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에서 일을 보고나니 오전 8시. 배낭은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꾸려서 차 뒷좌석에 놓아두었으니까 대충 준비는 된 셈이고, 머릿속으로 지도를 한 번 확인 해 보고나서 바로 출발했다. 배낭이래야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책 3권과 양말, 내의 한 벌, 치약 칫솔, 필기구와 노트 그리고 세븐 투 세븐(7 to 7, 밤 일곱 시부터 다음 날 아침 일곱 시까지 계속 달리는 경주) 때 받은 노란 윈드 자켙은 그냥 케이스에 넣어 둔 채로.
예전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짐을 메고 든 채로 툭하면 어디론가 떠나기도 잘했었는데. 가만 생각을 해 보면 근래 몇 년간은 꼭 필요한 여행이 있어도 여행의 장소나 테마 별로 모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해치우는 경향이 있다. 요는 내 스스로가 집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즐겨하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아내는 ‘이제야 가장의 위치로 무게 중심이 정확하게 이동한 것- 쉽게 말해서 철이 들었다는 말-’이라 말하고, 나는 ‘좀 많이 게을러졌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눈은 앞을 주시하며 내가 주행하기 좋은 위치를 확보하기 위하여 많은 정보들을 계속 보내오고 있다. 다행히 올림픽도로가 그다지 붐비지 않아 미사리를 거쳐서 양평까지 수이 올 수 있었고, 삼거리 길이 나타나자 좌회전을 받아서 홍천, 인제 가는 길로 들어섰다. 한데 출발하고서 1시간이 지나면서부터 핸들이 왼쪽으로 약간씩 쏠리는 느낌을 받았는데 도로가 잘 정비된 국도로 들어서면서 속도를 높였더니 쏠림현상이 좀 더 심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이러한 때 대부분은 타이어에 실 펑크가 나 있든지 아니면 타이어에 못이나 이물질이 박혀 있는 경우이다. 자, 가능하면 빨리 휴게소에 들어가서 타이어 체크를 해 봐야한다. 이때가 10시10분경. 마침 조각 휴게소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좀 쉴 겸 조각 감상도 해야지.
힌두교에서는 링가Linga男根와 요니Yoni女根를생명의 근원이자 힘의 원천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링가와 요니가 합일된 모습은 그 충만한 생명력으로 인해 우주적인 힘으로 그대로 환원되기도 해서 우주적인 힘(梵)과 개인의 힘(我)의 근본은 둘 아닌 하나(一如)라는 사상을 낳기도 했다. 인도에 있던 링가와 요니의 합일된 상像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전해져 들어와 맷돌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 맷돌 위에 암 맷돌의 구멍을 끼워서 맞물려 돌리게 되어 있는 형태가 자못 상징적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나는 지금 엄청나게 많은 링가와 요니에 둘러 싸여 있는데, 첫 대면 순간의 낯섦과 어색함은 이제 다소 완화되어 점차 평온을 회복하며 객관적인 조각물로서 감상을 준비 중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이 두 가지 중의 하나는 각자 몸에 지니고 살아가고 있지만 오랜 관습으로 인해 이를 드러내 놓고 논하거나 감상하는 태도는 터부시 되어 온 까닭에 은밀한 관심 속에서만 알려지고 전해져 왔고, 그 때문에 링가와 요니는 항상 서먹한 대상이 되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 조각 휴게소는 남근과 여근 조각 갤러리답게 그야말로 다양한 형태의 전시물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크고, 작고, 길고, 짧고, 넓고, 좁고, 깊고, 얕고, 우람하고, 단아하고, 거칠고, 매끈하고...
‘작은 것은, 작은 것은 모두가 아름답다(沈草子)’라는 말이 있듯이 ‘숨겨진 것은, 숨겨진 것은 모두를 들뜨게 한다.’라는 말도 과히 어긋나지 않을 듯하다. 예술藝術과 외설猥褻의 차이, 작가의 의도 못지않게 관객의 시각이 큰 몫을 하고 있지 않느냐는 느낌이다. 참, 내가 조각에만 넋이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바람 빠진 타이어에 우선 공기를 채워 넣었다. 인제나 속초에 도착하면 자동차 정비소부터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3차선을 주행로로 택해 60km/h 속력으로 진행을 하니 주변을 차분히 관망할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창을 열어놓고 강원도의 싱싱한 기운과 신선한 바람을 깊이 들이 마시며 강원도에 얽힌 여러 가지 추억과 이런저런 공상에 빠져 본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고 했는데 똑 같은 이유로 인생에도 가정법이 있을 수 없다. 그 인생 속에 슬쩍 가정법을 끼워 넣어 보았더니 대번 가슴이 아르르 아려온다. 얼른 가정법을 취소해 버렸다.
신남을 지나고 인제, 원통과 백담사 입구를 지나친다.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높은 재를 오르지 않고 새로이 뚫린 터널을 2800원의 요금을 지불하고 통과하니 잠깐 동안에 속초 입구에 들어선다. 맨 먼저 바다가 보고 싶어서 계속 직진을 받았다, 계속계속.. 정비소를 세 군데나 지나치고, 시청도 지나치고, 중앙시장도 지나치고, 쪼개지는 대처럼 앞으로 앞으로만 진행을 하니 이윽고 막다른 곳이 나오고 방파제가 보인다. 방파제 안쪽으로 종합 활어 시장이 있어 뜨거운 햇살아래 뭍에 올라온 거대한 고래처럼 물결 따라 흔들리고 있다. 방파제 뚝길 위에 올라서서 바다 쪽으로 뻗쳐 있는 길을 한참을 걷다가 방파제 외벽 쪽에 쌓여 있는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에 올라앉았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바다와 하늘인데, 그 어스름한 경계를 수평선이라 부른다. 누가 따로 가르쳐주지 않아도 내 눈을 가득채운 수평선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부드럽게 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정 곧은 것은 휘어 있다’는 도가道家의 설파는 이천 몇백 년이 지난 뒤에야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이론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동양의 직관直觀의 세계를 서양의 논리의 세계가 이해하고 확인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 셈이지만 직관의 세계는 몇몇 현자의 소유일 뿐이고, 반면에 논리의 증명은 모두에게 공유되는 지식의 체계가 된다는 점이 동서양이 서로 다르다면 다를까.
막히고 닫혀 있는 세계에서만 살다 트인 세계에 돌연히 내 던져지게 되면 막막한 넓이와 무한한 자유로움이 오히려 나를 구속하고 속박한다. 어둠에 익숙한 눈이 큰 빛을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내 몸 안에 갖추어진 생명의 힘이, 막막함과 자유로움으로부터 나를 익숙하게 할 것이다.
방파제 제방 길을 따라 걸어오던 여기저기에, 지금 내가 서 있는 시멘트 구조물 주변에, 잉크 스프레이로 ‘우리 반점 010-1234-****, 동춘관 017-3456-####, 호화 반점 011-4567-@@@@’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갑자기 시장기가 돌며 아스라한 그리움 같은 것이 스멀스멀 몰려온다. 내게 있어서 짜장면의 기억은 첫사랑의 기억과 거의 일치하며 그만큼 강렬하다. 그래서 일단 이런 기분에 휩싸이게 되면 짜장면을 꼭 먹어 주어야 한다. 가능한 한 빨리. 땡땡한 햇볕아래 거대한 거울 같은 바다를 한참동안 지켜보다 몸을 일으켰다. 머리는 맑고 속은 시원하다, 그저 얼굴이 조금 따가울 뿐.
이제부터는 동해안을 따라 갈 수 있는 곳까지 북으로북으로 진행한다. 고성 쪽으로 이정표를 보며 가다가 속초를 벗어나기 전에 자동차 정비소를 발견했다. 내 설명을 듣던 사장이자 정비소의 유일한 직원은 차 밑으로 기계를 넣어 차를 간단히 올리더니 왼쪽 앞 타이어에 공기압이 60이 될 때까지 바람을 넣은 후 타이어를 앞쪽으로 슬슬 돌리며 바퀴 전면에 스프레이를 뿌려댄다. 그러자 이내 어느 지점에서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온다. 정비소 사장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지점을 보니 홈 안쪽으로 못 대가리가 보인다. 아, 이거였구나. 못을 빼내고 간단히 수리를 해 준다. 익숙한 손놀림을 보며 ‘참 부지런한 손이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카센타 이승호 사장님 고마워요!
