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유병근 선생님을 추모하며 / 안경덕
어슴새벽 강의 물안개 솟아오르듯 선생님 생각이 자꾸 납니다. 1993년 초가을 수척해 가는 나뭇잎들이 마흔 중반을 맞은 제 모습 같아 마음이 허수할 때였습니다. 부산경남 전문대학 평생교육원(현 동서대학교 사회교육원) 문예 창작과 수필 반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남색 체크무늬 남방셔츠와 검정 바지에 단정한 차림은 예순 초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었습니다. 병환으로 돌아가신 지 스무 해가 넘은 제 아버지를 만난 듯해 가슴 뛰었습니다. 선한 인상과 풍기는 분위기가, 조용한 목소리와 보통의 키가 아버지와 흡사했습니다. 저는 그날부터 만 십 년간 수필 강의가 있는, 수요일을 기다리는 여자가 됐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선생님 덕분으로 그 시절이 가장 마음이 부유했던 것 같습니다.
몇 주간 수강생들은 집안일을 주제로 설명 부분이 많은 글로 주를 이루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여기는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자고 모인 곳이 아닙니다.”라고 하셨지요. 꾸지람 이기보다 타이르듯 했습니다. 그 후로도 별 진전이 없자 단호하게 나무랐습니다. 문학은 직설적이지 않아야 한다며 내면화와 형상화에 대해 핵심을 세심하게 짚어 주셨습니다. 새로운 어휘와 탄탄한 문장 공부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사물을 긍정의 마음으로 관찰해야 깊이가 보이고 글이 확장된다. 꽃은 아름다움보다 피우기까지의 아픔을 들여다봐야 한다. 돌에도 생명이 있다고 강조하셨지요.
저는 주마다 새 제목에 반해 겁도 없이 숙제했습니다. <신발>이라는 글에서 ‘내가 흰 고무신을 닦을 동안 시어머니는 경대 앞에서 참빗으로 머리를 곱게 빗었다. 동백기름을 바른 머리가 반지르르했다. 옥색 비녀로 쪽진 뒷모습에서 찬바람이 일었다’라는 문장에서 선생님은 훗날 활자가 됐을 때 ‘찬바람’은 분란의 씨가 될 수도 있다고 하셨지요. 사흘을 생각한 끝에 ‘하도 정갈하여 곧은 성품이 나타났다.’라고 수정했습니다. 그만큼 감정의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걸 먼저 가르쳤습니다. 거기에 부연설명이 긴 문장은 치맛단을 올려야 된다. 퇴고가 안 된 글은 가지를 가차 없이 쳐내야 한다. 표현과 문장이 무난할 땐 누에가 한숨 자고 일어났다는 식으로 은유와 비유법을 넌지시 상기시켰습니다.
선생님은 임기응변에도 능하셨지요. 그건 우리에게 베푼 배려였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선생님 오늘 이발하셨군요”라고 하니 “예 지붕 수리했습니다.” “선생님이 <애인> 드라마의 주인공 같아요. 파란 셔츠가 정말 멋집니다. 애인 있습니까?” “예 애인이야 많지요. 지나가는 바람도, 서 있는 나무도, 반겨주는 꽃도 다 애인입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 풍치風致와 위트가 얼마나 정겹고도 시적이었는지 가슴 촉촉해졌습니다. 선생님의 글이 언제나 젊은 이유를 알았습니다. 글마다 참신한 인식이 번뜩이고, 무한한 상상력을 넘어 빠르게 섭렵한 정보까지 풍부했습니다. 저는 그 경지는 감히 엄두도 못 내고 간결하고 탄력 있는 문장만이라도 닮아 보려고 선생님 글을 여러 번 필사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애쓰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수필과 비평> 세미나와 문학기행 때도 약속 시각 보다 훨씬 일찍 오셨고, 식사 때도 먼저 밥상 앞에 착석하셨습니다. “내가 안 그러면 집사람한테 혼납니다”라며 환하게 웃으셨지요. 사모님을 존중하는 마음이 물씬 묻어나는 소박함도, 몸에 밴 솔선수범도 우리에게 큰 귀감이었습니다. 진정한 스승으로서 가슴에 울림을 준 견고한 강의도 대단하셨지만, 우릴 허물없이 보듬어 주는 선생님이 참으로 따스했습니다.
