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산동 때때말랭이
“창복이를 잡아라―, 창복이가 사람을 죽였다―.”
가설극장 변사의 구성진 목소리가 여름날 밤하늘을 울린다. 담벼락에 의지한 영사막이 춤추듯 펄럭여도 재미가 그만이다. 풍물잡이는 저리 가라다. 고만고만한 내 또래의 아이들, 저녁 설거지를 설 끝낸 아낙들…….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인 남정네들은 들일로 묻힌 흙을 웅덩이에서 대강대강 씻어낸 모양새다. 그리고 아쉬운 노름판을 잠시 벗어난 꾼 아저씨들도 분명 있을 터이다. 삼촌 집 넓은 마당에서 경사가 났다. 그러나 온 동네 경사인 셈이다. 땅뙈기 서너 마지기만 있으면 제법 산다는 축에 드는 동네가 아닌가. 입에 풀칠하는 노역 외에 이렇다 할 심심풀이가 있을 리 없다. 비산동 때때말랭이*에 바야흐로 문명의 이기가 상륙한 것이다. 60년대 초입의 정경이다.
국민학교 시절 가장 스릴 넘치는 구경거리였다면 단연코 인넹*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나 같은 촌놈에게는 말이다. 공부 서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쌈질 잘하는 등수, 바로 인넹 서열이었던 것이다. 나이가 대여섯 살이나 많은 이 아무개의 서열 1번은 감히 넘보지 못할 성역이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안타까운 것은 이 아무개가 1번을 확정짓는 현장을 나는 목격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타이틀 매치도 없이 나이나 덩치로 카리스마 행세를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서열 3번인 김 아무개의 실전을 몇 차례 구경한 사실이다. 그가 2번 김 아무개에게 도전하기도 하고 4번 이하에게 도전받기도 하는 랭킹전이었다. 높푸른 하늘, 가을걷이가 막 끝난 널찍한 들판, 긴장된 양 선수, 선수 못지않게 긴장하여 주먹을 움켜쥔 관전 악동들(?), 코피만 나면 끝나는 승부……. 무하마드 알리나 김기수가 등장하기 이전인 50년대 말의 그림이다.
내 고향은 비산동(飛山洞)이다. 어원을 알리는 날뫼, 날미로도 불렸지만 통칭 비산동 때때말랭이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잘살고 세련된 성내(城內) 사람들이 못살고 촌스런 이웃을 깔보기 위해 선물한 이름이겠지만 자학심리도 웬만큼 보태졌으리라. 어쨌든 왜정 때부터 대구부(大邱府)에 속해 있었으며 행정구역으로 유식하게 표현하자면 서구 비산1동 일원이 된다. 지금은 5동, 6동, 7동으로까지 찢어져서 북비산로터리 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당산(堂山)* 너머 드넓은 들판조차 숨 가쁘게 변모해 버렸다. 상전벽해가 아니라 인총(人總)과 시멘트의 회색 바다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50년대와 60년대 초입의 그 시절까지는 남이야 뭐라고 하든 흙냄새, 풀냄새로 가득하던 비산동이었다. 달성공원을 끼고 성내와 바짝 붙어있는 비산2, 3동은 내가 말하는 비산동의 유래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때때말랭이가 아닌 것이다. 비산1동 중에서도 당산과 비산성당 그리고 경부선 철둑과 달서천을 돌아 북비산로터리-동네 사람들은 ‘노타리’로 불렀다-를 잇는 언덕빼기가 소위 때때말랭이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다. 오장최(吳張崔) 3성이 토박이로 행세한 지 13대째라고 했다. 그러나 세월 따라 타성바지가 늘어나다 보니 집성촌이니 세거지니 하는 관념은 없어져 버렸다.
멀지 않은 옛날에 동네 소사(小使)가 목청을 돋우어 이런저런 잡사를 알리던 범위가 원래 큰동네였겠고, 해방과 동란의 시기에 공동묘지를 넘어 노타리 쪽에 새동네가 형성된 듯하다. 큰동네 새동네 할 것 없이 지형적으로 당산기슭이다 보니 때때말랭이임에는 매한가지다. 어찌 보면 동네 인넹, 말하자면 집단 패싸움을 하는 단위로 보는 것도 재미있다. 아니 더 정확한 구분일지 모른다. 어린 시절 형뻘 되는 축들로부터 그 인넹의 무용담을 듣는 것은 흥미만점이었다. 때때말랭이로서의 결속력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대체로 들판을 사이에 둔 투석전으로 기억되는데 아쉽게도 내 또래에서 그 대가 끊겨 버렸다.
