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검(劍), 혈(血), 유성(流星)
의전으로 접어드는 길목.
화섭자의 불빛이 청석으로 표면을 번쩍이게 하고 있었다.
이 곳은 금지(禁地)의 지역, 영패(令牌)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감히 들어
서지 못한다.
지금 일단의 무림인들이 의전에 딸린 취의정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나
같이 특징이 없는 사람들이다. 각양각색의 의복, 불도속(佛道俗)의 인물들
이 두루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천하각지에서 연회에 참가하기 위해 온 사자(使者)들이 아니던가?
형산(衡山) 원장로(猿長老).
머리카락이 학의 털처럼 희고 등이 굽은 꼽추노인.
얼굴 모습이 원숭이를 닮았기에, 강호인들은 그를 일컬어 원장로라 하는
것이다.
태백파(太白派) 불노선인(不老仙人).
대춧빛 붉은 얼굴에 늘 미소를 짓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태백파를 강호의 오십 개 방파 안으로 끌어올린 주역으로, 백도계에
서는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는 노명숙이다.
어린금갑(魚鱗金甲)을 걸치고 있는 인물은 천산(天山)의 웅주(雄主)인 비
천은룡(飛天銀龍) 냉옥청(冷玉淸). 그는 칠금신법(七擒身法) 하나로 강호
제일쾌(江湖第一快)라 불리고 있는 인물이었다.
단아한 인상의 중년도인도 있는 바, 그는 손에 불진(拂塵)을 들고 있다.
불진은 먼지털이이며 또한 병장기가 된다.
그는 습관적으로 불진을 흔들어 대는 바… 강호의 밥을 일 년 이상 먹은
사람이라면, 그가 사자도인(獅子道人)이라고 불리우는 옥정도장(玉鼎道長)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도처에서 몰려온 강호명숙들, 숫자는 정확히 여든하나였다.
취의정 안, 연검천은 예복 차림으로 명숙들을 맞이하며 히죽 웃고 있었
다.
'오늘 밤, 무림사가 고쳐진다. 훗훗, 잠풍은 백도인을 가장한 폭풍귀혼조
(暴風鬼魂組)에 암살당한다. 아무도 오늘의 혈겁을 막지 못한다!'
이 밤, 달빛은 검은 구름에 잠기어 있었다.
칠야(漆夜)처럼 어두워지는 밤.
연검천은 오늘 하루를 위해 오 년 내내 비밀공작을 해 왔던 것이다.
'잠풍은 허수아비. 훗훗, 그는 취의정 안에서 영문도 모르는 채 살해된
다!'
연검천은 잠풍을 비웃고 있었다.
잠풍은 사해(四海)에 이름을 떨치는 대영웅이되, 연검천은 그를 비루먹은
허수아비로 취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살해된다. 모든 과정은 예정에 따라 처리될 것이다.
백도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풍운십성자(風雲十聖子)가 장로회의를 이끌고
있는 한, 사태의 수습은 연검천이 바라는 대로 진행이 될 것이다.
연검천이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에 불과할 것이다.
잠풍이 죽어 넘어지는 걸 보고 분노의 사자후를 터뜨리는 것, 그리고 잠
풍을 위해 상복(喪服)을 백 일 정도 입어 주는 것.
두 가지 일을 하는 것만으로 백도의 관산검맹은 연검천에게 접수되리라.
연검천이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시종 차림의 무사 하나가 슬
쩍 곁으로 다가서며 나지막한 소리로 잠풍의 근황을 전했다.
"맹주는 의전을 머물러 있습니다. 탁무군이라는 애송이와의 면담은 곧 끝
날 겁니다."
"별다른 이상은 없는가?"
"전무합니다."
"좋아."
연검천은 히죽 웃었다. 그의 입가에 번지고 있는 웃음은 그가 오랫동안
참고 있었던 악마의 웃음이었다.
잠풍은 의전의 좌석에서 나서는 대로 취의정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는 최근 들어 지극히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관산검맹은 무수한 세력의 연합단체인 이상, 잠풍은 늘 외부세력의 주도
자들에 대해 예우를 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곳에 오래 머물러도 좋네."
잠풍은 백무영을 향해 또다시 특유의 미소를 보내 주었다.
백무영은 머쓱한 표정 가운데 손에 잔을 쥐었다.
그는 잔을 천천히 들었으며, 잠풍은 술주전자를 들었다가 천천히 기울였
다.
술잔에 술이 담기기 시작할 때.
"호호호… 맹주님! 정말 자상하십니다."
냉약빙은 영롱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생긋 웃었다. 해맑은 웃음이다.
