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ookbang.dema.mil.kr%2Fnewspaper%2Ftmplat%2Fupload%2F20141118%2Fthumb1%2FBBS_201411180428452560.jpg)
전투를 연구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이 승리로 이끄는가 하는 점이다. 목숨을 걸고 전투에 나선 전사들의 ‘투혼(鬪魂)’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 않을까?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치열한 전투 상황에서 죽음을 무릅쓴 돌격은 승부를 좌우하는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내게 된다. 인류 역사를 수놓은 위대한 전투는 이러한 결전의지로 빛나는 투혼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아무리 군인정신이 투철한 병사라 해도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뛰어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위대한 지휘관은 그 역할을 자임하게 된다.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바그람의 나폴레옹, 오라스 베르네 作](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upload.wikimedia.org%2Fwikipedia%2Fcommons%2Fthumb%2F9%2F9d%2FNapoleon_Wagram.jpg%2F300px-Napoleon_Wagram.jpg)
바그람의 나폴레옹
●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오라스 베르네(Horace Vernet, 1789~1863)의 작품 ‘아르콜레(Arcole) 다리에서 부대를 이끄는 나폴레옹’(1826)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림의 소재가 된 사건은 나폴레옹의 1차 이탈리아 원정이다. 당시 프랑스는 시민혁명(1789)을 반대하는 유럽 국가들과 반혁명연합을 결성하고 혁명정부를 위협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국이었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은 이탈리아로 확대되고 있었다.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혁명정부의 신임을 얻게 된 나폴레옹은 27살의 젊은 나이에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Austerlitz The Battle of Austerlitz](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abutterflydreaming.com%2Fwp-content%2Fuploads%2F2011%2F06%2FAusterlitz.jpg)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나폴레옹
낭만적인 사랑 끝에 조세핀과 막 결혼한 나폴레옹은 젊은 혈기로 넘쳐났다. 1796년 원정 초기 오스트리아군의 거점 만토바(북부 이탈리아)를 봉쇄하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해 11월 오스트리아 지원군이 투입되면서 전선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전선은 확대됐고 3면에서 적을 맞이하고 있던 나폴레옹의 입장에서는 적의 협공이 이뤄지기 전에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을 격퇴해야 할 상황이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upload.wikimedia.org%2Fwikipedia%2Fcommons%2Fthumb%2F1%2F1f%2FNapoleon_ulm.jpg%2F350px-Napoleon_ulm.jpg)
울름에서 나폴레옹에게 붙잡혀 항복하는 불운한 마크 장군와 오스트리아 군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upload.wikimedia.org%2Fwikipedia%2Fcommons%2Ff%2Fff%2FAusterlitz-lejeune.jpg)
전투 전날의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
그림의 전투 장면은 베로나 남동쪽 25㎞ 지점에 있는 아르콜레(Arcole) 마을 앞 다리에서 벌어진 것이다. 나폴레옹은 베로나에서 강둑길을 따라 남동쪽으로 내려와 두 개의 강을 건너 적의 측면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11월 15일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가 어느 정도 진격했지만 이 다리 앞에서 차단됐다. 약 18m 길이의 좁은 다리 앞에 배치된 오스트리아군의 집중사격에 프랑스군의 희생자만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공격에 나선 지휘관들이 쓰러지고 강둑 아래 몸을 숨긴 병사들은 감히 뛰어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나폴레옹이 나선 것이다. 그림에는 포화에 찢긴 부대 깃발을 들고 선봉에 서서 병사들의 공격을 독려하고 있는 나폴레옹의 모습이 영웅적으로 묘사돼 있다. 오른손을 치켜든 채 뒤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서 굳은 결의를 발견할 수 있다. 앞선 병사들이 적의 포탄에 고꾸라지는 격렬한 전투 상황에서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선봉에선 지휘관의 용기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0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2.wp.com%2Flistverse.com%2Fwp-content%2Fuploads%2F2014%2F01%2F036.jpg%3Fresize%3D632%252C356)
● 인간 내면의 깊은 감정과 역동적 움직임
다리 왼쪽에는 오스트리아군의 머스킷총이 불꽃을 내뿜으며 일제히 발사되고 있고 그 너머 언덕에는 대포가 조준하고 있다. 당시 2000명의 보병과 2대의 대포가 다리를 건너려는 프랑스군을 도륙하고 있었다. 그림 하단에 칼을 든 채 죽어있는 기병에서부터 총탄에 맞아 막 고꾸라지는 병사, 그리고 다리 한쪽에서 고통스럽게 머리를 둘러싸며 절규하는 병사에 이르기까지 전장의 치열함이 현장감 넘치게 표현돼 있다.