하여튼 들판의 인넹이 사라진 그 여백을 가설극장이 대신한 것이다. 골목골목 소사가 소리치던 그 공간에 창복이의 체포를 외치는 변사의 목청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내 고향의 때 이른 임종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괭이나 지게, 기껏해야 마소의 힘이 고작이던 비산동 때때말랭이에 괴력의 쇳덩어리 불도저가 등장하게 된다.
문명의 앞잡이가 도로라 했던가. 그러나 촌놈이 어쩌다가 보게 되는 신작로 정도가 아니었다. 대도시 대구의 서부를 종단하는 간선도로 달서로, 비산동을 동서로 꿰뚫는 대동맥의 건설이 쉴새없이 이어져 왔다. 2차 순환선에 서북교통의 요지라는 도회의 논리가 언덕은 까뭉개고 물길은 메워버린 것이다. 주막거리, 그 앞을 흐르던 시냇물, 큰못, 작은못, 들말못, 사리못, 멱감던 웅덩이들……. 동심을 키우던 추억의 무대들이 속절없이 사라져 갔다. 성내 사람들이 생산한 혐오스런 배설물―쓰레기더미에 깔려버린 것이다. 네온이 찬란한 엠파이어호텔 앞에 설라치면 그 열 길쯤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을 주막거리가 아프도록 선명하다. 아서라 말아라, 문명의 행진을 그 누가 막을 것인가. 오만가지 주워 섬겨 보았자 그 많은 회향(懷鄕)의 명변들에 어이 견줄 것인가.
그런데 비산동을,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옛날의 냄새나 흔적은 약에 쓰려고 해도 찾기 어려운 그 고향을 말이다. 주거환경개선지구 덕인지 집 모양조차 딴판인 마당에 희미한 방범등은 신세대 창복이를 겨냥한 것일까. 또 요즈음은 소방도로 사태가 나서 어디가 어디인지 아예 가늠조차 할 수 없게 된 그 때때말랭이를 지켜온 것이다. 숙명처럼…….
어쩌면 고향은 떠난 자들에게 더 선명한 그림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배부른 이방인의 감상이요 일회성 사치일 수도 있다. 불청객임을 알면서도 나는 가끔 비산동을 찾는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는 채.
윗대 봉제사(奉祭祀)는 밤길을 피할 수가 없다. 몇 안 남은 혈친들이라 외로워진 탓일까. 공리를 좇아 일찌감치 고향을 등진 나를 이때만큼은 반갑게 맞아준다. 언젠가 나에게 해주는 충고에 걱정이 묻어 있다.
“여기 퍽치기를 조심해야 된대이.”
“길을 가더라도 옆으로 붙지 말고 한가운데로 걸어야 된대이.”
퍽치기라, 감이 잡힐 듯하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지난날의 인넹을 떠올리게 된다. 씁쓰레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원인 모를 안도감이 일기도 하고.
IMF는 바다를 건너온 인넹꾼이랄까. 세계화의 바람까지 몰아친 것이다. 가내공업 수준의 경쟁력은 바람 앞의 등불이 아니겠는가. 또 집세를 놓아 생계를 이어가는 곳에 유입인구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당산 기슭 언덕빼기의 때때말랭이였던 곳이 새삼스레 가파른 삶의 때때말랭이와 씨름하게 된 것이다.
인넹 거는 비산동 때때말랭이가 수십 년을 건너뛰어 나에게 다가서고 있다.
*때때말랭이 : 말랭이는 산봉우리의 경상도 방언이며, 때때는 어원이 불명확하나 강세어인 듯함.
*인넹[因緣] : 50년대까지 상용되던 일본말로서, 생트집이라는 사전적 번역이 있으나 별 이유 없이 시비를 건다는 뜻.
*당산(堂山) : 부락의 수호신이 있다고 이르는 산이나 언덕으로, 비산동의 당산은 원래 평지였던 이곳에 산이 날아와 내려앉았다는 전설이 있고 60년대에 보성기술학교가 들어섰다.
- 1999. 10.
첫댓글 고향 비산동에 얽힌 추억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비산동에 관심 있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 묵은 글을 올려보았습니다.
23년전 글인데 그때 써놓기를 잘 했다는 생각은 듭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