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사랑/서범석이 읽은 좋은 시
멧돼지 2008. 7. 31. 13:40
http://blog.daum.net/sbs96/5897701
씹어볼 만한 시들을 모았습니다. 가져 가셔요.
無名
김형영
쓸모 없는 나무가 산을 지키듯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늘이시어, 그들을 보아서라도
세상을 벌하지 마소서
오늘밤에도 별을 보여 주소서
―「시와시학」, 2000 여름
水墨 정원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 번 -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라온다
―「시와시학」, 2000 여름
입설단비(立雪斷臂)
김선우
二祖 혜가는 눈 속에서 자기 팔뚝을 잘라 바치며
달마에게 道 공부하기를 청했다는데
나는 무슨 그리 독한 비원도 이미 없고
단지 조금 고적한 아핌의 그림자를 원할 뿐
아름다운 것의 슬픔을 아는 사람을 만나
밤 깊도록 겨울 숲 작은 움막에서
생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저 묵묵히 서로의 술잔을 채우거나 비우며
다음날 아침이면 자기 팔뚝을 잘라 들고 선
정한 눈빛의 나무 하나 찾아서
그가 흘린 피로 따뜻하게 녹아있는
동그라한 아핌의 그림자 속으로 지빠귀 한 마리
종종 걸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싶을 뿐
작은 새의 부리가 불게 물들어
아름다운 손가락 하나 물고 날아가는 것을
고적하게 바라보고 싶을 뿐
그리하여 어쩌면 나도 꼭 저 나무처럼
파묻힐 듯 어느 흰눈 오시는 날
마다 않고 흰눈을 맞이하여 그득그득 견디어 주다가
드디어는 팔뚝 하나를 잘라 들고
다만 고요히 서있어 보고 싶은 것이다
작은 새의 부리에 손마디 하나쯤 물려주고 싶은 것이다
―「시와시학」, 2000 여름
石榴
이가림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 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햐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 주소서
―「시와시학」, 2000 여름
마음의 고향
― 初雪
이시영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세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란 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 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묵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적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시와시학」, 2000 여름
편지 받고
이성선
나 세상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것
그대 너무 걱정하지 말게
지금은 조용히
해 지는 산 앞에 앉아 있지
무릎 아래의 꽃들이
마음 접는 시간 곁에 사네
혼자 있을 때 사람이나 짐승
풀잎까지도
전체적이 된다고 누군가 말했지
단순한 삶 속에
앉아 있으면
자주 해 지는 시간이 찾아와서
장엄한 그림 속에 나를 넣어 작곡한다네
―「시와시학」, 2000 여름
하늘의 그물
정호승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기러리들만
하나 둘 떼지어 빠져나갑니다
우스운 기도
이탄
나는 20대가 왜 그리 길었는지, 저녁마다 빨리 가기를 빌었지. 아니 30대가 왜 그리 길었는지 어서 가기를 빌었지. 생각해봐. 허구한 날 막걸리에 동태찌개를 먹으면서 이렇게 먹어야 나이를 먹을 것인가 하고 술에 취했지. 정말 40대가 언제 가버릴까. 흐느꼈어.
50대가 되었을 때 나는 붕붕 떠다니는 신세가 되었어. 머리에 든 것이 있어야 무게가 나가지. 그래서 얼른 가라고 기도를 했어.
요즘, 나는 사기꾼, 머리에 무엇이 든 사람처럼 천천히 말하지.
― 시집 『혼과 한 잔』(1999.10)
봄비
오세영
꽃 피는 철에
실없이 내리는 봄비라고 탓하지
마라.
한 송이 뜨거운 불꽃을 터트린 용광로는
다음을 위하여 이제
차갑게 식혀야 할 시간.
불에 달궈진 연철도
물 속에 담금질해야 비로소
강해지지 않던가.
온종일
차가운 봄비에 함빡 젖는
뜨락의
장미 한 그루.