오른쪽으로 동해를 끼고, 왼쪽으로는 산자락을 스치며, 햇빛 쏟는 거리를 과속 감시기계에 찍히지 않을 만큼 내 달렸다. 훈훈한 바람 속에 갯내음이 섞여 있어 그 비릿한 냄새가 나를 정체모를 기억 속으로 자꾸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렇게 거진을 지나고 화진포에 다달았다. 이때가 오후 2시쯤. 바다도 보고, 쉬어 갈 양으로 화진포 해수욕장 안으로 들어섰다. 철 지난 해수욕장은 공연이 끝난 연극 무대만큼이나 휘젓했다. 느릿느릿 백사장을 밟아도 보고 밀려오는 잔물결에 손도 담가 보았다. 바닷물에 젖은 모래를 한 움큼 손바닥에 쥐었다가 펼쳐 보았다. 오래전, 추석 때 엄마가 쥐어 만든 송편처럼 젖은 모래가 손금이 찍혀진 채 덩이져 손바닥에 놓여 있다. 햇빛에 운모와 석영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숨은 별빛과 같이 여기저기에서 조그맣게 반짝이는 무수한 빛을 보고 있으면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리라 생각되는 어떤 영상이 어른거린다. 몇 무리의 가족들이, 몇 명의 아이들이 바닷가 모래밭에 앉아 있거나 뛰어 다닌다. 나도 그 사이에 끼어서 느릿느릿 철 지난 바닷가를 걸어 다녔다.
해안선에 부딪치는 파도의 거품이 오른뺨에 묻을 것 같은 대진 항을 지나 통일 전망대에 도착했다. 자연인으로서의 내가 올 수 있는 북한 한계점이다. 휴게소에 들러 아이스티를 한 잔 마시고 차를 돌렸다. 이제부터는 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간다. 화진포가 나타나자 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에돌아갔다. 얼마만큼 남으로 진행하니 건봉사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동안 달려 왔던 국도로부터 지방도일 듯싶은 건봉사 방향 길로 들어섰다. 여행자인 내 눈 앞으로 평화롭고 한가한, 그토록 그리워하던 풍광이 근사하게 펼쳐져 있다. 푸른 들이요, 푸른 산이요, 푸른 하늘이다. 잠시 귀 기울이면 푸른 바다 소리도 들려오겠고, 그 안에 둘러싸인 나도 푸른 사람이 되어 있겠지. 오고 가는 차도 없고, 나도 바쁠 것도 없고, 그야말로 ‘세월이 좀 먹니’ 하는 여유작작한 심사가 되어 양반 팔자걸음 치듯 슬렁슬렁 진행했다. 그렇게 이십여 분 갔을까 노란 줄이 빗살무늬로 그려 있는 차단벽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무장한 군인 두 명이 입초를 서 있다. 여기서부터 민통선이란다. 신분과 용무를 밝히고 다음 검문소까지는 주차나 정차를 하면 안 된다는 주의 사항을 들은 뒤 거수경례를 받으며 민통선 안으로 들어섰다. 이때가 오후 3시30분이 조금 지났을 무렵. 잘 닦인 왕복 2차선을 나 혼자 통째로 사용한다. 한낮 아무도 없는 길을 칠팔 분간 홀로 지나갔다. 햇빛이 독하게 쨍글 거리고 너무 주위가 고요하니 귓속에서 이명이라도 울릴 것 같다. 나무 이파리나 바위 뒤, 뭉개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다른 세계가 ‘짠~’ 하며 눈앞에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건봉사에서 수행을 하기 위해 지나갔던 많은 스님들이 아마 저마다 이런 느낌을 받으며 이 길을 지났으리라.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빛과 그늘 사이에 굽이굽이 숨어 있는 세상, 손끝으로 만져지는 세상이 아니라 영과 혼이 젖어드는 세상을 꿈꾸며.
마지막 검문소를 통과하고 나서 나지막한 언덕길을 오르다 이정표를 보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렸더니 꼭 절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생긴 다소곳한 길이 부드럽게 휘어진 채 놓여 있다. 풍겨오는 절 냄새를 맡으며 그 길을 미끄럽게 지나가는데 저편 왼쪽 산기슭에 있는 부도전이 설핏 눈에 뜨인다. 길 한 켠에 차를 세우고 부도전으로 향했다. 스님들을 화장하고 난 뒤 사리나 영골을 보관한 묘탑을 부도浮屠라하고 부도를 모아놓은 장소를 부도전浮屠田이라한다. 절은 그 역사와 역할 때문에 문화재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절은 대하는 사람의 관심에 따라 관광의 대상으로도, 문화재의 역사성 탐구와 탐미의 대상으로도, 자유로운 사유思惟와 예경의 대상으로도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해서 절은 문화재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누구에게라도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고, 약간의 지식만을 갖춘다면 매우 흥미로운 곳이 될 수 있다. 우리들이 절을 처음 방문하였을 때 그 절의 과거를 보려면 부도전을 주의 깊게 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부도전의 규모가 크고, 부도전 안의 부도의 기수가 많으며 오래된 것 일수록 그 절의 과거는 화려하고 번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도에 사리를 모실 만큼 훌륭한 스님들께서 많이 머무르며 수행을 하고 후학을 교화했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해서 지금은 사세寺勢가 미미 하지만 뛰어난 부도전을 갖추고 있다면 그 절의 과거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웅장한 거찰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영락없이 건봉사乾鳳寺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하겠다.
부도전 앞에 섰다. 두 그루의 나무가 양쪽으로 수문장처럼 지켜선 사이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아담한 산기슭 주위를 기운 청정한 소나무가 두르듯 싸고 있고, 고르게 펼쳐진 풀밭 위로 20여기씩 두 군데로 나뉘어 부도가 놓여 있다. 근래에 사람의 손길이 별로 가지 않은 듯한 쇠잔한 분위기가 오히려 고졸하고 소쇄한 맛을 자아낸다. 밖에서 부도전 안쪽을 들여다 볼 때에는 그저 양지바른 편안한 땅이거니 하고 느꼈는데 안에 들어서 밖을 내다보니 내리슴히 바라보이는 경관이 눈 아래 흐뭇하다. 참 좋은 땅이요, 기운 맑은 터로구나.
우리가 절에 들어서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수행하는 도량道場(절의 경내)이라 해야 할까하고 궁금해진다. 간단하다. 절에 들어서면서 처음 만나는 문이 일주문一柱門인데 산문山門이라고도 한다. 그다음은 천왕문이 있고 그다음은 불이문不二門의 순서로 위치하게 되는데, 세 개의 문이 다 갖추어진 경우도 있으나 한두 가지가 빠진 경우도 있다. 해서 거의가 일주문부터, 만일 일주문이 없는 경우라면 불이문이나 천왕문부터 수행하는 경내라고 판단하면 틀림이 없다고 본다. 건봉사는 일주문이 없이 불이문이 맨 처음 나를 맞이하고 불이문 기둥에 천왕을 음각으로 새겨놓아 천왕문까지 겸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서 부터가 건봉사 경내인 것이다. 큰 법당 앞을 흐르는 계곡에 발을 담그고 앉아 계곡 수 흐르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돌과 돌 사이를 흐르는 물, 물과 물 사이에 놓인 돌들. 계곡 따라 살랑이는 바람. 좋았다, 모두 좋았다.
내가 일주문을 지나 도량으로 들어올 때도 그랬는데 아직껏 현재 진행형인 모양이다. 이제 모바일은 필요품이나 필수품이 아니라 신체의 한 기관이 되어버렸다. 누군가와 말을 주고받으면서 자기를 표현하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상업적인 대성공을 거두며 생활양식을 변화시켜 버린 이 첨단기기에는 누구라도 속수무책인가 보다. 요사채 옆을 서성이며 기계에 얼굴을 마주한 채 한 시간이 지나도록 희로애락을 토로하고 있는 젊은 스님도 너울 같은 시류 앞에서 고고할 수만 없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해를 해 드리고 싶다. 몸짓이나 안색으로 보아 분명 선문답을 하고 있거나 법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큰 법당 오른편에 요사채가 있고, 요사채를 둘러 내려오면 평평한 노지가 나오는데, 그 한 켠에 황토 흙집이 한 채 서 있다. 벽에 황토를 발라 지은 홑집인데 지붕이 참 특이하다. 널빤지를 이어대 지붕을 만든 다음 널빤지 위에 흙을 올리고 거기에 풀씨를 퍼트려 지붕을 무성한 풀숲으로 이루어 놓았다. 좀 멀리서 바라보면 지붕이 풀 무성한 둔덕처럼 보여 빌보 배긴스나 프로도 같은 호빗족이 살고 있던 동굴집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처음에는 선방인가? 하고 둘러보았는데 아닌 것 같고, 행자실인가? 했는데 역시 아닌 것 같고, 주위를 두세 차례 돌아 보다 출입구에 써놓은 ‘절대출입엄금’ 때문에 들어가 보기에도 멋쩍고 해서 알고픈 탐구열을 포기해 버렸다. 한 쪽으로 방 여섯 개가 가지런히 있고, 들창문이 다 들려 있는 것으로 봐서 간달프든 누구든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팔목시계가 5시 30분을 향하고, 갸우뚱 기울어진 해도 아까보다 그렇게 씩씩해 뵈질 않는다. 뒷걸음 쳐서 경내를 두루두루 살펴 본 다음 계곡에 걸쳐 있는 예쁜 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향했다. 건봉사에서 국도까지 되 집어 나오는 길도 한적하고 맛깔스러웠다. 이런 호사를 언제쯤 다시 누려볼까? 하는 마음에 가능한 한 사분사분 20km/h 정도로 길을 조금씩 줄여 갔다.
