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적대의 세계에서 어떻게 정치를 사유할 것인가?
“나는 민주주의 정치의 중심 과제가 ‘경합적’ 형태를 취하는 갈등을 허용하는 제도를 제공하는 것임을 논의한 바 있다. 내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적대의 근절 불가능성을 단언하면서 출발하더라도 민주주의 질서를 구상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경합들』은 “무페 자신이 쓴 무페 사상의 입문서”로, 이 책을 통해 무페는 지난 30여 년간 선보인 자신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뿐만 아니라 확장하기까지 한다. “오늘날 전세계에서 창궐하는 우파의 포퓰리즘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좌파의 포퓰리즘을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무페의 최근 주장은 이 책에서 시도된 ‘사유의 확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무페의 사상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경합적 다원주의이다. 정치의 토대가 어떤 초월적인 이념이나 가치가 아니라 ‘적대의 항상-현존하는 가능성’이라고 보는 무페는 정치의 이런 적대적 조건과 본성을 인정하고, 특정한 방식으로 정치 안에서 수용해 관리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하면, 상대방(=적)의 괴멸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는 파괴적 적대를, 서로가 서로에게 반대할 권리를 인정하는 민주적 경합의 관계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 무페가 말하는 경합적 다원주의의 핵심이다.
무페가 지적하듯이, 서로 대립하는 정치 진영들이 서로를 제거되어야만 하는 적으로 볼 경우, 정치적 적대와 갈등은 도덕적인 선악의 문제로 환원되고 정치는 손쉬운 상호 비방전으로 변질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적대의 항상-현존하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무조건 화해와 통합(혹은 합의와 단결)만을 주장할 경우, 정치 영역은 서로 다른 집단들이 지배적 헤게모니를 문제 삼거나 권력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 없이, 그저 권력의 자리를 합법적으로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영역이 될 뿐이다.
샹탈 무페가 직접 들려주는 샹탈 무페의 사상!
“이 책이 내가 일부 기성 좌파들의 입장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영역들에 대해 이론적-정치적으로 다양하게 개입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나는 이 책의 제목을 『경합들』로 정했다.”
1장(「경합적 정치란 무엇인가?」)에서 무페는 자신이 정교화해온 경합적 접근법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서, 여타의 경합 이론들과 자신의 관점을 구별한다. 정치적 영역을 특징짓는 적대의 차원을 강조하는 무페는 특별히 윤리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의 차이에 역점을 두며, 경합 이론가라면 ‘적대 없는 경합’의 유용성을 상정하기보다는 적대와 경합 사이의 연관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역점을 둔다.
2장(「다극적이고 경합적인 세계에는 어떤 민주주의가 필요한가?」)에서는 다극적 세계라는 이념이 제기하는 몇 가지 쟁점들을 논의한다. 세계를 다원체(pluri-verse)로 보는 무페는 “민주화에는 서구화가 필요하다”는(그래서 서구식 모델을 강요하는) 관점을 비롯해 그동안 여러 이론가들이 ‘근대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서구적 제도들을 특화하는 방식, 즉 서구 근대성의 합리적·도덕적 우월성을 상정하는 형태의 보편주의를 비판하며, 민주주의의 이상은 다양한 맥락에서 상이하게 실현될 수 있다는 테제를 지지한다.
3장(「유럽의 미래에 대한 경합적 접근법」)의 주제는 유럽연합이다. 여기서 무페는 다양한 데모이(demoi)의 다층성으로 이뤄지는 ‘데모이-크라시’(demoi-cracy)의 양태로 유럽연합을 고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페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실행 주체인 ‘인민’(데모스[demos])은 분열 가능한 상이한 다수이고 그 내용과 형태 역시 다층적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무페는 ‘인민’을 복수형 ‘인민들’(데모이)로 다시 지칭하며 민주주의 자체도 ‘데모-크라시’(demo-cracy)가 아니라 ‘데모이-크라시’로 재규정한다. 민주주의를 이렇게 재규정해야지만 민주주의의 실행을 위한 상이한 공간들을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4장(「오늘날의 급진 정치」)은 급진 정치의 두 가지 모델, 즉 ‘이탈’ 전략(하트와 네그리, 비르노 등)과 ‘개입’ 전략을 대조하는 데 할애된다. 이탈 전략은 국가와 전통적 정치 제도들로부터의 엑서더스와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를 촉구함으로써 현존하는 제도들을 방치한다. 이에 반해 무페가 지지하는 개입 전략은 현존하는 제도들의 근본적인 변환을 목표로 삼는 다층적인 대항헤게모니 운동들을 포괄한다.
5장(「경합적 정치와 예술적 실천」)에서 무페는 문화의 상품화 탓에 예술가들에게는 비판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관적 진단에 반대하며, 문화적·예술적 실천은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에 맞서 대항헤게모니 투쟁을 개시할 수 있는 경합적 공적 공간들을 조성함으로써 비판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문화적 영역이 대항헤게모니 투쟁에 필요한 상식[공통 감각/의미]을 구축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하며,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6장(「결론」)에서 무페는 앞의 4장을 통해 살펴본 급진 정치의 두 가지 유형에 비추어, 최근에 일어난 저항 운동들(아랍에서의 봉기, 프랑스·영국·이스라엘에서의 시위, 그리스에서의 대중 동원, 스페인에서의 노숙 투쟁, 칠레·캐나다에서의 학생 운동, 미국과 유럽에서 일어난 ‘점거 운동’ 등)을 검토한다. 무페가 주장하는 바는, 이 운동들은 자유민주주의 안에 경합적 정치가 결여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봐야 하며, 자유민주주의 제도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급진화를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 말미의 부록(「샹탈 무페와의 대담」)은 무페가 이 책에서 논의한 문제들을 무페가 해온 작업의 더 넓은 맥락 안에 자리매김해줌으로써 무페의 현재 입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P.40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에 있어서 공유된 윤리-정치적 원칙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한 불일치는 정당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다. 민주주의 정치의 요소인 이런 불일치가 서로 다른 형태의 시민적 동일시를 허용한다. 민주주의적 형태의 동일시가 결여되어 다원주의의 경합적 동학이 저해될 경우, 열정은 민주주의적으로 발산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그 자리를 복병처럼 차지하는 것은 민족주의적▪︎종교적▪︎인종적 유형의 본질주의적 동일성을 중심으로 절합된 여러 정치 형태들, 협상 불가능한 도덕적 가치를 둘러싸고 증식하는 대결들, 그런 대결들에 수반되어 모두 드러나는 폭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