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4,12-16.22-26 |
12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은 히브리 달력으로 니산월 15 일이지만, 전례력으로는 성주간 목요일에 해당된다. 무교절 음식은 예루살렘 성벽 안에서 먹어야 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디에서 무교절 음식을 준비하기를 원하는지 물었다.
예수님은 목요일 밤에 최후의 만찬을 하였고, 체포되셨다. 안식일은 주간의 마지막 날, 즉 토요일이다. 예수님은 안식일 전날, 즉 금요일 오후에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고, 안식일 다음날, 즉 주간의 첫날(주일)에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요일은 분명하다.
과월절은 니산달(3-4 월) 14 일-15 일로 정해져 있고(탈출 12,18), 무교절은 니산달 15 일부터 21 일까지 7 일간 지낸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그해의 과월절과 안식일이 겹쳐졌다고 말하고 있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금요일은 안식일 전날이면서 동시에 과월절 준비일 이었다고 말한다(요한 19,31). 따라서 요한복음에서는 목요일의 최후의 만찬은 과월절 만찬이 아니라 그냥 이별의 만찬이 된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에서는 목요일 밤이 무교절 첫날이었고, 최후의 만찬은 곧 과월절 만찬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니산달은 양력 3 월-4월에 해당하는데, 니산달 15일은 춘분이 지난 후에 보름달이 뜨는 날이다.
이렇게 양력과 음력을 섞어서 사용했기 때문에 당시의 과월절도 그렇고, 오늘날의 예수님의 부활절도 해마다 날짜가 크게 바뀌고 있다. 예수님은 서기 30 년, 또는 서기 33 년 봄, 과월절 무렵의 어느 금요일에 사형 당했다. 요일은 분명하지만 정확한 연도나 날짜는 알 수 없다.
유대인들은 니산달 14 일 오후 3 시경에 성전에서 파스카 양을 잡고, 해가 진 다음, 즉 니산달 15 일이 되면 예루살렘 시내에서 과월절 만찬을 먹었다. 마르코는 로마식(현대식) 시간 계산법대로 ‘무교절 첫날’이라고 했지만, 유대식 시간 계산법대로 하면 ‘무교절 전날’이다.
과월절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많은 일들을 해야 했다. 적당한 크기의 방을 마련하고, 양을 잡고, 누룩 없는 빵을 준비하고, 식탁과 그릇 등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해야만 한다. 당시 예루살렘은 특정 지파에 분배되지 않고 이스라엘의 공동소유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순례자들에게 과월절 장소를 빌려줄 때 돈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전통이 있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그런 전통을 잘 따랐고, 침대와 방석에 대해서도 임대료를 받지 않았다. 방을 빌리는 순례자들은 임대료를 내지는 않았지만, 제물로 바쳤던 짐승의 가죽을 방의 주인에게 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제자들은 마치 하인들이 주인에게 묻듯이 예수님께 과월절 음식을 어디에 차려야 하는지 질문하고, 예수님께서는 두 명의 제자를 보내신다. 그래서 11 장의 예루살렘 입성 때 나귀를 빌렸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
13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루카복음에서는 ‘제자 두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이었다고 말하고 있다(루카 22,8). ‘도성’은 예루살렘이다. 당시에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은 여자들의 일이었다. 그래서 남자가 물동이를 메고 가면 눈에 잘 뜨였을 것이고 제자들은 그 남자를 쉽게 만났을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물동이를 메고 가던 남자는 마르코였다고 한다. 그리고 제자들이 빌린 집의 주인은 마르코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시내에서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를 따라가라고 하시는데, 아마도 그 남자와 제자들이 만나게 될 시간과 장소가 미리 약속되어 있었을 것이다. 왜 처음부터 준비된 집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을까? 아마도 만찬 장소를 미리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즉 만찬 전에 체포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도 배반자 유다는 만찬이 시작될 때까지 그 장소를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14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지금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시하시는 것은 방을 빌리라는 것이 아니라 파스카 음식을 먹기 위해서 미리 준비한 방을 미리 가서 보고 확인하라는 것이다. 즉 그 방은 예수님께서 이미 빌리신 것이다.
