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605. 묵상글 (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등 )
** 06:53. 김찬선 신부님 글 추가
----------------------------------------------------
24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근본정신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두가이들은 그 무리의 숫자는 적었으나 영향력은 무척 컸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권위 있는 경전으로 인정하고 예언서나 성문서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 오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계시로 믿을 필요가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무엇보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을 대표하는 그들이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유식한 무지를 행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부귀와 영예를 누리는 이 세상으로 충분하다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는가 봅니다. 그들은 사후 세계를 현재 세상의 단순한 연장 또는 재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형제가 함께 사는’ 상황에서 ‘한 형제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신명25,5) 그 대를 이어 주어야 한다는 ‘수혼법’의 특수한 규정을 들어 ‘후사를 남기지 못하여 일곱 번이나 결혼한 여자는 부활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부활 신앙의 허구성을 조롱하고 싶은 마음에서 한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마르12,25.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세상은 지금의 세상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 새 생명이 주어지고 새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이 우리에게는 죽은 인물이지만, 그분에게는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 충실하게 머무는 이들은 비록 죽었을지라도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라는 그분의 말씀과 능력에 의해 언제까지나 그분 안에서 살아있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부활한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은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있는 사람은 결국 죽은 사람이요, 거기서 나오는 사람은 산 사람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 주제를 알고 살리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은 세월이 가도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진리이기에 세월에 구애됨 없이 살아계십니다. 부활의 삶을 믿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한 사두가이들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12,24). 는 예수님의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여전히 같은 질문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혹 우리도 고정관념과 선입견, 편견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의 생각과 틀을 넘어서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주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가능성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생명의 창조주이심을 입증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삶의 희망으로 이끄십니다. 부활을 믿는 이의 삶은 이 세상의 산고를 겪으며 기쁨과 평화를 간직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현실에 타협하며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온갖 세상 것에 매이고 맙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늘을 인내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사는 기쁨 속에 산 이들의 하느님을 만나시길 빕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그분을 죽음까지도 극복하시는‘산 이들의 하느님’(12,27)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손희송).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6.05 06:13
- 내가 지닌 영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비겁함의 영이라!
비겁함의 영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떠한 영입니까?
비겁(卑怯)함이란 한자어를 그대로 뜻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비란 비천하다고 할 때의 그 ‘천하다’, ‘저속하다’는 뜻이고
겁이란 ‘겁나다/두려워하다’, ‘약하다’, ‘피하다’는 뜻으로서
비천하고 약하기에 두려워하고 두려운 것을 피하는 겁니다.
저는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에게 아쉬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영(spirit)적인 차원을 중시하지 않거나 간과한다고 제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Scott Peck이라는 분은 좀 다르고
이분의 주장이 저의 생각과 많이 일치합니다.
그것은 약함-두려움-회피의 구조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두렵고 두렵기 때문에 피하는 것입니다.
체력적으로 약하고,
심리적으로 약하고,
정신적으로 약하고
영성적으로 약하기에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면역력이 약한 사람이 감기조차 두려워하듯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고통을 두려워하고,
약한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악한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죄의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합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두려워하는 사람은 피하는데
그 피하는 방법 곧 회피의 방법이 다양합니다.
자기 부정, 핑계와 변명, 위선과 감추기이고,
자기 합리화와 남의 악 들추기입니다.
그 첫 번째가 자기 부정입니다.
정신(spirit)의 힘이 약한 사람은 죄와 악의 자신을 직면하는 것이 두려워
일단은 그것이 자기가 아니라고 부정함으로써 자기 부정을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경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인정할 때 그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런 자신에 대한 핑계를 대거나 변명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합리화 또는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짓이 바로 이것인데
그런데 이것은 남의 악 들추기에 비하면 양반인 회피 방법입니다.
약한 사람이 악한 방법을 쓰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약할 뿐 아니라 악해지기까지 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죄와 악을 들추거나 크게 만들고는
그 뒤에 자신의 죄와 악을 숨기고 감추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악에 화살을 돌림으로써
자신의 죄악으로 향하던 화살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겁함의 영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하느님께 받아 지닌 사람,
곧 성령의 사람은 주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가 악령과 직면하셨듯이
죄와 악의 자신을 직면할 힘을 지니게 되는데 그 힘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악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런 자신을 겸손하게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의 죄악과 정면 승부를 겁니다.