그녀는 웃는 모습이 퍽 아름다운 여인.
하이얀 치열이 장밋빛 입술 사이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사랑스럽기 짝이
없다.
냉약빙은 상냥한 표정 가운데 손을 쳐들어 머리카락을 가볍게 매만졌다.
하이얀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악마! 넌 죽어야 돼!'
냉약빙은 웃음 뒤에 비수를 감추고 있었다.
그녀는 이 순간을 위해 수년을 웃어 왔다.
이 한순간을 위하여,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늘 초조와 번뇌에 휘어 감
기어 있었던 것이다.
잠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웃고 있었다.
"오늘따라 약빙의 용모가 돋보이는군. 헛허, 강호청년들치고 약빙에게 눈
독을 들이지 않은 인물이 없으니."
잠풍은 껄껄 웃다가 다시 백무영을 바라봤다.
그는 긴장을 완전히 풀어 버린 듯 보였다.
"자넨 행운아야. 관산검맹의 장중주(掌中珠)라 불리우는 약빙과 태중정혼
을 했으니… 프핫핫! 자네의 등장으로 무수한 영걸(英傑)들이 피눈물을
흘릴 게 아니겠는가?"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제끼기 시작했다.
백무영도 따라 웃었다. 그의 웃음은 메마른 웃음이었다.
'이제 그 시간이다!'
그는 애써 태연스럽게 숨을 몰아쉬었다.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할 수 없다.
승부는 단 한순간에 결정이 된다.
의전 안에는 절세고수들이 득실거리고 있지 않는가.
단 일 검으로 차단하지 않는다면, 실패할지도 모른다. 냉약빙은 잠풍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아양을 떨며 무엇인가 이야기를 했다.
좌중의 분위기는 상당히 느슨해졌다.
포검(抱劍)한 채 장내를 지키고 있는 무사들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 중에는 술을 한 잔 마시면 좋겠구나,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방심
한 나머지 고향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탁무군이라는 이
름을 가진 자에 대해 꽤나 부러움을 갖는 무사도 있을 것이다.
절정(絶頂)을 향해 치달아가는 찰나(刹那).
백무영은 애써 무심경(無心境)을 유지하며 왼손을 조용히 쳐들었다.
'한순간에…….'
그는 잠풍을 힐끗 바라봤다.
우연인지 잠풍도 문득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는 바, 다시 그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보아도 낯익은 눈빛이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의 눈빛 마냥
친근한 눈빛.
백무영은 색혈일검(索血一劍)의 기수식(起手式)을 취하는 동시에, 그 눈빛
이 누구의 눈빛인지 문득 느끼게 되었다.
그가 머릿속에 떠올린 인물은 도저히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설마, 그란 말인가?'
백무영은 누군가를 문득 기억하며 내공을 흩트리기 시작했다.
잠풍이 그라면, 절대 베어서는 안 된다.
그가 누군가의 영상을 기억하며 살식(殺式)을 거두고자 할 때였다.
갑자기 그의 고막 속으로 천둥 소리가 들려 왔다.
"바보 자식! 예정대로 해라!"
청천벽력 터지는 전음입밀 소리이다.
그 소리는 백무영의 영혼을 지배할 정도로 엄청난 소리였다.
'이 목소리는……?'
백무영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무심경에 도달한 백무영이었으되, 이 순간만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마음의 지배를 받지 않을 정도로 완벽히 단련이 되
어 있었다.
그의 의식이 마비되어 가는 찰나일지언정, 그의 좌수(左手)는 색혈일검의
살인 수법에 따라 허공을 단선(單線)으로 쪼개어 나가는 것이다.
죽음의 손, 이미 완숙된 살수의 손이다.
희고 갸름한 손이 떨치어지는 데에는 찰나(刹那)의 순간이 소모될 뿐이
다.
잠풍은 웃고 있느라 호신강기(護身强氣)를 흐트리고 있었다.
아무도 주의하지 않는 방심의 순간.
백무영의 왼손은 잠풍의 가슴을 향해 힘차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절대절명(絶對絶命)!
백무영은 파음성(破音聲)도 일으키지 않고 일 장(一掌)을 격출해 냈다. 그
의 손이 잠풍의 가슴에 닿는 찰나, 도처에서 검을 뽑는 소리가 터져 나왔
다.
"네가 감히 암산(暗散)을?"
"저 자가 자객(刺客)이다. 베어라!"
요란한 쇳소리, 별빛처럼 뿌려지는 은색(銀色) 검화(劍花).
무사들의 거친 호흡 소리, 기합 소리, 어지럽게 일어나는 검은 그림자.
