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9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마태오 5,17-19
참사랑은 사랑하게 만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이 어째서 폐지하러 오신 분처럼 보였을까요?
율법만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이는 그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당하셨습니다.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모아집니다.
사랑을 강요하는 이는 율법주의자입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이 아무 잘못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이는 세상에서 사랑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참사랑은 그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율법주의자로 남느냐로 결정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소년 시절의 너’입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주인공 ‘첸니엔’은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 소녀입니다.
어머니는 첸니엔이 일류대에 들어가 집안을 일으키기를 원하며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작용이 심한 화장품을 팔고 다닙니다.
그런데 첸니엔의 유일한 말벗이었던 한 친구가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합니다.
첸니엔은 자신의 옷으로 그녀를 덮어줍니다.
이로써 친구를 괴롭히던 아이들의 다음 대상이 됩니다.
이때 첸니엔의 어머니가 남의 돈을 떼먹고 도망을 하였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도 전해집니다.
그래도 첸니엔은 꾹 참고 그들의 괴롭힘을 참아냅니다.
그러다 돈도 많고 공부도 잘 하는 일진 웨이 라이가 첸니엔을 괴롭히다 정학을 맞습니다.
웨이 라이와 일진들이 복수하기 위해 첸니엔을 찾아옵니다.
그들에게 쫓기던 첸니엔은 쓰레기통에 숨어서 위기를 벗어납니다.
이때 우연히 양아치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당하는 샤오 베이를 목격하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신고하는 걸 들켜 양아치들에게 끌려가 함께 괴롭힘을 당합니다.
샤오 베이는 자신에게 돈을 주면 첸니엔을 지켜주겠다고 말합니다.
웨이 라이 일당이 첸니엔에게 보복을 하려고 하자 첸니엔은 결국 샤오 베이를 찾아가 돈은 줄 수 없지만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냐고 묻습니다.
샤오 베이는 지금 생활을 벗어나는 건 명문대 진학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듯한 첸니엔의 등하교를 같이 해주며 첸니엔을 지켜줍니다.
항상 싸우고 다쳐 돌아오는 샤오 베이와 엄마에게 버림받은 첸니엔 둘은 함께 지내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점점 가까워집니다.
하지만 웨이 라이는 더 많은 패거리를 끌고 와 이전에 자살한 아이에게 한 것처럼 첸니엔을 짓밟고
머리카락도 강제로 자르고 옷을 벗겨 영상을 찍습니다.
주민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경고해서 이들의 괴롬힘은 끝나지만 첸니엔은 만신창이가 된 채로 샤오 베이에게 돌아와 분노한 샤오 베이를 붙잡고 첸니엔은 서럽게 웁니다.
샤오 베이는 아이들에게 머리가 잘린 첸니엔의 머리를 밀어주고 자기 머리도 밀어버립니다.
대입시험이 시작되고 여느 때처럼 샤오 베이는 멀리서 첸니엔을 지켜봅니다.
첸니엔이 시험을 보는 동안 공사장에서는 신원 불명의 시신이 발견되고, 시신의 신원이 밝혀지는데 바로 첸니엔을 괴롭히던 웨이 라이입니다.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고 아이들이 찍었던 첸니엔의 동영상이 밝혀집니다.
첸니엔은 유력한 용의자로 조사를 받고 추궁당하지만, 심증 외에 물증이 없자 경찰은 첸니엔을 따라다닙니다.
대입 시험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샤오 베이가 모든 것을 자신이 뒤입어쓰겠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첸니엔을 스토킹을 했고 웨이 라이도 강간을 하려다가 실수로 죽인 거로 하자면서 소리 지르라고 시킵니다.
샤오 베이는 의도적으로 증거까지 남겨놨습니다.
하지만 첸니엔은 자신이 한 일이니 자수를 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샤오 베이는 자기는 미성년자라서 큰 처벌을 받지 않을 거고 첸니엔이 대학 졸업을 할 때쯤에는
감옥에서 나올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샤오 베이는 네가 이긴다면 나도 진 게 아니라며 어른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니 먼저 안전한 곳으로 가 있으라고 합니다.
샤오 베이는 결국 첸니엔의 옷을 찢고 키스를 하다가 경찰에 체포됩니다.
자신이 한 범행처럼 증거를 만들어 놓은 샤오 베이는 경찰의 심문을 받습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웨이 라이가 첸니엔을 찾아와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경찰에 신고하지만 말아 달라며 장난이었다면서 무릎까지 꿇었습니다.
하지만 첸니엔은 자신의 남은 생애 동안 너를 보고 싶지 않다면서 돌아섭니다.
웨이 라이는 첸니엔을 따라가면서 첸니엔의 신경을 긁는 말을 하고 결국 참지 못한 첸니엔이 웨이 라이를 밀쳐냈고 계단에서 구른 웨이 라이는 죽게 된 것입니다.
