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들을 보내며
정동식
늦은 점심을 끝내고 나니 두 시 반이었다.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잠은 오히려 멀리 달아나려고 한다.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TV를 켰다. 모 방송에서 어싱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다. 처음 듣는 말이라 경청해 보려는 순간 방송이 끝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구글 검색을 해봤다. 어싱은 영어로 접지(earthing)를 뜻하는 말이란다. 맨발로 땅과 접촉하면서 기운을 받는 걷기 운동이었다. 혈액순환과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당장 실행해 보고 싶었다.
뭘 신고 갈까? 어차피 맨발로 걸어야 하니 운동화보다 샌들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주 전 올여름에 신으려고 내놓은 샌들 두 켤레가 생각났다. 둘 다 십여 년 전에 샀는데 양말 없이 편하게 신을 수 있어 휴가 때 슬리퍼 대용으로 많이 가지고 다녔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은 신발장 안에서 다년간 은둔생활을 했던 녀석들이다. 두 켤레 중 발등 끈을 조절할 수 있는 신발을 택했다. 오랜만에 신은 샌들은 가볍고 착용감이 좋았다.
우리 집에서 둑길로 가려면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야 한다. 신호에 따라 자동차 도로를 가로질러 단골 미용실 부근에 왔을 때 뭔가 허전했다. 오른발을 내밀어 보았다. 샌들의 쿠션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산 초입에 오르자마자 바닥을 확인해 보니 밑창이 벗겨지고 안 보였다. 이런 낭패가 있나. 몇 년 전의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둘레길 탐방을 하다가 조깅화 밑창 고무가 삭아 부스러져 한바탕 소동을 벌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동반자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한쪽 발로 걷는 듯 조금 어색했으나 거리가 멀지 않아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리 동네 둑길은 농어촌 공사가 관리하는 아담하고 풍광 좋은 흙길이다. 나는 수변 산책로와 숲 산책로가 만나는 서편 벤치 옆에 샌들을 벗어 놓았다. 이곳은 시원한 산그늘과 서늘한 골바람이 불어 왁자하게 담소를 나누는 분들이 많다. 맨발로 흙길을 한 걸음 내디디니 잔모래가 간지럽게 발바닥에 와닿았다.. 촉감이 좋았다. 산책로는 평일이어서 주말보다 한산했다. 맨발로 걷는 사람 중의 절반 남짓이 여성이었다. 여성이 남성보다 건강에 민감해서일까, 아니면 시간이 많아서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성의 참여도가 높아 보였다. 아직 어싱을 잘 몰라 왜 이 운동을 즐기는지 궁금했지만 나름 잰걸음으로 열심히 걷고 있어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산책 중 자그마한 돌이 밟힐 때는 수목원 황톳길이 생각났다. 거기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힐링이 된 듯 머리가 맑아지고 어싱이 어떤 운동인지, 어떤 느낌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두 번을 왕복하고 나니 벌써 장모님 맞이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나는 부랴부랴 운동을 마무리하고 샌들이 기다리는 명당 벤치로 갔다. 아까 뵌 그분들이 푹 쉬다 갈 참인지 아직도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햇볕 드는 곳에서 명소 그늘로 들어서니 냉장실을 열은 듯 서늘한 기운이 땀을 식힌다. 체감 온도가 삼사 도 낮게 느껴지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명당 쉼터임이 분명한 것 같다.
벤치에 걸터앉아 샌들에 묻은 모레를 털었다. 샌들을 신으려 하자 잊고 있었던 샌들 밑창이 다시 생각났다. 어디서 떨어져 나갔지, 되돌아가는 길에 찾을 수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지금까지 십 년 이상 나와 함께 했는데 이대로 헌신짝 버리듯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설령 고쳐서 예전처럼 신지 못하더라도 옛정을 생각해서 꼭 찾아야 했다. 온갖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왔던 길을 찬찬히 살피며 되돌아가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드디어 벚나무 아래 허탈하게 누운 밑창을 발견했다. 떨어져 나간 밑창은 말이 없었다. 밑창을 들어 신발에 맞추어 보니 마치 오래전 헤어진 가진 가족의 증표처럼 비로소 하나를 이룬다. 가슴이 뛰었다. 두 손으로 샌들 밑창을 감싸든 채 집으로 향했다. 보행자 적색신호가 이렇게 길었던가? 나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부질없는 조바심만 일었다.
오늘 마지막 봉사를 다 하고 부득이 쓸모가 없어진 나의 샌들!
밑창이 떨어져 나간 볼품없는 모습을 바라보며 요즘 배우자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몰인정한 세상이 떠올랐다. 가정불화로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는 부부, 조강지처를 내쫓는 사람, 심지어 보험금을 노리는 끔찍한 사건도 더러 일어난다. 사랑의 뿌리가 알차게 내린 만남이 많을수록 세상은 아름답고 거룩하다. 좋아서 만났다가 비록 헤어질지언정 서로 책임을 다하는 아름답고 숭고한 이별이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
숲의 철학자 어느 분이 말씀하셨다. '사랑이란 함께 하는 것'이라고.
좋은 날들과 아픔에 힘겨운 날들을 모두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아프고 힘겨운 날들에는 아름답고 고상한 이별이 당연히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2023.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