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그분의 마음
이 타오르는 사랑에 응답하시는 그분의 불, 그것이 바로 부흥이다.
나는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있음에도 굳이 내게 새로운 교회의 문을 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그분께서 새로운 교회를 원하시는 건, 그 교회만이 감당할 하나님의 요구사항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고민은 하나의 질문으로 향했다.
‘이 시대 교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고통은 무엇일까?’
기독교의 핵심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명력 있는 관계를 누리는 데 있다. 그런데 교회가 그 살아있는 관계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종교화되고 만다. 종교적 행위가 하나의 시스템이 되어 신앙생활의 바퀴를 기계적으로 돌리고, 어느 순간 자동화된다.
종교화된 신앙은 신앙의 대상을 향한 관심을 잃게 만든다. 예를 들어, 고사(告祀)를 지내는 사람에게 “누구한테 고사하는 건가요?”라고 물으면 이렇게 되묻는다. “조상님 아니에요?”
이는 누구에게 빌든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내가 정성을 다하면 누군가는 들어줄 거다’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순전히 내 행위와 정성만이 관심 대상이 된다. 비는 대상을 향한 관심은 사라지고, 일방적인 제의(祭儀)만 남는다. 이게 바로 종교 아닌가. 기독교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이 시대의 예배와 신앙생활이 이처럼 종교화됐다.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그분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어느새 그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예배를 드리며, 그보다 우리의 신앙 규칙과 준수, 감정의 충족, 기도 응답만이 중요해졌다. 자기 백성에게 잊혀진 존재로 전락한 것, 이것이 하나님의 고통이었다.
이 종교화에 대한 인식은 나를 배제한 비판의식이 아니다. ‘모든 기성 교회의 문제’라며 꼬집는 것도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언제든 종교화된다. 믿음은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잃어버리면 언제든 종교화된다. 사역은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순간, 금세 종교화된다. 나와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다.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추구하면 된다. 본질은 사랑이다. 핵심은 사랑이다.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제외하고 예배와 신앙을 논하지 않길 바란다.
사랑엔 언제나 특권이 있다. 내가 꿈꾸는 부흥은 결국 이 사랑의 특권이다. 하나님을 특심으로 사랑하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그분의 마음, 그것이 부흥이다. 이 타오르는 사랑에 응답하시는 그분의 불, 그것이 부흥이다. 그래서 이 부흥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제한받지 않는다. 구별된 사랑만 준비하면 된다.
예수님의 생애 대부분은 자신을 필요로 하시는 곳으로 향해 있었다. 공적 사명을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사역의 수행 외에 개인의 안식과 쉼을 위해 종종 찾으신 곳이 성경 속에 등장한다.
바로 베다니였다. 베다니는 ‘벧 아니’ 곧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심지어 필생의 사명인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도 이 특별할 것 없는 장소인 베다니로 향하셨다. 왜 하필 베다니였을까.
비밀은 사랑에 있다. 그분이 가시려는 그 길은 오직 사랑으로만 갈 수 있는 길이었다. 십자가는 오직 사랑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길을 가기 위해, 그 고난의 잔을 받기 위해, 그 엄중한 대속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그분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 곁에 잠시 머무르셨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내적 필요였다.
나는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교회가 그분에게 이 베다니 같기를 원한다. 나의 영혼이 그분에게 베다니 같기를 갈망한다. 그분을 향한 사랑이 여기 있어서 그분의 마음이 이곳에 있기를 원한다. 그분을 향한 순전한 사랑 때문에 그분이 이곳에 오시길 원한다.
이 땅을 굽어살피셨을 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시대 속, 이 패역한 세대 안에서도 그분을 순전하게 사랑하는 자들이 있는 곳, 그런 곳이 우리 예배이길, 우리 교회이길 원한다.
예배의 동력은 오직 이 사랑이 되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오직 예배 하나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과 교회를 세우고 싶었다. 잘 갖춰진 조건과 형식을 초라하게 만드는 이 중심을 발굴하길 원했다. 하나님을 향해 꺼지지 않는 푸른 불꽃을 심장에 품고 사는 이들과 예배하며 그들에게 마중물을 콸콸콸 넘치도록 붓고 싶었다.
나는 사랑으로만 완성되는 예배의 생명력과 기름부으심으로 완성되는 사역의 창의성을 핵심 가치로 삼았다. 그리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사역을 꿈꿨다.
나는 탁월한 예배를 위해 ‘예배 장인’(worship artisan)들을 키워내고 싶었다. 이것은 동생의 기획과 맞물려 포드 사역의 큰 축을 형성했다. 다양한 영역의 장인들이 창의적 예배를 세워나갔다. 예배의 영성이 예배의 예술을 지배하고, 이 시대 예술 영역에 빼앗긴 모든 아름다움이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데 쓰임 받길 원했다.
매주 살아있는 예배를 위해 어떤 것도 아끼지 않는 교회가 되고 싶었다. 예배의 구심력이 갖춰지면 사역의 원심력도 갖춰지기에, 살아있는 예배가 성도들 개인의 삶의 저력으로 확장되고다양한 영역에 변화를 일으키며 영적 생명의 선순환을 이루기를 꿈꿨다.
이런 예배를 한 주 반짝 드리는 건 쉽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것이 예배의 고정값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하나님 앞에 꾸준한 태도와 마르지 않는 갈망으로 이 정성을 늘 기꺼이 구별하는 것 말이다. 이 갈망은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기름부음으로만 유지할 수 있다. 이 성실을 지속시킬 수 있는 동력은 기도뿐이다. 그러니 성실한 기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기름부음을 위한 기도가 그치지 않아야 한다.
예배와 기도는 언제나 한 쌍이다. 한쪽 심장이 뛰지 않으면 다른 하나도 금세 멈춰버린다. 하나의 불꽃이 꺼지면 다른 하나도 금세 사그라든다.
- 여섯 걸음, 원유경
여섯 걸음
규장원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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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걸음 은혜문장쓰기 PDF : https://mall.godpeople.com/?G=1682306887-0
† 말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 요한일서 4장 16절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 시편 71편 14절
† 기도 아버지 하나님, 내가 드리는 예배와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이 빠져 있는 건 아닌가요? 주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찬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 위에 주님의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예배와 온 생활 가운데 온전한 주인이 되어주세요.
† 적용과 결단 우리의 예배와 신앙생활에 하나님은 점점 멀어져있고, 그분의 영향력은 줄어있지 않나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분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지요. 자기 백성에게 잊혀진 존재가 되신 하나님은 고통스러워하십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하나님을 순전히 사랑함으로 예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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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은 봄날 평안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