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0] 윤영태(尹泳泰) - 고생과 축복 2. 입교하자 뜻길에 1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세상은 어수선하였다. 그해 7월 삼복더위에 우리집 앞 벽보판에 ‘원리선포’란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또 옆집 청년이 받아왔던 9절지 큰 전단지를 빠짐없이 읽어보고 통일교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2 왜냐하면 성결교회 목사님께서 언젠가 설교시간에 ‘통일교회는 남녀가 빨가벗고 한방에서 춤을 추며 예배 본다’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에 사실이 그런가를 확인하고 싶었고 당시 예장, 기장이 서로 싸워 교파간의 분열이 극심했기 때문에 ‘원리’와 ‘통일’이란 글자에 매력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3 그날 밤 그 청년과 함께 안동역전에 있는 2층 강의실로 찾아갔으나 전기시설이 안되어서 강의를 듣지 못하고 김병호 전도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그다음 날 8월 1일 저녁부터 빠짐없이 30여 일간 강의를 듣고 크게 감명 받았으며 김 전도사님의 인격과 생활에도 감동되어 통일교인이 될 것을 결심하고 8월 1일 입회원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4 내가 통일교회에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성결교회 목사님과 장로, 집사님들이 수차례나 찾아와 성경 구절을 읽어주면서 전도관과 통일교회를 혹독히 비판하고 이단에 넘어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나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5 그때 성결교회에서는 나와 이경호란 청년이 통일교회에 나가면서 다른 청년들을 전도해서 문제가 생겼다. 나와 이경호는 어려운 교회 살림을 돕고자 성결교회 홍 집사 댁의 가내공업소인 벼룻집 제작소에 다니기로 하였다.
6 성결교회 측에서는 쫓아내라고 압력을 가했지만 홍 집사는 우리를 신임했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싸워 교회 내부에 혼란이 있게 되었고 그 얼마 후 그렇게 핍박하던 목사님 부인은 위암으로 타계하고 그 목사는 퇴임하였다.
7 그해 10월 4일 선생님께서 서대문 형무소를 출감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한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이경호와 나는 김 전도사님을 따라 상경하여 김병호 전도사님의 전 임지인 안양 교회에서 하룻밤을 쉬게 되었다.
8 거기 식구들이 전도사님의 양복을 마련해 주는 등 식구들끼리 화목하게 생활하며 인도자를 모시는 모습을 보면서 여기가 바로 천국이로구나 하고 마음 깊숙이 느꼈다. 그다음 날 청파동교회에 가서 선생님을 뵙고 인사를 드렸다.
9 김 전도사님께서 우리 두 사람을 소개하시자 선생님께서 “너희들은 통일 교회식구가 되어서 왔느냐, 되려고 왔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나는 무척 당황하여 주저하고 있는데 이경호는 큰 소리로 “식구가 되어서 왔습니다”라고 용감하게 말씀드렸다.
10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호통을 치시면서 “여기 오래된 사람들도 아직 통일교회 식구가 안되었는데 너희들이 되었단 말이냐?” 하고 웃으시면서 말씀의 방향을 돌리시고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다.
11 저녁 집회는 장장 6시간 정도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화동회 시간에 선생님께서 노래를 부르실 때에 차분히 선생님의 동작 하나하나를 우러러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12 다음날 10월 4일은 행주산성으로 야외 예배를 보러 가서 화동회 시간이 되었을 때 사회자가 “안동에서 올라 온 두 청년 중 한사람 노래하라”라고 지명하여 나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기 때문에 옆에 앉아 있는 이경호에게 부르라고 의논하는 순간 선생님께서 “윤영태” 하고 내 이름을 부르시어 깜짝 놀라 나도 모르는 순간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13 할 수 없이 선생님을 모시고 많은 식구들 앞에서 떨리는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때부터 나는 선생님께 완전히 사로잡힌 듯 하였다. 서울에서 많은 은혜를 받고 안동으로 내려와서부터 더욱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를 받들었다.
14 한번은 김병호 전도사님과 같이 성결교회 집사들 집에 전도갔다가 물벼락을 맞고 옷을 버린 적도 있었다. 권 장로 부인은 다듬잇방망이를 들고나왔고 그것도 부족했던지 인분 바가지를 찾기도 했지만 김 전도사님은 웃으시면서 마루에 앉아 태연히 할 말씀을 다하셨다.
15 1960년 11월 협회 제4회 40일 수련회가 있었다. 처음에는 참석할 여비가 없어서 애를 쓰다가 할 수 없이 종형에게 사업 기금으로 2만 원만 보내달라고 편지했더니 마침 수련 시작하는 전날 돈이 와서 계획대로 수련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16 개회식 때 선생님 말씀이 계셨고 유효원 협회장님, 안창성, 박보희, 최창림 씨 등 여러 강사님들의 특색있는 강의에 매일 은혜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식사시간에는 밥알 하나만 흘리거나 취침시간에 떠들기만 해도 효창공원까지 뛰어가서 두 주먹을 쥐고 눈 위에 엎드려 손에 쥐가 나도록 기합을 받았다.
17 120명을 대표하여 12명이 피를 뽑아 팔았고 12명은 3일 금식을 했는데 나도 처음 3일 금식에 동참했다. 수련을 통하여 눈물을 배웠으며 은혜가 무엇인지 체험하게 되었다.
18 하계 40일 전도 임지를 안동군 풍산면으로 배정받고 부푼 마음과 한편으로 헤어지기 싫은 아쉬움을 갖고 석별의 인사를 나눴다. 나는 안동으로 와서 교회를 우리 집과 같은 울안으로 옮겨 놓고 내 여동생부터 입교시키고 친구들을 전도하였다.
19 교회가 같은 집안에 있으니 큰형 내외의 반대가 심해졌다. 교역장님이 출타하신 어느 날 내가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있는데 형님이 멱살을 잡고 끌고 나가기에 나는 안 끌려나가려고 버티다가 형님의 손가락까지 부러뜨린 적도 있었다.
20 입교 후 1년간 마음 가운데 아무런 시험도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주일 낮 예배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김병호 전도사님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오늘도 혼자 왔느냐고 하셨다.
21 그 말씀에 왠지 미안하고 몸 둘 바를 몰라 그 길로 밖으로 나가서 하루 종일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돌아오는 길에 전도사님을 만나게 됐다. 만나는 순간 너무나 미안하였지만 이러다가는 점점 거리감이 생길 것같아 혼자서 기도하고 저녁 예배시간에는 염치 불구하고 참석함으로써 아무것도 아닌 마음의 시험을 체험하게 됐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