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四章 三靈神丹
감응곡의 집안은 대대로 의업(醫業)에만 전념하던 의가(醫家)였다. 그들은 비록 전설의 화타나 편작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강호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가문이었다.
대흥감가(大興甘家)! `
이것이 강호인들이 그들에게 붙여 준 이름이었다.
감가(甘家)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이었다.
무려 삼백 년 이상 의술에만 전념해 작금(昨今)에 이르러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대대로 오직 의술만을 연구했다. 자연 그들의 의술은 점점 높아졌고, 감응곡이 태어날 즈음에는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대단한 명성을 만천하에 떨치고 있었다.
더군다나 한 명의 기재가 나타나고부터 감가의 명성은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감의직(甘醫直)! `
감응곡의 부친이기도 한 그는 의술에 있어서만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천재였다.
이십이 되기도 전에 가문의 비전(秘傳)인 의학총요(醫學總要)를 완벽하게 터득했고, 사십이 넘어서는 전설의 화타나 편작에 버금갈 만한 성취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그는 독(毒)에 대한 지식이 뛰어나, 해독(解毒)뿐 아니라 독을 이용해 불치의 병을 치료하는 것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이른바 이독치독(以毒治毒)의 지고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의 의술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강호인들은 그에게 약성(藥聖)이라는 영광된 칭호를 붙여 주었다.
감의직의 나이 그때 겨우 마흔 여섯이었고, 감응곡은 약관의 패기만만한 청년이었다.
감응곡 또한 부친(父親)에게 뒤지지 않는 재능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너무도 뛰어난 아버지의 명성에 가려져 이름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감의직의 젊었을 때와 비교해서 전혀 손색없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부친이 갖지 못한 한 가지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열정(熱情)이었다.
뛰어난 사람을 아버지로 둔 관계로 그는 어릴 때부터 항상 아버지와 비교되었고, 또 많은 기대를 받으며 자라왔다.
철이 들 무렵, 감응곡의 가슴속에는 남이 모르는 한 가지 염원(念願)이 깊게 자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꼭 부친을 능가해 보겠다는 사나이로서의 순수한 열망이었다.
그때부터 감응곡과 부친의 보이지 않는 경쟁은 시작되었다.
하나, 그것은 기필코 서로를 이기겠다는 치졸한 경쟁심이 아니라 의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었다.
그러기를 십여 년.
각고의 노력 끝에 감응곡은 드디어 부친에 비해 전혀 손색없는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집안사람들은 이미 그의 실력이 감의직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친인 감의직은 그런 아들이 대견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세상에 자신보다 뛰어난 자식을 시기하고 미워할 부모는 없는 것이다.
하나, 그런 기쁨도 잠시.
약초를 찾기 위해 감응곡이 그의 처와 함께 집을 떠나 있던 어느 날, 감가(甘家)를 찾아온 한 사람으로 인해 그들의 명예와 삼백 년 전통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이름을 당문제라 밝힌 그 사람은 감의직과는 반대로 독(毒)의 대가(大家)였다.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에 천하제일이었던 것이다.
감의직은 그가 유명한 사천당문(四川唐門)의 고수라는 것을 알고 내심 께름칙했지만, 찾아온 손님을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문제는 감의직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서로의 의술과 독에 대한 실력을 겨루자고 졸라댔다.
사람을 살리는 의술에만 관심이 있을 뿐 명예에는 초탈한 성품인 감의직이 그런 허황된 짓을 좋아할 리 없었다.
그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당문제의 제안을 거절했다.
당문제가 그런 감의직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웃어댔다.
─`후후후…… 당신이 내 제안에 허락을 하건 말건 상관없소. 어차피 이미 우리의 대결은 이루어졌으니까…… `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졌다.
감의직은 그가 너무 쉽게 물러나자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아니나 를까.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집안 사람들이 하나둘 중독(中毒)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감의직은 보지 않았어도 그것이 당문제의 소행임을 알아채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빠졌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당문제를 찾아가 그 잘난 자존심을 깔아뭉개 주고 싶었으나, 사람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감의직은 불편한 심기를 애써 억누르며 치료에 들어갔다.
하나…… 누가 알았으랴.