오늘은 너무 늦게 일어나 너무 어려운 주제를 다루다 끝내지 못하게 되었는데,
아무튼 우리는 오늘 내가 어떤 영을 지녔는지 곧 비겁함의 영을 지녔는지
아니면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지녔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
24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십시일반(十匙一飯),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도와주기는 쉽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쉬운 일일지라도 함께하면 더 좋다는 뜻입니다. 저는 십시일반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본당에 청년 성가대가 결성되었습니다. 작년에 부주임 신부님이 오면서 청년들 모임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한주는 성경 공부, 한주는 친교를 하면서 청년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청년 성가대가 출범했습니다. 청년 성가대에서 ‘단복’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마침 본당에서는 한국에 성가책 300권을 주문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택배를 부치려면 가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라는 말처럼 택배비용이 성가책 구매비용과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10 미사 성가 단장이 한 가지 제안했습니다. 올여름에 성가대원들 중에 한국 가는 단원들이 있는데 미국 오는 길에 한 박스씩 가져오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택배비용을 줄이고, 그 비용으로 청년 성가대 단복을 사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10박스면 부피도 크고, 무게도 150킬로로 부담되지만, 1박스는 큰 부담 없이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청년 성가대를 아껴주는 어른 성가대원들의 따뜻한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기꺼이 맡아 주시는 성가대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멀리 한국에서 일을 도와주시는 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복음서에서도 ‘십시일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중풍 병자는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싣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사람이 많으니, 지붕을 들어내고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도 십시일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먹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사람이 많아서 어렵겠다고 하였습니다. 돈도 많이 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먹을 것이 없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중물의 위력을 알고 있습니다. 펌프에 물 한 바가지를 넣고 힘껏 펌프를 움직이면 한 바가지의 물로 5천 바가지의 물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하에는 많은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신 다음, 보리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십시일반과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만나니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예전에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을 보았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행동의 문제였습니다. 천국은 아주 긴 수저가 있는데 그 수저로 자기의 입에 음식을 넣지 않고, 이웃에게 음식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무것도 흘리지 않고, 모두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옥은 아주 긴 수저가 있는데 그 수저로 자기의 입에 음식을 넣으려 하니 아주 불편하였습니다. 음식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는 곳이 지옥이었습니다. 십시일반으로, 백지장도 서로 맞드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곳이 천국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애벌레는 땅 위를 기어 다닙니다. 그것에 대해서 불만도 없습니다. 하지만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나비와 애벌레는 본질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삶의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나비는 더 이상 땅 위를 기어 다니지 않습니다. 나비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한 마리의 애벌레가 하나의 천사가 되는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우리도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망과 탐욕의 삶으로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날개 잃어버린 천사와 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십시일반의 삶으로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우리는 천사와 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
24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현대인의 딜레마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기 위해 일하느냐, 일하기 위해서 사느냐?”
솔직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삶과 일은 이렇게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은 삶과 일을 분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요? 일도 나의 삶임을 인정하면 일 자체에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이 나의 삶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차이로 인해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헬렌과 스콧 니어링이 쓴 ‘조화로운 삶’에서 “경제적 노력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삶이다.”라고 말합니다. 일하는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해서나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심오한 믿음과 진솔한 감정들이 조화를 이룬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 본당의 한 고등학생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제 성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학생은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사회에 나가 생활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재산을 축적하고 또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지위를 얻는 것도 행복할 것 같고, 사제가 되어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은 채우면 더 갖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을 말해주면서, 사제의 길은 세상 것을 멀리하며 대신 삶과 일 모두가 주님을 향하기에 진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반드시 성직자, 수도자로 살아야만 조화로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쉽게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좋은 여건일 수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충분히 조화로운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 안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기억한다면 주님 뜻에 맞춰서 충분히 조화로운 삶을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일곱 형제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자기들의 주장이 맞음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따지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즉, 부활을 부정하려고 인간의 논리로 하느님 나라를 재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논리를 뛰어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십니다.
