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활사인 묘로 들어간 왕중양
왕중양과 사자우의 맞대결에서 누가 승자로 남을 것인가? 사자우는 오래 전부터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왕중양을 기필코 꺾어 보고 싶었다. 비록 왕중양이 무림의 맹주 자리에 다시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는 했지만 그 명성은 매우 드높았기 때문이었다.
사자우의 병장기가 획획 바람을 가르며 왕중양에게로 내리꽂혔다. 그는 왕중양의 명문대혈(命門大穴)을 겨눈 채 조금도 숨돌릴 겨를을 주지 않았다.
그의 공격은 더욱 위력이 붙어 무서운 소리를 질렀다. 이를 지켜 보는 단지흥과 홍칠의 손바닥에 땀이 흠뻑 배였다. 왕중양이 차츰 불리하게 전개돼 갔다. 왕중양의 검은 처음엔 흐르는 물과 구름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사자우가 거세게 날뛰자 서서히 흐름을 잃어 갔다.
"왕 형, 검에 좀더 힘을 주시오!"
단지흥이 안타깝다는 듯 소리를 지르자 홍칠도 거들었다.
"저 난쟁이의 공격이 빨라지면 왕 공자의 검은 느려야 하고, 공격이 뜸해지면 검은 빨라져야 하지요."
"아니오, 공격에 따라 검도 그 속도를 맞춰 가야 하오."
단지흥이 홍칠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홍칠은 단지흥을 슬쩍 돌아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허허허, 폐하께서 잘못 보셨소이다. 공격이 빠르면 검은 느려져야 하지요."
두 사람이 논쟁을 하니 옆에 있던 사대시위 중 주자류(朱子柳)라는 선비가 느끼는 바가 있어 의미 있는 눈빛을 지었다. 그는 네 사람의 시위 가운데 가장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두사람이 나누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왕중양과 사자우가 한창 어우러져 불꽃을 튀기는데 갑자기 모용준이 끼여들었다.
"셋째 동생, 그저 보고만 있지 말고 우리 둘도 한판 불어 보지 않겠나?"
그는 임조영을 향해 싸움을 걸어 왔다.
"후회만 하지 않는다면!"
임조영이 쏘아 붙이자 모용준이 음흉스럽게 웃었다.
"난 오늘 왕중양과 결판을 내야겠지만 셋째와도 그렇게 할 생각이다. 오늘부터 동생은 내 마누라가 될 준비나 하라구."
순식간에 모용준의 사대 가신들이 임조영에게 덮쳐 들었다. 이들은 임조영을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모용준이 아무리 회유를 해도 말을 듣지 않으니 아예 없애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들 중 주정과 목우는 임조영의 실력을 잘 알았다. 그래서 선뜻 달려들지 못하고 기회만 엿보았다. 반면에 임조영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지청과 허불잉은 단번에 제압하겠다고 날뛰었다. 그러나 임조영이 부리는 검날에 주춤 걸음을 세운 이들은 등줄기를 뒤흔드는 두려움에 잠시 몸을 떨었다. 지청은 갑자기 자신의 정수리가 싸늘해짐을 느꼈다. 임조영의 검이 그의 정수리에 있는 살가죽을 쓰윽 베어 버린 것이다. 처음엔 통증이 없어 몰랐으나 바람결이 벗겨진 살가죽
에 닿자 뼈를 가는 아픔이 엄습해 왔다.
"으……."
지청이 이를 악물며 아픔을 참아냈다. 뒤에 있던 허불잉이 앞으로 나가며 장을 내갈겼다. 그런데 손을 내뻗기도 전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눈을 떠보니 어느 틈엔가 팔뚝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잘려 나간 팔에서 피가 샘솟듯 했다.
"사, 사람 살려!"
허불잉은 자기 팔을 잡지도 못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악에 받친 허불잉은 몸을 돌리더니 남은 손으로 임조영의 젖가슴을 움켜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임조영의 몸에 손을 대기도 전에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지청이 곧바로 칼을 보나들고 앞으로 나왔다. 임조영이 싸늘한 눈빛을 내쏘며 검으로 그의 칼을 내리쳤다. 뒤로 훌쩍 물러선 지청 때문에 쓰러졌던 허불잉은 임조영의 검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임조영은 놈들이 도망치려는 것을 알고는 몸을 날려 옥녀심경에 있는 '심냉신담(心冷神淡) '이라는 검법으로 주정을 힘껏 찔렀다.
"아악!"
검에 찔린 주정도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너무 우쭐대지 마라!"
모용준이 임조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한편 왕중양과 사자우는 벌써 백여 합을 넘게 싸웠으나 승부를 내지 못했다. 서로는 질긴 싸움에 서서히 상대에게 두려움을 품었다.
왕중양이 속으로 뇌까렸다.