감의직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시전된 독은 전혀 해독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으로 치료를 시작한 감의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음을 고쳐 먹고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사람들의 몸에 침투한 독을 해독하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독을 치료하기는커녕 심지어 독의 이름조차 알아 내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이독치독(以毒治毒)의 시술로 인해 사람들의 중독 증세만 더욱 심화되었다.
마침내 독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 나갈 때, 밖으로 나갔던 감응곡이 돌아오게 되었다.
감의직은 다시 힘을 내 아들과 함께 독을 해독하려 했으나 역불급(力不及)이었다.
그사이 감가의 사람들은 마침내 감의직과 감응곡, 그리고 감응곡의 처만 남고 모두 죽고 말았다. 불과 한 달도 안 돼 백여 명의 무고한 인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감의직마저 중독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영약과 독을 접해 거의 만독불침지신(萬毒不侵之身)을 이룬 감의직조차 독을 이겨 내지 못하고 중독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달이 흘렀을 때, 마침내 감의직은 독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미쳐 버렸다.
너무도 짧은 시간에 한 가문이 완전히 망한 것이다.
감응곡은 너무도 커다란 분노에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가문을 풍비박산 낸 자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꼭 해독 방법을 찾아야 했다.
독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당가의 특성상 가전(家傳)의 극독이 무용지물이 된다면 그들은 자연히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부터 당문과 감응곡의 처절한 사투(死鬪)가 시작되었다. 감응곡은 우선 당문제가 가솔들에게 시전했다는 독에 대해 알아야 했다.
부친이 이름조차 알아 내지 못한 그 독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어떤 것도 쓸모가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감응곡은 삼 년 동안 고생고생 해서야 겨우 독에 대해 알아 낼 수 있었다.
무영절혼백(無影絶魂白)! `
사천당문의 삼대극독(三大極毒)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위력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이것은, 이름 그대로 아무런 냄새나 빛깔도 없는 데다가 해독 방법이라고는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아, 그야말로 악마의 독이라 불릴 만했다.
감응곡은 내친김에 당문의 삼대극독 중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감응곡은 다시 몇 년 동안 고생을 한 끝에야 겨우 당문의 삼대극독에 대해 알아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해독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나, 아무리 노력을 해도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감응곡은 점점 절망에 빠져 들었다.
─`진정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단 말인가!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지만, 그런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다.
한데 감응곡이 절망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정신이 나가 있던 감의직이 돌연 또렷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감응곡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아버지가 정신을 차린 것 같아 기쁜 얼굴로 달려갔다.
웃는 얼굴로 온 감응곡에게 감의직은 실로 놀라운 말을 해주었다. 당문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알려 준 것이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지던 삼령신단(三靈神丹)과 신선청(神仙淸)이라는 것이었는데, 감응곡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 감응곡은 채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커다란 슬픔에 빠져야 했다. 자신의 우상이자 영웅인 감의직이 그 말을 끝으로 이승을 하직했기 때문이다.
감의직은 너무도 오랫동안 독에 중독되어 있던 탓에 몸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져 있었다.
그는 죽기 전에 잠시 정신이 들자 마지막 힘을 다해 가문의 비전(秘傳)을 아들에게 알려 준 것이다.
감응곡은 부친의 장례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단약(丹藥)의 제조에 필요한 약재(藥材)를 구하기 시작했다.
삼령신단은 그 약재를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해, 감응곡은 우선 신선청을 제조하기로 하고 그것에 필요한 약재를 구하면서 틈틈이 삼령신단에 필요한 약재도 같이 모으기 시작했다.
신선청에 필요한 약재 또한 결코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감응곡은 이십 년의 노력 끝에야 겨우 모든 재료를 구할 수 있었다.
감응곡은 뛸 듯이 기뻤다.
무려 삼십 년의 노력 끝에 드디어 가문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감응곡은 혼신의 힘을 다해 신선청을 제조한 후, 그것을 시험하기 위해 먼저 아들 내외(內外)와 손녀에게 복용시키기로 했다.
아들인 감백언(甘伯言)이 차마 그럴 수 없다며 감응곡을 말렸지만, 이미 복수(復讐)의 화신(化身)이 되어 버린 부친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감백언은 결국 부친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들인 감백언과 며느리, 그리고 겨우 네 살밖에 안 된 감희연이 감응곡의 시험 대상이 된 것이다.