암살의 순간은 순간적으로 용광로 마냥 달아올랐다.
호의무사들은 거의 동시에 검을 뽑아 들고 백무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호
의무사들이 아무리 빨리 움직였다 하더라도, 백무영의 손보다 빠르게 움
직일 수는 없다.
펑-!
폭음이 일어나는 가운데, 잠풍의 몸뚱이가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우욱!"
그는 비명 소리를 내며 입에서 피를 한 모금 뿜었으며, 실 끊어진 연처럼
떠올라 벽에 가서 부딪쳤다.
잠풍의 몸뚱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나뒹구는 찰나, 백무영의 등과 허리
부분에 철검(鐵劍)의 날이 스치어졌다.
츠츳-!
옷자락이 베어지고, 선혈(鮮血)이 분출된다.
허공 가득 현란한 검화가 피어 오르는 가운데, 백무영은 신체 아홉 군데
에 검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잠풍의 호법들은 예상보다 막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탁자가 베어지고, 벽에 검흔(劍痕)이 쭈욱쭉 파이는 가운데 아수라장이
벌어진다.
냉약빙은 어느 순간, 허리띠 삼아 차고 있던 연검(軟劍)을 끄집어 내고
있었다.
그녀는 대명무문의 노장로들과 연수(連手)하여 잠풍 휘하세력을 모조리
벨 예정이었다.
그녀가 검을 휘두르려고 할 때, 누군가의 조급한 목소리가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검을 거두어라! 암살은 실패다. 잠풍은 죽지 않는다. 빌어먹을! 그는 천
잠사(天蠶絲)를 입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명무문의 요인 혈수서생(血手書生)이었다.
그는 잠풍 쪽으로 다가서다가 멈추었는 바, 이유는 잠풍 둘레에 이십여
명의 무사들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었다.
"으음… 나, 나는 괜찮다!"
잠풍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렸다.
잠풍은 거의 기적적으로 목숨을 보전한 것이다.
"천려일실(千慮一失)이다. 잠풍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천잠사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교활한 자! 크으, 어쩔 수 없다. 일단 냉혈살흔을 우리 손
으로 진압해, 그와 우리가 연관이 없는 듯 조작해야 위기를 벗어난다."
혈수서생 이하, 대명무문 쪽 무사들은 신호를 하는 가운데 백무영 쪽으로
다가섰다.
백무영은 잇달아 검에 베임을 당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문 쪽으로 물러
나고 있었다.
그는 호법무사의 손에서 뺏어 든 검을 들고 있는데, 검은 중간 부위가 끊
어진 상태였다.
"비켜라!"
백무영은 검을 흔들어 무수한 은색(銀色) 원호(圓弧)를 뿌리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상처받은 맹수는 더욱 포악해지기 마련인가?
그는 대리석 기둥 두 개를 검기로 베어 버렸으며, 그로 인하여 천장이 무
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돌더미가 와르르 쏟아지며 의전이 뒤흔들렸다.
이 곳 저 곳으로 격발되는 장풍 소리가 우레(雨雷) 소리처럼 퍼부어지는
가운데, 방 안의 기물이 하나도 남김없이 산산이 바수어진다.
벽력(霹靂)의 순간.
백무영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창틀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는 등에 검을 맞는 것을 불사하면서 창문을 향해 몸을 날리는 것이다.
그의 몸뚱이가 창문을 부수는 찰나였다.
호법무사들에 뒤덮여 있던 잠풍은 분노의 표정 가운데 손을 번쩍 쳐들었
다.
"내 손으로 널 처단하겠다!"
소매섶이 떨치어지는 가운데, 붉은빛이 번뜩거렸다.
무엇인가 섬전(閃電)처럼 빠르게 날아올랐으며, 그 순간 백무영은 등줄기
가 화끈거림을 느꼈다.
그의 등줄기로 무엇인가 깊숙이 꽂혀 드는 찰나, 그의 몸뚱이는 창문을
부수며 야음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냉약빙은 넋 나간 표정을 지으며 입을 따악 벌리고 있었다.
암살이 실패했기에 망연자실하는 게 첫째 이유.
또 하나의 이유라면, 방금 전 그녀가 본 무서운 투혼에 대한 경이 때문이
리라.
'사자… 아아, 그는 용맹한 사자다!'
인간의 상대에 대한 감정은 찰나적인 인상에 의해 결정지어지기 마련이
다.
냉약빙은 백무영의 무시무시한 용맹을 보고는 마음이 저릿해짐을 느끼는
것이다. 그녀가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손이 어깨에 닿
았다.