'과연 난쟁이들은 기인이야. 무공 역시 예측하기가 어려워……'
사자우는 원래 왕중양이란 인물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는 않았었다. 그렇지만 쉽게 물러서지 않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그도 적이 놀라고 있었다. 단지흥이나 홍칠보다도 세련된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쉽게 그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서로에게 두려움을 품은 두 사람의 동작은 자연스레 느려졌다.
"쾅!"
이때 난데없이 포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뒤를 이어 종남산 기슭으로부터 고함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중원 무림의 역도들아! 도망칠 생각일랑 말아라!"
사람들은 모두 아연실색하여 허둥대기 시작했다. 무심이 앞으로 뛰어나와 호걸들에게 호통을 쳤다.
"들었느냐? 산 아래는 이미 대군들이 물샐틈없이 너희들을 에워싸고 있다. 금나라에 투항하려는 자는 목숨을 살려 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모두 개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궁 앞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욕설을 퍼붓는 자가 있는가 하면 슬그머니 줄행랑을 치려는 이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멀리 달아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이미 금군이 새카맣게 몰려들어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돼 버렸다.
사자우가 싸움을 멈추며 왕중양에게 독기 어린 소리를 질렀다.
"후에 다시 겨루기로 하자!"
호걸들은 후퇴하면서 물에 빠진 사람들처럼 계속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산기슭에서 울려 오던 말발굽 소리는 차츰 가까워지고 금군의 외침 소리도 더욱 어지럽게 메아리쳤다.
왕중양이 전진교의 제자들을 한곳에 모이도록 했다. 홍칠도 자신이 데리고 온 개방의 여러 제자들을 모았다. 단지흥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둘러 대책을 강구했다.
이윽고 금군의 무리가 나타났다. 진두에 나선 포악스럽게 생긴 한 장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두 팔로 쌀가마니 천식을 들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마력수(馬力首)였다. 그가 손을 내뻗으며 벽력같은 호령을 했다.
"왕중양은 어서 앞으로 나와라!"
왕중양이 기풍당당하게 나섰다.
"네가 금나라의 장수인가? 할말이 있으면 하라!"
마력수는 거만한 눈으로 왕중양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타고 있는 말이 성을 내며 앞발을 치켜 들었다.
"네가 왕중양이냐? 그럼 잘 들어라. 납한 태자님께서 영을 내리셨다. 전진교를 해산시키라는 분부시다!"
"너희 태자가 무슨 권리로 그런 말을 하였느냐?"
왕중양은 죽더라도 비굴함은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이런 왕중양을 말리며 나선 것은 모용준이었다.
"큰형님!"
왕중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좋소. 하지만 이 말만은 꼭 해야겠소. 영주 들판에서 우리가 모였을 때 한 맹세는 잊지 않았겠지요? 금군과 싸워 이기지 못하면 천하의 대사에는 간섭하지 않고 스스로 활사인이 되겠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모용준이 그 말을 새삼 들추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심이 모용준의 의도를 간파하고는 대뜸 한마디했다..
"당신이 떳떳한 사내 대장부라면 맹세한 것을 지켜야 하오.!"
"아무렴, 사내 대장부가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하면 끝장이지."
왕중양이 선뜻 이렇게 받아치자 모용준이 실눈을 떴다.
"무심 공자, 우리 큰형님을 어떻게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오? 우리 큰형님은 천하 무림의 맹주가 아니오. 필부의 말도 일언이 중천금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영응호걸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회피하겠소이까? 만일 자기가 한 말대로 하지 않는다면 야 전진교의 교주 노릇은 어찌하겠소?"
왕중양은 그 말들이 자신을 올가미에 질어 넣으려고 하는 수작임을 모르지 않았다.
"모용준이 놈! 허튼수작 집어치워라!"
왕중양이 피를 토할 듯 울부짖자 모용준과 무심이 마주 쳐다보며 킬킬댔다. 무심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부릅떴다.
"왕중양, 우리 금나라의 태자님께서는 네가 전진교를 만드느라고 애를 쓴 것은 높이 사고 계신다. 그래서 네가 활사인이 되기를 자청한다면 수많은 강호객들은 살려 주신다고 하셨다."
강호객들 중에는 그 인품이 뒤떨어지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이런 자들은 금나라와 그다지 큰 원한이 없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은 애초에 송이든 금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알량한 영웅심으로 우리들까지 죽이려 하지 마시오!"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소리치는 자도 있었다.
"잠깐, 내 말을 들으시오!"
사태를 수습하고자 나선 것은 홍칠이었다. 홍칠이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숨을 토하며 말을 이었다.
"자네들은 모두 중원 사람들이 아닌가? 금나라 놈들과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할 자네들이 아닌가? 사람이 한번 세상에 태어났다면 언제가는 죽는 법, 무엇이 두렵다는 말인가?"
여러 호걸들이 홍칠의 말에 수긍을 했지만 일부는 여전히 반기를 들었다.
