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출현의 우주사적 의의
함석헌
『세계문화사대계』 저자 웰스(H.G Wells)는 유사 이래 가장 위대한 인물로 첫째 나사렛 예수를 들고 둘째는 석가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설명하여 말하기를 위대라 함은 “그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무엇을 축적하였는가 혹은 죽음과 공(共)히 곧 붕괴하여버릴 어떤 무엇을 건설하였는가 하는 것으로써 사정(査定)할 것이 아니요” “그가 생존하였던 까닭으로 세계에 달라진 것이 있는가. 그는 사람들이 새로운 방향에 향하여 생각하게 출발을 시키고 그 원기와 생맥(生脈)이 사후에도 존속 하는가”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즉 그의 말은 유사 이래 예수같이 위대한 영향을 인류 위에 준 자는 없고 그같이 사람의 맘을 새 방향에 향하게 한 이는 없다는 것이다.
독자는 그리 말하는 그 웰스는 세계 사람을 향하여 “나는 크리스천도 아니요 개인의 영생을 믿는 자도 아니다”라고 공언하는 사람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는 순수한 과학적 역사가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과연 갈릴리 목수의 집에 났던(그리고 자신 아마 그 직업을 하였던) 예수는 웰스가 보는 것같이 역사상에 출현한 단순한 일개인으로만 보아도 최대의 위인의 영예를 그 머리 위에 씌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예수는 결코 단순한 역사인으로만 볼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하기는 그의 일생에는 너무도 위대한 것, 너무도 이상한 것, 너무도 거룩한 것, 너무도 신비롭고 모순된 것이 있다. 그는 묘표(墓標), 기념상, 전기만을 남길 이가 아니다. 과거만 아니라 미래 영원한 미래에까지 아마 우주가 완성되는 날까지 생명을 주는 자여야 할 것이다. 실로 우주가, 저에 의하여 완성될 자다.
고로 예수는 역사상 어떤 지위에 서는가 하는 문제는 역사가만이 흥미를 가질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가진 자는 물론 우주간의 온갖 존재자에게 문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그의 출현이라는 사실이 우주진화의 대목적에 대하여, 따라 거기 이르는 온갖 역사 과정에 대하여 결정적 의의를 가짐으로써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그것을 우리는 이하에서 논구(論究)할 것이다.
우선 우리는 무엇에 의하여 이 대문제에 해답을 줄 것인가. 예수가 단순한 역사인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위에도 말하였다. 만일 역사인을 초월한다면 역사적 음미만으로 아니 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예수에게 모든 인간을 추종을 불허하는 숭고 위대한 점이 있다고 보면 그야말로 그의 초인간적인 점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역사가가 그 이상은 자기의 임무가 아니라 혹은 불가능한 것이라 하여 예수의 인간적인 점을 기술하는 데 그친다면 그는 가장 필요한 점을 무시하고 비교적 외면적인 것만을 어루만지는 어리석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예수에만 아니라 일반으로 인사라고 해서 순수한 인적 해설만으로 충분한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 안에는 인력 이상 물질력 이상의 어떤 신비력이 일하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유물관적 역사의 저자인 장 조레스까지도 인정하는 바였다. 역사란 결국 자연이라는 무대 위에서 신이라는 감독자의 지도 밑에 배우인 인생이 연출하는 일장극이라 할 수 있다. 고로, 초인간적 신비력을 무시한 역사는 평면화한 기록에 불과하다. 더구나 예수의 경우에 그렇다. 웰스는 자기는 역사가로서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사출(寫出)하는 것이 임무라고 하면서 결국은 이렇게 말한다.
“역사가가 이 나사렛 무일문(無一文)의 선생에다가 제1위의 지위를 허락지 않고는 인류의 진보를 정당하게 서술할 수 없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요 의미심장한 일이 아닌가”
고. 이는 확실히 암시적 어구다. 여운약약(餘韻鰯鰯)이라 하겠다.
그러면 역사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무엇으로써 할 것인가. 그는 성경이다. 성경은 곧 우주와 인생과 역사의 신적 설명이다. 역사적 서술이 다칠 수 없는 역사의 정수를 가르치는 것이 이 책이다. 더구나 예수에 대하여서다. 성경 66권은 실로 예수라는 중심 혹은 핵심 혹은 본체를 붙들어 가지고 그 본원, 그 사적, 그 장래에 의하여 우주의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설명한 것이다. 고로 우리는 이제 성경 중에 나타난 것에 의하여 예수의 지위를 알아보기로 하자.