나폴레옹의 용기에 고무된 한 무리의 프랑스 병사들이 부상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을 뒤따르면서 분위기는 고조된다. 전체 구도상 다리의 선을 따라 왼쪽으로 힘의 방향이 잡히면서 나폴레옹 부대의 에너지가 오스트리아 진영을 압도하는 느낌을 준다. 다리의 각도, 프랑스군 깃발과 총검의 방향, 그리고 하늘을 물들이는 검은 구름이 비스듬히 왼쪽으로 기울면서 거대한 삼각형이 오스트리아 진영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치열한 전투 상황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선봉에 선 나폴레옹의 영웅적 모습과 이에 고무된 프랑스군의 투혼을 성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전장의 격렬함은 나폴레옹의 용기를 더욱 빛내기 위한 배경처럼 보일 정도다. 전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병사들의 다양한 모습과 감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적을 향해 돌진하는 위대한 군인의 이상적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낸 것이다. 인간 내면의 깊은 감정과 역동적 움직임을 리얼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Romanticism) 회화 경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현실이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참혹하며 영웅적 결단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전장이 참혹할수록 영웅적 결단은 빛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 난관을 초극하려는 존재는 ‘숭고’하게 느껴진다. 낭만주의 회화에서 고전적 이상형이 빛을 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 화풍을 잘 드러내고 있지만 전사의 이상적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점에서 고전주의적 세계관을 내포하고 있다. 이상적 전사야말로 가장 낭만적이기 때문이다. 수년 뒤에 그려진 들라크루아(Delacroix)의 ‘인민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1) 또한 이러한 경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7월 혁명(1830)을 묘사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끌리오 제공](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ews.chosun.com%2Fsite%2Fdata%2Fimg_dir%2F2007%2F12%2F21%2F2007122100939_1.jpg)
7월 혁명(1830)을 묘사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용장 밑에 약졸 없다
당시 실제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다리 위로 달려간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사실은 다리에서 50여 보 떨어진 강둑 위에 올라가 부대 깃발을 흔들며 병사들을 독려했다는 것이다. 다리 위에 선 나폴레옹의 모습은 일종의 상징조작임에 분명하다. 그렇다고 그곳이 위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를 보좌하던 많은 장교가 총탄에 쓰러졌으며 전속부관 뮈롱(Muiron)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어떤 장교가 나폴레옹을 강제로 끌어내리지 않았다면 그 역시 총탄 세례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다리를 건너지 못했다. 많은 지휘관을 비롯해 엄청난 사상자를 냈지만 결국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흘간의 혈투 끝에 오스트리아군이 후퇴하면서 마침내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프랑스군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싸웠는지는 사상자 규모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프랑스군이 승리했음에도 사상자 수는 3500여 명으로 오스트리아군의 2200명보다 훨씬 많았다. 이렇게 결사적으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선봉에서 이들을 이끈 지휘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그보다 먼저 봉(Bon), 베르디에(Verdier), 베른(Verne), 그리고 란(Jean Lannes) 장군이 모두 공격을 이끌다 쓰러졌다. 그들의 헌신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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