자, 이제 왼편으로는 희부연 동해안을 끼고, 오른쪽으로는 어슴한 산자락을 스치며 남南으로 향한다. 사분사분한 지방도의 성찰省察 속의 여유와는 달리 국도는 과속과 추월의 생존 경쟁이 치열하다. 단 몇 분 만에 그 경쟁에 뛰어 들어 훌륭하게 적응해 내는 나를 보며 스스로 감탄인지 한탄인지를 되씹으며 씁쓰레한 입맛을 다셔 본다. 속도 경쟁에서는 대체로 그 지역 도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시외버스나 1톤 화물 트럭이 국도 레이스의 선두 주자로 나서기 십상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도 금메달을 바라지는 않는다. 선두 주자로 나선 차를 한 대 지목하여 그 차만 열심히 따라 붙이면 목적지에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도착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렇게 은메달을 목표로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속도 게이지 옆에 있는 연료 게이지가 말을 걸어온다. “어이, 주인 양반. 날도 어두워지고 강원도 기름 값도 싼데 기름이나 만땅 넣어 가자구.” 연료 게이지를 슬쩍 쳐다보니 맨 아래 한 칸에 게이지 눈금이 걸려 있다. “굳 아이디어. 어이, 사랑하는 차. 근데 왜 반말이야.” 우리는 의견 일치를 보았고, 국도변에 있는 국사봉 주유소 앞에 멈춰 섰다. 금일유류가격이라는 간판을 보았더니 ‘L당 1517원’이라 쓰여 있다. 흠, 괜찮은 가격이야! 기름을 가득 넣고 나니 이제 느끼기 시작하는 시장기도 해결해야지 싶었다. “사장님, 저녁 식사를 해야겠는데 여기 잘하는 식당이 어디 있죠?” “어떤 걸 드시고 싶은데요?” “글쎄, 강원도에 왔으니까 막국수나 황태찜 뭐든 지요.” “에또, 쭉 가다보면 대포항 지나서, 대포항 모르신다고요? 아무튼 속초 지나믄 대포항이 나오고 거기서 좀 더 가면 설악산 입구가 나오거든, 그러면 계속 직진 받아서 좀 더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거기 오른편에 강현 면사무소가 있는데 그 면사무소 쪽으로 우회전, 응 우회전 받아서 쭉 들어가면 식당들이 많이 있지요. 거기 식당들이 잘 한다구 그럽디다. 실로암이든가 그 집으로 서울에서 온 손님들도 많이 가는 모양인디. 예? 좀 복잡하다구요? 복잡할 것 없어. 가다 모르시면 좀 물어보셔. 그쪽 사람들은 다 아니께. 시간? 한 이삼십 분 걸려요.” 이처럼 자상한 설명을 듣고서야 꼭 그 막국수 집을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친절한 안내문을 지도로 바꾸어서 머릿속에 입력을 시켜 놓으니 찾아 갈 수 있다는 약간의 확신이 생겼지만 한 이삼십 분 이라는 말은 일단 믿지 않기로 했다. 국사봉 주유소 김호준 사장님, 고마워요!
속초를 쏜살같이 지나고 대포항도 재빠르게 지나쳤다. 아침에 북으로 향할 때는 해가 동쪽에 있어서 바다가 거울처럼 눈부셨지만 남으로 향하는 지금은 해가 서로 기울어 바다보기가 한결 편안하다. ‘눈부신 미모美貌’라는 말이 있는데 오늘의 경험대로라면 눈부신 미모가 바로 곁이나 주위에 항상 있어서 쳐다볼 때마다 눈부시다면 얼마나 눈이 부담스러울까?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해가 질 무렵이면 잔잔한 파도가 인다. 물론 겨울 날 바닷가 해질 녘은 허허로운 파도가 더 높이 솟는다. 일 년은 네 가지의 계절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우리들은 네 개의 계절을 항상 가슴 속에 품고 다니다 느낌에 걸맞게 그때그때 눈길 닿는 곳마다 하나씩 계절을 풀어 놓는다. 손에 바닷물이 적실 듯한 대포 항 앞바다를 스쳐 지나가며 겨울 바다를 생각했다.
설악산 입구 삼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직진을 받아 더 가야한다. 앞으로 내닫다 신호등에 서고, 이러기를 몇 차례 한 후 또 신호등의 붉은 등을 보고 서 있는데 삼거리 건너편을 보니 강현 면사무소라 쓰여 있다. ‘옳지, 여기서 우회전이구나, 응 우회전’. 길을 따라 곧장 올라가니 드문드문 식당들이 보인다. 식당마다 홍보용으로 걸어 놓은 이정표를 보면서 줄곧 안으로 들어 갔다. 이 대목에서 또 경험론이 나온다. 도심이나 오성급 호텔이 아닌 다음에야, 낯선 시골길에서 그 지역 사람이나 알 수 있는 맛깔난 식당을 찾으려면 우선 소개 받은 지역을 휘휘 둘러본 뒤 그중 건물은 좀 낡았지만 차가 가장 많이 주차되어 있고, 은행나무나 버드나무 또는 큰 고목나무를 끼고 있는 마당 넓은 집을 선택하면 거의 후회하지 않게 된다. 산기슭 아담한 마을이 있는 맨 안쪽까지 이정표에서 가리킨 대로 따라 갔더니 소개 받은 식당이 보인다. 다행히도 그 식당은 내 경험의 삼박자와 딱 맞아 떨어진다. 차를 주차하고 나서 손을 씻고 나름 식사 준비를 했다. 밀창을 열고 방으로 된 실내에 들어서서 4인용 식탁을 하나 차지하고 앉았다. 이 집에서 가장 잘 한다는 동치미 메밀국수를 시켰다.
발우처럼 생긴 투박한 사기그릇에 메밀 사리를 예쁘게 감아올린 위로 통깨, 김 가루, 다진 양파, 무채, 실고추등 고명이 얹혀 있고, 동치미 국과 양념장은 따로 나왔다. 분청사기 같은 투박한 회백색 그릇과 갈색의 메밀사리가 잘 어울렸다. 그 위에 붉은 양념장을 서너 숟갈 부으니 색의 조화도 그만이다. 그릇 아래쪽으로 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 국물을 국자로 떠서 담았다. 동정호洞庭湖에 솟아 있는 삼신산三神山이 내 면전에 나타난 셈이다. 음식은 세 번의 단계를 거치며 즐긴다고 했다. 처음으로는 눈으로 보며 상상으로 즐기고, 다음은 혀로 굴리고 이로 씹으면서 달고 짜고 맵고 시고 쓴 다섯 가지 맛의 조화를 즐기며, 마지막은 음식으로 인해 충만해진 기운을 즐기는 것이다. 그동안 도회지에서 순도 50%도 안 되는 메밀만을 먹어온 거친 내 입에도 이것이 메밀 맛이구나 하는 느낌이 시원하게 전해져 왔다. 한 그릇을 비우고 나서 메밀 사리를 하나 더 시켜 동치미 국물에 한 번 더 말아 먹었다. 나만 그런가? 배가 부르면 풍류가 생각난다. 아무렴 그렇다고 여기서 소리를 한바탕 할 수 도 없고 해서 뒷짐을 지고 동네 산책을 나섰다. 이랑이 가리마처럼 쭉쭉 뻗은 밭에 고추와 옥수수가 탱탱하게 영글었다. 이제 날씨가 조금씩 어두워지는데 아직 밭에서 약을 치고 계시는 할아버지도 보인다. 차 한 대가 라이트를 켜고 맹렬히 달려와 스치듯 지나 동네 안쪽으로 사라진다. 둘러보아도 초가집 한 채 없고, 지게 위에 삼태기를 올려 지고 있는 돌쇠 영감님의 모습도, 박 주사네 칡소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숲이 있고, 나무가 있고, 마당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이 남아 있는 시골이 내 눈에는 정겹게 느껴진다. 국도를 향해 어둑해진 길을 나도 라이트를 켜고 나섰다. 이때가 오후 7시20분경.