성경은 전부가 예수에 관한 문헌이기 때문에 예수를 알려면 그 전부에 긍(亘)하여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일이 그것을 토구(討究) 음미할 수는 없는 일이요 그중에 특히 예수의 30여년 생애에 대하여 기록한 4복음서 중에서 수절의 어구를 예증하여가지고 생각하려 한다.
(1)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복음, 2:14)
(2)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마가복음, 1:15)
(3)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5:17)
(4)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29)
(5)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이 수절에 나타난 것을 보면 예수에게 우주간에 어떤 존재자나 비할 수 없는 독특한 지위가 드리워진 것을 알 수 있다. 지위가 아니라 그야말로 우주의 머리요, 본체요, 생명이다. (1)은 예수 탄생 당일밤 천군 천사의 노래한 것이라고 기록된 것이다. 고래로 위대한 종교가, 제왕 성현의 출생에 제하여 종종의 서상(瑞象), 축복이 있었다는 전설은 많이 있다. 고로 이것도 그런 전설의 일종이라고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전설 중에도 이와 같이 천, 지, 인의 총중량을 일개인의 위에 싣는 송영(頌榮)은 볼 수 없다. 석가는 화원의 전설을 빼고도 석가로서의 의미를 잃을 것 없고 단군은 태백산의 강림을 신화로 해석하고도 단군이 될수 있다.
그러나 예수에서는 그 출생의 사실을 부정하고는 그리스도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이유는 예수에게서는 그것이 한낱 수식적(修飾的)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출생의 사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일임으로써다. 또 이것을 만일 사실이 아니라 하면 이를 인정하는 것보다 역사상에 더 많은 난문제가 일어난다. 가령 예를 들면 세례 요한의 증거(4번)가 거짓말이 되어버림이다. 천상에서 한 그 송영(頌榮)이 있고야 요한의 증거는 알 수 있다. 다음은 모든 비판학자들이 누가복음을 가장 역사적 서술의 성질을 가진 것이라고 하는데 의견이 일치하는 것과 상반됨이다. 누가복음의 문체는 4복음 중 가장 문학적으로 된 것이라는 것을 보면 저자는 유식자를 목표로 하였고 더구나 데오빌로에게 보내었다는 사실을 보아서 어린아이 속이는 듯한 옛말을 쓰지 않았을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가령 다 양보를 한다하고라도 여기 최대, 최강,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난관을 만난다. 즉 예수 자신의 말과 상충(相衝)됨이다. 4복음에 공통한 점을 보면 예수라는 인격이 어디까지 순결, 정직하고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겸손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순종하는 아들이었다. 그런데 만일 위로부터의 가납(嘉納)이 없이 2번에 인용한 말을 하였다면 성경의 기자는 전후 상충하고 만다. 그때에 예수는 강렬한 자기 과대광환자(誇大狂患者)거나 그렇지 않으면 방만한 인심수람가(人心收攬家)다. 그런데 만일 전자라면 기독교는 2천 년간 일개의 정신병자를 믿어왔다는 가장 비상식적 결론에 이르게 되고 만일 후자라면 성경의 기록은 상술한 바와 같이 전후 모순하는 신용할만한 가치 없는 문헌이라는 사실과 부합하는 결론에 귀착하여 버린다. 이것은 일례나 그 외에도, 3번에 인증한 말이라던가 혹은 “네 죄를 사하였다” 하는 말 등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 그리되면 성경전부가 거짓말이라고 하게 될 것이나 사실 인류의 가지는 문헌중에 가장 신용할만한 것임은 세상이 다 아는 바다. 고로 성경의 기사를 그대로 수납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다.
그러면 성경의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승인한다면 어떠한 의의가 거기서부터 설명되어 나오는가.
첫째, 예수의 출현에 의하여 우주에 새 질서가 생기었다는 것이다. 인류의 타락으로 인하여 우주과정에는 일대 변조가 생기었다. 자연계에 부조화라는 것이 있고 인류에게 죄악이라는 것과 그 결과인 고통사망이 침입케 되었다. 그리하여 창조주와 인생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구(深溝)가 생겼다. 이는 창조주와 인생 양편에 다 불행이었다. 그러나 그를 회복할 길이 없었다. 모든 노력은 도로(徒勞)였다. 최후에 유일의 길이 있었다. 그는 어떤 위대한 존재자가 있어서 성결한 자신을 던지어 그 심연을 메우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는 로고스 자신밖에 없었다. 예수는 정히 그였다. 그는 십자가 위에 화목제(和睦祭)를 드려 우주에 새 질서를 회복하였다. 이날부터 정상상태에 귀복하는 평화의 제일일이 열리었다.