어떻든 집의 주인에게 ‘선생님께서... 물으십니다.’ 하고 말하라는 지시는 그 집의 주인도 예수님의 제자였음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시켜 방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면 집주인에게 ‘부탁’하는 모습이 아니라, 마치 ‘명령’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선생’으로 자처하시고, ‘내 제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고, ‘내 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집주인이 예수님의 열렬한 제자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새끼 나귀를 징발할 때처럼 주님으로서 전권을 행사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
15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16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집주인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미리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준비되어 있는 방에 음식을 차리기만 하면 되었다. 새끼 나귀를 징발할 때와 거의 비슷한 상황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도시 가옥은 보통 이층에 가장 큰 방이 있었고, 거기에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했고, 그곳에서 손님을 접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원래 자리가(방석이) 깔려 있었다. 두 제자는 모든 것이 예수님 말씀대로라는 것을 확인하고, 과월절 음식을 준비한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보낼 마지막 시간들을 매우 신중하게 준비하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
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마태 26,20-25; 루카 22,21-23; 요한 13,21-30)
17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셨다.
‘저녁때’는 니산달 14 일에서 15 일로 바뀌는 때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해질 때 시작되어 한밤중에 끝나는 과월절 식사를 먹기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마르코는 빵과 쓴 나물을 양념 그릇에 같이 찍어 먹는 사람 중에 자기를 팔 자가 있다는 예수님의 선언과 식사 후 빵과 포도주에 대한 예수님의 성체 성사의 제정을 강조하기 위해 식사 중의 사건들을 생략하였다.
18 그들이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해가 지면서 과월절 저녁이 시작되었습니다. 과월절 축제는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회상하는 식사의 형태로 진행되는데, 가장은 가족에게 어린 양과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로 식사를 하는 의미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과월절 만찬에 반드시 있어야 할 어린 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과월절 만찬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 부분은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어떻든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의 배반을 예고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엄숙하게 강조하실 때 사용하는 관용어인데, 여기서는 제자의 배반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 유다를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또는 ‘열둘 가운데 하나(20절)’ 로 지칭하면서 사도들 가운데에 배반자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강조하신다. 이것은 그 배반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 라는 말은 시편 41편 10절,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라는 구절에서 온 표현인데, 식사 공동체, 즉 가족과 같이 친밀한 공동체를 배반하는 배반자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팔아넘길 것이다.’ 라는 말은 배반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는 것은 그가 이제라도 뉘우치고 마음을 바꿀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그의 배반 계획을 예수님이 알고 있다는 것만 말씀하신다. |
19 그러자 그들은 근심하며 차례로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놀라고 당황하고 동요하면서 ‘저는 아니겠지요?’ 라고 묻고 있다. ‘저는 아니겠지요?’ 라는 말은 ‘나는 그럴 리가 없다.’ 라는 뜻이 아니라, ‘혹시 그게 저입니까?’라는 뜻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제자들 모두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 즉 스스로 자신들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는 사람이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 라는 말은 앞의 18 절의 ‘너희 가운데 한 사람 ’ 과 같은 뜻이고, 제자이면서도 스승을 배반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는 사람’ 이라는 말은 앞의 18절의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 라는 말과 같은 뜻이고, 가족처럼 친밀한 사람인데도 배반을 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유대인들은 채소와 빵 등을 대접에 담긴 소스에 적셔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는 사람’ 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에서 온 표현으로 ‘나와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가 열두 사도 안에 있음을 분명히 밝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유다에게 거듭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떻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고통은 다른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음식을 먹는 동안에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는 것이 당신의 관습이었다. 이 자리에서 배반은 다윗이 그와 함께 친밀한 식탁 교제를 나누던 아히토펠(2 사무 16,15-17,23)이 그를 배신했을 때 시편 49 편에서 한탄한 그 한탄을 상기시켜 준다. |
21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가슴을 울리는 한탄스러운 어조가 나온다.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이다.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대로 죽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뜻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 그러나 불행하여라,’ 라는 말은 배반자가 불행하게(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이면서 동시에 그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말이다. ‘사람의 아들을 넘기는 그 사람!’ 이라는 말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배반하는 그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라는 말은 유대인들 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데, 이 말은 예수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탄식이다. 유다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유다에 대한 저주도 아니고,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아니고, 유다의 파멸을 예고하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은 유다가 그런 선택을 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이 말에는 유다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는 암시가 들어 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배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정해진 길을 가셨을 것이라는 뜻이고, 유다의 배반과 그것 때문에 당하게 될 불행한 운명은 그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반자의 죄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운명으로 작용하고, 그 운명을 아무도 변경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다면, 그냥 정해진 대로 되어갈 뿐이라면, 우리 인간은 운명 앞에서 자유의지가 없는 한낱 로봇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의지로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다.
