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속 이야기
고태현
오래전 바다 속 풍경에 반하여 잠수에 탐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자주 집을 비워 눈치가 보이자 아내와 어린 아이를 데리고 먼 바다로 나가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깊은 바다와 인연을 맺은 지도 강산이 세 번은 바뀌었습니다. 잠수시 마다 틈틈이 써두었던 일지들을 보는 일은 나만의 별스러운 재미입니다. 이 글에선 스쿠버다이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저가 드나들었던 바다 속의 풍경 몇 곳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주 바다는 미개척지인 처녀지가 많고 원시적이며 스케일이 웅대하고 힘이 넘치는 곳입니다. 거친 야성의 처녀와도 같이 때론 거칠게, 수줍게 다가섭니다. 바다 속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어, 봄에는 새순이 돋고 꽃이 피고 여름이면 무성한 숲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낙엽이 집니다. 능선이 고운 산이 있고 계곡이 있으며, 길고 깊게 뻗어 나간 산맥과 그리고 깊이 모를 아득한 절벽도 있습니다. 그 곳에도 바다 식구들의 삶과 영역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다 속에도 시와 음악이, 신화와 전설이 그리고 세월의 흔적이 있습니다.
신비의 영역인 바다 풍경을 찾아 떠납니다.
성산포 자릿여(1997년 11월 상순)
일출봉 남측벽 근처에서 일출봉의 절경을 보면서 바다 속으로 들어선다. 수심이 7-8미터도 나오기 전에 1미터가 넘는 감태 숲이다. 조금 더 깊이 들어서자 자리돔떼의 군무群舞가 펼쳐진다. 절벽을 따라 조금 아래로 내려서자 웅대한 스케일의 아름다운 절벽이 다가선다. 절벽의 몸체 곳곳에 온갖 모양의 해송(늙은 소나무 모양의 산호초)들이며, 부채산호와 연산호(바다 맨드라미)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이곳의 해송들은 다양한 포즈와 색깔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제주 바다의 절벽들은 보통 연속된 일자거나 조금 구불구불한 것인데, 이곳의 절벽은 첩첩산중이다. 생태환경도 서귀포 일대와는 다르다. 연산호보다는 대형 해송들이 직벽에 즐비하다. 2미터는 됨직한 백해송, 황토색의 해송, 푸른 해송들, 연산호와 부채산호들 그리고 계곡 틈새에 자리한 고르고니언 산호들, 뒤에 소개할 서귀포 일대의 수중경관이 도회풍이라면 이곳은 원시풍이라고나 할까.
뒤돌아서 조금 밑으로 가자 높이 10미터정도, 폭 6-7미터 정도의 독립문처럼 생긴 아치가 눈에 들어온다, 기념으로 실루엣 사진을 찍고 싶어진다. 필자의 주변엔 40센티가 훨씬 넘는 다금바리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가까이 다가서자 거리를 주지 않고 커다란 여(바다속 암초, 산) 밑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따라가서 랜턴을 비춰보니 다섯 평 정도는 됨직한 여아래 보금자리에 다금바리 일족들이 바글거린다. 오늘 무슨 다금바리 모임 날인가? 뒤돌아서는데 필자의 팔뚝보다 큰 돌돔(갓돔)이 주위 경계 보초임무 수행 중인지 필자의 주위를 예의 주시하며 선회한다. 나는 나그네일 뿐 이 곳은 그들의 영토다.
절벽 쪽으로 돌아서서 감태를 뽑아 날려 본다. 앞으로 빠르게 흐른다. 조류를 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중성부력을 잡고서 조류에 몸을 실어 우주를 유영하듯이 겹겹이 펼쳐진 직벽과 수중 계곡을 두둥실 넘나든다. 이 자유로움이야말로 바다 속으로 유혹하는 매력이다.
형제섬 수중아치 부근(1998년 9월 중순)
송악산 동쪽이다. 바다에 떠 있으면서 마라도, 가파도, 산방산, 용머리 해안, 멀리 한라산 봉우리 등이 어우러진 경관을 조망한다. 높은 절벽과 거친 산세, 크고 작은 기생화산으로 이루어진 송악산은 태평양의 거센 물결과 비바람이 빚은 신의 걸작이다.
바다 속으로 들어선다. 암초가 나오는데, 암초 틈에서 대형 다금바리들이 신기한 눈빛으로 멀끔히 쳐다본다. 돌돔무리들은 관심 없다는 듯 무리를 짓고 유영중이다.
이곳엔 5개의 유명한 수중 아치가 있다. 10여 명이 손을 잡고도 동시에 통과할 수 있는 대형아치, 넓은 거실 같은 분위기의 바닥이 10평은 넉넉한 분화구형 아치와 작은 아치들이 있다. 주걱치와 도화돔 무리가 놀고 있는 이곳의 아치들은 연산호와 해송 등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 같다.