"금나라 사람들과 싸우는 건 왕중양의 일이지 우리와는 하등 상관이 없소!"
무심이 크게 팔을 휘저으며 목청을 높였다.
"다들 보아라! 금나라는 병마가 강하고 백발백중의 궁수들로 가득하다. 만일 자네들이 불복한다면 고슴도치 꼴이 되어 죽을 것이다!"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과 골짜기에는 금나라 군사들이 피어난 풀꽃들처럼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또한 팽팽하게 시위를 당기고 있는 궁수들 때문에 더욱 긴장감이 맴돌았다.
홍칠이 단지흥에게 속삭였다.
"산 아래로 어서 내려갑시다!"
그러나 단지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반대를 했다.
"그건 안 돼. 물론 나나 자네는 별 근심이 없겠지만 무림의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화살에 목숨을 잃게 될 걸세."
단지흥의 말은 당연한 것이라 홍칠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마옥이 왕중양에게 비장한 목소리를 건넸다.
"사부님, 오늘 금나라 군사들이 들이닥친 것은 우리 전진교를 없애고자 함입니다. 더군다나 그 물결을 밀어 중원의 무림도 일망타진할 속셈인 것 같은데 최후의 결전까지 싸워야 합니다!"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는 금나라 군사들을 풀러보던 왕중양은 고심했다. 중원 무림이 금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해도 좋은 결과가 있을 수는 없었다. 중원 무림의 여러 영웅호걸들이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단합된 금군을 이기기란 쉽지 않으리라.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온 왕중양이 무심을 향해 물었다.
"무심 공자, 어쩔 생각이오? 어서 말을 하시오!"
무심과 모용준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무심이 입을 열었다.
"우리들도 중원 무림의 여러분들과 싸우려고 온 것은 아니오. 그저 왕중양의 대답을 받고자 왔을 뿐이었소. 이전에 왕중양은 자기가 금나라를 이기지 못하면 활사인이 ,되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소. 우리들은 바로 그 약속을 지키라고 찾아온 것이오."
사람들 속에서 다시 소란이 일었다. 어떤 자들은 왕중양에게 빨리 대답하라고 채근하기도 했다. 또 어떤 자는 대답을 해서는 안 된다며 금군과 맞싸울 것을 다짐했다.
왕중양이 손을 흔들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난 확실히 그 맹세를 한적이 있다. 나에게 활사인이 되라고 하는 그 물음에 대답을 하겠다. 하지만 난 어떻게 활사인이 되는지를 모른다!"
히죽 웃으며 무심이 모용준을 쳐다보았다.
"모용 공자님에게 훌륭한 생각이 있었지. 내게만 말하지 말고 어서 왕중양에게도 알려 주도록 하게나."
무심이 다시 왕중양에게로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왕중양, 자네의 동생 모용준에게 좋은 생각이 있네. 그 생각이 곧 내 뜻이니 잘 새겨듣도록 하게나."
사람들은 이윽고 난쟁이 모용준이 걸어 나오는 것을 지켜 보았다. 사람들은 모용준이 난쟁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눈에 모용준이 난쟁이로 보이지가 않았다. 모용준이 보여 준 큰 위력 때문이었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모두들 궁금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겁먹고 있는 눈치였다.
모용준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고는 그가 예전에 보여 주었던 미소와는 다르게 냉기가 스며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 한마디에 왕중양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다는 현실에 모두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눈길을 주었다.
"큰형님, 이 동생이 형님 때문에 인심을 제법 써 왔다는 것을 형님은 모를 것이오. 이번에도 형님을 위해 여러모로 궁리를 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소. 형님은 졌으니 순리대로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야 할 것이오. 금나라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는 말이오. 허나 그곳은 날씨가 몹시 춥고 땅이 거칠어서 고생이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이 동생의 마음도 즐겁지마는 않을 거요. 또한 형님이 지닌 무공은 다시 사라지고 무림의 일에는 두 번 다시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이 동생은 원하지를 않아요. 한때는 형제간으로 지내던 우리가 이처럼 원수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모용준은 자신의 속셈이라도 털어놓듯 감정에 치우쳐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사람들은 모용준의 간괴한 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모습에 역겨움을 느꼈다.
"모용준, 도대체 어쩌겠다는 것이냐? 왕중양을 네 집으로 모셔다가 잘 공대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누군가 모용준을 비꼬았다. 모용준은 그 말을 한 귀로 흘리더니 다시 왕중양을 쳐다보았다.
"큰형님, 생각 끝에 나는 큰형님에게 이런 말씀을 드릴 것을 결정했소. 이 뒷산에 있는 굴을 활사인 묘로 정해……"
모용준의 말은 곧 실행에 옮겨졌다.
