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610. 묵상글 (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 행복 점검표. 등 )
----------------------------------------------------
240610.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행복 점검표
무의식적으로는 누구나 행복하고 싶겠지만
행복 의지가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고,
행복이라는 것을 포기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의식적으로는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어떻게든 행복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행복 의지가 있는지 그것도 적극적인 의지가 있는지
점검하는 점검표를 한 번 만들어봤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행복 문제로 고민한 적이 적어도 한번은 있다.
-나는 행복을 주제로 하는 강의를 들으려고 일부러 찾아간 적이 있다.
-나는 요즘 유튜브를 볼 때 주로 행복에 도움 되는 것을 찾아 듣는다.
-나는 행복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영적 동반자 또는 지도자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행복론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나의 행복론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매일 나의 행복을 점검한다.
(아마 이 강론의 제목을 보고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행복 의지가 있고,
제목을 보고도 읽고 싶은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 사람은
의지는 물론 관심도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행복하려면 진정 행복 점검이 필요합니다.
제가 옛날에 원불교 교무님과 대화하다가 아주 좋은 것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원불교에는 유무념(有無念) 점검표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옛날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훈계하신 뒤 ‘이것을 꼭 유념해라’라고 당부하고,
그래서 어른들 말씀을 허투루 듣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유념하며 살았지요.
그것처럼 원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유무념 점검표를 만들고는
유념할 것들을 매일같이 점검하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않기로 했는데 오늘 나는 그것에 유념했는지, 무념했는지.
뒷담화하지 않기로 했는데 오늘 나는 그것에 유념했는지, 무념했는지 식으로.
그래서 이렇게 유무념 점검표를 한 달 지나서 보고 한해의 끝에서 보면
내가 하루하루를, 한 달을, 한해를 잘살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겠지요?
저로 말하면 저의 인생 문제로 한 10년 고민을 세게 했고,
그 결과 저는 저의 행복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저의 행복을 점검하는 행복 점검표는 없지만,
이 행복론이 중요한 때마다 불행해지지 않도록 저를 붙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문제로 불행해지려고 할 때 그때마다 이러면 안 되지 하고 일어서게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행복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데
저의 행복론은 주님의 이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가난해도 행복하고 가난하기에 행복한 것이 참행복입니다.
가난해도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은 부유하면 더 행복하고,
가난하건 부유하건 무조건 곧 조건 없이 행복할 것입니다.
조건에 좌우되는 행복은 참행복이 아닙니다.
돈이라는 조건,
명예라는 조건,
외모라는 조건
학벌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결혼하면 그 결혼은 백이면 백 다 불행하잖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가난해도, 슬퍼도, 모욕과 박해를 당해도 행복하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제가 무조건 행복한 비결입니다.
여러분도 행복 비결 곧 여러분의 행복론을 가지시기를,
행복 점검표를 가지시기를 바라고 비는 오늘 저입니다.
----------------------------------------------------
240610.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유명한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알고 계신 분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두 수도승이 길을 가다가 폭우로 개울의 물이 많아진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개울을 넘어갈 수 있도록 놓인 돌이 잠겨 있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개울 앞에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지요. 그때 두 수도승 중의 한 명이 이 여인을 업고 개울을 걸어 넘어갔습니다.
그 후 두 수도승은 침묵 속에서 발걸음을 계속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 다른 수도승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엽니다.
“왜 그 여인을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넜는가? 우리 수도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러자 여인을 업고 개울을 건넜던 수도자가 말합니다.
“나는 몇 시간 전에 그 여인을 내려놓았는데, 자네는 아직도 그녀를 업고 있는가?”
우리 역시 이 수도자처럼 상황을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또 내려놓으려는 의지도 갖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마음속에 짊어지고 다니는 과거의 짐이 또 얼마나 무겁습니까?