어두울 때 국도를 질주하는 것은 스릴이 있지만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게 아니다. 3,40분 정도 달렸나, 잠깐 졸음이 온다. 미터기를 슬쩍 쳐다봤더니 오늘 국도만 400여km를 달려 왔다. 낙산은 지났고, 양양은 아직 못 미쳐 온 것 같은데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문 닫힌 어느 상점 앞에 바다를 향해 차를 주차시킨 뒤 창문을 다 내리고 시트를 뒤로 젖혔다. 소금기가 묻어 눅지근 하지만 아쉬운 대로 가끔 바람이 창으로 들어온다. 저 멀리 바다에 점점이 보이는 불빛은 아마 배일 텐데, 저 배에는 누가 타고 있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위쪽으로 보이는 옅은 불빛은 별인 것 같은데 그 별에서도 지구를 느낄 수가 있을까? 나는 바닷가 차 속에 앉아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무슨 꿈인가를 꾸다가 깜빡 눈을 떴다. 주위가 너무 생소해서 내가 아직 꿈에서 덜 깨어났나 생각하며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차 질주하는 소리, 눅지근한 바람, 언뜻 코를 스치는 갯냄새. ‘내가 잠깐 잠이 들었나보군.’ 차 밖으로 나와 수도를 찾아 세수를 하고 손가락을 깍지 끼고서 팔을 쭉 편 채로 힘껏 뒤로 젖혀 보았다. 오후 9시가 조금 지난 것을 보고 길을 나섰다.
양양 시내에 들어서서 여기저기를 돌며 시내 구경을 하다 강릉 가는 길을 물어 다시 국도로 들어섰다. 하품이 길게 나온다. 시계를 보니 오후 10시. 이제는 보이는 숙박지로 들어가서 쉬어야지. 처음 나타난 모텔 앞에 차를 세우고 배낭을 꺼내 들었다. 6층, 바다가 보이는 방에 들어서 우선 몸을 씻고 난 뒤 오늘 일정 따라 생각나는 대로 메모를 정리했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은 나의 좌우명이다. 해서 나는 틈만 나면 쓰고 적는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가능한 모든 것을 노트에 다 옮긴 뒤 TV를 켜서 뉴스를 들으며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나요. 응, 먹었소. 좋은데. 그럼, 좋아요. 햇볕이 땡땡해서 그렇지 그리 덥진 않아요. 당신은? 그래 별일 없구? 예, 알았소. 그럼, 그럼, 천천히. 예, 그래요. 당신도 잘 자시오.” 부부 간의 전화란 한두 마디만 들어도 서로의 마음을 다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두 마디 만에 통화를 끝내기에는 무언가 미진해서 같은 내용의 말을 표현을 바꾸어서 이리저리 묻고 답한다. 그것은 또 그대로 연애할 때 느끼지 못했던 애틋한 정 같은 게 있어서 재미도 있고 좋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다. TV를 끄고 잠만 자면 된다. 하지만 이런 경우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말똥거린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책이다. 책갈피에 수면제를 묻혀 놓았는지 서너 장만 읽으면 직방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책이 침대 아래 떨어져 있다.
눈을 떴다. 생소한 분위기, 집이 아니라는 걸 금방 느낀다. 방 전면이 커튼 너머로 어두운 것으로 보아 새벽인 모양이다. 예정보다 일찍 일어났을 때의 미덕이란 새벽의 한가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침대 위에서 궁글대며 이모저모 생각을 달려 보았다. 커튼을 젖히니 동해가 뿌옇게 숨 터 오고 있다. 이대로 기다리며 일출을 맞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8월은 일출의 계절은 아니다. 입때껏 내가 본 최고의 일출은 32년 전, 크리스마스 새벽에 토함산 석굴암에서 보았던 해돋이였다. 새 해가 바다 위로 떠오를 때는 크기에 비례해서 순차적으로 솟는 게 아니라 암탉이 알을 낳듯 끝 부분이 조금 보이다가 순간 한 덩이가 불쑥 솟구쳐 오른다는 사실을 똑바로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때 태양과 관련된 설화를 왜 난생설화卵生說話라 하는지 머릿속을 꽤 뚫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아주 상쾌한 기억이다. 몸을 씻고 나오니 옅은 구름 사이로 해가 올라 있다. 책과 노트와 필기구를 배낭에 집어넣고 숙소를 나섰다. 주차장에 가보니 차의 앞뒤 유리창에 물방울이 가득하다. 이슬이다. 아침 햇살에 한 방울 한 방울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진주 같은 이슬이라 말 하지만 기실 이슬은 깨끗한 물의 결정체가 아니다. 빗물도 마찬가지 이지만 새벽녘에 이슬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핵이 필요하고, 핵의 정체는 먼지다. 줄여 말하면 제니퍼 코넬리의 눈물 같은 이슬 속에는 다수의 먼지가 섞여 있다는 말이다. 이슬을 걷어 내고, 타이어를 체크하고, 보닛을 열어 부동액과 엔진 오일을 살펴보고, 팬 벨트를 눌러 보는 등 하루 일정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오전 6시 20분.
이른 아침 국도는 유쾌하다. 도로가 시원하게 비워 있는데다 시야가 툭 틔어 있어서이다. 이 순간 이야말로 동해 바다를, 강원도의 맑은 기운을, 정신 초롱한 생각을, 그리고 질주를 즐길 시간이다. 주문진을 뒤로 하자마자 거침없이 강릉을 지나쳤다. 강릉 공항을 지나자 이정표에 정동진이 나타난다. 이쯤해서 바다를 한 번 더 안아 봐야지 하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정동진에 들어섰다. 꼭 10년 전인 97‘년 1월에 처음 정동진에 왔을 때는 대형모래시계도 없었고, 언덕에 올라앉은 대형 레스토랑이나 호텔도 없었고, 화려한 유흥업소들도 없었다. 동해안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횟집과 매운탕 집, 4.5층 높이의 숙박업소, 조그만 간이역과 철로, 그리고 동해 바다가 전부였다. 화려할수록 철이 지나면 더욱 쓸쓸한 법이다. 서너 명씩 몰려다니는 청춘들이 더러 있긴 하지만 생기가 없다. 오히려 몇몇 중년의 커플들이 들뜬 기분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바닷가에 쌓아 놓은 플라스틱 의자를 하나 끌어내려 바다를 향하고 앉았다. 바다가 너무 눈이 부셔 -내 주위에는 눈부신 미모가 별로 없어서인지 눈부심에 대한 내성이 없나보다 - 의자를 들어 11시 방향으로 돌려 앉았다. 해안선을 따라 완만하게 구불거리는 바다와 모래와의 경계에 긴 파도의 푸른 기운이 넘나들어 먼 하늘의 물빛 색과 잘 어울렸다. 동해의 아침 풍광을 흥겹게 구경하고 있는데, 오른쪽 뺨이 처음에는 간질거리는 듯하더니 급기야 따근따근 하기 시작한다. 혹시 이러다 오른 뺨만 빨갛게 익는 것 아닌가 싶어 가끔 고개를 오른편으로 힘차게 돌려 왼뺨도 구워 주었다. 그런 모습으로 바다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다보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초등학교 다니던 딸과 아들은 이제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딸과 아들은 잘 자랐다고 하겠지만 나는 더 성숙한 인간이 되어 간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릴없이 늙어간다고 하면 분한 마음이 들겠지만 단연코 부정할 자신이 서질 않는다. 너른 바다나 깊은 산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왜 이리 반성할 게 많은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다는 더하고 덜함이 없는데 말이다.