사람들은 모두 모용준이 말한 뒷산으로 향했다. 이들은 종남산에 이런 굴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심지어 이곳에서 제법 오래 머물고 있었던 임조영마저도 몰랐다. 아무도 모르게 무심이 이곳에 굴을 하나 파놓은 것인데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굴 어귀에 몰려든 사람들은 저마다 안을 들여다보며 탄성을 질렀다.
모용준이 비웃음을 띤 채 말했다.
"큰형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맹세를 해 보시오. 지킬 수 없는 맹세라면 아예 꺼내지도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왕중양은 무거운 한숨만 내될 따름이었다.
"난 형님을 위해 몇 달 동안이나 명당자리를 찾아 헤매었소. 여러 곳을 둘러보았으나 그래도 종남산이 가장 명당이더군요. 게다가 하늘이 도왔는지 찾으려고 애를 썼던 고분도 하나 만났지 뭐요. 그 안에는 방들이 가득하고 웬만한 살림도구들도 갖추어져 있어요. 무심 공자님은 워낙 인심이 후한 분이라 형님을 위해 그 많은 물건들을 장만해 주신 것이오. 큰형님은 이곳에 들어가 다시는 강호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만사대길일 것이오!"
이제야 모용준이 오래 전부터 꾸며 온 거미줄에 걸린 것을 알고는 사람들은 분노를 씹었다. 이곳에 들어가면 전진교의 제자들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자기가 세운 중양궁도 언제든지 바라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모든 것이 지척에 있는 이 현실이 더욱 왕중양에게는 괴로움이었다. 이런 고통까지도 모용준은 계산에 넣었을 거라 생각하니 더욱 치가 떨렸다. 무덤 속에 갇혀 버린 왕중양은 곧 미쳐서 죽고 말 게 분명했다.
모용준의 미소가 일순간 사라져 버린 것은 이때였다. 뜻밖에도 왕중양은 굴 안을 들여다보며 호탕하게 웃는 게 아닌가?
"수고 많았네, 정말 고마워!"
왕중양이 치하를 하며 대뜸 굴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왕중양의 거동을 본 모용준은 망연해졌다. 왕중양의 말뜻을 얼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군은 망했고 임조영과도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고맙다니…….
왕중양은 무심에게도 한마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이 안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면 군사들을 물리겠소?"
눈을 크게 뜨던 무심이 얼른 얼굴색을 고치며 껄껄 웃었다.
"하하하! 여부가 있겠소. 헌데 그대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언제나 남을 먼저 생각하니 말이야. 한데 나는 오합지졸의 무리보다는 자네 한사람이 더 중요하지. 자네가 만일 이 굴 속에 들어가서 다시 나오지 않는다면 내 그 약속은 지키겠네,"
왕중양이 사람들과 말없이 눈길을 주고받았다. 자신이 그대로 강호에 남아 있어 주기를 바라는 눈길도 더러 보았다. 특히 단지흥과 홍칠은 더더욱…….
왕중양은 문득 지금의 송나라를 되짚어 보았다. 절반밖에 남지 않는 강산은 뒷전이고 주색잡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황제와 신하들……. 이러한 판국에 왕중양 혼자서 무거운 멍에를 짊어진다는 것은 매우 힘이 들었다.
사람들 뒤에 서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한 여인 임조영. 왕중양은 고개를 옆으로 틀며 그녀를 찾았다. 왕중양 가슴에 가장 큰 미련으로 자리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지금껏 그 어떠한 마음을 전한 적도 없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 본 일도 없는 여인이지만 대협 왕중양의 가슴에 깊이 각인된 사람이었다.
자신을 향해 엎드려 있는 일곱 제자들을 둘러보던 왕중양은 그만 울컥 눈물을 쏟을 뻔했다. 모두 자신만을 믿고 충심을 보여 주던 사람들이 아닌가.
마옥이 엎드린 채 침통한 목소리로 만류했다.
"사부님, 그곳에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전진교가 일어서려면 사부님께서 계셔야 합니다!"
"내가 이곳에 들어간다 해도 전진교는 여전히 발전할 걸세.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오히려 전진교는 무너지는 거네. 전진교의 수제자라는 네가 이만한 이치도 분별하지 못한단 말이냐?"
짐짓 화를 내는 왕중양의 가슴은 천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마옥은 왕중양의 옷자락을 거머쥐고는 놓지 않았다. 구처기와 유처현도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왕중양이 이들에게 조용히 당부의 말을 주었다.
"마옥, 오늘부터 네가 교내의 대사들을 맡아서 처리하거라. 모든 일들은 내 뜻을 따르게 하여 교내의 법도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소림사의 방장(方丈)인 지심(智心) 법사가 왕중양에게 합장을 해 보였다.
"왕 진인께서는 그야말로 지조가 높으시고 고귀한 분이로군요. '이 굴이 있으면 내가 곧 굴이요, 굴이 내 속에 있으면 굴이 아니다.'소승이 왕 진인께 이런 말씀을 선사하고 싶소만……. 왕 진인께서는 내가 한 이 말을 믿으시는지요?"
