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留]이요, 순(純)은 뒤섞임이 없다는 것[無雜]이다. 비록 사(事)와 이(理)로 경계가 있고 마음이 있다고 관찰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홀로 일어난 것이 아니요 경계를 의지하여야 비로소 나며, 경계도 스스로 나지 아니하고 식(識)이 변하여야 비로소 일어난다. 경계를 탐냄이 있어서 그것을 버린다 하여도 유심(唯心)이라 일컫지 아니하고, 체(體)가 이미 순수하게 머물러야 유식(唯識)이라 말한다. |
그러므로 『유식론(唯識論)』에서 이르기를 “나[我]는 안에만 있고 경계는 바깥에 통하기도 하므로 바깥 경계를 혼동할까봐 유식이라고만 말한 것이지 안의 경계가 바깥 경계처럼 전혀 없다는 것 아니다”라고 하였고, 『화엄경』에서 말씀하기를 “3계(界)가 유심(唯心)이니라”고 한 것이다. |
셋째는 섭말귀본의(攝末歸本義)이다. 섭(攝)은 한데 몰아서 포섭한다는 것[綰攝]이요, 말(末)은 곧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의 두 가지이며, 귀(歸)는 곧 근본으로 향한다는 것[向本]이니, 식의 자증분(自證分)을 말한다. 이것은 소의(所依)의 체(體)이기 때문이다. 이제 말(末)의 견분과 상분을 한데 몰아서 본래의 자증분의 체에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유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말하기를 “모든 식의 소연(所緣)은 오직 식이 나타난 것일 뿐이다”라고 했다. |
넷째는 은열현승의(隱劣顯勝義)이다. 심왕과 심소로 다 같이 나투어 보이는 것을 말한다. 심소의 하열한 것은 의타기(依他起)때문이니, 하열한 것을 숨기고 취하지 아니한다. 심왕이 뛰어난 것은 소의의 체[所依體]이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유식이라 말하며 바로 이름이 뛰어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장엄론(莊嚴論)』에서 이르기를 “마음이 두 개라고 인정한 듯함은 이러한 탐냄[貪]과 같은 따위들이 나타난 것이다”고 했다. |
다섯째는 견상증성의(遣相證性義)이다. 식(識)이라는 말로 표시한 바는 사(事)와 이(理)가 갖추어져 있다. 사는 상용(相用)이라 버려서 취하지 아니하며, 이는 체성(體性)이라 증득하기를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섭론(攝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새끼를 뱀이라고 알음알이[解] 내었다가/새끼를 보고서야 아닌 줄 알듯이/그것이 분명함을 증득하고 보아야/비로소 밝은 성품[明性]이 어지러워진 줄을 아네”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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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는 경의(境義)이다. 경계[境]는 소관(所觀)의 경계를 말하며, 식(識)은 능관(能觀)의 마음이다. 이 소관의 경계는 식으로 말미암아 변하여 나타나며 경계는 식을 여의지 않으므로 경계에 유식이라는 차별 상태[義]를 세운다. 아비달마(阿毘達磨)의 경전에 말하기를 “귀신과 사람과 하늘들이 보는 바는 저마다 다르다”라고 했다. |
일곱째는 교의(敎義)이다. 곧 능전(能詮)의 교(敎)이니, 설명에 유식의 차별 상태가 있기 때문이다. 『능가경(楞伽經)』의 게송에서는 “자기 마음의 집착으로 말미암아/마음이 바깥 경계와 작용하는 듯하지마는/그의 보는 바가 있지 않나니/이 때문에 유심(唯心)이라 말하느니라”고 했다. |
여덟째는 이의(理義)이다. 도리(道理)의 유식이다. 『���유식송(唯識頌)』에서 이르기를 “이 모든 것은 식(識)이 전변한 것이어서/분별하는 주체와 분별되는 대상/이것과 그것은 모두가 없는지라/그 때문에 온갖 것은 유식이니라”고 했다. |
아홉째는 행의(行義)이다. 행(行)은 관행(觀行)을 말한다. 보살이 선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네 가지의 심사관(尋伺觀) 등을 짓는 것이니, 곧 관행과 선정은 다 함께 식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유가론(瑜伽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보살이 선정의 자리에서/경계는 유심이라 관찰하느니라”고 하는 것 등이다. |
열째는 과의(果義)이다. 불과(佛果)의 4지(智)와 보살의 모든 공덕은 모두가 식을 여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장엄론(莊嚴論)』에서 이르기를 “진여(眞如)에 경계와 식(識)이 없는 것이 깨끗한 무루계(無漏界)니라”고 한 것 등이다. |