한참 구경삼매에 빠져 천천히 앞으로 가는데 동행한 원장께서 뒤에서 다가와 급히 나를 잡아당기면서 뒤를 가르친다. 두 눈을 크게 뜬 것으로 미루어 대단한 괴물(?)이라도 본 듯. 바위틈엔 어른 두 주먹을 합한 것 정도의 머리를 가진 문어가 눈을 흘기고 있다. 문어는 위장의 도사라서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가벼운 수중 산책 중에는 잘 안 보인다. 문어는 머리가 좋고 위장 또한 천재적이다. 피부 조직에 갖고 있는 다양한 색소포를 수의근으로 확장, 수축시켜서 체색과 색의 모양을 주위환경에 따라 바꾼다. 암반에 붙은 문어는 그 체색이 훌륭하게 암반화 되어 있다. 암반에서 떨어지면 슬슬 체색이 바뀌면서 다른 장소에 가는 순간, 순식간에 주변의 색상과 모양에 따라 자신의 몸을 맞춘다. 그런데 그게 보이다니 눈도 좋으셔라.
동쪽으로 돌아 나서자 ‘가다리왓(왓은 제주방언으로 밭이라는 뜻)’ 절벽이 다가선다. 수심은 20-24미터 정도다. 절벽 곳곳에 해송과 연산호 무리가 보인다. 60-70센티 정도의 황금빛 찬란한 황돔무리와 벤자리, 회유성 어류인 방어들이 주위를 돈다. 근처에는 20-30센티 정도의 쥐돔, 자리돔, 주걱치, 전갱이 무리들로 끝이 안 보인다.
남쪽으로 진행하자 송악산 절벽밑 연산호 밭이 나온다. 다른 곳의 연산호 군락들은 대부분 경사진 곳이나 절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평탄한 곳에 자리한다. 다양한 색상의 연산호 군락으로 마치 원앙금침을 펴놓은 듯하다.
쏠베감펭이 슬슬 다가선다. 쏠베감펭은 지느러미를 활짝 펴서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화려한 지느러미가 독가시를 가졌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도 도망가지 않고 여유 만만하여 수중 촬영 시 모델로는 그만이다.
서귀포 문섬(1995년 12월 하순)
드넓은 태평양의 파도는 서귀포 해안의 끝자락에 와서 기나긴 여정을 마무리한다. 서귀포에는 저마다의 전설과 애틋한 사연이 담긴 아름다운 섬들이 있다. 이들 섬들은 나름대로 비경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다 속에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여 섬 주변 바다는 각종 바다 식구와 각종 산호 군락들이 화려하게 분포한다. 사시사철 만개한 붉은 연산호와 계절 따라 오고 가는 물고기떼, 수중림이라 할 모자반과 감태숲 등 서귀포의 수중 비경은 환상적이며, 신비롭고 개성이 강하다.
그 섬들 중에서 서귀포 정남쪽 1킬로 지점에 있는 문섬으로 간다.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데 물이 좀 찬 듯하다. 이곳의 수온은 연중 섭씨 14도에서 27도 정도다. 때문에 겨울옷인 드라이 슈트 없이 사계절 내내 왯슈트(봄, 여름, 가을 옷)로도 수중활동에 지장이 없다. 계절마다 다양함을 보이고 수시로 변하는 문섬의 풍경을 잘 설명할 능력이 나에겐 없다. 다만 계절을 불문한 형형색색의 물고기 떼, 연산호와 산호붙이 히드라, 말미잘과 해면 등 화려함이 골고루 갖추어졌다. 수십 회 이 바다에 왔어도 그 때마다 다른 느낌이다.
문섬 새끼섬 뒤편의 수중직벽을 따라 서서히 내려간다. 다양한 크기의 해송과 연산호, 금강바리와 꽃돔의 군무, 만개한 담홍 말미잘의 새하얀 폴립의 아름다운 선들이 반긴다. 각종 산호와 해송들을 모아놓은 전시장 같다. 크고 작은 연산호와 해송들(백송, 적송, 청송, 미송 등)이 군집하고 있는데, 그 수목 밑에 잔디를 심어 놓은 듯 작은 연산호들이 주위를 채우고 있다. 어느 곳에 사진기를 대도 예술품이 될 듯.
이곳은 별 생각 없이 섬을 일주하는 주마간산走馬看山식의 잠수에서 탈피하여 생태관찰잠수(에코다이빙)를 한다면, 자주 오면 올수록 늘 보아도 새록새록 새로운 생태 관찰이 될 것이다. 바위 속의 개오지, 유령새우, 각종 고둥들 등 보물찾기를 하다보면 재미가 쏠쏠하다. 산호초 밑엔 갯민숭 달팽이들의 사랑이 한창이다. 곧 2세들이 탄생하겠지.