앞서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 안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에 맞춘 삶,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춰서 그분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우리들은 행복해진 순간마다 잊는다. 누군가가 우리들을 위해 피를 흘렸다는 것을(프랭클린 루스벨트).
----------------------------------------------------
24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마르 12,24)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은 ‘불신의 페러다임’과 ‘믿음의 페러다임’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곡된 신앙’(잘못된 신앙)이 가져온 불신, 곧 ‘잘못된 생각’에 구속되어 버린 ‘영적무지’와 믿음이 가져온 ‘신적지혜’의 자유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성경’과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를 밝힙니다.
‘성경’에 대해,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받아들였고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범주로써 성경을 이해하려 했기에, 내세와 부활과 영적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으로 부활에 대해 따집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부활한 상태, 곧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이를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인 <탈출기>(3,6)를 인용하여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있으며 부활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느님 능력’에 대해, 그들은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능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곧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고, 고작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되살아난다는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1-53)
그렇습니다. 이러한 ‘영적 존재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 권능에 대한 불신’이 그들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믿으면, 신적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지만,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성경을 몰랐기에, 영적 무지에 빠지고 불신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 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속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주님!
제 안에
당신이 얼마나 생생히 살아 계신지를 알게 하소서.
제 생각에 빠져
허상에 끌려 다니지 않게 하소서.
제 생각이 빗나가지 않게 하시고,
영적 무지와 불신을 몰아내소서.
믿음으로 기뻐하며,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안에서
변화되고 성화되게 하소서. 아멘.
----------------------------------------------------
24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인디언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죽음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가 사라졌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죽음이라는 말의 범위가 육체의 기능 정지를 의미하는 것을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기억 속에서 사라질 때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보니파시오 축일입니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래서 하느님 품에서 평안을 누리고 계신 한 분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교구장님이셨던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님이십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이면 주교님이 많이 생각납니다. 학창 시절 제가 학생이고 주교님께서 신학교 신부님으로 계셨을 때의 추억이 생각납니다.
함께 운동하고 기도하고 웃고 즐겼던 그 시간이 기억납니다. 저는 압니다. 지난 그 시간도 하느님 나라였고 지금 주교님께서 계신 곳도 하늘나라이며 제가 있는 이곳도 하느님께서 관장하고 계신 곳인 것을 말입니다.
이곳도, 저곳도 모두 하늘나라 즉 하느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두가이들의 질문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들은 이곳과 저곳을 분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죽음은 이곳 하느님 계신 곳에서 저곳 하느님 계신 곳을 옮겨 가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다음도 영원히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것입니다.
---------
결초보은
운전하다 보면 많은 초보운전 스티커를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가장 기본인 ‘초보운전’을 시작으로.
먼저가 난 이미 틀렸어….
저도 제가 무서워요.
낮엔 초보, 밤엔 더 초보.
얼마 전 운전하다가 만난 스티커는 이것이었습니다.
결, 초보, 은
결초보은은 ‘죽어서라도 은혜를 갚음.’입니다.
양보와 배려에 훗날 그 은혜를 갚겠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어려울 수 있겠지만….
나중에라도 어려움 속에 있던 우리를 위해 배려하고 기도하고 기다려 주고 격려해 주고 믿어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우리가 결초보은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 결초보은을 따라가며 화살기도 한 다발 쏴줬습니다.
사고 나지 말라고요….^^
----------------------------------------------------
24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구원의 삶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요한11;25.26)
일기쓰듯 쓰는 강론입니다. 어제도 참 좋은 날이었습니다. 계속 축제같은 아름다운 날씨의 연속입니다. 3월20일부터 시작된 수도원 개인피정집 2채와 수련소 건축이 어제 6월4일로써 끝나고, 그동안 2개월 보름쯤 수고해준 '주님의 형제'이자 '주님의 전사'인 이승용 아오스팅, 이현옥 헤레나 부부는 왜관 고향집으로 떠났습니다.