―『한국문학』(1999.겨울)
꽃 핀 나무
이기철
하루를 침대에 눕히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그리움을 내려놓아야 한다
한 사람의 마음이 꽃 핀 나무로 서기 위해서는
한 움큼의 기쁨을 그의 마음 속에 심어야 한다
지나오면 모두 어제가 되고 작년이 되는
이빨 속에 무참히 뜯긴 시간들
봄을 따라가던 맹목의 가을이
잘못 든 길에서 얼굴 붉힌다
그것이 세월이다
그러나 한 다발의 기쁨으로 세월을 견디기 위해서는
쓸쓸함의 계단을 딛고 올라
꽃 핀 나무의 열렬함으로 하루를
꼿꼿이 세워야 한다
내가 사랑했던 나무와 네가 사랑했던 나무의
빛깔이 서로 다를 때
그것이 한 해다
세상은 어두워도 꽃 핀 나무의 마음은
혼자 환하다
―『문학사상』(2000.4)
전화카드
石華
이젠
할 말이 없다
이마에 찍혀진 만큼
할 말을 다했기 때문
제 것인 줄로만 알았던
우리 생명
들숨과 날숨이
누군가에 의해 주어졌던 것임을
너를 보며 확인했다
구겨진 데 한 곳 없고
덧금 하나 그어지지 않아
모양은 처음처럼 멀쩡해도
아무런 쓸모 없어진 너
너를 쥐고 있는 나도
내 손을 쥐고 있는 너도
이제 다시 찍소리 한 번 못하게 된 것
이마에 새겨진 만큼
할 말을 다했기 때문이다
―「시안」, 2000 여름
그리움
김완하
저 산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네
산으로 서기 위해 저 절벽도
이 강물 속으로 무시로 무너져 내리곤 하네
그것을 다만 우리가 알지 못할 뿐
안개에 싸인 새벽녘 산과 강이
은밀히 뒤엉켜 누웠다가
후두둑 깨어나곤 하지
그 때 산은 젖은 어깨 흔들어
온 산의 풀잎에 이슬 맺힌다네
그 때마다 나무들 일제히 힘차게
강물 쪽으로 뿌리를 뻗는다네
그 뿌리의 힘으로 산은 서 있네
―「시안」, 2000 여름
팽이
김선태
팽이가 도는 것은
누군가의 채찍질이 있기 때문이다
조무래기들의 채찍질까지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따악 따악, 아프게
매 맞으며 조금씩 제 몸을 일으켜 세우는 팽이
끊임없는 채찍질로 정신이 뜨여 빠르게 돌더니
마침내 스스로 도는 줄도 모르고 멈춰선 지점
저 무아지경의 황홀한 천착
저 꼿꼿한 自立 또는 自存
그리하여 팽이는, 천형의 팽이는
울음소리도 어지럼증도 미동마저도 없이
팽팽한, 한 송이 고요를 피워올리는 것이다
잠깐, 세계의 숨통을 바짝 조이기도 하는 것이다
―『시와사람』(1999.겨울)
'아이'라는 기표를 위한 상상
이원
아이라는 기표를 불렀더니
아이가 그림자까지 붙이고 나타났다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더니
입이 생기고
다섯 개의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생간다
아이스크림은 아직 녹지 않았다
아이는 금방 생겨난 입으로 깔깔거린다
아이스크림은 받지도 않고 계속 깔깔거린다
그사이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이
아이의 그림자에 달라붙었다
그림자를 손으로 찍어보니 달다
아이의 그림자만 뜯어먹고
아이를
지웠다
흔적도 없다
아이에게 주려고 했던 방한복만
덩그마니 남았다
―「현대시학」, 2000. 5
강화도, 거기서도 외로운
정상하
말이 없는 어느 외로움과 하루를 지낸다
그가 기다린 길 하나를 끌고와 내 길 옆에다 놓는다
놀러가자고 갖다 놓는 그 길도 군데군데 균열이 심하다
그도 나처럼 균열을 평지처럼 지나는 법을 알고 있다
그가 두 번 기우뚱거렸지만 나를 보며 삐죽 웃는다
바로 그때 내가 세 번째 휘청거렸기 때문이다
균열을 많이 건너온 그와 나는
모든 길을 균열처럼 지나간다 엉금엉금
저 새, 저 새들 좀 봐
그가 날아가는 한 떼의 새를 마구 갖고 논다
양날개를 퍼덕이며 논다
너무 갖고 놀아서 새떼들이
그의 손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새의 부스러기 하나도 남지 않는다
바다가 게워낸 햇감처럼 모래톱에 앉아서
그가 자기 어눌을 찰박찰박 만지며 놀고
나는 짜디짠 근심의 서슬들을 버석버석 갖고 논다
자신의 춥고 뻘 깊은 바다를 주거니 받거니
하루종일 논다
―「현대시학」, 2000. 5
내 사랑은
박재삼
