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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
낚시 천국의 섬
마도 개요
면적은 0.254km2, 섬둘레는 0.3km이다. 신진도의 서쪽에 마주보고 있는 섬으로, 생김새가 달리는 말과 같이 보인다고 하여 마주형이라 했는데 이에 연유하여 섬의 명칭을 마섬 또는 말섬이라 호칭해 오다가 지명의 한자표기에 따라 마도(馬島)가 되었다.
마도는 신진도와 비슷한 시기인 고려 성종 때부터 주민이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안흥면에 속하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근흥면 신진도리에 편입된 유인도서이다. 마도는 신진도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조그마한 섬이다.
지난 87년 7월 신진도와 마도를 다리 아닌 시멘트 포장길로 연결했다. 물의 흐름을 차단한 말 그대로의 도로로 바다를 양쪽으로 분리시킨 것이다. 이 도로를 건너면 바로 마도의 조그마한 포구다. 이곳에는 고만고만한 배들이 정박해 있다. 95년도에 안흥-신진도간 연륙교와 함께 마도는 육지가 되었다. 태안군 근흥면 신진도리에 소속된 섬으로 현재 20세대에 81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마도 둘러보기
마도의 어미섬은 신진도이지만 마도의 위치가 절묘하여 신진도와 함께 천혜의 어업전진기지이다. 마도는 지금 개발 중이다. 신진도에서 마도에 막 들어서면 언덕을 깎아내는 공사가 한창이다. 이미 주위에는 각종 모텔 등의 유락시설이 들어서고 있고, 현재도 새로운 시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마도 앞 옛 방파제에는 바닷물이 흐르는 50m 길이의 아치형 다리도 설치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바다길이 열려 바닷물 숨통이 트일 것이다.
신진항으로 통하는 안흥 외항을 이루는 두 섬은, 등대를 한 개씩 공유하고 있다. 신진도는 빨간 등대를, 마도는 하얀 등대를 갖고 있다. 하얀 등대가 들어선 방파제에서 신진도를 바라보면 높은 봉우리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후망봉이다.
사실 섬의 풍광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산에 올라야 한다. 신진도에서 가장 높은 후망봉은 망망대해의 크고 작은 섬과 주변의 자연 경관, 고깃배들의 모습, 어촌 생활 등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으로 어촌의 한가로움을 느끼게 한다. 후망봉은 고려 때 송나라로 가는 사신이 산제를 지내고 일기가 청명하기를 기다렸다는 유서가 깊은 곳이다.
여기서 보는 바다경치가 장관이다. 1km가 넘는 긴 방파제와 그 방파제 끝에 솟은 등대의 아름다운 풍경도 뛰어나다. 등대 건너 신진도 앞바다에는 거북바위·사자바위·독립문바위와 마도, 정곡도, 가의도, 옹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어울려 있어 풍광도 볼 만하다. 이 섬들을 둘러보려면 관광유람선을 타야 한다. 신진항에서 매일 2대의 유람선이 운항되고 있다. 마도선착장에 도착하여 배들 사이로 바라보는 일몰과 바다의 풍광이 아름다워 관광객과 사진동호인들이 많이 찾고 있다.
바닷속에서 잠들어 있는 고선박 발견
지난 2015년 4월에 태안 마도 앞바다에서 길이 11.5m, 폭 6m의 고선박이 발견되었다. 마도 근해에서 또 다시 발견된 고선박은 2007년 이후 여섯 번째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015년 3월 최신 3차원 입체영상 지층탐사장비를 이용해 마도 해역을 탐색한 결과, 2011년 마도 3호선(고려시대 화물선)이 발견됐던 해저 근처에서 고선박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물체가 탐지됐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에서 집게발 6개가 달린 해저 탐사로봇이 바다에 투입되어 200미터까지 혼자 작업을 하였다. 이번에 확인한 선박은 마도 4호선으로 길이 11.5m, 폭 6m 규모이며, 모형은 전형적인 한국 고선박 형태를 띤다고 한다.