과거는 현재를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를 과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살면서 미래를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나쁜 기억은 과감하게 내려놓을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의 기억력은 하루가 지나면 64%를 잃어버리고, 일주일이 지나면 98%를 잃어버릴 정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기억에 남는 것은 계속 되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되놰야 할까요?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을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억력은 금방 이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행복 선언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들은 과거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고 있기에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계속 되뇌고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좇으며 세속에 대한 욕망으로 계속 되뇌고 있다면, 결국 하느님 나라는 보지 못하고 불행한 삶만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사랑이란 외로운 두 영혼이 지켜주고, 보듬어주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이다(라이너 마리아 릴케).
----------------------------------------------------
240610.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오늘 <복음>은 “참 행복”에 대한 선언입니다. “행복하여라”(μακαριοι)는 용어는 <성경>에서는 단순히 인간의 행복을 말한다기보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 강조를 둡니다. 특히, 이 용어는 주님의 길을 걸으며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선언됩니다. 또한, ‘행복한 사람, 복된 사람'은 어떤 특정 상황이나 특정 태도가 지니는 가치 기준을 가리는데, 여기 “참 행복”에서는 영적 가난, 슬픔, 온유, 자비, 깨끗한 마음, 의로움 등 인간적 특정한 상황에서의 특정한 태도를 강조합니다. 결국, ‘참 행복’은 ‘복음적 인간’, ‘복된 인간’이 되는 방식에 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우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한 마디로,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된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4,10) 하셨으니, 회개한 이들이야말로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가난한 이들입니다. 비록 세상 안에서는 부유하지 못할지라도, 하느님 안에서는 부유하게 된 이들입니다.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이들은 ‘슬퍼할 줄을 아는 이들’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가슴이 찔린 까닭입니다.
이들은 ‘온유한 이들’입니다.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진 까닭입니다.
이들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이들’입니다.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인 까닭입니다.
이들은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이들’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은 까닭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깨끗한 이들’입니다.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이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입니다. 당신 손이 이끄는 까닭입니다.
이들은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들’입니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된 까닭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주님 앞에 있기에 강해지기보다는 약해질 줄을 알고, 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무력해질 줄을 알고,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을 줄을 아는 이들입니다. 주님 면전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하고, 자신이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님 되시도록 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참 제자들입니다. 자신이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옳고도 지는 것이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참 행복”을 따라 사는 이들이 참으로 복된 이들입니다. 참 제자들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 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40610.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하여라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참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하나가 채워지면 또 하나가 채워지길 원하여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서 헤매게 됩니다. 참된 행복은 천상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이 곧 행복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을 선언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그리하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과연 어느 사람으로 행복한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의 가난은 ‘주고 또 주고 더 주고 싶은데 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슬퍼한다는 것은 ‘공명’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어떠한 처지나 환경, 여건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친절과 너그러움으로 나타납니다. 의로움은 하느님의 공정입니다. 그러나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사랑이 정의를 포용합니다. 그래서 의로움은 사랑에서 나온 의로움이어야 합니다. 자비는 사랑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몽땅을 내어주는 베푸는 사랑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함, 완전함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고쳐야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평화는 세상이 주는 안전함에서 오는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함에서 오는 내면의 평화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한 사람은 목숨을 바치면서도 하늘의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박해나 모욕도 달게 받으면서 그 자체가 하느님을 증언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사도들은 최고 의회에 끌려가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하여 기뻐하였습니다(사도5,41).
예수님께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이 세상에서의 막연한 기대를 접을 수 있고 이 세상에서의 고달픔과 시련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곡식 단 들고 올 때 춤추며 노래하리라” 했던 말씀이 나에게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지금 내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내 안에 모시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모시고도 두 마음을 품게 되면 참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행복을 어디서 찾습니까? 세상의 풍요 안에서 찾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결국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차지한 사람은 비록 지금 세상의 풍요를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모두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610.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 배달하며 어렵게 살던 학생이 성공하여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제게 인상적인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시간을 보내면 앞으로 남은 날들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보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의 나이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시간을 보내면 앞으로 남은 날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보낼 수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간단한 말인데,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학생들도 강의를 들으면서 눈빛이 반짝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아주 간단하면서도, 쉬운 성공의 방정식 같았습니다. 학생이 예습과 복습을 하고, 책을 가까이하는 것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로하고 오락실과 컴퓨터 게임을 가까이하고, 놀기에 여념이 없으면 학생의 앞날에 해야 할 일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수도자가 기도하고, 정결을 지키며,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로하고 세상의 일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수도자의 앞날에는 악의 유혹이 기다릴 것입니다.