감응곡은 그들에게 먼저 극독인 자오분심독(子午焚心毒)을 복용시킨 후, 그 다음에 신선청을 복용시켰다.
보통 때의 감응곡이라면 이성을 갖고 차근차근 생각해 본 뒤 행동했을 테지만, 이미 복수에 눈이 멀어버린 그는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는 확신에 찬 눈으로 극독과 신선청을 복용하는 가족들을 살펴보았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처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다.
자오분심독에 중독되면 자시(子時)와 오시(午時)에 어김없이 발작을 시작해 심장이 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죽고 마는데, 아들 내외는 물론이고 어린 감희연조차 오시가 넘도록 전혀 발작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감응곡은 미친 듯이 기뻐하며 신선청을 대량 제조하기 위해 곧바로 단약실로 들어갔다.
당가의 몰락이 바로 앞으로 다가온 듯했다.
하나, 청천 벽력(靑天霹靂)이랄까.
저녁이 되자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곳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자시(子時)가 가까워 오자 아들 내외와 손녀딸이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미 중독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감응곡은 너무 놀라 정성을 다해 치료를 시작했지만, 이미 독은 골수(骨髓)까지 스며든 후였다.
신선청은 독의 진행을 늦췄을 뿐, 해독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감응곡이 그것을 깨달았을 때 아들내외는 이미 숨이 멎어 있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손녀인 감희연이 목숨을 부지한 것이지만, 그녀 또한 심한 후유증으로 인해 영원히 앞을 볼 수 없는 처지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슬픔의 와중에서도 감응곡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면밀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일 년여의 검토 끝에 그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한마디로 신선청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신선청은 일반적인 독에는 뛰어난 효능을 발휘하지만, 위력이 강렬한 극독에 대해서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응곡은 허탈감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가문의 복수는 그렇다 치고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아무런 죄도 없는 아들과 며느리가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절망에 빠졌겠지만, 감응곡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삼령신단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최후의 모든 것을 삼령신단에 걸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감응곡은 일 년의 연구 끝에 삼령신단이야말로 천고의 성약(聖藥)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미 한 번의 실패를 맛본 그인지라 이번에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삼령신단은 완벽한 해독제였다.
감응곡은 삼령신단을 만들기로 결론을 내리고 필요한 약재를 모으기 시작했다. 삼령신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천고의 영약 세 가지가 필요했다.
하나하나가 평생에 한 번 볼까말까 한 영약들로, 그것들을 다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감응곡의 집념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그는 거의 이십 년의 세월을 허비하고 나서야 삼령신단에 필요한 약재를 모두 모을 수 있었다.
물론 신선청에 필요한 약재를 모을 때 틈틈이 모아 두었던 것들이 도움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때가 바로 감희연이 철단소를 만났을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 년의 노력 끝에 감응곡은 드디어 두 알의 삼령신단을 완성할 수 있었다.
감응곡의 얘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
그는 말을 끝내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도록 눈을 뜨지 않았다.
아마 지난날의 회한(悔恨)이 그를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철군악은 말없이 그의 쭈글쭈글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비록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이었지만, 누구도 그를 비웃거나 무시할 수 없었다. 천하를 뒤덮을 만한 기개(氣槪)는 없어도 인간을 감동시킬 만한 끈기와 노력은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의 인생은 값어치가 있었다.
감응곡은 눈을 뜨고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 단소를 보았을 때, 나는 그에게 삼령신단을 복용시키려 했었네. 하나, 하늘의 뜻인지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로군…… 이제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를 말하겠네.”
감응곡은 잠시 말을 끊고 번쩍이는 눈으로 철군악을 직시했다.
철군악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눈을 봤지만, 이처럼 강렬한 눈빛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자네가 삼령신단을 복용하게!”
철군악은 고개를 들어 감응곡을 쳐다보았다.
너무도 뜻밖의 말이었다.
감응곡의 말대로라면 삼령신단은 그야말로 절세기보(絶世奇寶)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철군악이 비록 철단소의 사제라지만, 그와 감응곡은 심하게 표현하자면 전혀 모르는 남남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수십 년 동안 고생고생 한 끝에 겨우 만든 영약을 생전 처음 본 철군악에게 복용시키려는 것이다.
