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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래
사실주의는 하늘을 노래한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다. 상징주의는 땅으로 내려온 사실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생겨났으며 다시 하늘을 지향하되 더 높고 순수하고 고도의 지적인 것을 지향
상징주의는 1880년대 프랑스 문학운동에서 시작했으며, 1886년 프랑스의 신문 < 피가로 Le Figaro>에서 그리스 태생의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장 모레아스(Jean Moréas)의 선언문이 출판되면서 알려졌습니다. 서유럽 문화를 지배하게 된 합리주의와 유물론에 맞서 모레아스는 자연 세계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보다 순수한 주관성과 사상적 표현의 타당성을 선언했습니다. 현실은 자연을 복제하기보다는 평행하기 때문에 시를 통해 가장 잘 표현된다는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 (Stéphane Mallarme)의 확신을 통합한 이 철학은 상징주의 운동의 중심 교리가 되었습니다. 말라 르메의 말에 따르면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시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의 4분의 3을 억압하는 것입니다. 암시, 그것이 바로 꿈입니다. "
스테판 말라르메
알베르 오리에의 상징주의 선언
상징주의 이론을 세운 프랑스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알베르 오리에(1865~1892)는 고흐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봤던 인물이다. 오리에는 1886년 발표한 상징주의 선언에서 “이상주의적인 관념(Ideiste)을 그리며, 상징을 통해 아이디어를 표현하며, 합성적이며, 주관적이며, 결과적으로 장식적인 내부 세계를 시각과 기호를 통해 표현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1) Idéiste(관념), 관념을 표현해야 하며
2) 관념을 형태로 표현하기 때문에 상징적이어야 하며
3) 이러한 형태와 기호를 표현하기 때문에 종합적이어야 한다 .
4) 대상이 인식한 관념의 표시일 뿐이므로 주관적
5) 결과적으로 장식적이기도 하다
장식 그림은 동시에 예술이기 때문에 종합적이고, 상징적이고, 관념적이다.
알베르 오리에 <회화에서의 상징주의- 폴 고갱>
상징주의 - - ‘눈’보다는 ‘상상력’ 인간 내면을 그리다
: 견자, 뉘앙스, 나비파, 오컬트, 신비주의, 데카당스, 데포르마시옹,심미주의, 아르누보, 분리파 -
‘느껴진 실재’ 중시하고 재현 아닌 ‘암시적’으로 표현
꿈·신화·환상 등 주제…모로·클림트·뭉크 등 대표적
'관념에 감각적 형태’를 입히다
대상을 단순화하고 형태를 변형·왜곡
상징주의(象徵主義)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타난 예술 사조이다. 자연주의나 고답파(高踏派)에 대해서, 주관을 강조하고 정조(情調)를 상징화하여 표현하는 것을 주안(主眼)으로 했다. 상징주의는 고답파를 계승한 것이다.
고답파(高踏派, 프랑스어: parnassiens)는 1860년대 프랑스에서 생겨난 시인의 유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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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답파는 낭만주의 감정과 주관적 색채가 짙은 시에 반대하여, 인지적인 관찰과 과학적인 객관성을 존중하고 형식의 완벽을 목표로 하였다.
상징주의는《악의 꽃》의 보들레르를 비롯하여, 베를렌, 랭보 등이 대표적인 시인이며, 마테를링크, 릴케, 예이츠, 와일드 등 20세기의 주요한 문학자는 여기에서 탄생되었다.
문학
문학의 상징주의는 원조 보들레르 이후 두 파로 분파.