1997년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를 겪었습니다.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기업이 도산하였고, 구조조정을 겪었습니다. 국가의 신용도는 떨어졌고, 외환위기를 겪었고, 수많은 실업자가 생겼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해야 할 일을 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했습니다. 국민소득이 30,000불이 넘었다고 축배를 들었습니다. 무리하게 해외에 투자하였고, 해외 여행하면서 분에 넘치는 소비를 하였습니다. OECD에 가입했다고 좋아했습니다. 경제의 여러 분야에서 빨간불이 들어왔는데도 외면했습니다. 국가부도의 위기를 겪으면서 대한민국과 국민은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경쟁력 있는 기업을 헐값에 외국 기업에 넘겨야 했습니다. 20%가 넘는 이자를 감수하면서 대출받아야 했습니다. 국민은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아껴 쓰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저도 대출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의 지낼 수 있도록 전세를 마련했습니다. 27년 전의 일입니다.
교회에 위기가 올 때가 있습니다. 역시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도 빨간불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지망하는 성소자가 계속 줄고 있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 자도 줄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다가오는 도전과 위기를 외면했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시대의 징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에 따른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식별해야 합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늘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낡은 것이 있다면 새롭게 바꿀 수 있는 과단성이 있어야 합니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리면 안 되듯이 교회가 꼭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가치들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말씀과 예배, 나눔과 희생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가정에서는 기도와 대화를 하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하느님께서 참된 행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비움’의 영성입니다. 우리를 참된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재물에 대한 ‘탐욕’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언제나 교회가 부와 권력에 취했을 때였습니다. 교회가 나눔과 비움을 실천할 때는 언제나 기쁨과 행복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평화를 위해 연대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받는 박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
240610.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복된 것에 대해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내용을 우리는 ‘진복팔단’이라고 부릅니다.
이 모든 복의 내용을 이야기하자면 몇 페이지의 지면을 사용해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일곱 번째인 ‘평화를 이루는 사람’에 대해 나누려 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아니, 평화를 이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는 것을 들려주셨습니다.
즉 주님의 평화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평화입니다.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평화이며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는 평화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를 주님께서는 몸소 제자들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절망이 있는 곳에서 희망을 이야기하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고통이 있는 곳에서 기쁨의 기도를 바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으로? 믿음과 기도로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 닮아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하늘에서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
용서가 용서를
사랑이 사랑을 낳습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를 베풀고
사랑받은 사람이 사랑을 베풀 줄 압니다.
아마도 위의 말을 처음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위의 말은 아주 당연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저는 위의 말에 아주 깊은 자기 통찰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기 모습을 뿌리까지 본 사람만이 용서가 용서를 낳게 하고 사랑이 사랑을 낳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서받았다고 해서 모두가 용서를 베푸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같은 사랑을 모두가 베푸는 것도 아닙니다.
그 안에서 자기 모습을 바라본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바라보는 내면의 통찰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한 통찰은 내가 나를 바꾸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용서받음이 새로운 용서가 되기를, 사랑이 받음이 새로운 사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내가 내 못난 모습을 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
240610.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행복의 제자리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늘나라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 님한테서.”(시편121,1-2)
어제 친지로부터 받은 짧막한 카톡 글귀를 잊지 못합니다. 유명한 귀천 시를 지은 천상병 시인에게 그 어머니가 한 말이라 합니다.
“얘야, 뭘 그리 골돌히 생각하니?
그냥 살어, 그냥
별것 없다, 별것 없어”
제가 32년전 왜관 본원의 장엘마르 원장님을 찾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물었을 때 빙그레 웃으며 하신 말씀에 순간 자유로워짐을 느낀 말마디가 있습니다.