조류를 따라 부드럽게 벽을 타고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문섬수로로 돌아온다. 수심 30미터 정도까지 이어지는 벽을 따라 연산호, 해조류, 긴침성게, 연필모양성게 등을 보며 이동하다가 연산호폴립을 살짝 들추자 기생하는 작은 물고기가 빠끔히 쳐다본다. 조금 멀리 날렵한 지느러미를 가진 만세기 무리가 태양광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수면 아래로 무리 지어 유영하고 있다. 싱그러운 은빛 반짝임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거대한 집단의 카드섹션으로 보인다. 무리 짓는 고기 떼의 습성으로 일정한 간격과 방향으로 정확한 움직임에 의한 환상의 군무群舞다. 잘 훈련된 군대의 사열식이라고나 할까.
바다 속의 밤(애월리 한담동- 1999년 3월 초순)
수중 속의 밤은 별천지다. 수중 생명체들 중에는 야광, 발광물질을 많이 갖고 있어서 야간의 수중 세계는 무척 화려하다.
주간에 웅크리고 있던 동물들이 왕성하게 생활전선으로 나들이를 한다.
얕은 수심에서 서서히 바다 속으로 간다. 모래 바닥에 엎드려 있는 50센티 정도의 광어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도 위장술을 믿는지 눈만 깜박거린다. 조금 앞으로 가는데 돌팍망둑이 새끼고기를 잽싸게 물어 삼키고 있다. 동작 한번 기막히게 빠르다. 쌍가시육각복이 슬슬 유영하고 있다. 황우럭 수놈이 암놈을 졸졸 따라다니며 목하 유혹 중이다. 여러 종류의 게들이 먹잇감을 노리고 있다. 이 와중에도 김이마밤게 한 쌍은 열애 중. 집게발의 형태도 각양각색, 육식성 게의 집게발은 더욱 크고 강력하다. 나의 눈엔 안보이나 모래 속에 자신을 숨기고 사냥감을 기다리는 각종 수중 생물들이 수두룩한 살벌한 전쟁터다.
구멍에 몸을 숨긴 채 대가리만 내밀고 있는 바다뱀이 눈에 띈다. 물때에 맞추어 멸치 떼라도 오면 몸을 날려 순식간에 낚아챈다. 마침 멸치 떼가 온다. 필자의 랜턴 불빛에 놀란 멸치 몇 마리가 땅에 머리를 처박는 등 우왕좌왕하는데 근처에 있던 게가 달려들어 순식간에 낚아채어 두 동강으로 찧어 먹고 있다.
동쪽으로 돌아 들어가자 바위들이 나타나면서 수심이 조금 깊어진다. 주간에는 잘 안보이던 소라, 오분재기, 해삼 등도 보이고 바위틈엔 어랭놀래미들이 놀고 있고, 바위에 기대어 졸고(?) 있는 흑돔도 있다.
밤바다는 고요하나 그 속에는 바다 생물들의 생태드라마가 진행 중이다. 제주 바다에서는 기온과 수온에 대한 염려가 거의 없어 언제 어디서라도 밤에 바다 속에 가는데 지장이 없다.
나오며
나에겐 제주 바다 속의 멋있는 풍경들의 아름다움들을 적절하게 표현할 능력이 없습니다. 소관탈도의 깊은 계곡, 범섬의 깊고 깊은 절벽, 숲섬의 아름다운 바다 산의 능선들, 난파선들, 곳곳에 산재한 수중 동굴 등등…….
바다는 삶의 터전일 뿐 아니라 제주인의 삶과 숱한 고통과 굽이쳐 돌아간 역사, 그리고 한恨과 핍진한 질곡의 세월이 녹아있고, 그 수난의 상흔傷痕과 아픔을 어루만져온 생활의 일부입니다. 포작인과 해녀들의 땀과 눈물이 녹아 있는 바다, 제주인들은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들풀 같은 생명력으로 난바다를 헤치고 거친 풍파를 거스르며 바다를 이겨왔습니다. 운명처럼 바다에 내던져진 사람들에게 바다는 매운바람이 휘감기는 또 다른 거친 땅이었습니다.
바다 사람들이 목메이게 그리는 영혼의 쉼터이자 안식의 땅인 이어도는 제주 바다 속 어디엔가 있을 것입니다. 고단한 삶의 자락에서 이어도는 고통스런 현실을 잊고픈 상상의 나래였는지도 모릅니다.
바다 속은 또 다른 세상입니다. 특히 제주 바다 속은 수려함을 자랑합니다.
첫댓글 선생님이 이렇게 멋진 취미 생활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바닷가 마을에서 자랐지만 저는 물이 너무 무섭답니다. ^^*
고태현 선생님,,, 제주에서 만나고 시퍼욤^^
읽는 내내 제가 바닷속에서 주변을 둘러보는 듯 착각을 했습니다.
세부 묘사도 너무 뛰어나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