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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갈라디아서 6:11-15절
제목: 구원은 살라고 주신 겁니다.
지난주 목요일에 수능 시험이 있었습니다. 시험을 앞둔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물론 다는 아닙니다. 저희 셋째는 수능 전날 집에 일찍 와서 오후에 잠을 잤습니다.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평소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그런 겁니다. 안 하던 공부를 갑자기 하면 시험을 더 못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대학교는 입학할 수 있습니다. 학생이 모자라기 때문이죠. 질문합니다. 대학교는 입학이 중요할까요, 대학 생활이 중요할까요? 생활입니다. 이번 주 토요일 조카 결혼식이 있습니다. 없는 형편이라 스몰웨딩을 합니다. 아무리 스몰 웨딩을 해도 웨딩포토, 신혼여행 등의 기본적인 것은 합니다. 일생에 한 번 하는 이벤트이기 때문이죠. 질문합니다. 결혼식이 중요할까요, 결혼생활이 중요할까요? 결혼생활입니다.
신앙을 이렇게 생각하면 무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출애굽이 목적일까요, 가나안이 목적일까요? 가나안입니다. 출애굽 자체가 목적이라면 애굽에서 나오자 마자 다 데려가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해 주셨으면 우리를 곧바로 데려가셔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 받은 다음에도 숨 쉬고, 밥 먹고, 일하며 삽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신 다음 왜 우리를 이 땅에서 살게 하실까요? 구원의 목적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보낸 이유가 이겁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여섯 번이나 되풀이하는 게 있습니다.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고,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받았다는 겁니다. 그때 교회에 거짓 이단들이 들어와서 말합니다. 구원은 복음만으론 부족하니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속임에 교인들은 혼란을 겪습니다. 그때마다 바울이 말합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고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고.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겨버립니다. 은혜를 강조하자 방탕해지더라는 겁니다.
구원을 받았으니까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거죠. 그때 바울이 다시 말합니다. 5장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6절은 더 강조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맘대로 살지 말라는 겁니다. 바울이 말한 맘대로 사는 모습은 19-21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2-24절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 제목이 나옵니다. “구원은 살라고 주신 겁니다.”
여기 오만 원짜리 지폐가 두 장 있습니다. 이 두 지폐의 가치는 같습니다. 한 지폐를 구겨보겠습니다. 구겨져도 돈의 가치는 같습니다. 질문드립니다. 이 두 지폐 중 한 장만 가져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걸 갖고 싶으십니까? 이것이 삶입니다. 구겨진 삶이나 거룩한 사람의 구원은 동일합니다. 그런데 다른 게 있습니다. 멋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안 좋아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갑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구겨져서 들어가고 싶으십니까, 거룩하게 들어가고 싶으십니까? 거룩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에 이 땅에 살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한 홍 목사의 “아멘 다음이 중요하다”에서 그런 말을 합니다. “내가 설교하는 예배에 참석했다가 만난 커플의 결혼식에 주례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서 이혼하겠다고 찾아왔다. 그 멀쩡하던 형제가 가정 폭력을 휘두른다는 말에 너무 놀라 아무말도 못했다. 한 장로님은 미국 안에서 알아주는 큰 사업을 운영하시는데, 하청업자들에게 무자비한 갑질을 해서 그 업계에서 악명이 자자하다. 결혼 예단 문제로 예비 며느리들의 가슴에 한을 심고, 심지어 파혼까지 시키는 시어머니들 가운데는 교회 권사가 상당수다.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대체 교회에서 아멘하고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아멘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왜 이런 일들이 생길까요? 구원 받고 성령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목을 읽어봅니다. “구원은 살라고 주신 겁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구원받지 못함이 아닙니다. 왜 구원을 주셨는지 모르고 산다는 겁니다. 다시 제목을 읽어봅니다. “구원은 살라고 주신 겁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화하지 않는다고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 사람들에게 쪽팔린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신앙이 그랬습니다.
본문 11절에서 바울은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합니다. 큰 글자로 섰다는 건 중요한 말을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2절 첫 부분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사람들 보라고 꾸민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강요하는 게 있습니다. 할례입니다. 할례를 받으라는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유대인들은 할례를 구원의 상징으로 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할례를 안 받으니 핍박합니다. 이때 박해를 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할례받는 겁니다. 신앙생활 참 편하게 하는 방법이 이겁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 욕 안 먹습니다.
예수님이 왜 박해를 받았는지 아십니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하자는대로 안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그럴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인간관계를 잘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는 걸 숨기면 됩니다. 오늘 당장 해보셔도 됩니다. 평소 잘 지내던 사람에게 만날 때마다 예수 믿어라고 말해 보십시오. 나를 피할 겁니다. 하지만 그가 하자는대로 해 보십시오. 사람 좋다는 말 듣습니다. 질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에게 좋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께 좋게 해야 하나요? 저는 둘 다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저만 해도 신대교회 목사는 나쁜 사람이란 소문이 나면 전도가 안 됩니다. 하지만 살아보면 딱 결정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은 진심으로 만나고 하나님은 전심으로 따르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살라고 구원하셨습니다.
