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동래 지역 세거 성씨와 관련하여 『동래부지(東萊府誌)』[1740년]에는 삼성대가 보인다. 삼성대는 성씨 3개가 세거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안씨·송씨·옥씨를 말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 「동래읍지」 인물조에 옥씨와 관련하여 옥종손(玉從孫)을, 송씨는 송백(宋伯)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송씨·옥씨·정씨·조씨 4성 가운데 지방 향리에 계속 머물러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지 못하였다. 안씨와 조씨의 행적에 대해서도 자료가 없어 찾을 수 없다. 19세기 말 동래 지역의 호구 상태를 보여 주는 자료는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이다. 이 자료는 1904년(고종 41) 10월 탁지부 사세국에서 편찬한 동래군 12개 면의 가호 대장이다. 이 자료에는 동래군의 84개 성씨와 4,870호의 가호 수가 기록되어 있어 다양한 성씨의 출연과 가호 수를 알 수 있지만, 본관별로 구분하지 않아 거주하는 사람들의 분포를 자세히 알 수 없는 단점이 있다. 1930년 일제는 조선의 식민지 수탈을 강행하기 위하여 국세 조사를 단행하였는데, 이 때 동래 지역의 성씨 중 김씨(金氏), 정씨(鄭氏), 최씨(崔氏), 유씨(柳氏), 권씨(權氏), 조씨(趙氏), 송씨(宋氏), 조씨(曺氏), 임씨(林氏), 우씨(禹氏), 정씨(丁氏), 곽씨(郭氏), 방씨(方氏), 왕씨(王氏), 유씨(劉氏), 옥씨(玉氏), 차씨(車氏), 화씨(和氏) 등 18개 성씨를 조사하였다. 이들 18개 성씨 중에는 『경상도 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다섯 토성인 정씨·송씨·옥씨·정씨·조씨가 모두 포함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성인 왕씨·박씨·이씨와 하나의 내성인 김씨가 동래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이들 다섯 토성은 조선 전기 이래 계속 동래에서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의 성(姓)』에는 현재 동래의 것으로 해운대구 석대동에 영양 천씨(潁陽千氏) 24호가 거주한다고만 되어 있다. 이 책의 기재 기준이 15호 이상이기 때문에 아마 그 이하의 숫자로 세거하는 많은 성씨가 탈락되었으리라 본다. 또 1937년에 발행된 『동래군지』 성씨조에는 수관 성씨(受貫姓氏), 세거 성씨(世居姓氏), 우거 성씨(寓居姓氏) 등 3항목으로 구분하여 본관별로 거주하는 성씨를 서술하고 있다. 기록 방식은 입향조와 자손을 함께 서술하였으며, 본관은 같으나 입향조가 다르면 입향조별로 모두 기록하여 이전의 읍지 서술 방식과는 아주 다르게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가구 수나 인구수가 기록되지 않아 아쉽다. 내용은 ˂표2˃와 같다. [세거 성씨 현황] [참고문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