국도 위에서는 반성할 틈이 없다. 전방을 주시하고, 이정표를 읽고, 사이드 밀러와 룸 밀러를 보고, 수시로 주변 경관까지 감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숨 돌릴 틈조차 없이 분주하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 위에서 예시한 것들은 모두 눈으로 하는 일들이다. 다른 기관들은 각자 나름의 감각을 즐기고 있다. 포구 옆에서 풍겨오는 비릿한 갯내음이나 숲길을 지날 때 갑자기 밀려오는 풀 향기를 맡기도 하고, 차창을 내려놓은 채 왼팔에 따근따근 내리 쪼이는 햇살을 즐기기도 하며, 항구를 지날 때 듣는 뱃고동 소리는 운수 좋은 덤이다. 동해시를 지나고 삼척에 거의 다가왔을 때 삼척 시내로 진입하지 않고 우회전을 받아 태백, 영주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 30여분 진행하다보면 준경묘 입구라는 팻말이 보인다. 푸르고 훤칠한 소나무들이 산자락마다 빼곡한 기슭을 이리저리 돌아가면 어느새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도착한다. 집이 두 가구 있는 삼거리 께에 영경 묘가 있고, 여기서 고개를 둘쯤 넘어선 곳에 준경 묘가 있다. 영경 묘永慶墓 와 준경 묘濬慶墓는 각각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穆祖의 부모 묘로서 목조의 어머니 이씨 묘와 아버지 이양무의 묘이다. 한데 이 두 묘가 관심을 끄는 것은 내로라하는 풍수風水의 대가들이 바로 이 묘 터를 두고 조선 왕조의 산실이라고 하는 점이다. 영경 묘는 길에서 200m, 준경 묘는 길에서 1.8km라 표시되어 있다. 시간이 오전 10시에 가까워 가면서 태양은 제 개성을 마음대로 발휘하기 시작했고, 나는 일정에 맞춰 두 군데 중 한 곳을 선택해야 했다. 당신이라면 어느 패를 들겠는가? 물론 나도 그렇다. 조그마한 개울 다리를 건너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위로 어슷이 홍살문이 보이고, 홍살문을 지나면 제각과 비각 두 채가 양지쪽에 단아하게 위치해 있다. 분묘는 제각 왼쪽으로 나 있는 오솔길로 들어서서 100여m 진행하면 골 안쪽 완만한 기슭에 돌로 기단을 쌓아 모셨다. 주변은 빼어난 황장목이 두르듯 솟아 있고, 깊숙한 골인데도 분묘주변은 스폿 라이트처럼 햇살이 둥글게 쏟아지고 있다. 기단 한 켠에 앉아 보았더니 시야가 편안하고 온몸이 나긋해 지는 것이 그대로 눌러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겨난다. 잘생긴 여근곡女根谷 터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20여 분간 앉아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나보다.
신가와 도계를 지나고, 태백을 스칠 듯 지나쳐 현등을 지날 무렵 목도 마르고, 줄곧 차창을 열어 놓은 채 내달아서인지 머리가 멍멍해서 쉬랴하고 휴게소에 들렀다. 병에 담긴 시원한 꿀물을 마셨는데도 무언가 미진하다. 판매대 앞을 어슬렁거리니 카운터 안쪽에 있는 아가씨가 말을 걸어온다. “무얼 드실래요?” “어, 정신이 번쩍 들고 머리가 맑아지는 뭐 시원한 것 없어요?” “슬러시가 있는데 오렌지와 딸기가 있어요. 뭘루.. 그렇다면 딸기가 더 났겠네요.” 살짝 웃는 아가씨의 치아가 참 가지런하다. 예쁜 이齒가 나를 보고 상그레 웃으면 내 입 속까지 개운한 느낌이다. 치아 고른 것과 눈매 시원한 것은 타고난 복이다. 언제 보아도 즐거우니까. 머리의 열이 조금씩 빠져나갔는지 머릿속이 차분해져 온다. 얼른 생각해도 이건 딸기 슬러시 때문이 아니다. 순전히 아가씨의 미소 덕분이다. 파라솔 아래 의자에 걸터앉아 지도를 펼쳐보며 오늘의 진행 코스를 확인했다. 연필로 지도 위에 체크를 하고 있는데 건치 아가씨가 얼음을 띄운 수정과를 한 잔 갖다 준다. 그냥 드리는 거란다. 허참, 예쁜 아가씨는 하는 짓도 예쁜 짓만 골라서 하는구나!
땡볕 아래 세워둔 차문을 열었더니 뜨거운 열기가 얼굴에 훅 끼쳐온다.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우리들이 살아 있는 동안 끝없이 반복해야만 하는 일들을 오늘도 우리는 삶의 한 부분으로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에, 내게 얽힌 모든 일로부터 진정 자유로운 때가 있다는 사실에 짐짓 고마운 생각이 든다. 차 시동을 걸고, 안전벨트를 매며 중얼거렸다. 자, 국도로 들어가자!
휴게소에서 나와 산모퉁이를 막 돌아서는데 우측에 커다란 간판이 눈에 띈다. ‘수타, 산골 짜장면’. 차의 속력을 줄이면서 길 따라 조금 올라가 보니 후줄근한 식당 건물이 하나 보인다. 큰 나무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넓은 마당에 제법 여러 대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다. 충분은 아니더라도 필요조건은 충족된 셈이다. 담쟁이 넝쿨 그늘 밑에 주차를 한 뒤 손을 씻고 홀 안으로 들어섰다. 4인용 탁자가 8개 놓여 있고, 그중 4개의 탁자에 사람들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지금 시간이 11시 30분임을 감안하면 괜찮은 성적이다. 식사 중인 탁자를 쳐다보았더니 짜장면 아니면 짬뽕이다. 아마 이 두 종류가 산골 짜장면 집의 주력 상품인 듯하다. 주인 겸 요리사 겸 주방장이지 싶은 운두 높은 하얀 캡을 쓴 사내가 주문을 받는다. ‘짜장면 곱배기루’ 그대로 따라 복창을 하더니 노란 포스트잇에 모나미 볼펜으로 매끄럽게 휘갈겨서 주방 커튼 안쪽으로 건네준다. 4인용 탁자에 혼자 앉아 중국집 컵에 냉수를 따라 한 모금 마시며 주위를 둘러 봤다. 홀 안에는 입식 선풍기가 두 대 돌아가고 있지만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산골짜기에서 바람이 불어와 땀이 이내 식을 만큼 자연 냉방이 잘 되어 있다. 식사 중인 4개의 탁자 중 2개는 가족 단위의 외식이고, 2개는 이 부근 공사현장의 사무원과 근로자인 모양이다. 점심시간이 되었는지 두 패의 사람들이 홀 안으로 들어온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되는 옷차림의 각각 중년의 남녀 혼성팀이다.
10분쯤 지나서 내가 주문한 짜장면이 나왔다. 하얀 면을 덮은 짜장 위에 오이채를 쳐서 한 줌 올렸고, 깨와 실고추를 곁들였다. 짜장면은 잘 비비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잘 비비기는 짜장면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할 수 있다. 면발은 굵은 편이나 끈기가 있어 보이고, 짜장 소스의 묽기도 적당했다. 짜장면은 그대로 놓아두면 10여 분이 지나면서 면발이 퍼지기 시작하지만 일단 고루 비벼놓으면 30분이 지나도 마르기는 할지언정 퍼지지는 않는다. 잘 비빈 짜장면을 한 입 가득 먹어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굵은 면발이 좀 투박했지만 짠득짠득한 끈기가 있어서 약점을 만회하고 있다. 짜장면을 맛깔나게 먹는 방법 중의 하나는 버무린 면을 입안에서 씹지 아니하고 후루룩 거리며 거의 삼키다시피 하는 것이다. 멋진 방법이기는 하지만 소화기 장애가 있는 분들에게는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나는 짜장면을 먹을 때는 조그마한 희열이랄까 마음의 평화를 느낀다. 짜장면 속에는 기분 좋은 추억이나 우정, 호감, 질박 등의 감정이 틈입되어 있어서 미각에 우선해서 정서적으로 활기를 유발한다. 언제나 느끼는 생각이지만 좋은 음식은 몸과 마음에 좋은 자극을 주어 좋은 글쓰기를 재촉한다. 짜장면 정말 고마워!
춘양, 법전, 창평을 지났다. 영주 부석사를 가기 위해서는 영주로 들어가지 않고 봉화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물야 방면으로 진행을 해야 한다. 절로 향하는 지방도는 어디나 푸근하고 여유롭다. 길 가운데 황색의 중앙 분리선이 없는 곳도 많고, 가끔은 경운기가 털털거리며 앞장서서 달리긴 하지만 그대로 좋다. 철학의 출발은 한가閑暇로부터 기인한다고 했다. 소아시아Asia minor의 에게해 연안과 섬들, 시실리섬,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 지방은 희랍이 식민 도시를 건설해 놓은 곳이다. 이들 식민 도시들은 해양 무역을 통하여 번영을 누렸으며, 이로 인해 지적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여유와 한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한 환경과 토양을 바탕으로 B.C. 7세기경에 탄생한 서구철학은 B.C.6세기와 5세기에 융성하며 철학 사상에 관한 일정한 전통을 이룩하여 놓았다. 철학Philosophy은 희랍어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필로Philo는 ‘사랑하다’, 소피아Sophia는 ‘지혜’여서 정리하자면 철학이란 ‘지知를 사랑하는 것’ 정도 되겠다.
철학을 논하자면 국도보다는 지방도가 제격일 듯싶다. 아무래도 국도는 등속도, 등가속도 운동과 운동의 1,2,3법칙을 연구하는 물리학이나 시간당 소비되는 기름 값에 대한 생산성 향상을 조사하는 경제학이 더 맞춤하지 않을까한다. 물론 예술이야 어디서나 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은 좀 미쳐야 하니까.