이 부근 해역에서는 지난 2007년 태안선을 시작으로 2011년까지 마도 1, 2, 3호선 등 고려시대 고선박 4척과 3만여 점에 달하는 유물이 잇달아 발굴됐다. 지금까지 출수된 청자와 목간, 도기, 곡물, 젓갈, 선상 생활용품 등은 당시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발굴 조사에서 고려의 청자와 조선의 백자, 송, 원, 청대의 중국도자기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이곳 마도 지역 일대가 고대의 중요한 무역항로였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입증됐다.
그렇다면 하필이면 마도 일대에서 이렇게 수많은 유물들이 발견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먼저 이곳이 고려시대부터 '안흥정'이라는 국제적 객관(외국 사신들의 숙소)이 위치해 있어 무역선들의 중간 기착지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요인은 이곳은 강한 물살과 암초, 짙은 안개 등으로 난파사고가 빈번한 곳이다. 지금의 동력선은 물살을 잘 거슬러 다니기도 하고, 전진과 후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더구나 전자 장비와 해도까지 갖추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돛단배를 가지고 바람에 의지하여 가다가 풍향이 바뀌거나 물살과 파도가 세게 밀려오면 속수무책이었다. 바람과 조류가 센 서해안에서 사고를 많이 당한 것이다.
그래서 풍랑과 짙은 안개 때문에 난파된 고선박들이 많았던 이곳은 수중문화재의 보고로 불린다. 특히 900년 동안이나 수면 아래인 뻘속에 깊숙이 파묻혀 고요히 잠든 보물 창고가 드러난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에 서해안의 시화호와 새만금, 서산 A,B지구 등 수많은 곳이 간척사업을 하면서 조류자체가 바뀌어 버렸다. 여기서 고선박 위로 퇴적된 뻘이 강한 조류에 씻겨 나가면서 고선박이 유물과 함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옛날에는 어선과 무역선들이 먼 바다로 나가서 심한 풍랑을 만나면 방향 감각을 잃고 여러 날 표류해야 했다. 바다에서는 바람이 항상 적당하게 불어 주어야 한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며칠간이라도 바람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홍도에 대풍김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오면 그 풍랑을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바닷속에 감추어진 암초는 언제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배를 타는 선원들은 항상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다.
풍선 시절에는 바람이 너무 세거나 전혀 없으면 고생을 많이 했다. 풍선의 특징상 대부분 바람과 함께 바닷물의 조류를 따라 가면서 항해를 해야 한다. 스페인의 콜럼버스는 4차례나 범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다. 그 덕분에 인류 역사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그 이후 유럽인들은 대거 미국 대륙으로 몰려갔고 지리의 발견은 항해술, 예술, 과학, 종교에 새로운 발전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문화의 이동과 지리적 넓이가 크게 확장되었다.
우리나라 서해안의 간만의 차이는 최고로 11미터에 이른다. 간만의 차이가 심하다는 것은 물살이 거세다는 뜻이다. 동해는 간만의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현재의 동력선은 바람과 파도, 거센 물살도 무난히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전의 돛단배를 연상하면서 바다를 멀리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영국, 스페인이 세계를 정복한 것은 범선인 돛단배를 타고 오대양 6대주를 누빈 결과이다. 네덜란드는 1602년 3월 국가가 관리하는 동인도회사를 출범시켰다. 동인도회사는 범선을 타고서 세계 무역의 선구자 역할을 하다가 1799년에 해산했다.
지금은 옛날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선박 기술이 발달되었다. 더 많은 학생들이 섬과 바다를 탐험하고 개발해 나갈 때 우리나라는 더욱 발전에 속도를 가할 것이다. 마도가 신진도와 함께 도시인들에게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맑은 물과 낚시 천국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주말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바다낚시를 즐기며 아름다운 자연과 벗삼아 하루를 보내고 있다.
태안해저유물(泰安海底遺物)
충청남도 태안반도 해역에서 발굴된 해저유물.