형사는 첸니엔과 샤오 베이의 관계를 조사하다가 사실대로 말하면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샤오 베이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둘을 떠보기도 하고 압박도 하면서 진실을 털어놓도록 해보려고 하지만 둘은 서로를 모르는 사이라 잡아뗍니다.
결국, 둘을 대면시킨 날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애틋하게 바라보지만 진실은 감춥니다.
그 후 첸니엔은 대입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북경대에 합격했습니다.
엄마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형사는 첸니엔을 찾아와서 샤오 베이가 사형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줍니다.
첸니엔은 미성년자가 사형을 받은 것에 놀라 형사에게 미성년자가 아니냐 물으니 샤오 베이는 이미 성인이었다고 말해줍니다.
첸니엔은 샤오 베이의 면회를 하러 가고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합니다.
그리고 첸니엔은 만약 그때로 돌아가면 똑같이 할 수 있겠냐 묻습니다.
첸니엔은 사실대로 말하고 자수하여 다시 재판을 받습니다.
과실치사가 인정되었지만 웨이 라이와 일진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상해 입은 것이 정상참작되어
4년 형에 처해집니다.
시간이 흘러 첸니엔은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주눅 들어있는 아이와 함께 걷습니다.
그 두 사람 뒤로 샤오 베이가 따라 걷습니다.
이 영화에서 첸니엔을 사랑하는 사람은 딱 두 명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와 샤오 베이입니다.
어머니는 율법주의자나 바리사이와 같습니다.
첸니엔을 사랑하지만 그를 경쟁으로 내몹니다.
어머니는 첸니엔을 사랑했지만 첸니엔이 사랑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랑의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반면 샤오 베이는 첸니엔이 자신을 위해 자수하여 감옥살이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샤오 베이는 동네 양아치였지만 첸니엔이 사랑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참사랑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더 가까운 인물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는 첸니엔의 어머니가 첸니엔을 더 사랑하고 양아치는 양아치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각으로는 사랑의 율법을 완성한 인물은 샤오 베이입니다.
참사랑은 사랑으로 내가 의로워지려는 것을 넘어서서 상대까지 의로워지게 만듭니다.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늘 복음의 결론 부분은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참사랑은 사랑하게 만듭니다.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유다 지도자들의 의로움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랑을 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9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마태오 5,17-19
코린토 2서 3,4-11
또 다른 코린토 교회
바오로 사도가 유난히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던 도시 코린토는 참으로 특별한 도시였습니다.
코린토는 오늘날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서남쪽으로 89km 떨어진 도시였으며, 당시 잘 나가던 항구도시였습니다.
동방에 자리 잡은 로마 제국의 식민도시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행정과 경제면에서 활력이 넘쳤습니다.
사람들의 왕래도 많았고 국가 간의 무역거래도 활발했습니다.
당연히 경제적 풍요와 번성도 누렸겠지요.
동시에 문제도 많았습니다.
돈의 흐름이 많은 곳이었기에 부정부패와 착취, 윤리적 타락과 인간 품위의 실추가 뒤따랐습니다.
당시 코린토 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이런 말까지 나돌았습니다.
“신사는 코린토로 가는 배를 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자연스레 초세기 교회 안에도 반영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새 출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새 영세자들은 과거의 악습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과거의 달콤했던 유혹, 특히 우상숭배와 단절하지 못했습니다.
초대교회 성장을 위한 중요한 교두보였던 코린토 교회의 중요성을 눈 여겨 보았던 바오로 사도는
애증(愛憎)의 마음으로 사목서한을 보냅니다.
때로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았지만, 동시에 강력한 경고와 훈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코린토 1서가 당시 코린토 교회에 생긴 복잡하고 문제들과 다양한 도전과 문제들에 대한 세부적인 사목지침을 내린 사목 서한의 성격을 띠고 있다면,
코린토 2서는 바오로 사도가 코린코 신자들에게 보낸 화해의 편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서한들을 통해 우리는 초대 교회 신자들을 향한 바오로 사도의 불타는 사랑과 강력한 구원의지, 한없는 측은지심과 깊은 연민의 마음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께서 코린토 2서를 통해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코린토 2서 2장 6절)
어찌 보니 오늘 우리 대한민국 사회, 그리고 한국 교회가
또 다른 코린토 교회처럼 느껴지는 것은 저 혼자 생각일까요?
주님 보시기에, 바오로 사도 보시기에,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 보시기에 오늘 우리 한국 사회와 교회는 무척이나 걱정되는 측면이 많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늘 뉴스를 보다가 ‘지옥고’라는 가슴 아픈 대한민국만의 신조어를 들었습니다.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의 준말이랍니다.