냉약빙은 잠풍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로 곁으로 다가섰음을 알고 기겁을
했다.
'발각인가?'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백무영은 그녀의 정혼자 행세를 하며 나타났다.
그러한 이상, 냉약빙 일행의 음모가 발각된다는 건 기정사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냉약빙이 죽음을 느낄 때, 그리고 대명무문 쪽 무사들이 이젠 마지막이라
고 생각하며 좌절할 때였다.
잠풍은 냉약빙의 동그란 어깨에 손을 대면서 피투성이 얼굴 가득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허수아비 맹주에 불과한 인물.
그런데 그의 기도는 대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자는 탁무군이 아니었을 것이다."
"으으……!"
냉약빙은 할 말이 없는지라, 얼굴에 땀을 흘릴 뿐이다.
잠풍의 말 한 마디로 인해 대명무문의 운명이 결정지어질 것이다. 냉약빙
이 제압되고 다른 무사들이 제압된다면, 종대선생이 주도하는 대명무문의
비밀조직에 가담한 삼천여 무사들의 명단(名單)은 공개될 수밖에 없을 것
이다.
운명이 엇갈리는 찰나.
잠풍은 냉약빙의 동그란 어깨를 매만지며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노련한 솜씨로 보아 숙달된 자객이다. 분명 대명무문이 보낸 암살자였을
것이다."
"대, 대명무문!"
냉약빙은 몸을 으스스 떨었다.
잠풍은 애써 태연자약해하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포악하지. 늘 나를 죽이려 했지. 하나, 늘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
고 살아났다. 오늘 또다시 위기를 넘긴 것이다."
천만다행한 일이다.
잠풍은 냉약빙이 대명무문의 지도자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다행이다. 맹주는 가짜 탁무군이 나와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일
단 위기는 넘겼다!'
그녀는 현기증에 가까운 허탈감을 느꼈다. 잠풍이 뭐라 말하는지 잘 들리
지도 않는다.
지금 그녀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가짜 탁무군을 빨리 제거해야 대명무
문의 비밀이 완전히 유지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어쩔 수 없다. 그를 추적 살해하여 살인멸구(殺人滅口)해야만 한다!'
무림은 비정한 대지이다.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베어야만 하
는 것이다.
냉약빙은 허탈한 표정 가운데 청부자객을 제거할 몇 가지 대안을 생각하
며 부서진 창문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데, 창 밖에서는 유성이 흰 궤적을
끌며 낙하하고 있었다.
취의정의 유황등에서는 매운 연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지금 이 곳의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도검에서 흘러 나오는 예기(銳氣)와 한기(寒氣)를 넘어서는 차디찬 심기
(心氣)가 취의정의 공기를 싸늘하게 냉각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 놈이 거사를 망치다니!"
폭갈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쥐새끼 한 마리로 인해 모든 게 실패했다."
연검천은 애검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사지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는 십 년을 바쳐 오늘 하루를 노려 왔는 바, 일각 전 모든 계획을 백지
화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소식은 거사 직전에 전해졌다.
폭풍귀혼조(暴風鬼魂組) 팔십일 인에게 살인밀명이 하달되고 실행이 되는
찰나에, 모든 계획을 깨뜨려야만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관산검맹은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백면서생을 가장하고 은잠해 들었던 신비한의 암살 기도로 인해 수천 무
사에게 철야 경계령이 하달된 것이다.
모든 무사는 연회 준비를 그만두고 정해진 지역으로 가서 철야잠복을 해
야만 했다.
지하 연무관(鍊武關)에서 수련하고 있던 비밀 호위무사들이 모조리 쏟아
져 나와 요소요소를 감시하기 시작했는 바, 그 중에는 연검천이 은근히
두려워하던 팔백사십 금강천왕위사(金剛天王衛士)들이 끼여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연회 분위기로 인해 느슨해지던 맹내의 분위기는 살벌하
게 냉각되었으며, 모든 외부 인사는 감찰당의 무사에 의해 은밀히 조사당
하기 시작했다.
잠풍은 부상을 이유로 폐관에 들어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하였으며, 오늘 밤의 연회는 무기한 보류가 되었다.
모든 일은 거의 일각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빠드득! 그 잡놈 하나로 인해 모든 게 망쳐 버리다니!"
연검천의 눈에서는 시퍼런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이번 일에 청춘을 걸었다. 그는 오늘 밤 잠풍을 죽게 해야만 했다.
모든 일은 십 년에 걸쳐 계획되었으며, 실패란 절대 용납되지 못할 상황
이었다.
