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여고시절 3년 연속 같은 반 이었다. 우리는 같은 성(임)으로 매번 번호는 앞 뒤로 37번과 38번 이었다. 그러니까 시험을 볼 때나 체육 시간 달리기할 때나 음악 시간 이동수업이 있을 때 우리는 늘 가까이 있었다.
밥 먹고 뒤돌아서면 배고팠던 자취생 시절, 주말이면 해남 집보다는 친구 집 몽탄으로 가곤했다. 어머니의 따뜻한 밥상이 좋았다. 추운 겨울 눈 덮인 배추로 갓 절어 담은 겉절이김치와 그 배추로 끓인 된장국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달달한 배추 맛이 일품이었다. 시험 기간이면 밤새워 공부한다는 핑계로 친구네 집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결국엔 문제집을 다 보지도 못하고 우리는 책을 읽거나 이야기 하며 밤을 새웠다.
어느 날 ‘일그러진 영웅’을 읽고 삐뚤어진 눈으로 엄석대 와 한병태 이야기만 했다. 일그러진 영웅은 누구를 의미하는지, 둘 다 인지를 놓고 우리는 앞 다투어 말했다. 친구는 반 아이들이 반장인 엄석대에게 반기를 둘 생각을 못하고 굴복하고 충성하는 모습에 주목했다. 서울에서 전학 온 한병태는 반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결국 복종하고 마는 비굴한 모습에 ”에잇 못난 놈“하면서 화를 냈다.
세월은 흘러 나는 여고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다. 대기업 직원을 거쳐 통계청 임시직으로 일하다 현실 안주 하는 결혼을 선택 했다. 친구는 직장에서 노조 간부 중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잘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노동 운동에 뛰어들어 불꽃처럼 사느라 소식이 없는 친구를 찾아 나섰다. 친구어머니에게 주소를 받아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17평 아파트를 찾아갔다. 작은방 2평 남짓한 방을 월세로 살 때 난 친구에게 물었다.”왜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어?“ 친구의 답은 분명했지만 내게는 흐릿했다. ”내가 살아 있는 느낌이야. 심장이 막 뛰어.“ 노동가를 부르며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투쟁하는 치열한 삶이 친구의 심장을 뛰게 한다는 말을 난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가을날 친구는 일주일 휴가를 받았다며 원주에 사는 내게 찾아 왔다. 육아에 지친 나를 보고 친구는 결심을 하는 듯 “난 결혼하지 않을 거야.” 묻지도 않는 말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저녁이면 잠을 못 자고 뭔가에 불안한 모습이었다. 사실 친구는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어 조용히 지낼 곳이 필요하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친구의 삶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듯해 “혜영아 지금도 심장이 뛰니?” 친구는 단호하게 “응”한다.
쉽지 않은 삶을 선택한 친구는 십여 년을 다니던 회사에서 정리해고 되었다. 상실감을 안고 시골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내려와 글을 쓰며 조용히 한 해를 살았다. 학창시절 우연하게 만난 우정이 영혼으로 이끄는 필연이 되었듯, 친구는 운명적인 만남을 이루었다. 00대학교노조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아 헤벌쭉 웃으며 “나 결혼해.”한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던 친구의 마음을 돌려놓았던 신랑은 순둥이처럼 순했다. 마흔의 늦은 나이에 결혼해 딸을 낳았다.
친구의 행복도 잠시, 출산 후 종양이 발견되어 조직검사결과 난소암 3기 진단을 받았다. 몸 안에 퍼진 암세포는 두 달 된 딸을 두고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딸 곁에 있고 싶어 고통을 참아 내려했다.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기는가 싶었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기 속 흘러나오는 친구 남편의 목소리가 흐느낀다. 벚꽃은 비바람에 떨어지고 초록 새싹 돋아오는 4월, 벚꽃처럼 짧은 생을 살다 갔다. 장례식장은 북적거리는 사람들로 웅성거린다. 나는 사람들을 피해 조용한 의자에 앉았다. 친구의 핸드폰이 내 손안에 들어와 있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삶과는 다르게 활짝 웃고 있는 얼굴 사진이 보인다. 친구가 친구에게 보내는 글을 보게 되었다. 외로운 투병 생활 일기가 있었다. ‘나 내일 죽을지라도 그래도 할래. 작가.’ 이 문구가 내 마음에 꽂혔다. 나는 친구가 가고 난 후 예전처럼 살지 않는다.
고향에 내려온 후 종종 친구 집에 간다. 구부정한 어머니 허리는 백 살이 다 되어도 펴지지 않았다. 내가 왔다고 버선발로 나와 내 손을 잡는다. 더딘 걸음이 넘어질까 염려스럽다. 친구 언니는 도시에서 내려와 어머니와 함께 산다. 언니 말은 어머니는 자주 잊어버리는 증상이 나타나고 다른 사람 말도 못 알아듣는 치매 증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내가 왔다고 한 손에 작은 소쿠리를 들고 텃밭으로 간다. 구부정한 허리에 꽃무늬 고무줄 바지가 엉덩이에 걸려있어 올려주려고 어머니 뒤를 따라갔다. 콧물을 훌쩍이는 소리에 나는 발길을 멈추었다. 눈물 닦는 아이처럼 오른손으로 쓱 얼굴을 닦는다. 어머니는 나를 보면 늘 “혜영이는 뭣이 그리 급해서 빨리 가 버렸을까”하며 울음을 토해낸다.
첫댓글 감동적인 글이네요. 한 편의 단편 소설을 읽은 듯합니다. 혜영 선생님의 어며님은 선생님에게서 따님을 추억하시나 봐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기억이 가물거려도 가슴에 박힌 딸은 잊지 못하신가 보네요.
치열하게 살다 갔다는 표현이 딱 맞네요. 죽음까지도
짧고 굵게 살다 갔군요.
치매 어르신의 묵은 기억이 슬프네요.
심장이 뛴다.
멋진 제목만큼이나 글도 좋네요.
'마지막 잎새'도 생각나구 가슴 뛰는 일이 무엇인가도 생각하게 해 주는 글 입니다.
여고 3년 동안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너무 빨리 가셔 버리다니, 너무 슬프네요.
어린 딸과 늙으신 어머니를 두고 어떻게 떠나셨을까요? 가슴 뛰게 살다 가셨으니 좀 덜 아쉬웠을까요?
일찍 가버린 아름다운 사람은 두고두고 그립지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거 같아요.
가슴 뭉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