀뽀먼저 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나는 믿거나 말거나 매우 순하고 잘 웃고 똑똑했다고 한다. 목가누기, 뒤집기, 기기, 앉기, 서기, 걷기, 뛰기 등 신체 발달도 평균보다 조금씩 모두 빨랐다고 한다. 엄마 생각에는 엄마는 잠깐 힘만 주었을 뿐 자연분만으로 나 스스로 머리를 써서 태어났고, 모유를 15개월 동안 먹어서 순하고 똑똑한 것 같다고 한다. 엄마는 나를 낳고 몸이 많이 안 좋아 힘이 들었지만, 엄마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했는데, 분유를 먹지 않는 나에게 15개월 동안 젖을 먹였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고기 야채 죽 등 이유식을 날마다 다져서 직접 해먹이고, (동생은 이유식을 배달해 먹였다고 한다.) 나의 반찬거리는 생협에서 장을 보고, 우리 농산물 유기농 위주로만 까다롭게 먹였다고 한다. 또 아빠와 함께 즐기던 게임도 아빠는 계속 했지만 엄마는 그만두었다고 한다.
나는 엄마 아빠의 배위에서 잠자고 노는 것을 좋아했고, 발로 비행기를 태워주면 특히 더 좋아했다고 한다.
2005년3월19일 토요일 오후6시 개봉동 K컨벤션웨딩홀에서 나의 첫 생일 파티가 열린다.
해드폰을 끼고 찍은 돌 사진 대형 스크롤을 배경으로 스크린 양옆과 테이블에 보라색 펄 풍선으로 장식하고 돌상에는 각종 과일과 떡, 축하 케이크, 생일에 와주신분께 감사의 의미로 답례품까지 준비를 했다. 120석을 예약했는데 더 많은 분들이 오셔서 축하를 해 주셨다. 돌잔치의 하이라이트 돌잡이에서는 컴퓨터마우스를 잡아 제2의 빌게이츠를 희망하기도 한다. 한편 할머니께서는 돈을 잡지 않은 것이 조금 서운하셨는지 돈을 잡을 수 있게 유도하여 두 번째로는 돈을 잡았다고 한다.
내가 처음 밥을 먹은 시기는 돌 훨씬 이전 엄마 아빠가 식사할 때 밥을 몇 알 주면 주먹으로 밀어 넣어 오물오물 잘 받아먹었다. 돌 무렵 각종 채소와 소고기를 넣어 만든 볶음밥을 아주 좋아하고 잘 먹고 많이 먹었다. 볶음밥을 못하는 날은 미역국 된장국도 좋아해서 국에 말아 먹곤 했다. 엄마가 참기름을 발라 구워준 김과 생선을 밥보다 많이 먹기도 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말이 조금 늦었는데 처음 한 말은 돌전에 당연히 엄마 아빠였고, 돌이 한참 지나 언제쯤 말을 하려나 기다리던 어느 날 밥을 먹다 ‘엄마 물 주세요.’를 완벽하게 말을 해서 엄마가 거의 울 뻔했다고 한다. 말을 매끄럽게 잘 하지는 못했지만 두 돌 이후에는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이 가능해 졌다.
내가 좋아한 장난감은 흔들 말, 반달지붕차도 있지만 첫 장난감 아닌 장난감은 내 발 이였다. 발을 만지고 놀고 발가락을 쪽쪽 빨기도 하고 심지어는 엄마 아빠의 발도 좋아라, 만지고 놀다가 빨려고 하다 지지소리를 듣곤 했다.
나는 보행기를 탈 때 뒤로 먼저 탔는데 자전거도 처음 탈 때 페달을 뒤로 돌려 뒤로 탔다. 뒤로만 타던 어느 날 연습 끝에 앞으로 전진한 날 엄마 아빠가 기뻐하며 사진을 찍어 기념을 했다고 한다. 그 때가 3살 여름이었다.