한데, 단 한 명의 이단자로 인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
다.
"나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고 만단 말인가?"
연검천의 난색은 밀랍처럼 희어졌다.
'잠풍이 비밀 장소로 칩거해 든 이상, 그를 제거하고 난세(亂世)를 유도
하는 계획은 완전 실패했다!'
실패란 성공을 낳게 하는 산모라던가?
그러나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실패한 자에게는 치욕과 수치가 전해질
뿐이다.
취의정 안에는 음산한 눈길을 흘리는 무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죽어 버린 눈빛들이다. 가히 회색의 눈동자들.
부모를 죽이라 하더라도 죽인다.
자식을 베라 해도 베어 버린다.
그들 자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회색의 눈동자를 지닌 자들은 명령이라는 이름하에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고 처리해 버리는 악마의 살수들이다.
일컬어 폭풍귀혼조.
천하각지의 흑도(黑道)에서 뽑혀진 암살의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오늘 밤 백도명숙들로 위장하여 잠풍을 제거하기로 안배되었던
바, 탁무군이라는 애송이가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거사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마업(魔業)이 오늘 밤으로 인해 일 년 후퇴했다. 빠드득! 잠풍을 죽일 절
호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적어도 반년을 기다려야만 한다."
연검천의 머리카락이 빳빳이 일어났다.
지금 그의 비위를 거슬리는 일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그의 장풍에 맞고 떡
고물처럼 으스러져 버리리라.
'대종사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는 누군가에 대해 전율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거사의 실패로 인해 나의 지위는 세 단계 하락될 수밖에
없다!'
그의 숨결이 점점 거칠어졌다.
'모든 파란이 그 때문에 벌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놈을 잡아 죽여
야 한다. 그 다음, 기회를 노려 이차 거사를 진행하자!'
연검천의 입가에는 또다시 사악한 웃음이 번졌다.
"그 자를 추적하라!"
"……."
"……."
모두 말이 없다.
폭풍귀혼조는 말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은 오직 하나,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처단하라! 놈의 살가죽을 벗겨 요로 깔고 자겠다. 크크, 물론 내
앞으로 끌고 올 때에는 시체가 아니어야 한다."
연검천은 사악하게 외치며 손을 쳐들었다.
떠나라는 신호이다.
폭풍귀혼조 전원이 사라지는 데에는 거의 한순간도 걸리지 않았다.
취의정은 일순간 텅 비게 되었다. 거기 팔십일 인이 머물러 있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연검천은 뒷짐을 지고 다가갔다.
이 밤따라 별빛이 찬란하다. 이 세상 모든 보석을 다 깔아 둔다 하더라
도, 이 밤의 화려함은 능가하지 못하리라,
"잠풍이 은둔했다는 건 그가 심각하게 부상당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따지자면, 그가 죽을 가능성도 있다는 게 아니겠는가? 그가 상처를 치료
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일단은 암살의 배
후를 밝혀야 한다. 그 일이 중요하다."
연검천은 얼굴 근육을 실룩실룩거렸다.
이 밤, 그는 혼자 잠들지 못하리라.
은밀한 장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색녀(色女)들을 찾아가 가슴을 떡
주무르듯 매만지고, 채찍질을 해 가며 계집들의 비명 소리를 들어야만 직
성이 풀릴 것이다.
사실 아름다운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비명 소리는
묘한 쾌감을 주지 않는가?
그것은 연검천이 위장 생활의 권태감과 위기감 가운데 자연스럽게 갖게
된 비밀스러운 도락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었으며, 몇 걸음도 가기 전에 이미 성욕이 불같이 타오르
게 되었다.
성욕은 야망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는 말대로, 야망이 강한 영웅은 여색을 밝히기 마
련이다.
선혈과 죽음으로 얼룩진 강호인에게 있어 성이라는 건 술보다 더한 치료
제다.
'며칠 안으로 냉약빙, 그년을 밟아 주려 했는데… 얼마간 더 기다려야겠
군!'
그는 사이한 눈빛을 흘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새벽이 되기에는 아직 한 시진 정도의 시각이 있다.
백무영은 본능에 따라 안전한 장소로 찾아들었으며, 어둠에 젖은 하늘을
바라보며 적어도 한 시진 정도는 안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을 굳혔다.
위기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느긋해할 수 있다는 건, 그가 이미 완숙되었다
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솔직히 말해, 자신이 의맹의 주도자에 의해 길러졌다는 것을 알아 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수확이 아니겠는가?
그를 키운 장본인은 바로 잠풍인 것이다.