또 선생님은 고희를 넘기고도 등산을 즐겼습니다. 부산 근교 산은 물론이고 시간 맞춰 시외버스를 타고 경남 일원의 높은 산까지 마다치 않으셨지요. 일고여덟 명의 제자와 주마다 산을 오르내리며 힘든 내색 없을 만큼 건강했습니다. 그 공을 자연 공부 인생 공부가 발걸음에 힘을 실어 주어서라고 하셨지요. 그 산행이 문학 공부까지로 연장 선상이 되었답니다. 저를 포함한 그 문우들과 몇 년 동안 특별한 혜택을 누린 셈입니다. 선생님의 시집 <<금정산>>‘시인의 말’만 봐도 선생님은 얼마나 자연과 동화되고 자연을 깊게 관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딱따구리는 제 부리로 나무 등걸을 쪼아 소리를 빚는다. 산이 그걸 받아 제일 깊은 골짜기로 숨어들어 골짜기의 소리를 빚는다. 소리를 빚기 위해 산은 더 깊어진다. 여러 백 년 아니 천년쯤 곰삭아 가장 은은한 산울림으로 되살아나기 위해 깊어진다. 언어라는 나무를 쪼아 시의 산울림을 빚는 시인은 어쩔 수 없이 딱따구리다. 산이다. 나도 그런 딱따구리며 산이었으면 하고 어설픈 몸짓을 한다. 어차피 철이 들기는 글렀다. 1995년 여름 들면서 유병근”
선생님은 지금쯤 그 먼 곳에서도 시를 찾아 수필을 찾아 부지런히 길을 나서겠지요. 저에게 딱따구리 소리는 선생님의 절차탁마한 내공같이 들립니다.
그 숱한 독서와 집필에도 아흔 연세 가까이 돋보기를 쓰지 않으셨고, 염색도 하지 않은 검은 머리의 선생님은 만년 청년이셨습니다. 그 정정함이 우리에게 늘 희망이었고 탄탄한 울이 되어 주셨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미수米壽연宴을 앞두고 들려온 환후 소식에 하늘이 온통 잿빛으로 보였습니다. 오십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문학의 고독한 길을 꿋꿋하게 걸어온 선생님, 작가는 오직 글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조가 정말 확고했습니다.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철학이 든 문학 작품 <<시집과 수필집>>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또 후학 양성의 막중한 자리에서 열과 성의를 다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문하생인 것만으로도 큰 자긍심을 가졌습니다.
선생님의 부음을 받은 날, 사월 하순에 접어든 일기였지만 저는 온몸이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습니다. 놀란 가슴 좀처럼 진정되지 않더군요. 하던 일을 그만 손 놓고 말았답니다. 선생님의 영전에 함께 조문한 두 문우와 영정 사진으로나마 선생님을 뵙고 나니 온기가 도는 느낌이었습니다. 빈소를 지키는, 줄느런하게 선 근조화환의 애도가 생전의 올곧은 삶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 명예로움은 제 마음을 적이 놓이게 했습니다.
선생님은 집필이 버거울 때마다 자칭 칭한, 그 애인들이 기운 나도록 거들어 준다고 하셨지요. 그것들도 선생님과의 이별을 많이 슬퍼할 것입니다. 그동안 서로 살갑게 눈 맞추고 이야기 나누었던 정과 사랑을 어찌 잊겠습니까. 저 역시 존경하는 선생님이 우리 곁을 영영 떠났다는 사실에 애석한 마음 날로 더해 갑니다. 제 감성의 묵정밭에 문학의 싹이 트이게 해 주신 은혜 내내 잊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한결같았던, 근엄하면서도 유순한 선생님의 성품과 문학 의식을 본받도록 마음 다 하겠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첫댓글 선생님께 수업을 받는 복은 못 누렸지만
이렇게라도 함께 하고 싶어
한참을 앉았습니다. _()_
안경덕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