해저난파선 제작시기
태안선: 1131년, 마도1호선: 1208년, 마도2호선: 1200년 전후, 마도3호선: 1264∼1268년
수량: 4척
재질 : 나무
크기
태안선: 길이 8.2m, 너비 1.5m, 마도1호선: 길이 10.8m, 너비 3.8m, 마도2호선: 길이12m, 너비 5m, 마도3호선: 길이 12m, 너비 8m, 깊이 2.5m시대고려-후기성격해저유물, 해저난파선제작시기태안선: 1131년, 마도1호선: 1208년, 마도2호선: 1200년 전후, 마도3호선: 1264∼1268년수량4척재질나무크기태안선: 길이 8.2m, 너비 1.5m, 마도1호선: 길이 10.8m, 너비 3.8m, 마도2호선: 길이12m, 너비 5m, 마도3호선: 길이 12m, 너비 8m, 깊이 2.5m
개설
태안해저유물은 1976년 신안해저유물 발굴로 촉발된 발견매장문화재의 신고로 1980년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수중탐사로 해저에 유물이 산발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집중매장처는 찾지 못했다. 2007년대섬 앞바다에서 주꾸미잡이를 하던 중 청자대접 1점이 올라와 신고한 것을 계기로 긴급 탐사를 통해 다량의 청자가 노출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어진 발굴조사로 2만 5천여 점의 고려 청자와 선체를 인양하였다. 청자는 품질이 좋은 강진산이며 화물표인 목간(木簡)이 다량으로 수습되었다. 청자운반선인 태안선의 발굴 중에 마도해역에서 발견신고가 잇따라 광역탐사를 실시하였다. 넓은 해역에 걸쳐 다수의 유물이 산재하고 있어서 연차 발굴계획을 세워 조사를 하고 있다. 2009년부터 매년 1척씩 3척을 발굴하고 마도1·2·3호선으로 명명하였다. 마도해역은 난파선의 공동묘지라 부를 만큼 유물이 넓게 산포되어 있고 종류도 고려 청자와 조선의 분청사기·백자뿐만 아니라 중국의 도자기들도 많으며 크고 작은 닻돌 80여 개도 인양하였다. 따라서 마도해역의 수중조사는 장기계획을 세워 탐사와 발굴조사를 진행중이며 조사와 유물의 보존처리를 위해 신진도에 사무소를 건립하였고 유물과 선체를 전시하는 해양유물전시관이 2019년 11월 18일 개관하였다.그동안 수중발굴유물은 대부분 청자와 그 운반선이었고 난파시기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자료가 없었다. 2007년에 발굴한 청자운반선인 태안선에서 화물표인 목간이 처음 확인되었고 곡물운반선인 마도해역의 3척의 난파선에서도 목간과 죽찰이 다량으로 확인되어 화물의 내용과 성격은 물론 난파시기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강진에서 만든 양질의 청자를 실은 태안선은 1131년에 난파되었고, 마도1호선은 1208년, 마도2호선은 1200년 무렵, 마도3호선은 1264∼1268년 사이에 난파되었음을 목간을 통해 입증하게 되어 고려의 타임캡슐로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내용
1. 태안선의 발굴
2009년에 발굴한 태안선은 강진에서 만든 청자를 가득 싣고 개경으로 운반하다 태안반도의 신진도 남쪽 대섬 앞 해상에서 침몰하였다. 선체는 외판의 일부만 남아 있었으며 선원의 것으로 보이는 사람뼈도 있었다. 수심 15m 정도에 조류가 약간 강한 해역이나 가시거리가 어느 정도 확보되어 발굴조건이 양호하였다. 청자의 종류는 대접과 주발·접시가 대부분이나 참외모양주전자·통모양잔·사자모양향로·두꺼비모양벼루·소형분합·유병·발우도 있다. 최대경(崔大卿)과 같은 고위관료에게 보내는 목간 옆에 선적된 청자들은 최상품이다. 발우는 매우 양질이며 음각문양이 새겨진 것도 있고 48세트나 되어 의례에 참여하는 승려의 공양에 사용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작기법으로 보면 내화토 빚음이 대부분이나 일부 규석받침이 있고 문양수법은 음·양각과 퇴화·철화 등이며 상감은 전혀 없다. 두꺼비모양벼루는 소형으로 휴대용이며 철화와 퇴화 기법으로 만든 희귀한 작품이다. 사자모양향로는 해학적 표현으로 익살스러움을 드러내고 있다.태안선 발굴에서 나온 목간은 수중에서 확인한 최초의 고려 목간이다. 이 목간을 통해 청자산지로 유명한 강진에서 만들어 개경의 관료와 개인에게 보낸 것을 알 수 있었다. 목간을 통해 청자의 정확한 제작시기는 물론 출항지, 화물의 내용과 수량, 수취인의 이름과 관직, 보낸 사람의 수결 등 청자의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2. 마도 1·2·3호선의 발굴
2009년부터 발굴한 마도1·2·3호선은 지금까지의 청자 운반선이었던 태안선과는 달리 곡물을 운반하던 배였다. 화물의 대부분은 벼와 쌀·콩·메밀·조·피·기장 등 곡물과 건어물·메주·젓갈류로 채워져 있었다. 세 난파선 모두 화물표인 목간과 죽찰(竹札)이 다량으로 수습되어 선적물의 내용과 침몰연대를 정확히 밝힐 수 있었다.