“순식간 지난 듯 합니다. 거의 3개월인데 마치 3일쯤 걸린 듯 합니다. 하루 평균 10여명씩 인부들이 머물렀고 이들의 음식 뒷바라지를 해줬으니 이보다 역동적인 공동체는 없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긴장의 연속이지만 기뻤습니다. 우리 부부가 일심동체가 되어 해냈습니다.”
요지의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떠난다하니 서운한 감정이 들기는 처음입니다. 그동안 하루의 일이 끝나면 끝기도때마다, 또 날마다 미사때 마다 가지런히 앉아있던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 때문에 가족처럼 느껴졌던가 봅니다. 정말 내일처럼 최선을 다함으로 감동을 선사한 부부입니다. 마지막 대화를 나눌 때 얼마나 일을 끝낸 기쁨이 큰지 흡사 승리의 무용담을 나누는 듯 했습니다. ‘하루 묵었다 내일 갔으면 좋겠다.’ 말했지만 미련없이 오후 늦게 떠났고 저는 부부에게 강복을 주었습니다. 문득 떠남의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할 일을 다하고 떠나는 죽음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홀가분한 죽음이겠는가, 비록 두 부부는 떠나서 보이지 않지만 왜관집으로 귀향(歸鄕)하여 살아있듯이, 세상을 떠난 죽음도 그렇지 않겠나,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歸家)하여 부활의 삶, 영원한 삶을 살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 아침에 강론을 나눌 때 나눈 카톡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맞으심을 축하드립니다. 좋은 피정집을 짓는 아오스팅 형제님! 맛있는 밥을 짓는 헬레나 자매님! 또 좋은 강론 집을 짓기 위해 노력하는 프란치스코 신부! 모두가 하느님 눈에는 사랑스런 당신의 일꾼일 것입니다.”
“ㅎㅎ 예 감사합니다.”
그러니 각자의 꽃자리 제자리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이 영원한 구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된 하늘나라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쓴 책 서문 내용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삶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셨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산 이들은 죽지 않는다! 얼마나 놀라운 통찰이요 역설인가! 물론이다. 죽은 이들은 살아난다. 그러니 우리 산 이들이 죽지 않는다라는 사실은 얼마나 진실인가! 우리는 영원으로 운명되어졌다(We are destined for eternity)! 우리는 영원을 위해 지음 받았다(We are made for eternity)”
오늘 복음의 부활논쟁에서도 예수님은 친히 부활의 진리를 명명백배 밝히십니다. 새삼 우리의 죽음은 무에로의 환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부활의 삶, 영원한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는 이들이 신봉하는 모세오경중 탈출기의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죽은 이들이 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the God of Jacob).’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다.”
새삼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뿐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다음 확신에 넘치는 고백은 부활신앙에서 연유됨을 봅니다. 바오로뿐 아니라 부활의 희망이 샘솟는 내적 힘의 원동력이 됩니다.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죽음을 폐지하시고 생명과 불멸을 환히 드러내신 파스카 예수님과 하나되어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 영원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인데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겠는지요! 바로 이런 빛나는 삶의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정말 배절불굴의 주님의 전사, 순교자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입니다. 그 험하고 위험한 고난의 삶중에도 80세 전후의 장수를 누리시다 순교하셨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의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게르만이들의 사도인 보니파시오는 ‘평화의 친구“라는 뜻의 빈프리트라는 이름을 지닌 영국인이었습니다. 그는 베네딕도회 수도승이 되었고, 716년 그레고리오 2세 교황은 게르만족의 복음화를 위해 그를 선교사로 파견합니다. 교황은 이때 그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보니파시오 이름도 주었습니다. 보니파시오는 정말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불가사의의 정력적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유명한 풀다 수도원을 포함하여 끊임없이 교구들을, 수도원들을 설립합니다. 마인츠의 교구장이 된 그는 마침내 프랑스에까지 진출하여 교회를 재조직하던중 755년 6월5일 오순절에 현재 네델란드 도쿰 근처에서 이교도들에 의해 52명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고 풀다 수도원에 묻힙니다. 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그의 공적을 기립니다.