왕중양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이미 이 말속에 든 참뜻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살을 해 버렸지 굴속에 들어가겠다고 자청을 했겠는가? 지심 법사를 향해 왕중양이 덤덤한 어조로 내뱉었다.
"내가 굴속에 들어가면 굴이요, 네가 굴속에 들어가는 것과 한가지라네. 물이 있어야 마음이 생기고,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한 가지가 이루어지네."
"하하하핫!"
지심 법사가 크게 웃어젖혔다. 그리곤 마옥을 향해 이렇게 일렀다.
"왕 진인께 축복을 드리게나. 굴속에 들어가도 편안하게 복을 받을 테니까."
지심 법사가 왕중양이 굴속에 들어가는 것을 마치 동천복지(洞天福地)에 들어가기라도 하듯 여기니 마옥은 도통 그 영문을 몰랐다.
"자네들은 더는 비통해 하지 말게나. 왕 진인께서 굴속에 들어가시는 것을 붙잡아서는 안 돼."
지심 법사가 다시 여러 제자들에게 일침을 놓듯 힘주어 말했다.
왕중양은 다시금 고개를 들어 임조영을 찾았다. 그녀의 심정을 알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여러 사람들 틈에 묻혀 있어 보이지가 않았다. 왕중양이 천천히 굴속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사람들은 굴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 보며 끝없는 슬픔에 잠겼다. 지조와 덕성에 있어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천하 협객의 운명이 이렇게 끝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왕중양이 굴안으로 들어간 지 며칠이 지났다. 강호의 호걸들은 제각기 흩어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굴 어귀에 지켜 서서 왕중양이 행여 굴 밖으로 나오지 않을까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일곱제자들은 하루나 이틀 건너씩 굴속에 들어가 필요한 물건들을 건네주었다. 그렇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이렇게 다시 여러 날이 흘렀다. 왕중양의 말대로 전진교는 오히려 흥성해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왕중양이 굴속으로 들어간 소식을 듣고는 탄복하여 일부러 찾아와 전진교에 가담했다. 그리하여 전진교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모여들었고 강호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기에 이르렀다.
고분 속에 들어간 왕중양은 우선 그 안을 살펴보았다. 모용준의 말은 또 한 번 거짓임이 드러났다. 그의 말처럼 무심이 사람들을 시켜 고분 안을 손본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이름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고분을 발견하고는 왕중양을 가둘 속셈으로 꾸민 말이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왕중양은 그중 하나를 침실로 정하고 다른 한 곳은 무공을 연마하는 장소로 삼았다. 다른 방들은 별로 쓸모가 없어 보였다. 제일 아래층에 가 보니 돌로 만든 석관 몇 개가 놓여져 있었는데 매우 견고하고도 거대한 것이었다.
'이곳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군. 죽을 때 남들을 부르지 않아도 되겠어. 이 돌관속에 누우면 그만일 테니까……'
별로 할일이 없어진 그는 맡은 시간을 무공을 연마하는 일에 전념했다. 잠을 잘 때는 불현듯 원숭이가 떠올라 마음이 허전해지기도 했다.
'원형, 꼭 다시 찾아가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사정이 이렇게 되었소. 내 마음만은 형을 그리고 있으니 너무 야속하게 생각 마오.'
한편 그는 이따금 찾아오는 마옥과 구처기 등에게 무예를 전수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일곱 제자들의 내공심법(內功心法)과 무공은 날로 늘어만 갔다.
어느 날, 왕중양이 무덤 안에서 한가로이 앉아 있는데 홀연 어디선가 사람의 외침이 들려 왔다. 굴 어귀까지 나가 본 왕중양은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준과 무심이 찾아왔던 것이다. 이들이 타고 온 듯싶은 가마도 그 뒤로 보였다.
"형님, 나와 무심 공자는 함께 임안에 다녀왔소. 거기서 아주 재미있게 놀았지요. 임안의 사루라고 불리는 회모루, 유작루, 청고루 그리고 대백루는 정말 일품이었소!"
모용준이 침까지 튀기며 열을 올렸으나 왕중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제 할말이 없으면 난 그만 굴속으로 들어가겠네.
왕중양이 막 몸을 돌리려고 했다.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소. 그 회모루에 취아(翠兒)라고 부르는 계집이 하나 있었는데 자꾸만 형님의 이름을 부르더군요. 청루의 여인들이 그토록 사모하고 있는 걸 보면 형님도 재미를 많이 보신 모양이군요?"
왕중양은 모용준이 취아라는 이름을 들먹이자 표정이 금세 달라졌다. 어느새 그의 표정의 변화를 읽은 모용준이 속으로 궁리했다.