마도1호선에서는『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하는 김순영(金純永)이라고 하는 대장군의 이름과 정묘(丁卯)·무진(戊辰)의 간지가 있어 1207∼1208년 사이에 난파되었음이 분명하다. 마도1호선에 실린 800여점의 도자기 가운데 주목할 유물로는 청자상감표형주자(靑磁象嵌瓢形注子)와 받침대가 있다. 수십 점의 도기는 도량형제도 연구에 학술적 의미가 크고 도기연구의 실증자료로서 중요하다. 더욱이 도기에 담겨진 것이 주로 젓갈류라는 사실을 통해 고려의 식생활 문화도 살펴볼 수 있다. 이외에 50kg 정도의 석탄도 실려 있어서 석탄의 사용개시 연대를 고려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다. 침몰연대가 무신권력자 최충헌(崔忠獻)의 집권시기이므로 무신집권기 수취체제는 물론 출항지, 거래관계, 운송책임자, 적재단위 등을 알 수 있다. 마도1호선은 전라도의 장흥·해남·강진·나주 등지에서 화물을 싣고 항해하다 1208년 봄 마도해역 즉 난행량에서 침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10년에 발굴한 마도2호선은 마도1호선과 성격이 비슷한 곡물운반선이다. 선체에 실린 청자는 양이 많지 않으나 2점의 최상급 매병이 주목을 끈다. 매병은 음각연화절지문(陰刻蓮花折枝文)과 상감능화형유죽로화훼문(象嵌菱花形柳竹蘆花卉文)인데 높이 39㎝로 크기가 같고 형태가 당당하고 유려하다. 이 매병의 주둥이 옆에서 죽찰이 인양되어 꿀과 참기름을 담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이 “중방도장교오문부택상정밀성준봉(重房都將校吳文富宅上精蜜盛樽封)”으로 개경의 중방(重房) 소속 도장교(都將校)인 오문부(吳文富)에게 올려 보낸 꿀단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매병을 준(樽)으로 불렀다는 것과 매병의 용도가 술이나 물을 담거나 화병으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론을 벗어나 꿀과 참기름 같은 고급 식재료의 보관과 운반에 쓰였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자료이다. 양질의 청자연판문통형잔(靑磁蓮瓣文筒形盞) 20점과 대접 25점 한 묶음도 인양되었다. 배에 실린 매병을 비롯한 청자들은 부안에서 생산된 것이다. 마도2호선에서도 쌀·콩·알젓 등 화물의 종류와 수량·수취인·발신자·발송지가 적힌 목간과 죽찰 30여점이 수습되었다.