한 빛 황토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바닥에 갈아 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구나
몸으로 사내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불이 지지지 지지지 않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갈래
여울바닥에는 잠 안자는 조약돌을
날새면 하나 건져 햇빛에 비쳐 주리라
가다간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나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는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이 시대의 아벨』
진공청소기
-희망사항
서귀자
의사 선생님,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이제는 터져 버릴 것 같네요
한결같은 습관에 길들여져 껍데기만 살아 숨쉬는 내 몸
오늘은 밖으로 향한 문 모조리 열어놓고
전자 현미경으로 내 가슴 좀 들여다 보세요
수없이 우글거리는 잡균들
서로 몸 비비는 어두운 소리, 보이지 않나요
비상구를 향해 실핏줄처럼
어지럽게 엉킨 붉고 푸른 기억의 저장물들
일제히 더듬이를 치켜 세우며 탈선을 꿈꾸는 소리
소리들로 가득하잖아요
그리고 저기 좀 보세요
가슴 속 깊은 곳, 악성종양처럼 뿌리 깊숙이 박고
제 집인 양,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한 사내의 젖은 눈빛
그 차갑고 따뜻한 눈빛에 갇혀
비라도 흐느끼듯 내리는 날은
약이 듣지 않는 지독한 몸살에 죽어가요
선생님, 치유되지도 않고
지워지지도 않을, 수많은 상처와 우울로
한껏, 부풀어오른 내 가슴
투명한 빈 가슴으로 갈아 끼워줄 수 없나요
―「시안시인」, 2000
말 이야기
이향지
-세상에 伯樂이 있고, 그런 다음에 千里馬가 있다.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백락은 항상 있지 않다. 그러므로 비록 명마가 있다하나, 다만 노예인의 손에 욕되게 하며, 마굿간에서 변사하니, 천리마라 일컫지 못한다. -韓退之,「馬說」
말로 태어나서, 멀쩡한 사지를 갖고도 千里를 달려보지 못했다. 나는 伯樂을 찾아다녔다. 雜說로부터 1천 2백여 년 마셔온 강물을 따라 1천리 걸어가니, 伯樂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동쪽 창 밖에 크고 아름다운 호수가 보이는 찻집에 그가 있었다. 伯樂! 나는 설레는 마음에 앞발을 번쩍 치켜들고 히잉히잉 울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말울음 소리를 들은 伯樂이 밖으로 나왔으나, 고개를 저었다. 가는 데 1년, 오는 데 1년이 걸리는 1천리 길을 세 번이나 찾아가서 발굽이 빠지도록 울었으나, 伯樂은 내 울음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듣기만 할 뿐, 너는 千里가 아니라거나, 나는 伯樂이 아니라거나, 나는 伯樂이지만 아무 千里나 받아들이지 않는다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마지막 강물을 따라 내려오며, 늙고 병든 암말의 부스스한 갈기가 물결에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병든 암말을 강물에 떠밀어 죽이고, 밤톨만한 망아지 속으로 들어갔다. 병든 암말이 살던 마굿간을 등지고, 伯樂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작아도 나는 말이니 달리다 죽기로 했다. 伯樂 앞에서 마굿간 앞까지, 1년 걸리건 길이 열 달 여덟 달 여섯 달 두 달 한 달 열흘 닷새 하루로 줄어들었다. 밤톨만하던 나는 점점 자라서 망아지가 되었다. 伯樂은 저만치서 이따금 고개를 끄덕일 뿐, 내가 바로 伯樂이라거나, 너는 千里가 될 것이라거나 하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무릎이 꺾일 것이 두려워 달리지 못하던 말이었다. 伯樂이 그걸 알게 했다.