둘째, 그러나 이는 단순한 복구라기보다는 신의 무한애(無限愛)의 새로운 계시였다. 그리하여 새 도덕이 수립되었다. 이것을 예수는 기약이 이르렀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였다. “기약이 이미 이르렀고”는 직역하면 “때가 찼고”하는 말이다. 즉 의미는 자기의 출현으로써 어떤 기다리던 것의 만기가 되었다는 말이다. 즉 자기 이전의 역사는 결국 자기의 오기를 위한 준비의 역사란 말이다. 이것이 70여 종 원소의 30여년간의 결합운동에서 나온 것이라고! 결단코 이 말을 발하였다는 것이 벌써 진리인 증거다. 그러면 예수는 왜 자기로써 우주사에 신기원을 삼았나.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곧 하나님의 사랑이 행하는 나라, 즉 하나님과 인생 사이가 부자의 관계에 있는 곳이다. 예수가 왔음으로 우주에 근본적으로 변화가 생긴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고 인류가 그의 아들이 되는 길이 열린 것, 인류에게 아들의 심정을 넣어주고 아들의 자유를 지어준 것, 예수의 천국의 가르침은 사해동포주의라든가 세계국가사상의 비롯이라든가 하는 그런 3분짜리 설명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로 상술한 것 같은 우주 사상의 혁명적 방향전환이다. 이에 의하여 율법의 시대는 지나가고 신앙의 시대가 열리었다.
셋째, 새 목적의 계시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의 하나님인 것이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일생에 의하여 명료하게 나타났다. 우리가 번제(燔祭)로 하지 않고 상한 영혼을 가지고 영인 하나님 앞에 헤르몬 산에서도 아니요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예배할 것을 가르쳤다. 이 육신과 이 세상은 지나갈 것이요 영원의 생명과 신천신지(新天新地)가 영의 나라에 있음이 알려졌다. 우리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에 있지 않고” 위에 있으며 우리의 보물을 이 땅위에 쌓을 것이 아니요 하늘 위에 쌓을 것을 가르쳤다. 그가 세상에 온 것은 “진리를 위하여 증거하려 함”이다. (요한복음, 3:6) 이는 우주 역사의 계단적 진보라기보다도 변질적 진화였다.
넷째, 이를 위하여 예수는 우리에게 새 생활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이는 회개와 신앙의 생활이다. 그는 복음 전파의 첫머리에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부르짖었다. 새 세계에 살기 위하여 새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 인 고로 고쳐 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요한복음, 3:6)
그는 월천(越川)하는 사공같이 나루 이쪽에서 모든 보행의 기구와 짐을 버리고 빈 몸으로 자기 배에 올라 절대로 자기를 신뢰하기를 명령한다. 물론 그의 이 십자가의 도는 결코 넓고 평탄한 길이 아니다. 매우 좁고 험하여 찾는 자가 적은 길이다. 그러나 생명에 들어가는 길이다. (마태복음, 7:13~14) 성질상 전연 새 길이다.
이리하여 이 나사렛 사람의 출현은 두 세계 두 우주의 경계선이 된다. 총결산자며 보상자요 창조자며 완성자다. 과연 그는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 자요 (요한복음, 1:14) 저로 “만물이 지은 바 되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로새서, 1:16~18)
이제 세계는 사상과 경제의 대 수난시대에 있다. 과연 암운저미(暗雲低迷)라 할 때다. 공황은 전 세계를 덮었다. 야비한 모더니즘과 유혹적인 물질주의는 경련적 광무(狂舞) 중에 무참하게 청년 남녀를 권입(捲入)하고 있다. 혹은 그러다가 전 인류와 그 모든 문화를 뇌격하여버릴 수 있는 이 암운이 시시각각 위협적으로 되어가는 이때에 인류의 아들들은 진지한 태도로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숭고한 질문을 누구를 향하여 발할 것인가. 굉대한 우주간에 뉘에게 가서 여기 대한 지시를 얻을 것인가. 우리는 이를 이상에서 본 나사렛 예수 이외에서 발견치 못한다.