'왕중양은 대단한 인물이다. 그가 무공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 누구도 만만하게 보지 못할 정도였다. 지금은 무공이 더욱 견고해졌을 것이다. 그러니 나와 무심은 조심을 해야 한다.'
애당초 모용준과 무심은 왕중양을 협박하여 강호의 일에서 손을 떼게 만들 요량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사자우를 끌어들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사자우의 역할은 이제 끝이 났다. 모용준은 그에게 후한 은자들을 주어 떠나게 했다. 또한 꿈이 이루어지면 꼭 대연제국의 중요한 소임을 맡게 해 주겠다고 약속도 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모용준으로서도 더는 계략을 꾸밀 수가 없었다. 만일 더 심한 압력을 가한다면 그의 일곱 제자들이 들고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일단 왕중양을 이 굴안에 집어넣는 것에는 성공을 한 셈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 따져 보니 계산착오를 범한 게 분명했다. 오히려 왕중양에게 시간을 벌어 준 결과가 아닌가.
모용준은 얼른 다른 수작을 펼치려고 왕중양의 심중을 슬쩍 떠 보았다.
"나와 무심 공자는 납한 태자님에게 찾아가서 형님의 행적들을 말씀드렸소. 태자님께서는 형님에 대해 매우 탄복하셨소. 그래서 꼭 형님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겠소. 만일 형님도 만나 뵐 의향이 있으시다면 내가 그렇게 태자님께 여쭈어 드리리다."
"이제는 이 굴속의 생활이 몸에 배어 낯선 사람은 만나기도 싫다."
왕중양이 단숨에 거절을 하자 모용준이 다른 사람을 들먹였다.
"형님, 이 한사람을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형님이 보시기만 하면 단번에 알아볼 것이오."
이들이 타고 온 가마 안에서 한사람이 걸어 나왔다. 여인이었는데 걸음걸이가 매우 이상했다. 여인을 보는 순간 왕중양은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녀는 바로 왕정아였던 것이다. 태호에 있을 때 잠깐 인연을 가졌던, 육욕에 눈이 멀어 사내의 품을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이곳까지 왔을까? 왕중양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자신을 찾아왔다가 모용준에게 걸려든 것은 아닌지. 왕중양은 여러모로 추측을 해 보았다. 왕정아가 비틀거리며 왕중양이 있는 어귀까지 와서는 목을 놓아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이곳에 계시나요?"
오라버니라는 말에 왕중양의 가슴을 쓰라렸다. 불현 애틋한 정감이 이는 것 같아 그는 감동하고 말았다. 그저 육욕을 찾던 왕정아가 아닌 그의 회복을 위해 밤새 간호를 아끼지 않던 여인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정말 온 힘을 다해 왕중양의 회복을 애썼고 밤을 새우기도 했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왕정아의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어렸다.
"오라버니가 이곳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안 보이죠? 오라버니는 이름이 드높은 협객이 아니랍니다. 그런 오라버니는 이런 굴속에서는 살 수가 없어요. 혹시 나를 속이려는 게 아닌가요?"
"속이긴 누가 속아!"
모용준이 자기 뒤쪽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그녀에게 침을 뱉듯 한 마디 던졌다. 드디어 왕정아가 어둠 속에 가려져 잠시 보이지 않던 왕중양을 발견했다. 오매불망 그리던 왕중양을 본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오라버니, 그동안 별고 없으셨나요?"
왕중양은 그녀의 뒤에 바싹 붙어 서 있는 모용준이 신경에 거슬렸다.
"어서 물러서지 못해욧!"
그녀 역시도 왕중양의 눈빛을 읽었는지 고개를 돌리며 쏘아붙였다.
"난 힘들게 오라버니를 만났어요. 오라버니와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 썩 물러나세요!"
왕정아의 얼굴은 몹시 초췌해 보였다. 그녀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전 그 사내를 버렸답니다. 오라버니가 떠난 뒤 이내 헤어지고 말았어요. 전 지금까지 홀로 지내면서 자나깨나 오라버니 생각만 했어요."
왕중양이 묵묵히 팔짱을 끼고 서 있자 그녀가 다시 애원을 하듯 매달렸다.
"오라버니, 제가 왔으니 이제부터는 외롭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사실은…… 전 오랫동안 사내의 품을 떠나 있었어요. 너무 오랫동안……."
그녀는 그동안 참았던 온갖 애교와 교태를 한꺼번에 늘어놓을 심사였다. 왕중양의 머리 속에서는 낯설지 않은 광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왕정아가 보이는 행동은 모두 그 배 위에서 했던 말이나 몸짓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조금 전 느꼈던 다감한 감정은 사라지고 또다시 육욕에 눈이 먼 한 탕부와 마주하고 있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다가들며 왕중양의 손을 잡으려 했다.
왕중양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더듬더듬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난…… 난 도사의 몸이오……."