나의 여행은 생후 4개월 무더운 여름 나의 기억에는 전혀 없는 엄마, 외할머니, 사촌형 이모할머니, 사촌이모와 제주도 여행이다, 여미지 식물원, 한라산, 우도에서 보트타기와 해수욕을 한 것이 나의 첫 여행이다. 그 후로도 엄마 아빠는 가끔 저녁을 먹다 갑자기 나를 담요에 둘둘 말아 무작정 떠나는데 눈떠보면 해남 땅 끝 마을이기도 했고, 속초 어느 바닷가이기도 했다. 또 벚꽃이 필 때 마다 여의도 윤중로로 벚꽃구경을 나서는가 하면 더운 날 한강 고수부지에 돗자리를 깔고 강바람을 쐬기도 하며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어릴 때 엄마 아빠가 읽어 주었던 책은 셀 수 없이 많다. 아빠는 반대를 하였지만 엄마는 매번 전집을 사들인다. 심지어 안 쓰는 가전제품이나 옷가지들을 주면 동화책을 주겠다는 사람에게 짝 잃은 귀고리, 휘어진 와이어목걸이, 끊어진 발찌 등 금붙이까지 내 놓았다고 한다(이후 금값이 폭등함.) 그렇게 사들인 창작동화 몬테소리 토들 피카소, 웅진 마술피리꼬마, 자연관찰, 수학동화 교구 베이비 몬테소리, 리틀 몬테소리, 빅 몬테소리, 한글만세 등 이 책들을 시간 나는 대로 읽어주셨다. 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했던 책은 전집이 아닌 엄마 배속에서 듣던 동화책 ‘알피, 잠 잘 시간이야’ ‘여우가 오리를 낳았어요’라고 한다. 그렇게 엄마 아빠의 동화를 듣고 자란 나는 4살 겨울 무렵 책을 혼자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5살 봄. 집에서 조금 떨어진 스포츠놀이학교인 난나 유아 스포츠단에 입단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수영, 발레, 인라인, 사물놀이를 배우면서 학습은 조금, 운동은 많이 하는 재미난 유치원 생활을 했다. 엄마 아빠는 나보다 큰 가방을 혼자 매고 ‘열심히 하고 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등원할 때 정말 대견하고 감격스러웠다고 하신다. 가족들에게 유치원에서 필요한 수영복, 발레복과슈즈, 인라인 스케이트를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엄마는 내가 수영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나는 발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유아 스포츠단 다닐 때 기억나는 것은 담임선생님이 결혼을 하셨는데 우리 반 친구들이 결혼식장에서 장미꽃을 들고 ‘흰 눈이 기쁨 되는 날’ 노래를 불러드렸던 것이 기억난다.
동네 친구이자 유치원 친구인 준우와 함께 유치원버스를 타고 함께 다니고 유치원 끝나고도 집 앞 놀이터에서 매일 간식을 먹으며 놀았다. 그 후로도 준우와 2년 동안 더 ECC 유치원과 태권도도 함께 다녔다. 또 나에게는 친한 친구가 한명 더 있는데 같은 동 18층에 사는 현빈 이다. 현빈이가 우리 집에 놀러오고 나도 놀러가고 상가 문방구, 떡볶이집도 함께 다니며 친하게 지내다가 양평으로 이사 오면서 떨어지게 되었지만 가끔 양평에 놀러오면 만날 수가 있는데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지금도 유치원 때를 생각하면 너무 좋았고, 복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쉬웠던 것은 없고, 친구가 많이 있어서 그리고, 날 좋아하는 여자 친구들이 많아서 좋았다. 지금도 이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도 있다.
내가 어렸을 때 TV에 교실 벽과 문도 없고, 카펫에 선생님과 아이들이 앉아 자유롭게 공부를 하는 영훈 초등학교가 나왔는데 부모님이 그때 이 학교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7대1의 경쟁률을 뚫고 우리 유치원에서는 연식이와 나 둘이 영훈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식 날 나는 하늘색 와이셔츠와 교복 바지, 코트를 입고 부모님이 준비하신 꽃다발을 들고 할머니 엄마 아빠와 영훈 초등학교로 갔다. 체육관에서 오케스트라 부 형 누나들이 연주를 하며 환영해 주었다. 나를 위한 연주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
체육관에서 입학식을 하고 운동장에서 6학년 형 누나들이 직접 만든 꽃 화분과 편지를 선물로 받았다. 나는 1학년1반9번 이었는데 6학년1반9번 형에게 받은 것이다. 부모님에게도 꽃다발을, 오케스트라부 형, 누나들의 축하공연도 기억에 남는다. 오케스트라 공연을 기대했는데 곳곳에서 삑 삑 소리가 나서 좀 웃겼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거니까 일단 기대를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입학을 하였던 것 같다.
1학년 담임선생님은 두 분이 계셨다. 첫인상이 인자하신 한국 담임 원상철 선생님, 조금 깐깐하실 것 같았던 영어 담임 Ms. Tara 선생님이었다. 두 분 다 첫 인상 만큼 1년 내내 큰소리 한번 내지 않으시고 우리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해 주시며 친절하게 수업을 해주셨다.
첫 수업은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치원을 같이 나온 연식이, 서로 마음이 잘 맞아 좋아했던 이정석이라는 친구도 있다. 내가 먼저 전학가고, 정석이가 나중에 강남으로 전학 가서 EBS '공부의 배신'이라는 프로에 출연하여 티비로 나마 보게 되었다. 또 나랑 같은 모범생?(자랑하자면 벌점이 가장 적었다) 김태리 와는 정말 친했는데 태리가 먼저 전학을 가 헤어지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 나는 미술이 제일 좋았다. 왜냐하면 미술 선생님이 예쁘시고, 나에게 도예 왕 이라고 칭찬을 많이 해주셨기 때문이다. 반면 싫어했던 과목은 없었다. 그때는 정말 어려운 과목이 없었다.