“그냥 살면 되!”
어제 형제의 퇴회 소식에 순간적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텅빈 공허의 체험이었습니다. 여기 요셉수도원에서 정주생활한지 36년인데 텅빈 하늘에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뭐 보이는 것도 없고 잡히는 것도 없고, “아, 이래서 수도원 나가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후 노모와 방문한 자매에게 이런 체험을 나눴을 때 즉각적인 답변도 잊지 못합니다.
“밖에서도 그래요. 어디나 그래요. 별것 없습니다.”
이래서 사막교부들은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을 만나야 할 하느님 나라 꽃자리입니다. 그 어디든 뿌리 내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거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입니다. 제 행복기도시 일부도 생각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6월의 초목이 저리도 푸르게 빛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땅속 깊인 뻗은 뿌리들 덕분입니다. 하느님께 뿌리 내린, 보이지 않는 믿음의 뿌리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뿌리내리지 못하면 어디서나 표류하는 두렵고 불안한 삶의 연속일 것입니다. 천상병 시인의 절친인 구상 시인의 유명한 “꽃자리”라는 시도 기억할 것입니다. 두분 다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나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고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고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바로 참행복을 살아야 할 꽃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산상설교의 참행복 선언이 참행복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모세의 십계명을 포함하면서 그를 훨씬 뛰어넘는 참행복입니다.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있는 하늘 나라의 행복이요 끝없이 열려있는 탐구대상의 참행복입니다. 종파를 초월해 참영성, 참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영성가들이 열렬히 사랑했던 참행복입니다. 특히 인도의 성자라 일컫는 간디가 평생 참 좋아했고 살려고 노력했던 또 살았던 참행복입니다. 다음 내용을 묵상하며 내 영적상태를, 성덕수준을 진단해보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주님의 기도가 예수님의 가난하고 단순한 삶의 요약이듯 산상설교의 참행복은 예수님의 초상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평생 추구했던 참행복이요 이 참행복의 거울에 비춰보면 우리의 영적수준은 언제나 초보자 수준에 머물고 있는 듯이 생각됩니다. 이런 참행복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진짜 신자들입니다.
모세의 십계명과 예수님의 참행복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십계명을 포함하나 이를 훨씬 능가하는 끝없이 열려 있는 참행복의 비결입니다. 십계명의 준수로 좋은 신자는 되겠지만 정말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참행복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길뿐입니다. 참행복의 성인들의 공통점은 하느님 배경에, 하느님께 깊이 신망애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뿌리 내리느냐에 참행복이 달려 있습니다. 보이는 세상 것들이 아닌 하느님께 깊이 뿌리 내린 참행복한 성인들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듯 하나 하느님께 깊이 뿌리 내린 참 부유하고 행복하고 자유로운 자들입니다. 이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도 나오는 것입니다. 아주 예전 부활대축일 다음날 엠마오 산보를 떠나고 혼자 남아 있을 때 써놓고 오랫동안 위로를 받았던 “민들레꽃”이란 짧은 시편 하나도 생각납니다.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다”<2000.4.24>
외관상 가난해 보이지만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부자도, 더 큰 자유인도, 더 큰 행복한 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눈만 열리면 어디나 뿌리내릴 꽃자리 참행복의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누가 찾아줄 수 없는 각자 하루하루 날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해 평생 찾아야 할 참행복의 하늘 나라입니다. 결코 값싼 참행복의 하느님 나라는 없습니다. 말이야 “별것없다, 그냥 살어!” 평범한 말같지만 깊은 내공이 깔려있는 참행복의 하느님께 알게 모르게 깊이 뿌리 내린자의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참행복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요 이에 앞서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당신을 찾는 엘리야에 앞서 가시며 그의 필요를 채워주시니 가난한 듯 하나 참 부자, 참 행복한 자가 엘리야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시니 피신중의 그 불안한 자리도 안정과 평화의 꽃자리가 됩니다. 바로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까마귀들이 그에게 아침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고,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다. 그리고 그는 시내에서 물을 마셨다.”