사람은 어쨌든 자기긍정의 경향이 강하다. 개인과 단체를 물론하고 그렇다. 그리하여 역사에 대한 관념도 거기 지배되어 지금까지 온 길이 마땅하고 유일 필연의 고칠 수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마는 사실 역사에는 허다한 ‘만약’과 ‘있었을 것’이 있다. 이 ‘만약’이나 ‘있었을 것’이야말로 풍부한 암시와 반성의 동기를 주는 것이다. 거기 의하여서 오류를 시련으로 의의(意義) 부(付)할 수 있고 결함을 동기로 가치화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 소위를 시인 혹은 구니(拘泥)하는 이 버릇에서 현대인은 금일 세계를 풍미(風靡)하는 이 방식의 문화가 유일의 것이요 현대에 유행하는 이 사상의 유일 필연의 역사적 산물이요 가장 합리적인 것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노력의 의무에서 해면(解免)되어버린다. 그것은 과거에 그랬던 것같이 금후에도 역사는 유일 필연의 방향과 방식만에 의하여 맹목적으로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페이지 위에는 일찍이 꽤 많은 가능적 세계와 문화체계가 전정(剪定) 당한 지흔(枝痕)처럼 점선으로써 투영되어 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가 사상에 획시대적(劃時代的) 사건이라든가 전환점이라고 칭하는 것은 요컨대 이 역사적 전정흔(剪定痕)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정(剪定)은 성공인 것도 있으나 실패인 것도 있다. 모든 전정, 모든 선택이 다 긍정당하여야 할 것은 아니다. 혹은 수절(數節)을 역상하여서 근본적으로 개전하여 새 가지를 낼 필요가 있는 때도 있다. 현대는 정히 이 경우가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전수(全樹)의 지모(枝貌)를 결정하는 간경(幹莖)에까지 역상하여 결정하지 않아서는 아니 된다. 이것이 우리가 각하(脚下)의 혼란에 광명을 던지기 위하여 예수의 서는 곳을 찾는 소이다.
현재의 세상에 대한 경제가, 사상가, 학자의 해설은 종종 일 수 있다. 그러나 여하한 해석임을 막론하고 이 문명에 거대한 결핍이 있어 거기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만은(우연적 발생이 아니고) 인정치 않을 수 없다. 어떤 결함인가. 원래 구주제(歐洲諸) 민족들은 탐욕적 군주궁정의 사기와 편만과 간계와 스파이의 정치에서 자라났다.
즉 마키아벨리식 정책 중에서 자라난 사람들이다. 그들 사고방식과 품성이 그렇게 되었다. 그것이 17,8세기로 들어오며 국가주의의 발달에까지 미쳤고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이르면서 허다한 과학적 발명이 생기어 기계혁명이 일어나고 그것이 산업혁명을 일으키자 각종 산업이 울연(鬱然)히 발흥하였다. 이것이 일편(一便)으로는 구주인의 생활 관계를 종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넓은 범위로 변화시켜 종종의 사회문제를 촉발시켰고 타일편(他一便)으로는 부원(富源)개발, 자연정복의 표어와 공히 과학만능, 이성 만능의 시대를 산출하여 그 인생관, 우주관, 역사관에 대변화를 일으켰다. 여기서 일대 간극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즉 그들의 목전에 환혹(幻惑)할만한 물질의 세계가 전개되자 이를 소화하고 통제할 만한 정신력과 도덕력은 종래의 고정된 습관으로 인하여 또는 그 물질세계가 너무 환혹적인 것으로 인하여 압두(壓頭)되어버렸다. 눈앞에 대우주가 펼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심정은 여전히 탐람(貪婪)적 투기적 절취적이었다. 우주대(宇宙大)의 건축재를 놓고 가옥건조식의 옛 기술밖에 못 가졌던 것은 가석(可惜)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신세계의 발견과 종교개혁으로써 개막을 행한 근대사의 극(劇)은 욕심 많은 아이들의 쟁투로 화해버리고 말았다. 이제 저희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자기네가 이런 분위기에서 자라났고 지금도 이것을 호흡하고 물질적 정복적 분위기를 통하여 모든 것을 관찰하고 측정하고 판단하고 사고하고 있는 것임을 자각함이다. 그러할 때 그는 이 문명이 당연한 것, 이 세계 밖에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미망에서 벗어져 나올 것이다.
현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요구한다. 오히려 찾을 줄을 모르는 고로 더구나 필요하다. 이제 저희가 미친 듯이 부르짖는 빵보다 더, 빵보다 먼저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의 우주사적 지위에 대하여 명료한 정당한 자각을 가지지 못하는 이상 이 문명은 절망적일 것이다. 그는 우주 진화의 목표인 그리스도에 전연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가기 때문에.
성서조선 1931. 1월, 24호
저작집30; 18-167
전집20; 19-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