그야말로 한가하게, 내가 뒤에서 차를 밀고 가는 속력으로 가자하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 밖으로 뛰쳐나와 차안이 잡다하다. 하지만 하나도 허수이 대할 수 없는 모두 나와 연관된,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지식의 편린들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철학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막상 처하고 보니 철학이 별개 아니라는 조금 오만한 생각이 든다. 그렇게 구르고 굴러 가다보니 어느새 봉황산에 이르렀나 보다. 차를 주차장에 넣고 몸을 씻은 뒤 절을 향해 서서히 걷기 시작했다. 좌우로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그 옆으로 키 작은 사과나무 밭이 펼쳐 있는 사이로 슬몃슬몃 오르니 일주문이 보인다. 은행나무 길을 따라 좀 더 올라가니 천왕문이 나오고, 천왕문 안에는 험상궂지만 익살스런 얼굴의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부석사는 큰 가람伽藍 -승가람마僧伽藍摩의 줄임말. 절, 사찰과 동의어- 이다. 건물과 조각물이 많을 뿐 아니라 국보와 보물등 문화재를 다수 보유하고 있어서 찬찬히 새겨 보자면 하루를 꼬박 보아도 시간이 그리 충분치 않을 것이다. 큰 절을 구경할 때, 한정된 시간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묘수가 있다. 일주문과 천왕문 라인으로 이어지는 중심선에 위치하는 건축물을 우선으로 보는 방법이다. 야구에서도 포수, 투수, 세컨드, 센터필더의 중심선이 강해야 강팀이 된다하지 않던가. 부석사의 경우 일주문, 천왕문, 법고각, 안양루, 무량수전이 여기에 해당된다. 하지만 나는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치듯 법고각도 휘적휘적 지나치고 안양루에 이르자 예서부터 주의 깊게 하나씩 살펴본다. 안양루 아래로 나 있는 안양문을 통해 계단을 올라서니 잘 생긴 배 한 척이 봉황산 중턱에서 동해를 향해 막 출항하려고 날아오를 듯한 자태로 서 있다. 한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이마를 쓸어주는 산들바람에 겨우 숨이 터진 나는 정면에 걸린 현판을 바라보았다.
무량수전無量壽殿! 현판에 쓰인 글자는 법당의 이름을 알려주고, 법당의 이름은 법당에 모신 본존불을 알려준다. 수학에 공식이 있는 것처럼 여기에도 몇 가지 공식이 있다. 대웅전,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이, 대적광전, 대광명전에는 비로자나불이, 무량수전, 보광명전에는 아미타불이 본존불로 모셔져 있게 된다. 해서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이 본존불로 모셔져 있음이 마땅하다. 무량수전에 들어서 참배를 마친 뒤 본존 부처님을 보니 항마촉지降魔觸地의 수인手印(손과 손가락 모양)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이 아닌가? 하면 지금의 본존불은 원래 모셔 있던 부처님이 아니라 나중에 따로 모셔온 부처님이든지 아니면 훼손으로 인해 복원 수리를 할 때 수인이 바뀌었든지 여하튼 연고가 있을 듯한 부처님이다. 이 부처님은 정식 명칭이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으로 국보 45호이다.
무량수전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부처님의 위치가 법당 전면에 있지 않고, 서쪽 편에 자리하고 있어서 다른 법당과는 달리 법당이 길게 느껴져 또 다른 아늑한 기품이 있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보꾹이 보이는데 우아하고 정교한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요나Jonah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간을 지나면서 물고기의 뼈대를 볼 수 있었다면 느낄 수 있을 듯한 정적감과 동시에 생동감이 넘치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경험에 의하면, 어느 절에서나 조망眺望이 가장 빼어나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큰 법당 안에서 정문을 열어젖히고 문설주에 기대어 밖을 아련히 바라볼 때이다. 한창 팔월이라 여닫이는 열려 있고 들창은 들려 있는데, 법당 안을 사분사분 걸어서 활짝 열린 정문 문설주에 기대어 섰다. 지금 내가 바라보는 풍경이 사람들 입에 회자되며 눈 시린 절경이라 칭송받는 ‘부석사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연봉들’이다. 진분홍 백일홍에 둘러싸인 안양루가 받들고 있는 연이은 소백산의 정경은 가깝고 멀음에 따라 능선의 윤곽과 초록의 농담濃淡이 천변만화를 일으키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인지 부석사의 조망은 하루 중 석양 무렵을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무성한 배나무에 얘기 주먹만 한 똘배가 가지가 휘어지게 매달려 있구나. 법당 안을 이리저리 거닐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 부처님과 미래 말세를 제도하기 위해 오신다는 미륵 부처님, 삼십삼천에서 수행을 하고 있을 무량의 보살들을 생각했다.
무량수전을 나와 행선行禪을 하듯 법당을 한 바퀴.. 두 바퀴..세 바퀴.. 걸어 보았다. 팔월 오후 두 시의 장엄한 햇살아래 구름 위를 산책하는 기분이라면 어떨까? 마음이 취하면 몸도 취하나 보다.
안양문을 내려서서 법고각을 지나고 천왕문을 들렀다 일주문으로 향했다. 아직은 푸른 잎이 성성한 은행나무 사이를 걷고 있는데 저만치에 한 여자 아이가 좌판을 벌리고 있는 할머니 등 뒤에 서서 열심히 부채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옛날 옛날에 어느 마을에서’라고 시작하는 동화책에야 으레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선풍기와 에어컨이 세상에 나오고 효심이 옛 같지 않은 요즈음, 모르긴 몰라도 근 이십 년 이래로 그런 풍경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정말 그리운 60년대의 향기가 지척 간에서 물씬물씬 풍겨왔다.
“할머니, 손주딸이에요?” “예, 덥다구 그만 하래두 저러구 있소. 내가 호사허요, 호사해.” “효손을 두셨네요, 오늘은 법당에 불전을 놓는 대신 이것이나 좀 사가야겠네요. 이게 뭐지요?” “ 고사리나물, 취나물, 진달래나물, 둥굴레, 느릅나무껍질..” “이거이거, 그거그거 주세요.” “어디서 오겠소?” “서울에서 왔는데요.” “서울 사람들은 이것도 잘 사가든디. 이것은 중국산 아니고 다 진짜여. 봄 내내 산에서 한 거여.” “그럼 그것도 주세요.” 검정 비닐 봉투로 한 가득이 된다. 집에 가져가면 칭찬을 받을는지 지청구를 들을는지 알 수 없지만,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나도 방만한 경제 활동을 할 때도 있구나. 나물 보따리를 덜래덜래 들고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으로 갔다. 목과 팔뚝에 땀이 홍건하다. 차문을 활짝 열어 놓고 나물 보퉁이를 뒷좌석에 던져 놓은 후 봉황산 맑은 물로 세수를 하고 출발 준비를 했다. 오후3시 경.
절은 들어오는 길도 아름답지만 돌아가는 길도 아름답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것이 절집 풍속이라는데 표현을 바꾸면 절은 항상 열려 있는 곳이라는 뜻과 통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와 철학과 사상이 각기 나름대로 이상을 제시하고 진리를 설파하지만 이를 한꺼번에 수용하기에는 힘에 벅차다. 결국 인연 닿는 대로 공감이 가는 어떤 것을 선택해서 회의하고 의문을 제기해 가며 그 묘의妙意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공감과 선택에는 어찌할 수 없이 사람마다 차이가 나타난다. 그 차이를 극복하고 화목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성숙한 문화가 보여줄 수 있는 따스한 인간애가 바로 서로에 대한 배려이다. 배려란 우월한 자가 보여주는 약자에 대한 아량이 아니다. 같은 눈높이에서 우리는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의 동등한 구성원이라는 지속적인 친밀감이자 존중이다. 다만 이런 좋은 생각들이 우리들 눈앞에 실현되도록 잘 되어야 할 텐데...
집으로 가는 길은 늘 최단거리를 통한다. 막연한 그리움과 편안함 때문이다. 지도상으로는 부석사 - 풍기 I.C. -중앙고속국도 -원주 I.C. - 영동고속국도 - 호법 I.C. - 중부고속국도 - 올림픽도로 - 백제 고분로 - 우리 집.으로 이어지는 그림이 제일 예쁘다. 여기에 현장 확인을 더하면 정확한 그림이 된다. 설렁설렁 가노라니 풍기, 봉화 갈림길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 모퉁이 당산나무 아래 영감님 몇 분이 모여 앉아 긴 한가를 즐기고 계신다. 차를 멈추고 내려서 객으로서 예를 차리고 물어 보았다. “저, 어르신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원주로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합니까?” “엉, 원주? 어, 풍기로. 그리 반듯이 가면 폐차장이 나와, 폐차장 지나면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길이 있어.” “그래, 폐차장만 지나면 바로야.” “한 식경이나 가믄 될거야.” “맞어, 풍기로 가는 게 훨씬 빠르지.” 여러분의 의견을 종합하니 지도와 그림이 딱 맞아 떨어진다. “어우, 더우시죠. 어르신네 덕분에 편안하게 갑니다.”