"그럼 나도 도사가 되면 되겠지요? 낮에는 도사 노릇을 하고 밤이면 오라버니의 따뜻한 이불이 되어 드리겠어요. 도사들에게는 원래 좋은 이부자리가 없는 법, 밤이면 얼마나 한기를 느끼겠어요?"
그녀는 마치 꿈을 꾸듯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왕중양이 그저 목석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녀는 더욱 노골적으로 매달렸다.
"오라버니가 싫다면 어쩔 수야 없겠지만…… 하지만 저를 한 번만 보기라도 해 주세요. 제 살결이 어때요? 희지요? 얼굴은 또 어떠세요?"
이처럼 곤혹스런 순간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왕중양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녀가 또다시 거머리처럼 달라붙으려 하자 모용준이 불쑥 끼여들었다.
"형님, 원래 저는 형님을 도우려 했었소이다. 형님을 대신해서 사내에게 굶주린 이 여인의 욕망을 채워 주고자 했지요. 허나 죽어도 싫다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더군요. 오로지 형님만을 만나겠다는 게 아니겠어요? 그 정을 봐서라도 매몰차게 뿌리치지는 못할 겁니다."
이제는 모용준까지 합세하여 왕중양을 밑둥에서부터 마구 뒤흔들어 놓을 작정이었다. 왕중양이 줄곧 부처님인 양 눈을 감은 채 가슴을 닫아 버리자 모용준은 집요하다 못해 발악을 해댔다.
"형님, 형님은 아마도 굴속에서 나오는 게 나을 겁니다. 납한 태자님을 만나 뵈면 형님은 태자님의 상빈으로 대접받을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이 여인과의 혼사도 원만하게 치를 수 있을 겁니다."
이 말에 가장 기뻐 날뛴 것은 왕정아였다.
"오라버니는 이 굴속이 그리도 좋다는 말이에요?"
"정아, 어서 여기를 떠나 주오."
드디어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침통한 목소리였다.
"이 굴속에서 난 나만을 위해 목숨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니오."
"오라버니가 정 나오지 않겠다면 내가 들어갈 수도 있잖아요?"
"정아, 제발 여기를 떠나주오.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것만이 나를 위하는 길이오. 난 정아를 돌볼 겨를이 없소. 난 전진교의 교주……."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더 이상 애원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왕중양의 굳은 뜻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왕중양이 무슨 일이 있어도 굴속에서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녀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오라버니는 훌륭한 사내예요. 오라버니가 떠난 후 난 매일 밤마다 꿈을 꾸었답니다. 난 오라버니가 세상을 떠난 줄로만 알았어요. 후에 소문을 들으니 한 사내가 금나라 놈들에 저항하며 싸우고 있다고 하더군요. 모두들 중원 땅에서 으뜸가는 사내 대장부라고 칭찬을 했어요. 그런데 그의 이름이 왕중양이라는 말을 듣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아세요? 그분이 내 오라버니라고 자랑했더니 모두들 믿어 주지를 않았어요……."
왕정아의 서러움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녀는 눈가를 훔치며 돌연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어요. 이것으로 우리는 영원히 이별을 해야 하는 건가요.? 저승에서나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고개를 돌린 그녀가 모용준에게 공손한 태도로 말을 건넸다.
"당신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지만 헛수고만 한 셈이네요. 그러나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요."
말을 마친 그녀는 갑자기 몸을 획 한쪽으로 돌리더니 나는 듯 달려갔다. 왕중양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강한 빛을 냈다. 그녀가 돌문에 자기의 머리를 박고 만 것이다. 머리가 부서 졌는지 그녀의 머리에서는 피가 계속 쏟아졌다. 그녀는 맥없이 땅바닥에 쓰러져 경련을 일으켰다. 왕정아는 겨우 머리를 들고는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난 마지막으로 오라버니를 보고 싶어요, 오라버니, 그…… 그 눈 언저리가 아……직도 젖어 있지 않나요?"
왕중양은 안개가 긴 듯 흐릿한 시선 속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죽어 가는 그녀를 향해 어떤 말을 해줄 수가 있겠는가. 그녀는 이미……이미 죽었다. 왕중양은 잠시 손을 들어 무언가를 잡으려는지 허우적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손은 맥없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형님의 인품에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지는군요 저에게는 왜 이토록 진심으로 대해 주려는 계집이 없는지……."
모용준의 탄식 소리를 들으며 왕중양은 더 무거운 숨을 쉬었다. 문득 모용준만 아니었다면 정아 역시도 이렇게 죽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에 주먹이 저절로 모아졌다.
"모용준이 놈! 난 네 놈을 꼭 죽이고 말 것이다!"
모용준이 깜짝 놀라며 왕중양을 설득하려 했다.