철군악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감응곡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의 두 눈에선 알 수 없는 열기(熱氣)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단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자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철군악은 그 눈을 보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했던 철단소의 눈빛도 저랬고, 지금 자신의 눈빛도 바로 저러할 것이다.
저와 같은 눈빛의 소유자라면 최소한 자신을 위해 남을 속이거나 하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는다.
감응곡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삼령신단이 비록 천고의 영약이라 하나 그 효과를 완전히 장담할 수는 없네. 신선청(神仙淸)과 마찬가지로 별 효과를 못 볼 수도 있다는 말이지. 하지만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건…… 만약 삼령신단이 제대로 만들어졌다면 천하의 어떤 독도 자네에게 절대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네…… 절대로!”
철군악은 그의 말을 믿었다.
설사 삼령신단이 별 효과를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만약…… 만약 삼령신단이 감응곡의 말대로 만독불침(萬毒不侵)의 효과를 가져다준다면 철군악은 기대하지 않았던 엄청난 효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감응곡은 모든 얘기가 끝나자 다소 허탈한 표정으로 철군악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뼈를 깎는 고통을 불굴(不屈)의 투지로 이겨 낸 사람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지난 칠십 년간 난 너무 힘들었네…… 특히 아들놈과 며느리가 내 잘못으로 인해 고통스런 모습으로 죽어 가는 것을 봤을 땐……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대로 죽고만 싶었지. 지금 생각해 보니 역시 그러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나는 이제 손녀와 함께 아무도 살지 않는 곳으로 가 남은 여생(餘生)을 보낼 작정이네. 자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부디 신중을 기해 내 가문과 자네 사형제의 원수인 삼성에게 통쾌하게 복수를 해달라는 것일세.”
철군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감응곡의 눈을 직시했다.
그의 두 눈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단지 인생의 목표를 이룬 자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안락함과 만족감이 거기 있을 뿐이었다.
인생의 황혼기(黃昏期)를 맞은 기인(奇人)과 이제 막 화려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기재(奇才)의 만남은 그렇게 끝나 가고 있었다.
* * *
노을[霞].
마지막 힘을 다해 거무스름한 땅거미를 몰아 내려 몸부림치는 노을의 모습은 언제 봐도 알 수 없는 감동과 장엄함을 느끼게 해준다.
철군악과 송난령은 그 노을 속에 서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하남(河南)이 내려다보이는 대별산 어귀였다.
그들은 감응곡 조손(祖孫)과 헤어진 후 개봉(開封)으로 가기 위해 이쪽으로 길을 잡은 것이다.
한참 동안 노을을 바라보던 송난령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이제 그들은 어디로 가죠?”
철군악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 누구도 그들을 보지 못하리라는 것뿐이오.…… 아마 사람이 없는 깊은 산속에서 영원히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오.”
송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들은 험하고 추악한 이 세상에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남에게 해를 입힐 줄 모르는 꽃이나 구름을 벗삼아 즐거운 여생을 보냈으면 해요.”
철군악의 생각도 그녀와 같았다.
그들처럼 순순한 영혼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남에게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연과 함께 조용히 지내는 것이 그들에게는 훨씬 나을 것이다.
송난령은 철군악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다시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 거죠?”
“뭘 말이오?”
“삼성(三聖)에게 복수를 한다고 했잖아요?”
“그랬소.”
아무렇지 않은 듯한 철군악의 대꾸에 송난령은 얼굴 가득 걱정스런 표정을 떠올렸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삼성은 무림 전체나 마찬가지예요. 아니, 세 명은 고사하고 그들 중 하나만 하더라도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어요. 더욱이 무림사대세력 중 세 곳이 그들의 수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그들이 누구든 간에 먼저 나를 건드렸으니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해야 할 거요.”
“그렇다면 당신은 그들을 상대할 방법이 있나요?”
“현재로선 생각나는 것이 없소.”
송난령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철군악을 째려보았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삼성을 상대하겠다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세상에 어떤 미친 자가 이런 허황된 생각을 하리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송난령이 놀라다 못해 기가 찬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삼성(三聖)! ``
이 이름은 백 년 무림인들 중 가장 강한 세 명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들에게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강호에 출도하여 사십이 되기 전에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는 칭호를 받은 공통점이 있었다.