돌아서서 차에 타고 안전벨트를 매고 있는데 아무 말 없이 맨 앞에 앉아 있던 영감님이 차창을 내려 보라고 손사래를 친다. “다 필요 없어, 간판이 잘 되 있어. 간판만 보고 쭉 따라 가면 돼.” 하!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진정한 프로는 히든카드를 마지막 순간에 내 놓는다. 사거리를 건너 풍기 쪽으로 직진을 했다. 연료 게이지를 슬쩍 옆 눈질하니 서울까지 가려면 기름을 보충해야 한다. 사실 이번 여행길에는 기름에 대한 좀 복잡한 기억이 있다. 태백을 지나 얼마쯤 가다가 어느 삼거리 어름에서 ‘L당 1495원’을 본 뒤로는 L당 1505원, 1509원, 1511원에서는 기름을 넣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생기질 않았던 것이다. 한데 막상 기름을 넣으려 하니 내가 필요로 하는 주유소가 나타나지를 않는다. 이럴 때 마음의 향방이란 내 패를 내놓기도, 상대방의 패를 받기도 난처한 심정과 비슷하다.
요사이 미술계에 그림 경매가 한창이다. 이제 그림도 감상이나 문화의 향유 단계에서 소유와 재산적 가치의 단계로 의미가 확대 되었다. 해서 경매를 잘 알면 좋은 그림을 착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어서 두루두루 좋다. 경매에는 순경매와 역경매 방식이 있어 머리를 즐겁게 한다. 일반적인 경매가 처음 기준 가격을 정한 뒤 차츰 가격을 높여 가며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물건을 양도하는 방식인데, 역경매는 반대로 물건대비 시세에 비해 월등 높은 가격을 기준 가격으로 정한 뒤 점차 낮은 가격을 제시하다 어느 시점에서든 사인을 보내는 사람에게 물건을 양도하는 방식이다. 순경매는 언제든지 높은 가격만 제시하면 되므로 물건이 마음에 든다면 소유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는 셈이다. 허나 역경매는 다른 사람이 사인을 보내는 순간 게임이 종료되어 버리기 때문에 소유의 가능성은 찰나에 닫혀 버리게 된다. 역경매는 유리한 기회와 낮은 가격 사이에서 갈등하다 경매에 오른 물건의 선호도에 따라 위험 부담을 무릅쓴 낮은 가격보다 유리한 기회인 높은 가격에서 결정을 하도록 유도하는 진정한 의미의 멋진 경매 방식이라 생각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멋진 것은 항상 그 구조가 단순치 않다. 한국 해병의 구호가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면 영국 해병의 구호는 ‘명예와 미인을 위하여’이다. 참말 멋진 구호라고 생각하지만 이 아름다운 구호 속의 숨은 뜻은 명예와 미인을 위해서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명예와 미인을 위해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구호는 내 가슴에도 불을 지르지만 ‘언제든지’라는 대목에서는 가슴 속 깊은 곳이 젖어오는 느낌이다. 서양에 기사도가 있고, 일본에 무사도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선비도가 있다. 이 땅에 학문學問과 예禮가 전해져 온 이래, 그 전통을 이어받은 단아한 선비가 있어 그가 아침.저녁으로 구호를 외친다면 뭐라고 할까? 책 속에 길이 있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컴퓨터와 영상 매체가 횡행하는 오늘 날에도 탄탄한 독서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기계화와 산업화, 거기에 한 술 더 뜬 가상현실화에 파묻혀 그나마 우리의 인간성은 매몰될 것이라고 한 목소리로 우려하지 아니하던가. 풍기 I.C.를 향하면서 GS 칼텍스를 찾으려는 소박한 욕구는 참으로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며 나를 자연스런 철학의 길로 안내한다.
이정표만 열심히 따라 온 탓인지 폐차장은 보지 못했지만 풍기 I.C.는 잘 찾아 중앙고속국도에 무난히 들어섰다. 고속도로를 달리면 지역과 지역 간의 차이가 별로 없다. 거의 비슷한 도로를 계속 지나칠 뿐이다. 단지 일정한 거리마다 지역 명칭을 알리는 이정표가 바뀌어 있어서 지역의 분위기나 인상은 접어둔 채 지명만을 훑고 지나게 된다. 한데 또 이 지명이 자못 흥미를 끈다. 지명중에는 간혹 호쾌, 흔쾌, 매캐한 이름이 있어 한 번 듣거나 보면 좀처럼 잊히지 않는 게 있다. 용담, 용암, 용문, 용두, 용전, 용정, 용평, 용궁, 용강, 원통, 부발, 대포, 기계, 대합, 맹방, 맹동, 몽탄, 소태, 문막, 지보, 풍각, 감물, 쌍치, 삽교, 다시, 학교, 엄다, 물야 등이 기억에 남아 있는 즐거운 이름들이다. 저만큼에 원주 I.C.가 보인다. 길을 바꿔 영동고속국도로 들어섰다. 지금은 오후 4시가 넘어선 시간. 좀 쉬어갈까 생각하는데 문막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띈다. 옛 기억을 더듬으며 좋은 기억이 있는 휴게소라는 느낌에 망설임 없이 방향을 돌렸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이람, 휴게소 진입로가 아니라 문막 톨게이트가 나타난다. 아차차我車車, 어찌하는 수 없이 앞차를 따라간다. “안녕하세요, 오늘 무척 덥지요. 저어, 휴게손 줄 알고 잘못 들어왔는데 그냥 돌려서 나가면 안 될까요? 네에, 이번만 살짝 나갔으면 좋겠는데. 나 같은 사람이 그렇게 많아요? 그렇담 이정표 위치가 문제 있는 거 아네요? 티켙 계산하고 다시 뽑으면 많이 비싸지지요. 흠, 거 아까운 걸. 그래요, 수고하세요.” 톨게이트를 돌아서 다시 티켙을 뽑아들고 재차 영동고속국도에 들어섰다. 좋다, 휴게소는 취소다. 바로 직행이다. 여주, 이천을 지나치니 바로 호법 분기점이다. 우회전을 받아 중부고속국도에 들어섰다.
여기까지만 와도 서울이 턱밑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천 휴게소를 지나고, 곤지암을 지나친다. 벌써 한 이십여 년 되었나? 부동산 열풍이 불고 있을 때 귀가 아프게 들었던 이름이다. 곤지암이 보통명사화 되어 당시 시대상을 알려주는 유행어로서 귀에 익기 전까지는 그 이름을 들을 적마다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곤지암 터에 먼 미래를 보고 절을 세운 것은 사찰 경영이라는 측면에서는 선견지명이 있다 하겠으나 사람들의 입에 떠돌며 부동산 열풍의 중심에 서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곤지암을 생각했더니 연이어 천진암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천진암天眞庵도 그 이름으로 봐서 예전에 절이 있던 곳이 분명하나 지금은 천주교의 성지가 되어 있다. 세상사는 돌고 돈다. 필요가 현재를 낳고, 현재란 오랜 필요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이 거대한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각기 스스로의 하늘을 바라보며 이상과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것도 같은 이치가 아닐까. 한 때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종교학을 전공해 보고자 한 적이 있었다.
‘인류의 모든 종교를, 아니면 적어도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종교들을, 진정으로 과학적인 입장에 서서 공평하게 비교 연구하는 일을 초석으로 삼는 이른바 ‘종교학Science of Religion’이 이제 그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것은 독일 출신의 문헌 학자 막스 뮐러가 런던의 왕립 학술원에서 한 말이며, 후에 영어권에서 종교학의 초석으로 꼽히게 된 그의 저서 ‘종교학에의 초대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 1875’ 의 서문에 나와 있는 유명한 구절이다. 종교를 이해하려는 종교학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는 다르다. 종교를 바라보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너무나 뜨거운 열정은 제거하고 싸늘한 냉정만 남겨 진정으로 과학적인 입장에 서서 공평하게 종교를 비교 연구하는 일이 종교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오랜 학습이나 감동에 의해서 받아들이는 신앙이 아닌 냉철한 이성의 힘으로 종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도 하겠다.
나도 이런 눈으로 종교를 바라보고, 관찰하고, 파악하고,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랬었다.
지금도 종교의 다양한 기능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지만 절대적인 효능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을 수 없다. 그렇다.