―「시안시인」, 2000
버스 소리
장무령
나보다 먼저 일어나 하늘을 밀고 있는 미루나무 아래
나보다 먼저 걸어가 둑 너머 물결에 떨어진 실구름을 줍는 방죽
길 위에 해가 오더니
다람쥐가 눈치를 보더니
다람쥐 앞에 놓인 도토리가 낙엽 밑에 숨더니
해와 다람쥐와 도토리를 바람이 밀더니
해와 다람쥐와 도토리가 바람에 밀려난 자리
밤하늘이 내려와 앉더니
밤하늘에 흰 눈알이 툭툭 튀어나오더니
미루나무 가지에 광목 천을 감는 창제 아저씨
허공에 떠 바람을 밟고 오는 창제 아저씨
내 입을 벌리고 하나 둘 따 넣던 흰 눈알
입안에 가득 가득
마지막 눈알 쩍 쪼개 창제 아저씨 내 붕알에 불룩
집어넣더니
그제야 들리던 버스 소리
지평선 끝 바지 지퍼를 열고 쏟아지던 헤드라이트 불빛
―「시안시인」, 2000
어처구니
최지언
뛴다
녀석의 눈 속에 토끼가 뛴다
토끼 눈 속에 들판이 뛴다
뛴다
장총을 꼬나멘 포수가 녀석의 뒤를 따르고 있다
셋이서 한꺼번에 뛴다
짧은 왼발뒤엔
긴 오른발이 젓가락질처럼 내뻗는다
오리인형 같은 뭉퉁한 그림자가 뛴다
말없는 토끼와 말많은 녀석과
또, 털모자의 헐떡임이
숲을 빠져나가고
들을 가로질러
다달았다, 강은 깊고 후회는 싯푸르다
토끼가 녀석을 보고
녀석이 포수를 한순간 보았다
모두같이 보았다
장총이 겨누었던 건 토끼인가 녀석인가
녀석이 달렸던 건 토끼를 잡으려 했던가
아님 포수를 피해 달아났던가
그럼 토끼는 누구 때문에 뛰었는가
그래도 뛴다
분노가 토끼를 잡을 때까지만
빨간 눈의 토끼를 잡을 때까지만
빨간 눈의 토끼야! 너는 살아야한다
―「시안시인」, 2000
가을햇살
정양
산모퉁이 빈집
바랭이풀 토방까지
술 취한 여자처럼 쓰러져 있다
초가을 햇살이
툇마루에 걸터 앉는다
누가 보든 말든
두엄자리 옆 호박잎들은
넙죽넙죽 햇살을 받아 먹고
비탈길 칡넝쿨은 너풀너풀
그 햇살을 뒤적거리고
바랭이풀 함부로 쓰러진 텃밭에
팔랑거리는 메주콩잎이 띄엄띄엄 서서
연신 아는체를 하고 있다
대숲에는 댓잎들이
보일 듯 말 듯 자디잘게
그 햇살을 쪼개 먹는데
해갈이하는 먹감나무는 온통
눈부시게 반짝거려서
드문드문 매달린 햇감을 감추고 있다
드문드문 매달린 햇살이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낯을 붉히며
도망도 못 가고 두근거린다
―「시안시인」, 2000
바다
-日出
최동룡
며칠 전
바닷가 거닐다가
알 낳는 女子를 보아 버렸다
치마를 걷어올렸다 내렸다
끝내는 불콰한 얼굴의
알 낳는 女子를 한참은 숨어 보았다
푸른 엉덩이 하늘로 치켜들어
이마 땀 흥건한
알 낳는 女子를 보아 버렸다
오늘 아침
그 女子 또 보고 싶어
바닷가 거닐어도 보지만
부끄러웠던지
그 女子 먹구름 치마 덮고
엉덩이도 붉은 알도 통 보여줄 생각을 않는다
―「시안시인」, 2000
미아, 혹은 우주인
배용제
갑자기 아이가 무중력의 공간으로 떠오른다
나들이 중이었던 아니.