위에서와 같은 열 가지 차별 상태인 성(性)ㆍ상(相)ㆍ경(境)ㆍ지(智)ㆍ교(敎)ㆍ이(理)ㆍ행(行)ㆍ과(果) 등은 모두가 곧 식(識)일 뿐이어서 하나의 법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여러 경전의 요의(了義) 중의 왕으로서 모든 성인이 의지해야 할 아버지라 일컬으며, 만약 만난다면 단박에 바라는 것이 사라져 하나의 법도 구할 것이 없고 한 가지 일도 부족한 것이 없어서 온전히 여래의 위없는 값진 보배를 얻으리니 어찌 형산(刑山) 굴 속의 옥덩이와 같겠으며, 이미 교해(敎海)의 비밀한 영주(靈珠)를 찾았거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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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검은 용의 턱 밑의 구슬에다 견주리오. 나아가 중생의 괴로움의 끝[苦際]을 다하고 번뇌의 병의 근원을 끊었으며, 한 생각의 공(功)이 온전하여 천 갈래 길이 스스로 바르게 된다. |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기를 “마치 맑고 시원한 못이 온 목마른 이들을 만족시키는 것과 같고 추운 이가 불을 얻은 것과 같고, 벌거숭이가 옷을 얻은 것과 같고, 장사꾼이 우두머리를 만난 것과 같고, 아들이 어머니를 만난 것과 같고, 건널 적에 배를 만난 것과 같고, 병든 이가 의사를 만난 것과 같고, 어둔 데서 등불을 만난 것과 같고, 가난한 이가 보물을 얻은 것과 같고, 백성이 왕을 만난 것과 같고, 장사꾼이 바다를 만난 것과 같고, 횃불이 어둠을 없애는 것과 같아서, 이 『법화경』도 역시 그러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온갖 고통과 모든 병통(病痛)을 여의게 하며 온갖 생사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것만이 진실하고 만 가지 법이 모두가 공한 줄 알 것이니, 이 표종(標宗)이야말로 다시는 견줄 이 없이 뛰어난 것[無等等]이다. |
『관법경(觀法經)』에서 말하였다. |
“거기에 상수(上首)라는 보살이 있었다. 하나의 걸사(乞士)가 되어서 성에 들어가 걸식을 하는데, 그때 항가(恒伽)라는 비구가 걸사에게 말하였다. |
‘당신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
대답하였다. |
‘나는 진실(眞實)안에서 왔습니다.’ |
‘무엇을 진실이라 합니까?’ |
‘적멸(寂滅)하기 때문에 진실이라 합니다.’ |
또 물었다. |
‘적멸한 모양 안에서는 구할 바가 있습니까. 구할 바가 없습니까?’ |
대답하였다. |
‘구할 바가 없습니다.’ |
‘구할 바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구하십니까?’ |
‘구할 바 없는 가운데서 나는 일부러 구하고 있습니다.’ |
‘구할 바 없는 가운데서 뭐하러 구하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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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할 바 있는 것이면 모두가 다 공한 것이니, 얻는 것도 공이요, 담는 것도 공이요, 채우는 것도 공이요, 오는 것도 공이요, 말한 것도 공이요, 묻는 것도 공이며, 적멸 열반과 온갖 허공의 분계(分界) 또한 모두가 공입니다. 나는 이와 같은 차례대로의 공한 법을 위하여서 진실을 구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법과 법의 위에서 공을 구할 수 있다면, 문과 [문]안에서 해탈한 줄 알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이 법으로 문답하며 언어가 오고 가고 하는 것은 마치 종경(宗鏡) 속의 형상과 같으며, 만약 반야(般若)지혜로 적멸 열반을 비추면 마치 종경 중의 광명과 같다. 그런 까닭에 형상이거나 광명이거나 간에 모두가 다 공한 것이니, 거울의 바탕은 항상 드러나 있을 뿐 온갖 처소에 두루 하여 일찍이 나타나거나 숨은 일이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나는 이러한 차례대로의 공한 법을 위하여서 진실을 구하나니, 온갖 법이 모두 진실임을 알기 때문에 구할 바 없는 가운데서 나는 짐짓 그것을 구합니다”라고 한 것이다. |
역시 법을 구한다 하면, 온갖 법에서 구한 바가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융대사(融大師)가 말하기를 “만약 하나의 법이라도 얻을 것이 있다 하면, 바로 이것은 때 아닐 적[非時]에 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
그런 까닭에 『정명경(淨名經)』에서 말하였다. |
“‘공은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
대답하였다. |
‘62견(見) 가운데서 구해야 합니다.’ |
또 물었다. |
‘62견은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
‘모든 부처님의 해탈 안에서 구해야 합니다.’ |
‘모든 부처님의 해탈은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
‘일체 중생의 심행(心行) 가운데서 구해야 합니다.’” |
고석(古釋)에 이르기를 “공지(空智)는 소견[見]을 인해서 나온다. 그렇다면 공지는 성품이 없으며 성품이 없기 때문에 지혜가 공하므로 공지라고 한다. 삿된 소견[邪見]은 모든 부처님의 해탈로 인해서 존재하되, 삿된 원인[邪因]이 바로 삿된 소견을 내는 것이라 역시 공하다. 모든 부처님의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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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은 깨친 중생으로 인한 마음의 행(行)이므로 해탈이요 공이다. 그러므로 그 공(空)의 체(體)에서 보면 둘이 없다. 그런 까닭에 서로 구한다는 도리가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다”라고 하였다. |