마도2호선은 전라도 정읍·고창 등지에서 거둔 곡물을 싣고 가다 난행량에서 침몰하였다. 목간과 죽찰에 대경 벼슬의 유(庾)씨와 왕의 친위부대인 견룡(牽龍) 소속 기(奇)씨가 주목된다. 무송(茂松)을 본관으로 한 유씨는 고려 인종 무렵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문벌(門閥)의 하나이다. 이 시기에『고려사』에 등장하는 기씨 성의 무인으로는 기홍수(奇洪壽: 1148∼1209), 기윤위(奇允偉), 기존정(奇存靖) 등이 있다. 한편 대경을 역임한 무송 유씨로는 유자량(庾資諒: 1150∼1229)이 보이는데 그는 무신정변의 와중에서 무인 오광척(吳光陟), 이광정(李光挺), 문장필(文章弼) 등과 교유관계가 있어 살아남았고, 1213년에는 모든 관직을 내놓고 은퇴하였으므로 마도2호선의 난파 연대를 추정하는 근거를 제공해준다. 또한 김취려(金就礪) 장군과 함께 거란을 물리친 이극서(李克㥠)라는 인물도 보인다. 따라서 목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활동으로 미루어 마도2호선은 1213년 이전에 난파된 것이 확실하다. 목간에 적힌 유씨 성을 가진 인물이 유자량이 맞다면 그의 관직 경로상 대경에 재임한 시기는 1200년 전후로 추정된다. 2011년에 발굴한 마도3호선은 지금까지 발굴한 고려 선박 가운데 선체가 가장 잘 남아 있었다. 배의 이물과 고물 및 돛대를 고정시키는 구조 등이 거의 완형으로 남아 있어 고려시대 선박 구조에 대한 전모를 확실히 알려주고 있다. 마도3호선의 남아 있는 규모는 길이 12m, 너비 8m, 깊이 2.5m로 그동안 발굴한 고려선 가운데 가장 크다. 마도3호선도 곡물과 먹을거리를 싣고 가던 배였고 다량의 목간이 수습되었다. 화물 수취인으로 신윤화(辛允和)와 유승제(兪承制)가 보이는데 시랑(侍郞) 신윤화는 1260년(원종 원년)에 장군으로 몽고에 다녀온 기사가 있다. 유승제란 유씨 성의 승선(承宣)을 말하는 것으로 원종 초엽 우부승선(右副承宣)이었던 유천우(兪千遇)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수취인으로 나오는 김영공(金令公)은 최씨무인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김준(金俊)이라는 인물이다. 김준은 1258년 11월에 정권을 잡았고, 1264년 해양후(海陽侯)에 책봉된 후부터 영공이라 불렸으며, 1268년원종과 임연세력에 의해 제거되었다. 따라서 마도3호선은 1264∼1268년 무렵 난파된 것이 분명하다. 즉 임시 피난수도인 강도(江都)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기 직전 최고 집권층에게 보내는 곡물과 먹을거리들이 배 안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목간 가운데 “우삼번별초도령시랑(右三番別抄都領侍郞)”이라는 묵서가 있다. 그동안 삼별초의 지휘관은 7∼8품의 하급 무반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4품의 시랑(侍郞)이 도령(都領)을 맡았고 야별초의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가 각기 3번(番)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는 몽고 침략에 끝까지 저항했던 삼별초의 실체를 연구하는데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마도3호선의 화물로는 볍씨·보리·밤 등의 곡물과 대나무상자 속에 생선뼈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또 다량의 도기 안에는 젓갈류 등이 들어 있는데 목간에 표현된 내용을 보면 상어〔沙魚〕·말린 홍합〔乾淡〕·생전복〔生鮑〕·전복젓갈〔鮑醢〕·개고기포〔犭脯〕등이 있다. 이 외에 조약돌 앞뒤에 장군(將軍)·차(車)·포(包)·졸(卒) 등이 적힌 장기돌 47점도 수습되었다. 배에 승선한 사람들이 고단한 항해 생활을 달래기 위해 중국에서 들어온 장기를 오락 삼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마도해역에서 발굴된 태안선은 청자운반선으로서, 마도1·2·3호선은 곡물 운반선으로서 기능했으며, 배 안에 적재된 다양한 유물과 목간·죽찰 등을 통해서 당시 생활상과 문화상을 복원할 수 있는 고려의 타임캡슐로서 부각되고 있다. 태안선은 여러 종류의 청자가 다량 발굴됨으로써 고려 청자 제작기법 및 청자의 문양에 관한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마도1·2호선은 최충헌집권기에, 마도3호선은 김준 집권기에 난파된 곡물운반선인데, 고려 무인집권기 중앙 지배층의 지방지배와 조세수취가 원활히 이뤄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로서 중요하다. 특히 마도3호선은 고려 선박의 구조뿐만 아니라 무신집권기 삼별초의 편제·운영 및 당시 강도 지배층의 식생활 문화를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안 마도해역 탐사보고서』(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2011)
