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단기 4357). 2.23 (금) 음력 1.14 (비, 바람) -아침에 쓰는 일기-
제44회 대전수필문학 정기총회를 다녀와서
雨水는 자신의 이름값을 옹골지게 받아내고 있다. 빌딩숲이 막아섰는데도 비바람은 그 틈새를 마구잡이로 비집고 다녔다. 데스크 안내는 말했다. “전철역까지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리’가 거슬렸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찬비가 하늘을 그어댈 때는 변수가 작용한다. “그냥, 승용차로 갈걸 그랬지?”나의 불만 섞인 어투에 아내의 대꾸는 차분했다. “모처럼 지하철을 이용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유성온천' 역에서 공짜 표를 신청했다. 익숙하지 않아선지, 두 번이나 퇴짜를 맞았다. 세 번째 도전에서 동그란 플라스틱 우대권을 받았다. 아내는 나보다 더 헤맸다. 주민등록증이 아닌 운전면허증 때문일까? 자꾸만 실패했다. 하는 수 없이 내 주민등록증을 드밀며 한 장을 더 요구했다. 기계라고 깔본 것이 실책이다. “두 번은 안 돼요!” 나는 또 다른 묘책을 발휘했다. “여보, 내가 게이트에서 우대권을 대자마자 얼른 따라 들어오면 돼요. ”웬걸, 내 몸뚱이가 나가자마자 문지기가 비명을 질렀다. “한꺼번에 두 명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때 지켜보고 있던 역무원이 달려왔다. 질책 속에 담긴 친절로 아내도 우대권을 받을 수 있었다.
자리는 없었지만 공간은 넉넉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액정을 밀거나 쓸면서, 히죽히죽 혼자들 웃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다. 스마트폰에 집중하고 있었다. 말하면 징역이라도 갈 것처럼, 전철 안은 조용했다. 그때 ‘정부청사’란 멘트와 함께 문이 열리고 30대 장애우가 들어왔다. 베이지색 패딩위에 둘둘 말아 걸친 연두색 목도리가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손수 휠체어 바퀴를 밀고 당기는 모습이 퍽이나 자연스러웠다. 내 앞 벽면에 휠체어를 세운다음, 이내 책을 펼쳐 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동지를 만났듯 반가웠다. 친밀감을 앞세워 다가서며 말했다. “젊은이 그 책 제목이 뭐요?” 대답대신 책 겉장을 보여주었다. 주황색 바탕에 검정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도둑맞은 집중력(STOLEN FOCUS)’
저자는 ‘요한 하리’다. 나는 젊은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용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제목은 마치, 전철 안 풍경을 비웃는 것 같았다. 목차를 읽으면서 대략적으로나마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집중력을 도둑질하는 실체는 무엇일까? 얼른, SNS (Social Network Service)를 떠올렸다. 그런 다음, 전철 안 풍경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이미 집중력을 도둑맞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나는 아내에게 귀띔하고 옆 칸을 둘러보았다. 역시 대동소이(大同小異)다. 신문이거나 책을 읽는 사람은 없었다. 눈을 감고 잠든 척 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스마트폰에서 무언가 빠르게 찾고 있었다.
나는 컴컴한 창밖을 내다보며 스스로 자문했다. “너는 어떠냐?”내가 나에게 대답했다. “그려, 매사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하지, 그뿐만이 아니다. 문장이 조금만 길어도 끝까지 읽지 않고 대충 짐작하여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지.” 이 또한 ‘도둑맞은 집중력’의 후유증이라고 확신했다.
누군가가 말했다. ‘독서를 위해 가장 힘든 일은 책을 펼치는 것이라고.’ 그만큼 종이책을 홀대한다는 방증이다. 이거야말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목적지인 ‘중앙로 역’에 도착했다.
비바람은 여전히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머릿속에는 자꾸만 그 장애우 청년이 떠올랐다. 작별인사는 정중하게 받았지만, 의미심장한 웃음의 의미는 여전히 숙제다. 뇌리에서는 청년이 쥐고 있던 ‘도둑맞은 집중력’이 뱅글거렸다.
찬비 속을 헤맨 끝에 선배님의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진작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마도 책의 표지가 던진 메시지(집중력)의 작용이었으리라. 반갑게 맞는 선배님의 모습이 참으로 인자하고 넉넉하게 보였다. 아마도 사무실 벽면 전체를 차지한, 종이책 때문이었으리라. 그분은 결코 집중력만큼은 도둑 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만리포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컴퓨터를 열고 책을 구매했다. 이삼일이면 손안에 들어올 것 같다. 받아 들면 문장에 몰입할 작정이다. 그래야만이 흔들리는 ‘집중력’을 바로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다음, 독후감을 써서 친구나 후배, ‘수필예술’ 카페에도 올릴 것이다.
회원여러분! 이번 정기총회는 개인적으로 큰 울림을 받았습니다. 먼저 이정웅 회장님,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아울러 박 미련 신임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모처럼 동인들과 흉금을 털어 놓을 수 있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모르는 회원들과 인사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한 제가 불찰입니다. 이 또한 집중력을 도둑맞은 결과일 것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문우들과의 교류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카페를 이용해서라도 여러분과 자주 소통하고 싶습니다. 요즘 저는 수필집 한편을 더 출간하기 위하여 문장을 다듬고 있습니다. 되도록 가식의 군더더기는 떼어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말했던가요? “대리석이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조각은 커진다.(The more the marble wastes the more the statue grows)
아직도 빗소리가 들립니다. 회원 여러분, 모쪼록 건강하시길 희망합니다.
첫댓글 이태호 작가님이
오랜만에 귀한 옥고 올려주셨습니다.
‘수필예술’ 간판에 걸맞은 격조와 섬세한 문장,
행간마다 풍기는 태안 작가 특유의 따스한 인정.
비바람 맞으며 달리는 어느 자전거 탄 사람의 흑백 필름이
옥고 분위기를 한결 돋보이게 합니다.
이태호 작가님 방문으로 앞으로 카페 분위기가
새로운 활력으로 넘칠 것입니다.
'윤승원의 삶의 이야기' 삶이란 바라보는 위치와 관점에서 다른 것 같습니다. 매사 긍정적인 윤승원 작가님의 나날에서 많은 앎을 얻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친밀한 관계는 녀석에게 값진 추억이며 자산으로 쌓일 것입니다. 저는 할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으레 長竹과 글 읽는 소리입니다. 무엇보다 '명심보감'을 가르쳐 주시던 다정함이 눈에 선~합니다. 그때의 한문 실력이 그대로 남아 있음은 모두 할아버지의 제대로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윤승원 작가님, 손자와의 관계가 날로 무르익기를 희망합니다.
@이태호 할아버지의 長竹과 명심보감. 과거 근엄하신 할아버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 훌륭한 할아버지 밑에서 우주 만물의 이치를 배우고, 인간의 도리를 배운 어르신들은 오늘날 세태를 보면서 많은 걱정을 하지요. 그래도 옛 어르신들의 반듯한 정신적인 토양에서 자란 분들은 전통을 이어가려고 노력하지요. 이태호 작가님의 따뜻한 격려 댓글에서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