셋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성검자(聖劒子) 서문륭(西門隆)조차 이미 백세에 가까운 나이를 지니고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강호를 제패하기 위해 그들이 서로 힘을 합쳤다는 사실이었다.
삼성이라는 호칭으로 같이 불리고 있기는 하지만, 강호에 알려진 바로 그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삼성 중에는 정도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천마(天魔) 사공기(司空麒)처럼 극악한 마인(魔人)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합쳐질 수 없는 삼인의 절대고수가 무림제패(武林制覇)라는 깃발 아래 한데 뭉친 것이다.
한데, 철군악이 삼성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송난령은 철군악이 무모한 것인지, 용감한 것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앞으로의 길이 험난할 거라는 사실뿐이었다. 송난령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철군악을 따라갔다.
어느새 사방에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 * *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
하남 대평야(大平野)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는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
옛적에는 변경(京), 대량(大梁)이라고도 불렸으며, 오대(五代) 사 왕조(王朝)와 북송(北宋)의 수도이기도 했던 대도시가 바로 이곳이었다.
개봉은 또한 용정(龍井), 상국사(相國寺), 주선진(朱仙鎭) 등 명승지가 많기로도 유명하다.
데에엥, 데에엥!
어둠의 적막을 깨뜨리며 맑은 범종(梵鐘)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철군악과 송난령은 그 소리를 들으며 숲속에 묵묵히 서 있었다.
이곳은 상국사(相國寺) 근처의 이름 없는 숲이었다.
과연 명승지답게 가까이서 바라보는 상국사의 야경(夜景)은 은은한 아취(雅趣)가 있었다.
철군악은 개봉성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다.
철군악이 묵묵한 표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인기척은 금세 말소리로 변해 철군악의 귀를 파고들었다.
“군악이냐?”
철군악은 고개를 돌려 말소리가 들려 온 곳을 쳐다보았다. 사십대로 보이는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중년인은 값싸 보이는 청삼(靑衫)을 단정하게 차려입었을 뿐인데도, 전신에서 풍기는 고고한 자태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철군악은 그의 유현한 눈을 직시하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철군악이 제갈(諸葛) 형님을 뵙니다.”
철군악이 인사를 하자 청삼의 중년인은 떨리는 눈으로 철군악의 용모를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정말…… 군악이로구나!”
청삼의 중년인이 탄성 같은 소리를 내며 철군악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군악아!”
철군악도 힘주어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움켜쥔 손과 손을 통해 뜨거운 그 무엇이 오갔다.
지금 철군악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철단소의 죽마고우였다.
제갈추(諸葛秋)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그는 철군악이 무창에서 만났던 동천립과 마찬가지로 철단소와 함께 모종의 단체를 만들어 삼성에 대항하고 있었다.
제갈추는 잠시 깊은 눈으로 철군악을 응시하더니 믿기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단소가 죽었다는 것이 사실이냐?”
“예!”
“허허허……!”
제갈추는 이미 동천립에게서 그 말을 들었지만,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단소가 그렇게 가다니……!”
한참 동안 허탈한 표정으로 웃던 제갈추가 문득 감회 어린 표정으로 철군악을 바라보았다.
“네가 딴사람 같다는 천립(天立)의 말을 듣고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몰라보게 변했구나.”
제갈추와 철단소가 매우 친했던 관계로 철군악은 어렸을 때부터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제갈추의 눈에 비친 철군악은 그저 장난이나 좋아하는 어린애였었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전혀 딴사람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제갈추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대견한 표정으로 철군악을 보고 있다가 시선을 송난령에게로 돌렸다.
철군악이 그제서야 송난령을 소개했다.
“송 소저! 인사드리시오. 내게는 친형님 같은 분이시오.”
송난령이 먼저 인사를 하기도 전에 제갈추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낭자가 바로 신검미인(神劒美人)이로군. 강호에서 신검미인, 신검미인 하기에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보고 싶었는데,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송난령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선배님은 저를 알고 계시나요?”
“소저의 사부가 검제 냉 선배가 아니시던가?”
송난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제갈추가 그녀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송 소저에겐 말을 안 했나 보군. 냉 선배께서는 우리를 돕고 계시네.”
“아! 그러시군요. 한데 선배님의 존함은……?”
“나는 제갈추라는 사람일세.”