중부고속도로를 부리나케 올라가다 보면 하남을 지나서 강일 I.C.가 나온다. 이정표를 보고 달려온 속도와 원심력을 잘 조화시켜 차를 매끄럽게 왼 쪽으로 90도 회전시키면 올림픽 도로에 척 들어선다. 이제 앞마당에 들어 선 거나 한 가지라는 기분이 지배적이다. 자, 이 때 조심을 해야 한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차로 장거리 이동 시 출발한 후 10분, 도착하기 전 10분 이내에 사고가 가장 많이 났다는 보고가 있다. 출발 직후, 도착 직전 들뜨거나 방심이 주원인이라고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올림픽 도로는 80km/h 제한 속도인데 오랜 고속도로의 주행으로 인해 속도감이 둔해진 듯 주위의 차를 간단히 추월하고 선두에 나선다. ‘이러면 안 되지, 이럴 때는 무슨 생각을 해야 뜨끈한 격정을 누르고 차가운 냉정만 남길 수 있지?’ 이러할 때 내가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말이 ‘까빠뚜나kappadduna’이다.
중국의 만만디慢慢的 정신에 대해 우리는 익히 들어 왔다. 하지만 중국에 만만디만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권이나 돈에 관련된 일이라면 만만디慢慢的(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게)는 순간 콰이콰이快快(빨리빨리)로 변신한다. 그것이 중국이라는 몸집 큰 나라가 가지고 있는 매력적이고도 위험한 두 가지 얼굴이다. 만慢자나 콰이快자에 모두 심방변(忄)이 붙어 있어서 마음의 변화를 나타내는 글자인 줄 한 눈에 알 수 있다. 삼십여 년 전 인도에 처음 갔을 때, 흐름이 멈춘 거대한 강 같은 그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온갖 신의 이름으로 시간의 흐름을 잊고 살아가는 인도인들이 어느 순간 보여주는 놀라운 생각의 속도는 내가 당혹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속도에 대한 융통성 있는 조절력은 몸집 크고 한 때 세계를 상대로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준 나라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아닐까한다. 인도는 찰나刹那ksana(순간)와 겁劫kalpa(극대한 시간)과 0(없음)의 개념을 최초로 만들어 낸 나라이다. 그들의 관념 속에 한없이 느리고, 너무나 빠른 두 가지의 생각이 없을 리 없다. 인도인이 쓰는 말 중에 ‘짤루짤루calucalu’가 있다. ‘갑시다,’라는 뜻과 함께 ‘빨리 빨리’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말인데 짤루짤루에 대한 상대어로서 중국의 만만디에 해당하는 적당한 인도 말을 맞춤하게 찾기가 어려웠다. 이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한 상황에서 인도 정부종합청사를 방문했는데 그곳 정문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진리는 멸하지 않는다.’ 그때 머릿속이 밝아지면서 그 자리에서 힌디어 새 단어를 하나 만들어 냈다. 까빠뚜나kappadduna(진리의 앞에 서서). 이러한 연고로 나는 나를 통제하고 순화시켜야 할 때 ‘까빠뚜나’ 하고 중얼거린다. 여러분도 한 번 해보시라. 효과는 믿는 만큼 얻는다.
까빠뚜나, 까빠뚜나.. 굉장한 효과가 나타났다. 속도 게이지가 100km/h에서 80km/h로 뚝 떨어졌다. 모두를 위해서 참 다행한 일이다. 그리고 정말 신나는 일이다. 한강변을 끼고 올림픽 도로 위에서 심호흡을 하는 일은 언제라도 상쾌하다.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맹렬한 바람이 나를 태우고 휘날리며 천호대교를, 올림픽 대교를, 잠실철교를, 잠실대교를 지나쳤다. 잠실 종합운동장 이정표를 보고 사이 길로 들어서니 한강 둔치가 나온다. 한강에서 풍겨오는 물비린내를 맡으며 길바닥에 그려진 화살표대로 진행하면 올림픽 도로가 아닌 종합 운동장을 끼고 도는 길로 올라선다. 보조 경기장을 지나고, 잠실 야구장을 지나면 사거리가 나오지만 여기에서는 좌회전 신호를 주지 않는다. 초록 등에 신호를 받아서 직진을 하면 탄천 제방 길 위를 지나게 된다. 2,3분 정도 계속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깜빡이를 넣고 비보호 좌회전을 받으면 아래편으로 내려가는 사이 길로 차가 미끄러져 내리듯 흐른다. 유수지와 우성 아파트 후문 사이를 지나 얼굴을 들면 큰 교회가 보이고, 교회 전면 출입 계단을 보면서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리면 우리 동네다. 요즘 동네 이면도로는 일방 통행로가 많아서 바로 집이 보이는데도 한 블록을 빙 에둘러서 집 앞에 도착한다. 일단 정차를 한 다음 차를 앞뒤로 가볍게 흔들어 제 자리에 넣은 뒤 주차를 한다. 핸드 브레이크를 올리고 모든 게이지를 체크한 후 시동을 끈다.
이제 여행이 끝났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지금부터 여행을 즐기고, 느끼고, 새김질하는 나만의 비법이 있다. 시트를 뒤로 밀고 등받이를 젖힌 뒤, 행복한 자세로 여행에 대한 생각을 고루고루 굴려본다. 시간 순서대로, 그 역순으로. 어느 시간, 어느 길 위에서 일어났던 감흥이나 정서적 울림은 그때 새겨둔 마음속의 영상과 음향을 되살려 가슴 속에 정리하고 메모를 한다. 다시 지도를 꺼내 들고 여행 중에 표시했던 기호나 숫자 밑에 그와 관련된 간단한 설명을 써넣으며 진행 과정을 느린 동작으로 살펴보듯 쭈욱 머릿속으로 훑어 내린다. 그렇다, 바둑으로 치면 복기復碁를 하는 셈이다. 이렇게 이십여 분 정도 여행의 여운을 즐기고 나면 여행의 전 과정이 한 편의 영화처럼 잘 편집되어 갈무리 된다. 이 필름은 기억의 창고들 중 하나에 ‘33시간 30분 - 바다와 숲, 그리고 동해와 소백산 -’ 이라는 명찰을 달아 보관한다. 그렇게 한 뒤 언제든 내가 필요로 할 때 꺼내어 보면 되는 것이다.
여행이 끝났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30분. 2007년 8월 23일 오전 8시부터 2007년 8월 24일 오후 5시 30분까지 33시간 30분간의 여정旅程을 잘 마쳤다. 33시간 30분 동안 550km의 국도와 300여km의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헤어졌으며,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또 간절히 원하기도 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내 주변에서 항상 보아왔고, 내 속에 항상 출렁거리던 것들이 여정 속에서도 얼굴과 표정만 바꾸어 줄곧 함께 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여행은 인생의 시놉시스synopsis이자 축소판이라는 말에 구태여 이론을 제기하려 하지 않는다. 오는 11월에 2박3일 예정으로 또 하나의 여행이 준비 되어 있다. 참으로 오랫동안 미뤄온 여행인데 이번에는 묵은 빚을 정리하는 기꺼운 마음으로 다녀와야겠다.
여행이란 지구를 반 바퀴 돌아오든지 경기도 강원도 경상북도 삼 개 도를 지나오든지 간에 삶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는, 생활을 응축시켜 필요할 때 풀어볼 수 있는 매듭을 만들어 놓은 범상한 마디의 한 끝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달리고, 멈추고, 걷고, 앉고, 일어나고, 뒷걸음질치고, 서성이고, 그저 서있을 뿐이었던 길 위의 여정旅情. 좋았다. 참, 좋았다.
첫댓글 아래한글 바탕체 10포인트 편집했더니 A4 20쪽 나옵니다. 33시간을 실시간으로 옮기신건지..... 암튼, 대단하십니다. 프린트 완료되면 글따라 신나는 여행 갈 볼 참입니다. 소백산이라..... 아직 못 가본 곳인데.... 긴울림님 觀점으로 유람 해 보겠습니다.
네개나 다섯개쯤으로 잘라서 올리시면 좋겠어요...읽다가 마우스 끌어내렸어요...시간이 없는거 같아서...ㅎㅎㅎ
이 글 모두 읽은 기특한 나.....ㅎ
짝짝짝짝짝 쓴 작가도 대단하지만, 한 숨에 읽은 독자는 더!!! 대단함. *^^*
결코 만만치 않은 33시간 30분의 여정을 참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저도 좋았고 참 좋았습니다. *^^*
호밀밭의 파수꾼님 글의 댓글에서 "까빠뚜나"를 보고 여기 까지 찾아왔습니다...이기대의 굵은 저음, 자동 앵콜송..첫인상이 매우 짙게 남는 분이였습니다....님의 글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누리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