13절 끝부분에는 편한 신앙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육체로 자랑한다는 건 교인 수를 늘리겠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끝판왕입니다. 바울이 무엇을 지적하나요? 구원받지 못한 교인을 만들어내지 말라는 겁니다. 무엇이 구원받지 못한 교인을 만드나요? 편한 신앙입니다. 사실 교회가 그렇습니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신앙은 정말 편합니다. 한 상담가가 그런 말을 하죠. “아이를 망치고 싶으면 해달란 대로 다 해줘라.” 어쩌면 지금 교회가 그러는지 모릅니다. 필요한 것보다 좋아하는 걸 주려고 합니다. 우리에겐 말씀이 필요합니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예수 빼고는 다 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줄 수 있었습니다. 능력은 거기서 나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편하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교회는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말처럼 케바케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예배를 생명 걸고 지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목사인 저는 그걸 지적도 못 합니다. 지적하면 박해를 받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어디에서 배웠는지 모르지만 예배를 꼭 대면 예배로 드려야 하냐고 말한답니다. 비대면으로 드려도 된다는 거죠. 맞습니다. 케바케가 적용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부부생활도 비대면으로 하십니까? 사랑하는 남녀가 평생 비대면으로 연예하던가요?
왜 비대면으로 예배하길 원할까요? 편의주의입니다. 어떤 성도는 꼭 헌신을 해야 하냐, 십일조를 해야 하냐, 말씀대로 살아야 하냐고 묻습니다. 저는 질문하고 싶습니다. ‘무슨 말을 듣고 싶으세요?’ 질문은 하고 싶어서 한 건가요, 하기 싫어서 한 건가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울이 강조하는 게 그겁니다. 박해를 면하려고 세상과 같아지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 편해질까요, 불편해질까요? 정말 불편해집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은 그렇게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는 여기까지만 좋아합니다. 그 다음이 뭔지 보십시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입니다. 예수를 믿음은 멍에를 메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의 8복은 참 좋아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고,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고,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8가지 복입니다. 그런데 복을 받는 사람이 함께 받아야 할 게 11절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이건 당연하답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더 힘듭니다. 이유는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3절입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게 고난을 받으라” 로마서 8장 17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빌립보서 1장 29절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 한 생각이 올라올 겁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예수 안 믿는건데’ 여기서 두 부류로 나뉩니다. 그만 두는 교인과 그래도 계속 가는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누군지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모델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제가 모델 하기에 좋은 몸매인가요? 아닙니다. 모델은 배가 나오면 안 됩니다. 또 모델은 지나치게 잘생기면 안 됩니다. 이유는 모델이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모델은 옷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 받은 다음에 고난이 있는 이유가 이겁니다. 너는 다르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라는 겁니다. 화가 날 때 사랑을 택하고, 용서할 수 없을 때 이를 악 물고 용서를 선택하고, 세상이 독해질 때 너는 강해지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14절에 전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구원 이후에 오히려 십자가를 지는 게 성도입니다.
성도들은 목사에게 궁금한 게 있나 봅니다. 술을 안 마시냐는 겁니다. 제가 술을 못 먹을까요, 안 먹을까요? 안 먹는 겁니다. 술을 마신다고 지옥가나요? 안 갑니다. 그래도 안 마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거라도 해야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 세상과 구별될까요? 할 수 있는 걸 안 할 때입니다. 토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에서 말합니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맞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게 있어야 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보디발의 아내와 잠자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 합니다.
믿음은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겁니다. 왜일까요? 15절을 새번역으로 봅니다.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하루 새로워지길 원하는 사람, 구원의 감격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할 수 있는 걸 안 하고, 하기 싫은 걸 합니다. 이유는 거룩에 있습니다. 로마서 1-11장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12장부터는 구원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그래서 12장 1절은 말씀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산 제물이 뭘까요? 살아있는 삶을 드리라는 겁니다.
한국교회 초기에는 평양에만 교회가 있었습니다. 믿음이 좋은 여성도가 진남포로 이사를 갔습니다. 진남포에서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가려면 토요일에 출발해야 합니다. 그 성도는 진남포에도 예배당이 생기도록 기도했습니다. 한번은 달구지에 두 아들을 태우고 가는데 형제들끼리 막대기 장난을 하다가 옆을 지나던 말의 눈을 찔렀습니다. 말이 놀라 뛰는 바람에 타고 있던 사람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형제는 재판을 받게 되고 서로 자기가 안 했다고 말합니다.
재판장이 어머니를 불러 의견을 묻자, 어머니가 말합니다. “벌을 받는다면 작은 아들에게 내려주십시오. 저는 이 가정으로 개가를 했습니다. 큰아이는 전처의 소생이고 작은아이는 제가 낳은 아들입니다.” 검사가 그 말에 감동을 받아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오?” 어머니가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그렇게 됩니다.” 그러자 재판장이 말합니다. “내가 돈을 줄테니 진남포 땅에 예배당을 세워 당신 같은 사람이 많이 생기도록 해주시오” 그렇게 해서 진남포에 첫 예배당이 세워졌습니다.
교부 터툴리안이 말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크리스티아니’가 아닌 ‘크레스티아니’라고 불렀답니다. 두 단어는 거의 비슷하게 발음됩니다. 크리스티아니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크레스티아니는 “온유”를 뜻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로 알려지기 전부터 온유한 사람으로 알려졌다는 겁니다.
디모데후서 3장 1-3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딱 지금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교만하고, 비방하고, 무정하고, 원한을 풀지 않고, 사납습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현재입니다. 주님은 왜 구원하신 다음 우리를 그런 세상에 살게 하셨을까요? 향기입니다.
시인 조병화는 “나 하나 꽃이 되어”란 시로 말합니다. “나 하나 꽃이 되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꽃 피고 너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거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주님은 부탁하십니다. 신대교회 성도들, 당신들 만큼은 향기나는 삶을 살아달라고.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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