유다는 배반을 선택하고 실행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배반의 책임은 전적으로 유다에게 있다. 하느님도 예수님도 유다에게 배반자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은 없다. 운명은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예정된 미래의 운명 같은 것은 없다. 그래서 아무도 미래를 미리 알 수 없다. 예측하고 짐작할 뿐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예언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 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우리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조건적인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성경에 수없이 나오는 멸망의 예언들과 그 예언대로 이루어진 일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경고한 것들이 현실화된 것뿐이다. 즉 회개하면 피할 수 있었던 일인데,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한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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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유대인들의 식사 때에 가장은 빵에 대한 축복의 기도를(찬미를) 하고 빵을 떼어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관습대로 축복의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빵을 쪼개는 것은(떼어내는 것은) 나누어주기 위한 것이고, 이 빵을 받아먹는 것은 주인이 했던 축복기도에 동참하는 것이고, 하나의 빵을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것은 공동체적 친교를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찬미’ 라고 번역한 말은 ‘축복’이나 ‘찬양’ 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따라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셨다는 말은 축복기도를 하셨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받아라.’ 라는 말은 ‘받아먹어라.’ 라는 뜻이다. 여기서 ‘몸’ 이라는 말은 육신만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전부를 가리킨다. 그래서 ‘이는 내 몸이다.’ 라는 말은 ‘이것은 나다.’ 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주신 것은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신 것이다. 따라서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일이다.
교회는 처음부터 성체를 예수님의 몸으로 알아들었고 믿어왔다. 빵이라는 겉모습의 형상은 그대로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인해 빵의 본질이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 성체성사의 교리이다. 그래서 성체는 예수님의 몸을 나타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몸이고, 예수님 자신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23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유대인들은 회식 때 주식사가 끝나면 다시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드리고 나서 후식으로 포도주를 마셨다. 원래는 참석자들의 개인용 잔이 준비되는 것이 원칙인데, 여기서는 하나의 잔을 돌려가며 마시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로 새롭게 맺어지는 하느님과의 계약에 참여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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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많은 사람’ 은 온 인류를 뜻합니다. ‘위하여’ 라는 말은 ‘희생’을 뜻한다. 즉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는 단순히 계약을 맺기 위해서가 아니고, 인류를 위한 희생으로 흘리신 피라는 것을 나타낸다. ‘내 계약의 피다.’ 라는 말에서 ‘피’는 혈액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내 피’ 라는 말은 ‘나 자신’ 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신 것은 피를 흘리고 죽게 될 당신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주신 것이다.
‘계약의 피’라는 말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을 때 제물로 바친 수송아지의 피를 가리킨다(탈출 24,8). 계약을 맺을 때 피를 사용하는 것은, 만일에 계약을 어긴다면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곧잘 우상숭배에 빠져서 계약을 깨뜨린 때가 많았다. 계약대로라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다.
이 새로운 계약이 ‘신약’이다. 그런데 신약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계약이다.
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당신의 말씀을 엄숙하게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 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된 후에 열릴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뜻한다. 이 말은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예언이기도 하다. ‘새 포도주’ 라는 말은 지상에서는 한 번도 맛보지 않은 포도주라는 뜻인데, 이 말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상징한다.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 은 포도주인데, 여기서는 파스카 음식을 가리키고 있다.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라는 말은, ‘포도주를 다시 마실 틈이 없다.’는 뜻이고, 이 말은 당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고하는 말씀이다. 25 절의 뜻을 다시 정리하면, 죽음이 임박해 있어서 또다시 포도주를 마실 틈도 없지만, 머지않아서 하느님 나라 잔치가 열릴 것이고, 새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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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이제 최후의 만찬이 끝나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겟세마니로 간다. 여기서 ‘그들’ 은 예수님과 열한 명의 제자들이다. 유다는 그전에 떠났을 것이다. 루카복음 22장 21절을 보면, 유다는 성찬례가 끝난 뒤에도 최후의 만찬 장소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요한복음 13 장 30 절을 보면 유다는 최후의 만찬이 끝나고 예수님께서 고별 담화를 하시기 전에 떠난 것으로 보인다. 하여간에 유다가 언제 떠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유다가 성체성사 제정 때 그 자리에 있었고, 성체를 받아먹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한다. 즉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보증 받았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하고, 성체성사의 은총이 자동적으로 발휘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되기도 하다. 성체를 주시는 예수님과 받아먹는 우리가 온몸과 마음으로 일치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다가 받아먹은 성체는, 또는 믿음도 없이 받아먹는 성체는 무의미하다.
여기서 찬미가를 불렀다는 것은 과월절 만찬이 끝난 뒤에 부르는 시편 115 편-118 편을 노래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말은 이제 과월절 만찬이(최후의 만찬이) 완전히 끝났음을 나타낸다.
‘올리브 산으로 갔다.’ 라는 말은 올리브 산에 있는 겟세마니 동산으로 갔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때에도 자주 겟세마니에서 기도를 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겟세마니 동산은 올리브 산 서쪽 비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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