"형님, 한낱 계집에 불과한 목숨인데 뭘 그러시우. 이런 말도 있지 않소. 형제는 수족과 같고 마누라는 옷과 같다고 말이오. 수족은 바꿀 수 없어도 옷이야 얼마든지……."
"네 놈을 언젠가는 죽이고 말테다!"
왕중양의 독기 어린 눈빛에 모용준은 은근히 겁을 집어먹었다. 그러나 철창에 갇힌 호랑이일 뿐이란 사실을 상기하며 얼른 자세를 가다듬었다.
"형님, 난 아직도 형님의 동생이 아니오? 동생들에게 너무 매정하게 굴지 마시오. 그러니 셋째는 코빼기도 내밀지 않는 게 아니겠소? 난 날마다 형님이 얼마나 고독해 할까 걱정이 돼서 잠이 다 오지 않는단 말이오."
가슴이 쓰리고 입 안으로 쓴맛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더는 가증스런 모용준과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왕중양은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도적놈은 제 발이 저린 법이지."
"그 말씀이 맞소. 그리고 난 오랫동안 궁리를 했었소. 형님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를 말이오. 오늘 내가 그걸 형님에게 드릴려고 가져왔소이다."
또 무슨 얄팍한 수로 원성을 쌓으려고 하는지 왕중양은 내심 부아가 치밀었다.
모용준이 뒤에 있던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수하들이 다른 가마를 들고 다가왔는데 그들의 동작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건 내가 형님에게 드리는 선물이오. 어서 받으시지요."
다시 모용준의 신호에 따라 가마 안에서 한 여인이 가볍게 걸어 나왔다.
"아니, 저 여인은!"
여기서 자지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놀라움을 추스리기도 전에 모용준이 다시 입을 놀려댔다.
"형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두 계집이었소. 하나는 임조영이었지만 소유하지 못한 게 한으로 남을 뿐이오. 허나 자지는 얻었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니겠소. 하하, 한 가지 궁금할 것이오. 처음부터 자지가 나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소. 내가 손을 썼지요."
왕중양은 뜻하지 않게 이어진 충격의 여파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모두가 모용준이 꾸민 짓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치가 떨렸다.
"형님, 왜 후회를 하고 계십니까요? 원래 형님의 몫이었던 옷을 내가 입은 셈이지요. 막상 옷을 빼앗아 입고 나니 차츰 후회가 들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오늘 이렇게 형님의 옷을 돌려드리려 합니다. 형님께서는 꼭 받으셔야 합니다. 이 굴속의 밥은 몹시 추울 테니까요."
"자지, 어서 말을 해 봐라!"
모용준은 대답 없는 왕중양 대신 자지를 채근했다.
"큰공자님……."
자지는 왕중양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과연 부럽소이다. 모든 여인들이 형님에게는 마음을 쉽게 열어주니 또 한 번 감탄하고 또 내 자신이 미워지는군요."
모용준이 혼자서 탄식을 했다.
자지가 이때 왕중양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왕중양의 눈에는 오히려 자지의 좋지 않은 안색이 염려되었다. 아무래도 무슨 시름에 싸여 있는 것만 같았다.
"혹시, 나쁜 독에 중독된 것은 아닌가?"
왕중양도 목소리를 죽여 묻자 자지가 더욱 슬피 울며 어깨를 들먹였다.
"저자가 독약을 먹였어요. 미약이라 하는데 독성이 강하고……, 또 내가 발작을 할 때면 저자는 나에게 임조영이라 자칭하라며 못살게 굴기도 해요. 흑……"
왕중양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뼈마디가 으스러질 정도로 그는 주먹을 틀어쥐며 이를 갈았다. 자지의 눈물은 왕중양의 가슴에 불을 당기기에 충분했다.
왕중양이 모용준에게 말 하나하나를 짓씹듯 물었다.
"모용준, 네가 자지를 내게 주겠다고 했지?"
"그럼요. 형님께서 굴에 들어가도록 허락만 하시면 이내 드리리다."
말을 끝낸 모용준이 무심과 눈을 맞추며 낄낄거렸다. 그러나 왕중양은 선뜻 그럴 수가 없었다. 왕중양이 여인을 굴속으로 불러들인다면 그의 명성은 더러워질 게 뻔했다. 한편 들여 놓지를 않는다면 왕중양이 죽기 일보 직전의 사람을 돌보지 않았다는 소문으로 떠돌게 될 것이다. 왕중양이 갈등을 겪으며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모용준이 소매 안에서 단검을 꺼내 자지를 위협했다.
"자지, 어서 빌어라. 만약 너를 구해 주지 않으면 난 너를 죽여 버릴테다!"
단검을 빙빙 돌리며 모용준은 자지를 더욱 매섭게 위협했다. 그를 주시하고 있는 왕중양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왕중양이 화기를 가라 앉히며 어렵게 입을 때었다.
"좋다. 네 말대로 할 테니, 어서 이 안으로 들여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