첫 소풍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 집 근처 북한산으로 소풍을 갔었는데 담임선생님께서 산에 올라가는 길이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씀해 주신 기억이 난다. 숲길을 걷고 놀이터가 있어서 놀았었다.
1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a그룹 b그룹에서 모범생을 뽑아 새끼손가락을 석고 뜨기 해주셨는데 나와 태리였다. 가을에 손뜨개 수업에 엄마가 오셔서 아이들과 함께 손뜨개를 한 날 엄마가 있을 때 애국가를4절까지 부르는 시험을 보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한해는 체육대회 한해는 축제를 한다. 내가 1학년 때는 체육대회가 있었는데 부스를 돌아다니며 경기를 하고 비타민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들은 릴레이와 줄다리기를 하셨는데 엄마 아빠가 참가해서 너무 열심히 한 결과 아빠는 팔이 다 까지고 엄마는 삼일을 앓아 누우셨다.
거의 모든 종목에 다 참가 했다, 싫어한 종목은 없고, 박 터뜨리기를 신나게 한 기억이 있다. 그리고 우리반에 승우라는 친구가 축구와 달리기를 아주 잘하는데 릴레이에서 마지막에 역전을 해서 청군이 이기게 되어 환호하고 옆에 친구를 끌어 안고 엄청나게 좋아했던 기억도 난다.
2009년 9월 7일 유치원에서 돌아왔는데 엄마 대신 외할머니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병원에 가서 산부인과 병실 밖에서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병실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호기심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초조하게 동생을 기다렸다고 한다.
어른들은 아들을 낳고 딸을 낳아서 좋아하셨는데 나는 어른들이 동생만 보고 예뻐하는 것 같았다. 머리가 까맣고 우굴쭈굴 못생겼지만 그래도 기다리던 동생이어서 설레고 좋았고 예뻤다.
동생이 태어난 날 나는 병원에서 동생과 엄마를 보고 돌아와 우리 집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일주일을 지내고 친할머니와 또 일주일을 지냈다. 할머니들과 지내면서 유치원이 끝나면 엄마와 동생이 있는 산후조리원에 가곤했다.
2학년 담임선생님은 1학년 담임선생님만큼 자상하신 ‘이 재형’ 선생님, 록 스타 같이 생기신 Mr. 알바로 선생님이 계셨다. 두 분 모두 친절하셨다.(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선생님 복이 많다.)
2학년 때 내 기억으로는 아주 많은 것을 했다. 나의 일생 중 가장 바쁘고 행복하던 때가 아닌가 싶다. 나는 꾸준히 태권도를 다녀 2012년 2월 국기원에서 2품을 따고 새로 받은 검정 띠가 생각난다. 이 때 관장님께서 검정 띠를 그냥 주시지 않고, 노래를 불러야 띠를 주셨기 때문에 노래를 하고 받았다. 지금도 관장님을 생각하면 우리 아빠처럼 재미있으시고, 태권도도 열심히 잘 가르쳐 주셨던 것 같다.
또 반 친구 5명과 어린이수영장을 다니기 시작해서 2년 동안 다니게 된다. 이때 남자 둘 여자 넷 이였는데 여자 아이들의 수영실력이 훨씬 좋았었다.
또 엄마 친구가 추천해준 스피치 학원도 열심히 다녔다. 우리 집은 정릉인데 성북구에서 송파까지 토요일 수업이라 가는데 한 시간, 어떤 날은 두 시간, 심지어 크리스마스이브 때는 세 시간이 걸려서 가기도 했다. 그만큼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하여 1차, 2차 웅변대회를 끝내고 국제 웅변대회에서 100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고 최고상을 따고서야 나의 웅변생활 14개월을 마칠 수 있었다. 나의 스승이신 ‘편 사범’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만나 뵙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나의 집에는 1차 웅변대회 상 ‘메달’ 2차 웅변대회 상 ‘작은트로피’도 있지만, 국제 웅변대회에서 딴 크기가 거의 100cm 가까이 되는 트로피와, 그때 웅변대회가 아직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다.