『태안 마도2호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2011)
『수중발견신고유물 바닷속 유물,빛을 보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2010)
『특별전 도록,800년전의 타임캡슐』(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2010)
『태안 마도 1호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2010)
『고려청자보물선 태안 대섬수중발굴조사보고서』(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2009)
『특별전 도록,고려 뱃길로 세금을 걷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2009)
『특별전도록,고려청자보물선』(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2008)
「마도 3호선 목간의 현황과 판독」(임경희,『목간과 문자연구』7,한국목간학회,2012)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안해저유물(泰安海底遺物))]
충남 태안 마도는 ‘수중문화재 보물창고’
아시아경제 기사 입력일 : 2009.07.02
왕성상 기자
고려, 조선, 송·원·청나라 때 도자기 380여점 건져 올려…파묻힌 배도 발견
충청남도 태안의 마도가 ‘수중문화재 보물창고’로 햇볕을 보게 된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소장성낙준)는 올 4월26일~6월23일 태안군 근흥면 마도해역에 대한 수중발굴조사를 벌여 우리나라와 중국도자기 380여점을 건져 올리고 2척의 배가 파묻혀 있는 것도 확인했다고 2일 발표했다.
마도해역은 1970년대부터 유물발견·신고가 잦았던 해역으로 지난해 조사 때 고려청자 500여점을 건져 올리고 유물보존을 위한 사적으로도 가지정했다.
올 3월 중순 주변해역에 대한 탐사에선 국적과 시대가 다른 여러 유물들이 수습돼 본격 수중조사를 펼쳤다.
조사에선 지난해 했던 Ⅰ구역과 올 3월 탐사 때 유물이 확인된 Ⅱ구역 탐사와 수중촬영을 한 뒤 유물을 인양했다.
특히 많은 유물들이 나온 구역은 트렌치조사(시굴조사)도 겸했다.
Ⅰ구역 조사 결과 파묻힌 선체를 발견했다. 규모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배 밑(저판) 5단과 좌우 외판이 2단씩 남아있음을 확인했다.
배에 실린 청자 잔 등 60여 점과 땔감소재인 석탄덩어리를 인양했다. 지난해 건져 올린 청자와 거의 같은 상태다.
드러난 배 몸체는 손상이 심하고 오래전 그 때의 것으로 보이는 볍씨, 묵서가 남아 있는 죽간, 목간편 각 1점을 수습했다.
우리나라 수중 발굴 때 죽간이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묵서내용은 뚜렷하지 않아 판독이 어렵다.
현재 본격 선체발굴을 위해 20×20m 크기의 그리드(격자)를 설치하고 각 1×1m의 세부 구획 틀도 갖췄다.
Ⅱ구역 조사결과 300여 점의 시대와 국적이 다른 도자기들이 인양됐다. 또 파묻힌 선체 일부(외판 2단)도 확인됐다. 게다가 나무 닻에 매달아 썼던 닻돌 5개를 발견했다.
다량의 닻돌은 이 지역이 선박난파가 잦았던 곳임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이밖에 뱃사람들이 쓴 것으로 보이는 도기소호(小壺, 작은 항아리)와 철제 솥, 맷돌, 청동그릇, 수저 등도 건져냈다.
인양된 도자기 종류는 고려시대·조선시대·중국 것 등 매우 다양하다.
우리나라 도자기는 11세기께 해무리굽청자부터 14세기 후반의 상감청자까지 여러 종류의 고려청자와 15세기 분청사기, 17~18C 백자 등 조선시대 도자기들도 있다.
중국 도자기는 송나라부터 청나라 때에 이르는 다양한 종류들이 인양됐다.