“독일에서 정치, 교회, 영성의 영역에서 발전한 모든 것은 보니파시오가 놓은 기초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 민족의 영적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우리와 우리의 후계자들에게 우리의 위대한 황제와 왕들이 기여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성인이 편지 다음 대목도 감동적입니다.
“고통과 고뇌의 날들이 우리에게 닥쳐온 이때, 주님의 날이 임할때까지 굳건한 자세로 전투에 임합시다. 우리 선조들과 함께 영원한 유산을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거룩한 법을 수호하기 위해 하느님의 뜻이라면 죽음도 불사합시다.”
정말 부활의 희망으로 무장된 ‘주님의 불퇴전의 용사'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였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백절불굴, 주님의 희망의 전사가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
24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27)
지금여기에서
살고 있는
삶
그 너머
지금여기에서
살 수 없는
삶
그 이룰
지금여기에서
살고 있는
삶
----------------------------------------------------
24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교부들의 말씀 묵상✝️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르 12,25)
영적 동반자
우리는 그들(사별한 배우자들)과 더욱 확실히 결합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승화된 차원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고, 영적 동반자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우리 자신이 누구에게 속하는지 알게 될 것입 니다.
만일 우리 안에 이 관계에 대한 감각과 기억이 없다면, 어떻게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영원히 찬미 노래를 불러 드릴 수 있겠습니까? 또 우리가 의식 없이 육적으로만 변화된다면 어찌 찬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며, 하나가 될 것입니다(참조 요한 17,11.21; 갈라 3,28). 비록 상급은 다를지라도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습니다(요한 14,2 참조). 모든 이가 이미 합의한 품값인 한 데나리온(참조; 마태 20,10; l코린 3,8), 곧 영원한 생명을 받기로 하고 일했지만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덧없는 이승의 삶에서도 부부가 갈라서는 것을 금하셨으니, 당신 몸소 맺어 주신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 안에서 결코 갈라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신적인 씨앗은 우리 안에 들어 있다. 여느 씨앗이 그러하듯이, 신적인 씨앗도 자라야 한다.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 안에 들어 있습니다. 어질고 슬기롭고 부지런한 농부를 만났을 경우, 그 씨앗은 튼튼하게 자라서 하느님이 될 것입니다. 그 열매는 하느님의 본성과 똑같을 것입니다. 배나무 씨앗은 자라서 배나무가 되고, 개암나무 씨앗은 자라서 개암나무가 되고, 하느님의 씨앗은 자라서 하느님이 됩니다.”
이 씨앗, 곧 하느님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 불처럼 타오른다.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거나 덮어 버릴 때도 그것은 꺼지지 않는다. 엑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를 오리게네스에게서 빌려 온다.
“하느님께서 몸소 이 씨앗을 뿌리시고, 꽂으시고, 낳으셨습니다. 비록 떠밀리고, 감추어지고, 한 번도 경작된 적이 없다고 해도, 이 씨앗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라고, 반짝이고, 빛을 발하고, 타오를 것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하느님께로 발걸음할 것입니다.”(181)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5절: 십자군 운동
제 1차 십자군(1096∼1099):
제 1차 십자군의 성과는 그리스도교적인 예루살렘 왕국의 건설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본보기를 따라, 십자군 참가자들의 더 작은 국가들인 안티오키아 후작령과 에데사와 트리폴리 백작령과 더불어 봉건국가로 조직되었다. 부이용의 고드프롸가 최초의 “성묘 수호자”로 선출되었다.
그는 1099년에 아스칼론 부근에서 이집트의 술탄을 정복하였다. 그의 동생 발두인 1세 (1100)∼1118)가 그의 뒤를 이었는데, 그는 예루살렘 그리스도인의 왕이라고 자칭하였다. 앙주의 풀고(1131∼1143) 때에는 이 왕국의 영토가 최대로 확장되었다.
제 2차 십자군(1147∼1149):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특히 이 십자군의 성립을 권고하였고, 프랑스 국왕과 독일 국왕 콘라트 3세를 여기에 가담하도록 하였다. 그것은 독일 • 프랑스군의 무서운 파국으로 끝났는데, 그들은 여러 번의 전투에서 터키인들에 의하여 전멸되었다. 1187년에 예루살렘을 다시 잃었다.