2학년 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신명나는 문화학교’ 에서는 우리학교 친구 12명과 매월 첫째 주 일요일마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역사 체험을 하게 된다. 가장 기억남은 것은 뽀로로 선생님과 다 같이 공주, 부여에 간 것이다.(3학년 때) 그곳 박물관도 가고 예쁜 기념품도 사고, 그곳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들이 좋았고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것 같아서 더 좋았다. 부여 박물관에서는 백제의 완벽한 예술의 금동대향로를 보고 모조품을 기념품으로 사오기도 했다. 이 외에도 경복궁, 서대문 형무소, 국립중앙박물관, 몽촌토성, 강화... 을 탐방 했다
2학년 봄에는 나와 아주 친한 진우형의 가족과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그 당시 나는 비행기에 타면 추락하지는 않을까, 추락하면 어떻게 되나 등 온갖 걱정을 다 했다. 고소공포증이 나를 힘들게 했다. 무사히 도착한 우리 가족과 진우 형 가족은 제주도 소인국 테마파크에서 금귤을 살짝 따서 맛을 봤는데 귤이 너무 시어서 모두 웃긴 표정을 지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조립형 자동차를 사나 제주도 선인장 엿을 고르나 이것이 문제였는데, 결국 자동차를 샀지만 시식으로 먹어본 선인장 엿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학년 때는 체육대회 2학년 때는 축제가 열린다. 격 년 으로 번갈아가며 열리는데 2학년 때 서경대학교 강당에서 아주 신나는 축제가 열렸었다. 우리반은 내가 추천한 레몬트리 라는 노래와 춤 또 하나 태극권을 선보였다. 이때 오빤 강남스타일 이라는 노래와 춤이 유행 이였는데 모두가 음악에 맞춰 신나게 뛰며 춤췄던 것이 생각난다.
3학년 담임선생님은 영훈 초등학교에서 가장 예쁘시고 유쾌하신 김 영인 선생님, 외국인 선생님은 금발머리 Mr. Scott 선생님이셨다. 역시 품위 좋으신 김 영인 선생님은 세상에 어떤 사람보다 좋으시고 친절하시다. 한마디로 천사 같으셨다. (Mr. Scott 선생님은 어떠셨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3학년 때 가장 좋았던 점은 내가 마술부에 들어가게 된 점이다. 눈속임 마술, 화분 마술, 바늘구멍에 두꺼운 끈이 들어가는 마술 등 아주 많은 것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나는 마술은 ‘뫼비우스의 지갑’ 이라는 마술이다. 이 마술은 면이 하나밖에 없는 뫼비우스의 끈을 활용한 지갑이 있고, 정말 신기한 건 이 지갑의 특성이다. 마술의 비법은... 비밀!
3학년 때도 신명나는 문화학교를 다녔다. 다만 우리나라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좀 더 먼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나는 신명나는 문화학교를 다니기 시작하고부터 매달 1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3학년때도 역시 태권도, 수영을 다니며 지민이와 미술을 함께 배우기 시작했다.
또 수영은 친구 최 윌, 홍 다연, 우리부모님이 모두 한눈에 반한 오 아림 이라는 친구와 수영을 해 다이빙까지 완수했다. 하지만 지금은... 수영을 할 수는 있지만 빨리는 나가지 못한다. 그 때는 어린이 수영장 얕은 물에서 했던 터라 깊은 물에서 다시 연습하고 싶다.
3학년 가을 체육대회 때의 일이다. 우리들은 개미들의 힘겨루기를 했는데 내가 주장이었다. 그래서 내가 제일 먼저 달려 나가 줄을 잡고 끌어 친구들이 잡아 2번 연속 이겼는데 마지막 판에 다른 팀 아이들이 우리 팀 을 이기려고 모든 조가 달려들어 결국 지고 말았지만 이 게임으로 우리 청군이 이겨 200점을 따서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 이어달리기도 우리 팀이 이겨서 우리가 최종승리를 거둬 좋았고 신나게 몸을 움직이며 놀아서 좋았다.
4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원상철 선생님만큼 자상하신 신재현 선생님과 나를 매우 아껴 주셨던 Mr. Still 선생님이었다. 신재현 선생님은 스카우트 총대장이셨고, 동화작가여서 일기장도 직접 만들어 주셨다. Mr. Still 선생님은 여러 가지 게임과 놀이를 많이 시켜주셨다.
4학년 초에는 스카우트 모집을 했는데 모집 인원은 적고, 신청하는 수는 많아 투표를 했다. 나는 한방에 ‘축 당첨!’이라고 적혀 합격했지만 내 친구들은 거의 다 떨어졌다. 어떤 친구는 종이에 ‘축 안타깝습니다.’ 라고 적혀있었다. 스카우트 단원이 된 나는 2대 최범언 대장님쪽이 되었다. 대장님과 여러 활동을 했다. 레프팅 활동을 했는데 처음에는 앞서고 나갔다가 교관이 바뀌어서 뒤처지게 되었다. 하지만 교관님께서 오리 꽥꽥 병아리 삐약삐약 앗싸 가오리 이렇게 재미있게 해주셨다.
4학년이 돼서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 바로 전학을 오게 된 것이다. 영훈초에 있으려면 친할머니와 함께 있어야 해서 가진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해어지니 정말 가슴 아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