1)지성파 상징주의- (말라르메) 지적인 유추, 상징적 수법, 언어의 순수성 견고, 난해시의 원조 , (발레리)20세기 최고의 지성적 상징주의 완성, 최고의 정신적 우월성을 지닌 만능의 인간, 만족을 모르는 탐구정신
2) 감성파 상징주의 - . 베를렌과 랭보가 대표적
"무엇보다 먼저 음악을/ 그러기 위해 가장 어렴풋하고 용해하기 쉬운 / 허공 속에서 아무런 구애도 없는 / 기수각을 택하라"(베를렌 시작법)
상징주의의 구조
두개로 쪼개진 걸 하나로 맞추는 것, 비교하기
달, 다리, 탑, 창 하늘, 등
해석 예) 계시와 은폐, 보들레르의 항해, 베를렌의 비올롱 소리 닮은 북풍 말라르메의 하늘색, 멜빌의 백경 등.
상징주의는 그 이념성보다는 기교로서 널리 확대 심화 시에서는 에드거 앨런 포, 릴케 등, 소설로서는 멜빌 앙드레 지드, 혜세, 포크너 등, 드라마에서는 입센, 유진 오닐, 테니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 등
*애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1849) 독립군 참여 아버지와 유랑극단 어머니 사이에 출생 대학 중퇴, 입대, 제대 후 웨스트포인트 입학, 퇴교 온갖 고초 속 창작. 추상화, 이상화, 평균화가 아닌 한 시대의 갈등과 역동성을 변증법적으로 통일시켜 형상화하는 기교
문학에서 자연주의 이후는 상당한 혼잡이 초래된다. 이를테면 자연주의 문학에 대한 각양 각색의 반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발언을 한 것이 상징주의라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자연주의의 과학적 결정론(科學的 決定論)에 반대하여 상상과 몽환과 상징을 강조하였고 고체와 보들레르를 선구로 삼았다.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말라르메를 꼽을 수 있고 위스망, 베르아랭, 마테를링크, 랭보 등을 지적할 수 있다.
불문학자 A.티보데는 상징파의 새로운 바람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지적했다.
1. 자유시: 딱딱하고 전통적인 양식을 탈피해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시의 조류를 뜻한다.
2. 순수시: 산문적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시적인 시를 지향하며, 바그너의 영향 아래 말라르메를 필두로 한 순수시는 발레리에 이르러 완성된 것으로 평가 받는다.
3. 문학적 혁신과 발전의 개념: 상징파는 이전 세대가 수립해놓은 문학개념을 부정하는 권리와 의무를 처음으로 젊은 세대에게 인정하기 시작하며 이를 기준으로 ‘전통적 문학’과 ‘전위문학'이 나누어지게 되었다.
한국에서 상징주의는 1920년부터 1924년까지 5년간은 자연주의와 더불어 문예사상 지배적인 조류였는데, 이들 모두 창조파에 기원하는 것이었다. 곧 <창조> 1호에 김동인의 자연주의적 소설 <약한자의 슬픔>이 실렸을 때 시에서는 주요한이 상징파의 영향을 본따서 <불놀이> 3편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또한 1921년에는 황석우의 대표적 상징시인 <벽모(碧毛)의 묘(猫)>가 <폐허(廢墟)>에 발표되었고, 변영로는 <상징적으로 살자>(1922)라는 시론을 써냈고 그의 시도 언어의 기교를 상징성에 두었다.
미술
미술에서 상징주의는 상징주의 시인의 영향 아래 조금 늦게 나타난 반사실주의적인 경향을 지향했으나, 문예의 경우처럼 명확한 주장이나 운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직접적으로는 비평가 오리에(Georges Albert Aurier, 1865∼1892)의 논평 <회화에 있어서의 상징주의>(1891)에서 고갱을 중심으로 한 퐁 타방 파(이 파는 오리에의 논평에 의해 종합주의라고도 불리었다)와 고갱이 타히티로 떠난 뒤 오리에의 주장에 가까운 나비파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후의 논평에서는 고갱 등의 음악적·장식적인 구성을 목표로 한 작품보다도 도리어 신비적인 주제를 취급하는 작품을 포함한다. 퓌비스 드샤반느, 르동, 귀스타브 모로, 카리에르, 앙소르, 클림트 등이 대표자로 간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