송·원(宋·元)대 청자, 백자, 도기 등이 인양됐고 일부엔 묵서명이 있다. 둥근 잔을 올려놓는 받침대로 보이는 이형도자기 4점도 빛을 봤다.
명(明)대 유물로는 15~16세기 복건성 남쪽에서 만들어져 동남아시아로 많이 수출됐던 청화도자기도 들어있다.
청(淸)대 유물로는 백자발(白磁鉢), 백탁유발(白濁釉鉢), 백자청화초문발(白磁靑畵草文鉢, 청화기법으로 풀 무늬를 외면에 시문한 발) 등이 있다. 백탁유발은 균요계 요장에서 주로 만들어진 유약의 한 종류로 가마 내 번조분위기에 따라 도자기 유색이 불투명한 푸른빛과 흰색이 섞여 나타난다.
18세기 균요계(鈞窯系, 송대에 각 지방 특성을 반영한 자기도요지들인 6대 요계 중 하나) 도자기와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백자청화초문발도 있다.
수중 발굴 주변해역은 원래 난행량(難行梁)이라 부르던 곳이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크고 바닷물 흐름이 빨라 조운선들이 가라앉는 사고가 잦은 곳이다. 때문에 안흥량(安興梁)이라 이름을 바꿔 선박운행의 안전을 빌었다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고려와 조선시대 운하를 파서 새 안전항로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또 이 일대엔 고려시대부터 안흥정(安興亭)이란 국제적 객관(客館)을 둬 나라 간 사신선 및 무역선의 중간 기착지역할을 해왔다.
이번 발굴조사로 시대와 국적이 다른 다양한 도자기들이 나와 이 지역이 국제무역항로로 중요한 지점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입증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다양한 시대의 배와 도자기 등이 인양되는 태안 마도 인근해역의 수중고고학·역사학적 중요성을 감안해 장기계획을 세워 체계적이고 치밀한 수중발굴조사를 벌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태안군, 천년의 보물 묻힌 태안 ‘바닷속 경주’로 재조명
(충남)허희만 기자
아주경제 기사 입력일 : 2021-08-23
청포대 해수욕장서 조선 왕실 건축물 기와 취두 등 발견돼 최근 공개
최근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태안군 남면 청포대 해수욕장에서 발굴한 조선 왕실 건축물에 쓰이는 용머리 모양의 취두와 장군상 등을 공개하면서 태안군이 ‘바닷속 경주’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19년 9월, 청포대 해수욕장에서 해루질을 하던 태안군민의 발견 신고로 처음 첫번째 취두의 아랫부분이 발견됐으며, 이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추가 발굴을 통해 온전한 모습의 취두 1건 2점과, 머리가 없는 장수상 1점을 수습했다.
조선 전기의 취두가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군에 따르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지난 19일 조선 전기 왕실 관련 건축물의 지붕을 장식하는 용머리 모양의 기와 취두(鷲頭)와 갑옷을 입은 사람 모양의 잡상(雜像)을 공개하고 8월 31일부터 9월 5일까지 태안군 근흥면에 위치한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태안군에서는 근흥면 마도 앞바다에서 지난 2007년부터 2015년까지 고려 태안선과 마도 1·2·3호선, 조선 조운선인 마도 4호선이 발견됐으며, 2016년에는 남면 당암포 해역에서도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기가 발굴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끈 바 있다.
특히, 지난 2020년 4월 신진도 고가의 군적부와 2019년 취두의 발견으로 문화재 발견신고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기도 하다.
군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취두가 발견된 지역의 조사 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라며, 발굴 시 군민들의 양식장 이용 등에 피해가 없도록 하고 해양유물의 발굴에도 적극 협조해 ‘바닷속 경주’를 넘어 ‘해양문화재가 곧 태안’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도록 노력한다는 방침이다.
군 관계자는 “그동안 태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3만 여 점의 해양 유물과 앞으로 새로이 발견될 유물들이 과거의 역사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길 바란다”며 “서해안의 대표적 보고(寶庫)로 떠오르고 있는 태안군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앞으로도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태안군 마도 지도
태안군 [마도&신진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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