그의 입에서 제갈추라는 석 자가 튀어나오자 송난령의 얼굴 가득 경이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제갈추……? 삼뇌천자(三腦天子) 제갈추(諸葛秋)가 본인이시라는 말씀인가요?”
“그렇네.”
제갈추가 고개를 끄덕이자 송난령은 놀란 눈으로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도대체 제갈추가 누구기에 그녀가 이토록 놀라는 것일까?
삼뇌천자(三腦天子) 제갈추(諸葛秋)! `
이 이름은 강호 역사 이래 최고의 천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누구도 그가 천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다섯의 나이에 대과(大科)를 치러 장원(壯元)을 차지했고, 약관이 되어서는 한림대학사(翰林大學師)인 경승필(慶丞筆)과 문장을 겨루어 하루 만에 밑천을 드러내게 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더욱이 그는 고금(古今)의 모든 병법(兵法)에 통달해 삼국 시대의 제갈공명에 비견되기도 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지는 대정회가 삼성을 상대하면서 지금까지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송난령은 한참 동안 제갈추를 흠모의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공손히 인사했다.
그녀 역시 천재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 제갈공명에게까지 비견되는 천재를 직접 만나게 되자 감회가 남다른 것 같았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제갈 선배를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다니…… 금생(今生)의 영광이에요.”
“허허! 송 소저가 내 얼굴에 너무 금칠을 하는군.”
제갈추는 실소를 터뜨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송 소저도 군악과 함께 다녔으니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대정회(大正會)라는 단체를 만들어 삼성에게 대항하고 있네.”
“대정회라면…… 강호사대세력(江湖四大勢力) 중 하나가 아닌가요?”
“그렇지. 하나 대정회가 비록 사대세력 중 하나이긴 해도 나머지 삼대세력인 성검문(聖劒門), 제마궁(帝魔宮), 사천당가(四川唐家)에 비교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鳥足之血)밖에 되지 않는다네…… 더군다나 회(會)의 최고고수라 할 수 있는 단소까지 죽고 나서 그 차이는 더욱 심해졌지. 우리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네. 지금 같은 전력 차이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삼성의 음모를 분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지.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노출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뜻있는 고수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네. 다행인지 몇몇의 고수들이 우리들을 도와주기로 했지. 냉 선배께서는 그 전부터 우리를 암중으로 도와주고 계셨는데, 일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위험을 무릅쓰고 겉으로 나서서 고수들을 포섭하는 일을 맡으신 거지.”
제갈추의 설명이 끝나자 송난령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
“그렇지 않아요? 삼성이 무림제패의 야욕을 갖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왜 처음부터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죠?”
송난령의 날카로운 질문에 제갈추는 고민의 빛을 떠올렸다.
“그건 송 소저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일세.”
“……?”
“삼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모든 강호인들에게 존경과 경이의 대상이었네. 한데, 느닷없이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욱이 그들은 우리가 그 사실을 알기 수십 년 전부터 은밀히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고, 전혀 허점을 노출시키지 않았지.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나름대로 그들에게 대항하며 그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했네. 하나, 지금은 그마저도 거의 소용이 없게 되었네.”
탄식과도 같은 제갈추의 대답에 송난령은 물론 철군악의 얼굴에도 의문이 떠올랐다.
제갈추가 씁쓸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무림의 절반 이상이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네. 이제는 그들의 음모를 분쇄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칫 잘못하면 거꾸로 우리가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돼버렸지.”
그의 말을 들은 송난령의 얼굴에 사뭇 걱정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정말 제갈추가 말한 대로라면 무림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이다.
철군악이 문득 제갈추를 바라보았다.
“형님께 물어 볼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사형의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사형은 그때 고금십대검법의 하나인 광해삼검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완벽하게. 더욱이 사형은 광해삼검보다 더욱 뛰어난 검법을 연구하고 있었고, 그 당시 이미 칠(七) 성(成) 이상의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아마 삼성이라 할지라도 사형을 그처럼 비참하게 만들지는 못했을 겁니다. 한데, 그런 사형이 너무도 비참한 모습으로 죽은 것입니다…… 형님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으음……!”
제갈추는 철군악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글쎄, 단소에 버금가는 고수들이 합공을 했거나, 아니면 암습(暗襲)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 하나, 나는 그것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는 듯싶네.”