잠풍은 허수아비 맹주 노릇을 하고 있는 가운데, 무서운 세력을 외부에서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술창고의 천장을 보며 누워 있었다.
검에 베인 상처는 상당한 고통을 주었다.
한 군데 상처는 갈비뼈 두 개를 끊었다.
발등에는 쇄옥혈부(碎玉血斧)라는 기병(奇兵)에 찍힌 자국이 움푹 패였으
며, 피가 흥건히 흘러 신발을 적실 지경이다.
가장 큰 상처는 등에 남아 있었다.
그는 피가 어느 정도 아물기를 기다렸다가 등에 박힌 검자루에 손을 대
었다.
검을 던진 장본인은 잠풍이었다.
그의 비검술(飛劍術)은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바, 그는 의도적으로 요혈
을 피한 부위에 검을 꽂은 것이다.
검이 박혀 있는 부위는 근육이 단단히 뭉쳐 있는 주위이기에, 상처는 크
되 결정적인 상처는 입지 않았다.
백무영은 검자루를 손으로 쥔 다음, 심호흡을 해 가며 검을 힘껏 뽑아 냈
다.
그는 재빨리 혈도를 스스로 점해 지혈(止血)을 하면서 검을 눈가로 갖다
댔다.
신기한 것은, 이제까지 한 마디의 신음 소리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검은 한옥(寒玉)으로 만든 보검이었다.
백무영의 등줄기 속으로 파고들었다가 빠져 나온 보검의 날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검자루에는 상감(象嵌 : 금속, 도자기 등의 표면에 각종 무늬를 파서 그
속에 금은을 넣어 채우는 기술)으로 글씨가 패여 있었다.
<용혼(龍魂)>
백무영은 느낌이 없는 눈빛을 던지며 검자루 부위를 바라봤다.
'이런 종류의 검자루는 비밀 서랍의 역할을 한다!'
백무영은 천천히 검자루를 떼어 냈다.
아니나 다를까? 검자루는 힘을 조금 가하자 검신 부위에서 분리가 되어
떨어졌으며, 그 순간 종이 뭉치 하나가 백무영의 손에 떨어져 내렸다.
"밀지가 있다."
백무영은 재빨리 종이 뭉치를 폈다.
우선 보이는 건 한 알의 검은 단약이었다.
백무영은 단약의 생김새와 냄새만으로도 그것이 신속한 치료 효과를 가
진 금창신약(金瘡神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검으로 찌르고, 약을 주고……."
백무영은 문득 잠풍이라는 자의 용의주도한 준비에 대해 역겨운 감정을
느꼈다.
만에 하나 그가 갖고 있는 이유와 명분이 불리한 것이라면, 그는 이제까
지 백무영의 일생을 제멋대로 농락한 대가로 심장을 도려 내야만 할 것
이다.
그는 금창신약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가운데, 쪽지를 활짝 펼쳤다. 쪽지에
는 특이한 기호가 적혀 있는 바, 그것은 혈의육존(血衣六尊)과 그만이 해
독할 수 있는 천자(千字)의 암호문 글씨였다.
<나에 대해 어떠한 감정을 품든지 자유다. 그리고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비밀은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단 하나 밝힐 수 있는 건, 모든 과정이 혈채(血債)를 풀기 위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잠풍은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메웠는 바, 그 안에는 백무영이 생각하고
있는 사항보다 더욱 엄청난 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창고 안에는 빛이 없다. 백무영은 안력을 최고도로 발휘해서야 겨우 쪽지
의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너의 일 검(一劍)은 난세(亂世)의 풍운(風雲)을 가속시키리라.
넌 대세가 어찌 돌아가는지 이해할 필요가 없다. 넌 하라는 대로 하면 된
다. 대세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이제 네게 또 하나의 밀명을 내리겠다.
너로 하여금 나를 치게 한 것은 그 일을 하기 위한 준비 과정일 뿐이다.
마교(魔敎)로 파고들어야 한다.
너는 그 곳에서 한 명의 무림절대자를 제거해야만 한다. 그의 이름은 함
백(涵伯), 그는 강호마도에 군림하고 있는 인물이다.>
함백, 그가 바로 최후의 살해 대상이었다.
그는 바로 연환마교(連環魔敎)의 창건자.
그는 강호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무림집단을 이끌고 있는 인물이다.
수십만 백도인이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암살을 퇴치했다.
그가 바란다면 관산검맹은 삼 년 안에 무너지는 바, 그는 강호 모든 세력
의 비난을 받으며 강호를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겉으로나마
관산검맹과 평행선을 그으며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데, 잠풍이 백무영을 십여 년 간 비밀리에 키워 함백을 제거케 하다니?
