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을 하며/ 박해성
하루치 공연 위해 거울 앞에 다시 서서
어설피 분장을 한다, 풋내기 광대처럼
빈 가슴 들키지 않게, 세월도 보이지 않게
알몸으로 곤두박인 연습 없는 이생 무대
질펀한 배경음악 묻혀버릴 단역인데
외줄 위 어질머리는 갈수록 울렁거리고
가끔은 문득 암전, 세상 온통 캄캄해도
고치 속 애벌레같이 담담히 응시하리라
두려움 내려놓으면 어둠마저 요람인걸
그 흔한 꽃다발이나 한번 안아 보려나,
농익은 빨간 거짓말 정성스레 덧칠하고
자꾸만 외우는 방백, 오늘도 막은 오른다
-《여강의 물결》2006.
집에 가는 길 1/ 박해성
방금 놓친 막차는 꼬리만 가물거린다
텅 빈 플랫폼에 울컥, 비릿한 정적
홀로이 남겨진 술래 먹먹하다, 방전된 듯
한판 굿 끝난 자리 버려진 신문 조각
뉘에게 밟혔는지 뼈만 남은 문자들이
외등빛 눈 먼 불나방 날갯짓에 흐너지고
자정을 질러간다, 맹수 같은 총알택시
까짓 붉은 신호등쯤 못 본 체 내달리는
허기 진 생의 질주에 공범인 양 눈 감으면
장례식장 국밥 한 술 끝내 삭지 않았는지
환삼덩굴 친친 감긴 전봇대를 쓸어 안고
내 집은 어디쯤인가,짐짓 길을 잃고 싶다
-《작가와 문학》2010. 제2호
장군카센터/ 박해성
별이 되고 싶었다는 정비사 장씨 아재
왼손 검지와 중지 마디 잘린 꿈 추슬러
시름을 꼭꼭 조인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때로는 구겨지듯 가장 낮게 엎드린 채
한 시대 질주본능 꼼꼼히 진찰한다,
다 닳아 삐걱거리는 무릎관절은 접어두고
어쩌다 짬이 나면 '체 게바라'* 펼치지만
권세나 혁명쯤은 더 이상 흥미 없다나?
과부하 중고차처럼 괜스레 툴툴대다가
지구의 자전 속도 따라잡지 못하고서
브레이크 고장인지 지상에 추락한 별,
한 박자 늦어도 좋은 콧노래가 구성지다
*Che Guevara- 아르헨티나 태생의 쿠바혁명가
-《작가와 문학》2010. 제2호
장미와 첫눈/ 박해성
한 여자 서성인다
서릿발 선 앞마당에
뭉클,
붉은 입술에 숱 많은 파마머리
울 엄니 젖은 빨래처럼 후르르 구겨진다
수런대는 감국일랑 아예 아랑곳 않고
분 냄새 제철인 듯 느꺼웠던 내 아홉살
그녀의 신데렐라 구두에 작은 발을 담아보던
아버지는 묵묵부답 괜스레 헛기침만
저 저 저, 상강 지나 발칙하게 핀
장미!
성마른 눈발 속에서
소리 죽여 울고 섰다
-격월간《유심》2010.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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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調의맛과˚˚˚멋
박해성 시인의 <화장을 하며> 외
안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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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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