제 3차 십자군(1182∼1192):
성도를 다시 탈환하기 위하여 강력하고 잘 조직되고 무장된 거대한 십자군이 프리드리히 적발제의 인솔하에 동방으로 출발하였다. 이 군대는 이코니움 부근에서 터키인을 물리치고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연로한 황제가 1190년에 살레프에서 익사하자 지휘자를 잃은 군대는 더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영국의 리처드 사자심왕과 프량스 왕 필리프 2세는 예루살렘을 다시 정복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192년에 술탄 살라딘과 휴전을 맺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 순례자들의 평화적인 예루살렘 방문은 보증되었다.
제 4차 십자군(1202-1204):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이 원정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전 서구의 그리스도교계가 마지막으로 이 계획을 위하여 하나로 뭉쳤다. 그러나 이 원정은 교황의 뜻을 완전히 거스르고, 베네치아 상인들의 이기적인 상업상의 관심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유도되어 비잔틴의 내정 분규에 간섭하게 되었다. 이 도시의 최초의 정복(1203. 7 .17) 후에 협정된 그리스 교회와 라틴 교회의 재일치가 지켜지지 않았을 때 두번째의 정복(1204.4.13)이 있었고, 이때 이 도시가 무섭게 약탈되고 황폐화되었다. 이른바 라탄 제국이 이곳에 설립되었는데, 이 국가는 1261년까지 존속되었다.
이같이 난폭하고 무책임한 행동은 동서 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회복시킬 수 없게 만들었다. 일치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221)
----------------------------------------------------
24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과 부활에 관한 논쟁을 벌이십니다.
사두가이들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이는 사회적 관습을 근거로 부활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사회적 관습에 달려 있지 않고,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둡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에 대한 선언으로서, 부활 신앙은 죽음 뒤에도 하느님께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믿음입니다.
사실 생명이 끝나는 것으로 보이는 죽음은,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는 남겨진 이들에게도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어 보이는 영원한 상실은 유족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크나큰 슬픔과 고통을 안겨 줍니다.
그런데 이 슬픔과 고통이 ‘부활 신앙’ 안에서 극적으로 변화됩니다.
한 사람의 온 생애를 돌보셨던 주님께서 그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돌보아 주신다는 믿음, 그래서 지금 그의 영혼이 주님 품에서 아무 고통 없이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믿음,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은 남은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기쁨과 희망으로 바꿉니다.
복음에서 이야기하듯,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을 믿고 살아간 이들은 모두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먼저 죽음의 강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이들과 다시 만나고, 함께 웃으며 함께하였던 오늘을 추억할 것입니다.
영원히 우리를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께서 그 시간을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
24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우선 그들 질문의 배경을 보면
질문이 엉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세가 말한 법은
어떻게 보면 과부를 보호하기 위한 법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었습니다.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속했습니다.
이 개념은 단순한 소유를 넘어서
그 여자를 보호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결혼 전에는 아버지가 보호를 하고
결혼 후에는 남편이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남편이 죽고 나면 그 책임이
맏아들에게 갑니다.
그래서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형수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
형의 이름이 이어지고
형수도 보호받게 해야 한다고
모세는 말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이 규정을 가지고
부활이 없다는 자신들의 생각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합니다.
만약 부활이 있다면
죽기 전 배우자와 함께 살게 될 텐데
이 여자는 많은 사람과 혼인 관계를 맺었으니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묻습니다.
누구의 아내로 결정하느니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말한 모세의 규정은
과부로 살게 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입니다.
생명을 주신 분께서
인간의 생명이 잘 유지되도록
보호해 주시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즉 사두가이들은 모세의 규정에서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세를 말하면서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물론 살아있는 사람을 보호해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죽고 나서의 삶도 보호해 주십니다.
죽음 이후의 삶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금 우리의 삶에 먼저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현재의 삶에 집중할 때
내세의 삶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도
덤으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