쪽지의 글이 이어진다.
<난 널 믿는다. 넌 당금의 백도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연무(鍊武) 과
정을 거쳤다.
너의 진정한 무공은 나를 능가하는 수준이다. 다만 넌 미완성의 상태일
뿐이다.
그러나 암전(暗箭)이 되어 적을 죽이는 것은 성사할 수 있는 수준이라 본
다.
방법은 현재 없다. 방법은 네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중요한 건, 네가 이제부터 나와 완전히 무관한 사이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는 것이다.
빨리 떠나라. 나의 수하들이 널 추적 살해하려 들 것이다.
그들은 널 모른다. 솔직히 넌 의맹의 무사가 아니다. 넌 의맹의 외부에서
길러진 인물이다.
네가 죽게 되어도 도와 줄 사람은 없다. 넌 완전히 고립된 것이다. 이후
네게 연락도 하지 않겠다.
함백을 제거한 후, 모든 걸 알게 되리라.>
잠풍은 글을 그렇게 끝냈다.
백무영은 글을 세 번 읽었으며, 그 후 쪽지를 입 안에 털어 넣고 우물우
물 씹어 삼켰다.
'잠풍은 겉보기 허수아비 맹주다!'
그는 천천히 드러누웠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체력을 회복하고 내공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마저 정지할 정도로 완전한 휴식상태에 빠져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겉보기일 뿐이다!'
백무영은 자신이 겪은 일을 토대로 상황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는 마교에 자신의 힘이 노출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백도
인들에게 누명을 써 가면서도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잠풍은 철두철미한 지략가였다.
그는 마도 쪽이 자신을 과대평가할 경우, 마각(馬脚)을 드러내어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힘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마교의 자신에 대한 암살 계획을 간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
하기에 그는 그것을 저지하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궁여지
책으로 백무영을 끌어들였을지도 모른다.
암살 계획을 자신의 힘으로 막을 경우, 연환마교에 자신의 정체가 노출될
것이기에 감히 직접 막지는 못하고… 다만 자신을 누군가 노리고 있기에
자구책으로 호위세력을 늘리고 숨어들어야만 한다고 변명하기 위해, 백무
영이 대명무문에 의해 선택되어 자심을 노리는 일 검(一劍)을 긋게 하였
을지도!
밤이 엷어져 간다. 새벽은 코앞에 닥치고 있었다.
오늘부터는 힘든 나날이 계속되리라.
백무영은 가장 고독한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모든 길은 안개가 뒤덮여 있다.
그가 완벽한 무사로 길러졌다고 하나, 천하 모든 세력을 상대로 싸워 살
아남는다는 건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죽음이란 몹시 힘든 일이기도 하고, 또한 인간에게 있어 가장 쉬운 선택
일 수도 있다.
백무영은 연무 가운데 죽음 근처까지 가 본 바가 무수하다.
죽음을 확실히 알지는 못하나, 비슷한 느낌은 무수히 체험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 공포스러운 것만은 틀림이 없는 일이었다.
여명(黎明).
모든 새벽은 찬란하며 신비하다. 산이 어둠의 장막에서 깨어나며, 하늘은
연청색으로 타오르며 푸르게 물들어 간다.
천지사방이 암회색으로부터 연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장관은 압도적이
다.
중곤륜의 산세는 온통 핏빛이다.
이미 가을은 깊을 대로 깊은 것이다.
관산검맹 전역은 무수한 무사들에 의해 뒤덮여 있었다.
모든 도로가 봉쇄되고, 수상해 보이는 사람은 일단 제압되어 신분을 증명
할 때까지 갇혀 있어야만 한다.
관산검맹의 남동쪽.
황톳길이 연천진(連天鎭) 방향을 끝없이 이어 나가고 있다.
관도 주변에는 흰 자작나무 숲이 무한히 펼쳐져 있다.
새벽 안개가 자작나무 숲을 휘어 감으며 햇살에 찢어지고 있을 때, 여러
개의 인영이 언뜻거리는가 하더니 짙은 안개 속으로 일곱 명이 사뿐히
내려섰다.
그들은 일제히 거목의 뿌리 부분에 눈길을 던졌다.
얼핏 보면 모르되, 자세히 보면 그 곳에 혈흔(血痕)이 번지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놈은 무서운 인내력을 가지고 있다. 놈은 극한의 고통을 참으며 여기까
지 왔다."
"우리가 거쳐 온 곳에서 의맹무사의 복장 한 벌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 자는 거기까지 오는 동안 의맹의 무사 행세를 했을 것이며… 일단 안
전한 장소에 이르렀다 생각하자, 옷을 벗어 버리고 치달리기 시작한 것
같소!"