잠시 엄마로부터 조금 멀어져
신기한 세상을 운행하던 아이가
엄마의 引力을 잃어버린 순간
궤도를 벗어나 무중력의 공간을 떠다닌다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낯설고 무섭다
귓속의 주파수를 돌려도 소리가 잡히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건 이상한 별들 뿐
꿈에서 만났던 외계인들이 스쳐간다
멍한 머리 속에서 생각들도 궤도를 벗어난다
나는 누구였을까, 아니는 발을 동동 구른다
어느 별에서 왔는지
사람이었는지 풀잎이었는지
풀잎의 뿌리를 묶어주던 한줌의 흙이었는지
알 수 없는 아이의 뒤엉킨 기억들이 자꾸
이상한 진술을 반복하고 있다
환하구요 물소리가 나구요 길이 �구요
재밌었어요, 그런데 나는 너무 멀리 와버렸어요
여기는 어느 별인가요
취조하던 외계인들이 어리둥정해진다
외딴 별에서 아이는 쉬지 않고
―「시안시인」, 2000
빈들
신달자
추수 끝내고 겨울로 접어드는
빈들이여
정 깊은 산하여
아 아직 정면으로 보지 못한
나의 등을 여기서 본다
울고 보채는 저녁 바람
흔들흔들 업어 달래고
뼛속까지 발 뻗어 오는
새벽 한기
다독다독 업어 재우던
이제는 까끌까끌
마른 뼈가 잡히는
왠지 서늘한 내 등이여
그러나 흙이 따뜻한 저 빈들을 보아라
한 여자의 한평생 설움은
다 받아주지 못해도
그 설움을 반으로 자른 것이야
지금도 거뜬히
업어 줄 것 같이만 보인다
―「시안시인」, 2000
연애미학서설
오탁번
자가운전하는 예쁜 여자가
내가 달리는 차선으로
얌체같이 끼어들기하고는
차창 밖으로 흔드는 하얀 손 보면
무 베어먹듯 그냥 한 입 물고 싶다
눈 마주치면 눈흘레나 하고 싶다
뒤에서 들이받을 생각 아예 말고
살가운 접촉사고나 내고 싶다
-지금쯤 고향의 억새밭 물녘에서는
무지개도 뛰어넘을 만한 힘센 황소가
널비에 황금빛 털이 간지럽겠다
밤길에 잽싸게 끼어들기하고는
점멸등 깜박이며 달아나는 차를 보면
반딧불이가 반딧반딧 짝을 찾는 것 같다
나도 한 마리 반딧불이가 되어
하늬바람에 공중제비하고 싶다
홰친홰친하는 낚싯대 펴고
동동거리는 형광찌 불빛 따라
얄미운 붕어 한 마리 잡고 싶다
-지금쯤 고향 집 지붕에는
하양 박꽃이 환하게 피어
은하수까지 다 물들이겠다
―「시안시인」, 2000
헌책들
이영광
원수의 멸망을 보려거든 그가 늙을 때까지 기다려라
늙으면 필연코 추해진다
화장으로 가릴 수 없는 시든 주름과
힘 빠져 늘어진 뱃가죽,
저 늙은 매음녀의 짧은 한평생을
보라, 침처럼 흘러내린 사랑의 고백이거나
노골적인 호객의 대사임을 듣고
그대는 놀라리라, 스스로를 팔기 위해
악착같이 이 거리에 매달린 생이
늦은 11월, 떨어져 비젖은 나뭇잎과
쓰레기를 닮아간다는 사실,
문득 술 취한 어느 손길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가 깜짝 놀라 물러설 때도
희미하게 그 어둔 눈빛 반짝인다는 사실,
이 거리의 어느 누구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팔리기를 포기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녀의 늙음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그녀의 늙음은 너무 쉽게 노출된다
상처를 이루지 못한 비싼 사랑의 흔적들이
정액처럼 표지 위에 비벼져 있다
―「시안시인」, 2000
녹는 사람
이장욱
어느 날 손톱 끝이 허물어진다.
한 통의 엽서도 받지 못한 채 가을이 갔다.
어느 날 손가락이 허물어진다.
가을은 가고 나는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무른 발목을 어루만지고 있을 때,
건너편 아파트 15층에 걸린 謹弔燈이 나부꼈다.
그리고 내 무릎이 몹시 아련해지던
그리고 다시 어는 날,
어쩌면 오래전에 나를 버린 여자도 지금쯤,
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는지.
리비아의 모래 사막에서 사살당한 테러리스트와
내 어두운 어머니.
그리고 다시 새벽 네시의 朝刊,
나는 일렁이는 모래 바다를 생각했으나
더 이상 눈은 내리지 않았다. 문득
겨울 바다에 나부끼며 자살하던 눈발들은
생각난 듯 잠시 물 위에 머문다.
나는 아주 부드러운 몸을 욕조에 담그고
가장 먼 바다의 한 순간을 생각한다.
가장 가난한 유물론과,
가장 가벼운 그의 리듬에 대해, 그리고
창밖 公園에서 한 여자, 한 남자의 뺨을 때릴 것이다.
한 남자의 뺨을 날카롭게 지나가는, 한 여자의 어둠.
허공을 가른 손목이 점점이,
물 속에 흩어져 간다.
그 물 속에 아주 잠시 떠오르는
새벽 다빛, 빛 속으로 조용히
녹아가는 사람.
―『세계의 문학』, 2000.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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