“다른 이유라면?”
제갈추는 잠시 철군악을 직시하더니 빛나는 눈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자네 때문이네!”
“……?”
“자네는 모르고 있었지만, 단소는 항상 우리에게 만약 삼성을 제거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으로 바로 자네를 꼽겠다고 말하곤 했네. 하나, 그는 가능하면 자네만은 이 일을 모르고 있길 바랐지. 한데 일이 틀어지는 바람에 단소는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직감적으로 자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지. 물론 단소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까짓 위험쯤이야 벗어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자신의 목숨을 대신해 더욱 커다란 일을 이루고자 했을 것이네. 바로 삼성의 제거지.”
“그렇다면?”
“그렇네. 단소는 자신이 삼성의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고수라는 것이 밝혀지면 자신은 물론 자네까지 위험에 빠지고 말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겠지.
더욱이 그의 검법은 아직 미완성이었지. 그는 차라리 그럴 바에는 자신의 실력을 감추고 후일을 기약하기로 한 것일세. 비록 자신은 죽는다 하더라도 자네가 있다는 것을 생각한 것이지.”
철군악은 침묵했다.
철단소는 자신이 아끼는 사람과 신념을 위해 단 하나뿐인 목숨을 아끼지 않고 희생했다.
최고의 무인이었고 천재였던 그는 오직 남들을 위해 모든 편안한 길을 버리고 끝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이다.
절대…… 사형의 죽음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잠시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철군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삼대세력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신상 명세와 거처를 알고 싶습니다.”
제갈추가 기이한 눈빛으로 철군악을 쳐다보았다.
고집스레 다물린 입매와 번뜩이는 눈빛이 생전의 철단소를 보는 것 같았다. 그도 지금 같은 처지라면 철군악과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제갈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하나, 조건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제갈추는 철군악을 직시하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절대…… 단소처럼 되지 말게.”
“……!”
철군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번쩍이는 눈으로 제갈추의 두 눈을 마주볼 뿐이었다.
* * *
무당산(武當山).
호북성(湖北省) 균현(均縣)에 위치하고 있는 명산으로, 도교(道敎)의 성지이기도 했으며 특히 명문인 무당파(武當派)가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무당은 이전부터 강호에서 거대한 명성을 쌓아 왔지만, 근래에는 그 기세가 더욱 욱일승천하여 소림을 제치고 구대문파(九大門派)의 수위(首位)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시(子時)가 넘은 밤.
주위는 온통 먹물을 풀어 놓은 듯 캄캄하기 그지없었고, 어두운 밤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달빛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기이하게도 무당의 중지(重地)인 태화궁(太和宮)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태화궁은 무당의 전대장문인(前代掌門人)인 관초상인(貫初上人)이 은거하고 있는 성지(聖地)인데, 무슨 이유로 늦은 밤에 이토록 불을 밝혀 놓은 것일까?
무언가 중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태화궁의 대전(大殿).
다섯 명의 도인(道人)이 단정한 자세로 무릎을 꿇은 채 태사의에 앉아 있는 노인을 공경(恭敬)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섯 명의 도인들은 언뜻 보기에도 모두 육십이 넘어 보였으며 그 중에는 비룡승천대회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한 정풍도장(庭楓道長)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들이 바로 무당의 장로인 무당오자(武當五子)였다.
무당오자는 무당의 현장문인인 정수도장(庭水道長)의 사제들로, 지닌 무공과 인품으로 인해 세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한데, 무슨 일인지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들의 표정에는 놀란 빛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이미 꽤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지 그들의 입술은 모두 까칠까칠하게 메말라 있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무당오자의 첫째인 정와도장(庭蛙道長)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허공에 고요히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사부님! 그렇다면…… 삼성(三聖)이 무림제패의 야욕을 갖고 있다는 게 사실이란 말씀이십니까?”
정와도장은 말을 마치고 번쩍이는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나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늙어 보이는 노인이 태사의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겨우 오(五) 척(尺)이 될까말까 한 작은 키에 여기저기 듬성듬성 난 백염(白髥)이 매우 초라해 보였지만,
오자 중 그를 함부로 마주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바로 무당의 전대장문이자 최고 어른이요, 동시에 무당오자의 사부이기도 한 관초상인이었다.