현재 3분의 1이나 되는 우리나라 청년들이 ‘지옥고’에서 생활하고 있답니다.
겨우겨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월 120만원 남짓의 수입으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지옥 같은 현실을 견뎌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새 정부는 이런 우리 청년들의 현실을 잘 파악하고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이 믿겨지지 않은 지옥 같은 현실을 조금이나마 경감시켜주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단돈 일원이라도 일자리 창출을 위해 쓰겠다며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추경예산에 대한 청사진을 발표했건만,
참으로 후안무치한 집단들의 ‘반대만을 위한 반대’로 발목이 잡혀있는 상황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또 어떻습니까?
이미 지나치게 중산층화된 우리 교회입니다.
위풍당당하고 럭셔리한 외형 앞에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이 들어설 자리가 점점 축소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회 현실을 도외시한 채 ‘억억’ 소리 나는 대대적인 성전, 성지, 수도원·수녀원 신축, 리모델링 공사 앞에, 없이 사는 관계로 조금도 동참할 수 없는
가난한 신자들은 입지가 더욱 위축되고 있습니다.
틈만 나면 스스럼없이 성전신축기금이요 후원금 이야기를 늘어놓는 교회에 가난한 신자들이 어찌 마음 편히 드나들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서민경제가 최악의 밑바닥 상태인데, 사지(死地)로 내몰린 자영업자들이 막다른 골목에서 방황하고 있는 시대인데, 교회조차 그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는 못할망정 돈 이야기를 퍼붓는다면,
이게 그 옛날 타락했던 코린토 교회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국민 대다수의 간절한 염원은 뒷전인 채 ‘반대만을 위한 반대’로 서민들의 스트레스 지수를 높이는 집단들의 심각한 자기 성찰과 회개를 촉구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이웃들의 하소연을 외면한 채 외연 확장과 자기만족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교회의 진지한 자기반성과 새 출발을 기원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6월 9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을 통하여 율법이 완성됨을 보여 주십니다.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 유명한 산상 수훈 대목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도 초기에 이루어진 가르침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키기 전일 터인데, 예수님은 앞으로 당신에 대해 일어날 경계와 의혹을 미리 내다보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시지 않으셨지요.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느님 말씀의 완성이시니까요. 예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진 율법을 몸소 말씀과 실천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분의 생애가 곧 사랑의 완성입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하늘 나라의 도래는 이스라엘의 희망입니다. 처참했던 유배의 기억과 식민지 현실이 메시아와 함께 이루어질 하늘 나라를 꿈꾸게 했지요. 예수님은 그런 구약 백성의 꿈과 당신의 꿈이 다르지 않음을 말씀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 말씀을 경외하여 지키며 전하는 이는 하늘 나라에 속한, 하늘 나라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율법에서 성령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합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2코린 3,6)
돌판에 문자로 새겨진 율법이 이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영혼에 새겨집니다. 새 계약은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지지요.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는 뜨거운 사랑의 새 포도주, 곧 성령이십니다.
문자에만 집착하다 보면 형식주의에 빠지기 쉽지요. 숙고 없는 형식주의는 하느님의 말씀을 메뉴얼로 둔갑시켜 영혼이 결여된 의무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이쯤 되면 율법의 본질인 사랑의 정신이 오히려 불편해지지요. 이미 형식이 제도와 톱니처럼 맞물려 잘 굴러가니 굳이 정신까지 되짚어 소환할 필요성을 못 느끼니까요.
하지만 성령은 끊임없이 신앙의 정수를 건드리시고 일깨우십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떤 지향으로 하는지 묻고 또 물으시지요. 어떤 계명을 준수하기에 앞서 그 안에 사랑을 담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자격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2코린 3,5-6)
이제 성령께서 율법의 조항을 넘어 하느님 나라를 누리고 선포하는 자격을 부여하십니다. 어떤 신분이건 성령께서 거하시는 영혼이 새 계약의 일꾼이지요. 그는 문자로 새겨진 메뉴얼을 따르기보다 영혼 깊이 각인된 사랑의 인장을 따라 움직입니다. 사랑이 새 일꾼의 표징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계명을 무력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라고 하셨지요. 율법의 정신인 사랑이 계명과 별개일 수 없으니까요. 이 말씀이 아버지의 사랑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율법을 경시하거나 폐지하지 않으신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세워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어느새 우리 몸에 배여 좋은 습관이 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하나하나 깨어서 의식하며, 그 안에 더 따뜻하고 더 정성어린 사랑을 담뿍 담아 실천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계명은 문자적 메뉴얼이 아니라 사랑의 지침이니, 우리의 작고 소박한 사랑 안에서도 주님의 계명이 완성될 것입니다. 함께 사랑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