해석하여 보자. 삿된 것과 바른 것은 체가 똑같이 공의 도리에 근본을 둔 것이다. 또 일찍이 잠시라도 숨은 일이 없다. 만약 이 평등한 성품 안에서라면, 구할 필요가 없지만 아직 모르는 이를 위하여 구한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
『무생의경(無生義經)』에서 말하였다. |
“경에서 ‘모든 부처의 지혜를 원하고 구하는 것[願求] 또한 원하거나 구하는 것에 집착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부처의 지혜를 구하는 것조차도 오히려 탐착하지 않게 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착한 법이겠는가? 또 보살은 본래 원을 세우면서, 다만 말하기를 ‘제가 불도를 원하고 구하는 것은 중생들이 이로 인하여 비로소 알고 발심하면서 불도를 구하게 함입니다. 뜻을 얻으면 스스로가 구할 바가 없음을 알게 하여지이다’라고 할 뿐이다.” |
위에서 해석한 바는 생각과 생각이 실상(實相)과 상응하여 다시는 그 밖의 생각이 없다. 그런 까닭에 『능가경』에서 이르기를 “낱낱의 모양[相]이 상응하면, 모든 소견의 허물을 멀리 여읜다”고 하였다. 이것은 만약 모든 모양에서 언제나 실상과 상응하면 저절로 모든 허물을 여의고 제일의(第一義)를 알게 된다는 것인 줄 알 것이다. |
청정한 참된 마음은 밝고 사무쳐서 염착(念着)이 없고 사(事) 그대로가 여(如)이다. 유심으로 똑바로 나아가는 것이 부처님께서 허락한 바며 스스로가 깨달음의 경지이다. |
그러므로 논(論)의 게송에서 “스스로가 알면 남을 따르지 않고/고요히 사라지면 쓸모없는 이론 없다/다름이 없고 분별이 없는/이것을 바로 실상(實相)이라 한다”고 했다. |
[문] 이 유식은 크게 요약하면, 몇 가지가 있는가? |
[답] 요약하여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갖춘 갈래[具分]요, 둘째는 갖추지 않은 갈래[不具分]이다. |
갖춘 갈래의 유식이라 함은, 성(性)이 없다는 도리이기 때문에 진여가 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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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따르는[眞如隨緣] 이치가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생멸하지 않는 것과 생멸하는 것이 화합하여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하리니, 바로 이것이 갖춘 갈래이다. |
만약 전혀 참된 마음의 사(事)에 의하지 아니하고 이(理)에 의하지 않는다면, 생멸에서만 본 것이기 때문에 갖추지 않은 갈래가 된다. |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림자 밖에 바탕[質]이 있다면 반쪽 유식이다”라고 했다. 바탕의 그림자와 함께 하는 그림자라야 갖춘 갈래의 것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유식종(唯識宗) 중의 갖춘 갈래일 뿐이다. |
또 만약 결정신(決定信)으로 들면, 이것이 유식의 바른 도리여서 속히 보리(菩提)에 이르러서 마치 수레를 타고 서서 먼 데까지 이르는 것 같으며 배를 타고 앉아서 저 언덕에 오르는 것과 같다. 『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에서 말하기를 “대승(大乘)에 의하여 3계(界)가 성립되니, 이것은 식(識)일 뿐이다”라고 했다. |
해석하여 보자. 경에서 말씀한 대승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보리살타(菩提薩埵)가 행하는 길이요, 부처의 훌륭한 결과[果]이다. 이것을 얻기 위하여 유식관(唯識觀)을 닦는 것이니, 이것은 과실이 없는 방편이요 바른 길이다. 이런 것들을 위하여 저 방편을 나타냈고 모든 경전 가운데서 갖가지로 널리 펴 말씀하셨으니, 마치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과 아울러 가지고 있는 물건의 품류를 알기가 어렵고 방향과 처소가 그지없는 것과 같다. |
이로 말미암아 자기 마음의 형상이 나타난 것을 자세히 알고, 나아가 모든 처소에서 그 바깥 형상을 버리며 기쁨과 근심을 멀리 여의고서 다시 존재 바다[有海]의 시끄럽고 고요함이 차별 없다는 것을 관(觀)하여 저 작은 길을 버리고 대승(大乘)을 바라는 것도 희망도 끊으며, 모든 존재에서 탐착하는 무리들을 험한 낭떠러지 보듯 하여 깊이 두려움을 내면서 바르게 중도(中道)로 나아간다. |
만약 이것이 자기 마음만으로 하는 일인 줄 알면 그지없는 양식이 쉽게 쌓여서 많은 시간을 기다리지 않음이 마치 적은 공을 들여 큰 일을 능히 이룬 것과 같고 수행 처소에 잘 노니는 것은 마치 손바닥 안과 같으리라. 이런 이치 때문에 모든 원하고 구하는 것이 원만하게 되고 뜻대로 작용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