"이 곳에 피가 떨어진 이유는, 상처가 아물기 전에 내공을 과격히 운용했
기 때문일 것이오."
"그렇소. 놈의 상처 부위가 아물었다 터지며 피가 흘러 나온 것이오."
"계속 추적합시다. 잘하면 두 시진 안에 놈을 찾아 낼 수 있을지도."
회색의 눈동자를 가진 자들, 이들은 특이한 안력과 후각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심해(深海)에 떨어진 바늘 하나를 찾아 낼 수 있으며, 가지가 부
러진 방향이며 미세한 발자국만으로도 상대가 어떠한 상태인가 즉시 파
악해 낸다.
"어리석은 자군. 군중 속에 파묻혀 숨지 않고 호젓한 곳으로 도망쳐 가다
니……."
"후후… 우리들처럼 빼어난 추적자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도망치고 있는 걸게요."
"자, 갑시다!"
추적자들은 회색 눈빛을 새로운 방향으로 던지며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경공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며, 그들이 달려가는 가운데 휘
파람 소리가 퍼지며 다른 곳에서도 호응하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이각 안에 여든한 명이 다 모이게 될 것이다.
상처받은 짐승을 쫓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상처받은 짐승은 최후의 발악
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숙련된 추적자들이란 건강한 짐승보다 상처받은 짐승을 추적하는
데 더 큰 쾌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안개가 부서진다.
이미 환한 아침이다. 참으로 맑은 하늘은 하나의 푸른 유리 거울이 되어
대곤륜의 하늘을 버티어 서기 시작했다.
냉약빙은 몸이 아프다는 구실로 시녀를 돌려보내고 정실에 틀어박혔다.
그녀는 하룻밤을 꼬박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그녀
는 탁자 위에 수반을 바라보는데, 수반에는 국화가 함초롬히 꽂히어 있었
다. 국화 가지는 역삼각 구도를 이루고 있었으며, 은은한 화향이 감미롭
게 퍼져 나갔다.
'그 자는 완벽한 자였다. 거의 불가능한 살인을 완성시킬 뻔했다. 실패의
원인은 잠풍이 천잠사의(天蠶絲衣)를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약빙은 냉혈살흔을 기억했다.
무미건조한 인간.
그가 잘하는 일이라고는 타인을 죽이는 일에 불과하다.
그러한 자에게 엄청난 일을 맡긴 것은 모험이었으나, 인물 선택은 정확했
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잠풍이 천잠사의를 걸치고 있었다는 게 모든 일을 비비꼬아 버린
것이다.
'일단 위기는 모면했다. 냉혈살흔이 그 자리에서 잡혔더라면, 대명무문의
비밀이 완전 누설되었으리라!'
냉약빙은 천천히 옷을 벗었다.
이제까지 걸치고 있던 옷은 예복이다. 예복은 행동하는데 부적합한 복장
이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반나신이 되었다.
여자치고는 꽤 큰 키이다.
풍만하게 부푼 둔부가 성적인 아름다움을 더하게 한다.
쭈욱 뻗어 내린 허벅지며 탄력 있어 보이는 종아리의 하이얀 빛깔이 매
혹적이다.
다만 젖가슴이 납작한 게 흠이라면 흠이다.
가슴이 부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이 년 전부터 젖가리개를 단단
히 조여 풍만한 젖가슴을 애써 감추고 있는 것이다.
젖가슴은 여자의 상징, 그것을 감추고자 노력한다는 것은 스스로 여자라
는 걸 부정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
냉약빙은 벽장에서 경장을 꺼내 재빨리 갈아입었다.
지금 필요한 건 시간이다. 조속한 시일 안에 그 자를 제거해야 한다.
그녀는 벽장을 뒤져 암기가 든 상자를 끄집어 냈다.
"살인멸구하는 건 마도인들이나 하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
그녀는 애써 자신의 동기를 합리화시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냉혈살흔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 자가 의맹에 잡혀 비밀을 누설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대명무문은 초토
화되어 버릴 게 아니겠는가?
백도인의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냉혈살흔을 제거해야만 한다.
'폐관을 가장하고 빠져 나가자. 심하게 다친 걸 미루어 보아 멀리 가지
못했다!'
그녀는 방문을 안으로 잠근 다음에 비밀통로 안으로 몸을 날렸다.
비밀통로는 그녀의 뒷모습을 감춘 이후 자동적으로 닫혔으며, 방 안에는
맑고 우아한 국화 향기만이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