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가장 큰 기념일은 1월 26일 ‘호주의 날’(Australia Day)과 4월 25일 ‘안작의 날’(ANZAC Day)이다. 호주의 날은 1788년 1월 26일 지금의 록스 지역에 영국 국기를 게양한 날이고, 안작의 날은 1915년 4월 25일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 갈리폴리 전투의 ANZAC을 기리는 날이다. 4월 25일은 모든 전쟁의 헌신과 희생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호주 원주민과 갈등이 있는 '호주의 날'보다 더 통일된 국경일로 간주된다. '안작의 날'은 한국의 현충일과 유사한 날이지만, 광복절과 같이 지키고 있다. 한국은 기념일을 '절'과 '일'과 '날'로 나눈다. 5대 국경일은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과 '한글날'이다. 2006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한글날'이 국경일에 포함되었다. 한글을 기념하는 한글날의 특성상 한자인 절(節) 대신 '날'을 쓴다. 성탄절이란 용어는 기독교 신자들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절'이라고 부르지만, 공식적인 명칭은 '기독탄신일'이다.
1. 안작이란?
ANZAC(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은 '호주.뉴질랜드 연합군'이란 뜻이다. 1900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던 호주는 1901년 1월 1일 ‘Australia’로 독립은 했지만, 국민의 대부분은 영국계로서 영국을 ‘어머니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영연방 국가의 젊은이들은 '어머니 나라’를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참전하였다. 이집트’에서 훈련 받은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이 연합하여 '안작(ANZAC)'이란 이름으로 1915년 4월 25일 갈리폴리(Gallipoli) 반도로 투입되었다. ANZAC은 1915년 4월 25일 캄캄한 어둠의 바다를 뚫고 이집트를 떠나 갈리폴리로 향했다. 해가 뜨기 전 새벽 미명에 침투하고자 했다. 하지만 ANZAC의 상륙을 예상한 터키군은 해안가 언덕에 진지를 구축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상륙지역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평편한 해변이 아니라 언덕이었다. 언덕 위에서 ANZAC를 향한 터키군의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져 내렸다. 안작은 상륙도 하기 전에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악전고투 끝에 상륙은 했지만, 전투는 참호전이 되어 전진할 수가 없었다. 결국, 호주군 8709명, 뉴질랜드군 2721명이 목숨을 잃고 그해 12월에 연합군은 철수했다.
2. 안작정신
ANZAC 정신은 호주와 뉴질랜드의 국가 정체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신으로, 병사들이 제1차 세계대전 중 1915년에 '갈리폴리'에서 보여준 용기와 희생의 태도에서 유래한다. 갈리폴리 전투는 ‘실패한 전투’가 아니라, 호주인의 안작정신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호주에서 더 많은 숫자가 전쟁에 지원했다. 당시 호주는 '정규군'이 없고 모두 '지원병'이었다. 500만 정도의 인구에서 30만 명이 전쟁에 참전했고, 이중 6만여명이 전사하고 15만 6천명이 부상당했다. 인구 비율로 본다면, 1차 대전 때 보여 주었던 호주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1927년 4월 25일을 'ANZAC Day'로 정하였다. 지금은 안작 뿐 아니라 인류평화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자신을 던졌던 모두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다. '재향군인회'(RSL) 클럽에서는 매일 오후 6시가 되면 기립하여 1분간 전몰용사와 순국선열을 향한 묵념을 한다. 묵념이 끝나면 모두 이렇게 외친다. “Lest we forget.” 이들의 피와 땀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순간'이다. 안적 정신은 호주와 뉴질랜드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3. 밀알정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적인 원리를 사용하셨다. 사람들은 씨앗이 싹이 트고 식물을 생산하며 그 과정에서 많은 새로운 씨앗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씨앗이 땅에 묻혀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 알의 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고, 많은 열매는 성도들의 부활의 생명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죽어야만 사는 ‘복음의 역설’이다. ‘역설’이란 표면적으로는 모순되거나 부조리한 것 같지만 그 표면적인 진술 너머에서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 수사법이다. 약한 중에 강해질 것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진정한 종이 되어야 한다. 섬김을 받으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져야 한다. ‘복음의 역설’은 육을 중심으로 보면 모순이지만, 영을 중심으로 보면 진리이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모순이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진리이다. 세상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모순이지만, 하늘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진리이다. 육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다. 영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인간은 얼마만큼 강해질 수 있는가? 자기를 부인한 그만큼 강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