관초상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미 많은 고수들이 그들에게 포섭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하면……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관초상인이 나직이 침음하며 무슨 말을 꺼낼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나, 무당오자가 아무리 기다려도 관초상인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둘째인 정풍도장(庭楓道長)이 성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부님! 이럴 게 아니라 사형 말대로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우리도 언제 혈겁(血劫)에 휘말릴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관초상인이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정와(庭蛙)의 말대로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하겠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쉽지 않다니요?”
“나는 그 동안 삼성의 주위를 조사하면서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음모가 치밀하면서도 방대했기 때문이다. 만약, 제갈 시주가 미리 말해 주지 않았다면 결코 그들의 음모를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용의주도했다. 나는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지. 이대로 가다가는 무림이 그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은 그야말로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하나,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쉽사리 대책을 세울 수도 없었다. 그들의 행사가 너무 은밀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증거도 없었거니와, 얼마 전부터는 그들이 드러내 놓고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더욱 커다란 이유였다.”
관초상인의 말이 끝나자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정석도장(庭石道長)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부님! 그들이 공공연하게 무림제패의 야욕을 드러내 놓고 있다면 오히려 잘된 일 아닙니까?”
관초상인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언뜻 보기에는 그렇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제자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정석도장의 말에 오자(五子) 모두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관초상인을 쳐다보았다.
관초상인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호의 앞날도 문제였지만, 순진함이 지나쳐 아둔할 정도로 계략(計略)에 어두운 제자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후유…… 이놈들아!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서 어디에 써먹겠느냐? 삼성이 수십 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강호제패를 위해 암중으로 행동을 하다 갑자기 ‘나 여기 있소!’ 하고 마각(馬脚)을 드러낸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그제서야 오자(五子)는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는 듯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삼성이 강호를 제패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들은 설사 자신들의 음모가 탄로난다 하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만한 자신이 생긴 것이다. 무림을 제패(制覇)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끝냈다는 반증인 것이야.”
관초상인이 단정하듯 말을 끝내자 오자 중 비교적 생각이 깊은 정풍도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군요. 당금 무림에서 누가 삼성의 어마어마한 힘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나도 여러 가지 궁리를 해보았지만, 현재로선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그게 무엇입니까?”
관초상인은 긴장한 제자들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삼성의 음모를 제대로 알고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대항할 문파는 오직 대정회(大正會)밖에 없다!”
“으음……!”
오자는 침음을 흘리면서도 한편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삼성은 이미 수많은 고수들을 포섭했다.
개중에는 극악한 마인도 있었고, 선(善)의 탈을 쓴 정도기인(正道奇人)들도 있었다.
또한 이미 많은 문파가 그들에게 동조했지만, 대정회만큼은 어찌 된 일인지 오래 전부터 삼성에게 대항해 왔었다.
그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삼성의 음모를 알아차렸기 때문인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당금 무림에서 삼성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갖춘 곳이라면 그래도 대정회밖에 없었다.
관초상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삼성이 많은 고수들을 포섭했듯이 우리 또한 대정회에 힘을 모아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들을 야심한 시각에 부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오면……?”
관초상인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자들을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오자는 모두 뭔가를 듣고 있는 듯 신중한 표정이었다.
관초상인은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기밀이 새어나갈 것을 우려하여 전음(傳音)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전음이 끝나자 오자가 모두 긴장한 신색으로 관초상인에게 절을 했다.
“사부님, 그럼 제자들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옥체 보중하십시오.”
“오냐!”
오자가 절을 하고 모두 물러가자 관초상인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저놈들이 잘해 주어야 할 텐데.’
그는 빛나는 눈으로 야경(夜景)을 응시하며 계속 생각에 잠겼다.
‘이미 정인(庭人)이 폐관(閉關)에들어갔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으나…… 녀석이 태극혜검(太極慧劒)을 대성하는 날 무림의 정기는 다시 꽃을 피울 것이다. 아울러 무당의 이름도 또 한 번 만천하에 찬란하게 빛을 발할 것이다.’
뒷짐을 진 채 묵묵히 야경을 바라보는 관초상인의 눈에는 기대와 걱정의 빛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쪼로로롱……
관초상인의 복잡한 심사를 달래 주려는 듯 숲속 어디선가 이름 모를 새의 울음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