문득 논어의 <덕불고 필유인(德不孤 必有隣>,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좋은 이웃이 생긴다’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진정 하느님을 찾는 의인들 곁에는 까마귀들로 상징되는 주님의 천사같은 사람들의 도움이 늘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의 계신 곳에 엘리야가 있으니 참행복의 예언자 엘리야는 우리 믿는 이들의 롤모델이기도 합니다.
정말 수십년을 살았어도 언뜻 보기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텅빈허무의 외롭고 쓸쓸한 느낌’도 들겠지만, 잘 깊이 들여다 보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린 삶에서 샘솟는 ‘텅빈충만의 기쁨과 행복’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참행복의 주님을 마음 깊이 모시는 시간이자 주님께 깊이 신망애(信望愛)의 뿌리를 내리는 시간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아멘.
----------------------------------------------------
240610.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
서로 빼앗거나 움켜쥐지 않으며
함께 마음이 가난한
행복
서로 슬프게 하지 않으며
함께 슬퍼하는
행복
서로 거칠게 대하지 않으며
함께 온유한
행복
서로 내치거나 버리지 않으며
함께 자비로운
행복
서로 불의의 제물 삼지 않으며
함께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행복
서로 더럽히지 않으며
함께 깨끗한
행복
서로 짓밟지 않으며
함께 평화로운
행복
서로 하느님을 핑계 삼지 않으며
함께 하느님을 따르는
행복
----------------------------------------------------
240610.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하늘 나라는 덕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어울리는 곳이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는 말씀이 무슨뜻입니까? 하늘 나라는 덕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어울린다는 뜻 아닙니까? 지옥으로 가는 길이 온갖 악덕, 특히 교만으로 칠해져 있듯이,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은 모든 덕, 특히 겸손이 인도합니다. 모든 악의 뿌리는 교만이고 모든 선의 뿌리는 겸손이기 때운입니다(루카 14111 참조).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이는 높아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존재하는 모든 것에 활짝 열려 있음으로써 우리는 영혼과 의식을 더 넓힐 수 있다. 이렇게 영혼과 의식을 넓히는 분은 하느님이다. “하찮은 미물까지 변화시키는 하느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영화롭게 창조한 영혼을 변화시키지 않으랴?” 우리는 불만족을 피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신성한 모험의 출발점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사람의 영은,
“(하늘에서 내려온) 그 빛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창공을 뚫고, 하늘로 기어 올라가서, 하늘을 움직이는 성령에 도달합니다. 하늘이 운행하는 결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번성하고, 잎을 분출하지만, 영은 절대로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소용돌이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내려가서, 자신이 뿌리내리고 있는 원초적인 근원에 도달합니다.”(183)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마르 11,15-26
성전을 정화하시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다.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날이 저물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의 교훈
이른 아침에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
베드로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스승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
240610.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바이올린 장인 마틴 슐레스케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과정에서 얻은 통찰과 함께 이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는 훌륭한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는 울림이 좋은 목재를 찾으러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높은 산에 빽빽하게 자라는 나무들은 햇빛을 받으려고 빛이 들어오는 곳을 향하여 가지를 뻗칩니다.
그러다 빛을 받지 못한 가지들은 시들고 말라 죽습니다.
그러면 나무는 부담이 되는 죽은 가지를 떨구어 냅니다.
안타까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죽은 가지가 떨어져 나간 바로 그 자리는 나이테가 얇고 섬유질이 길고 단단해져 질 좋은 울림 목재가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여 죽은 부분, 우리에게 부담을 지우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악습과 악덕입니다.
이 부분은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죽어 있으면서 몸과 마음에 붙어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죽은 가지를 떨구는 나무의 지혜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가지를 떨구는 순간에는 아프고 고통스럽겠지만, 그 자리는 자신의 고집이 얇아지고, 성품이 더 단단해져 아름다운 삶의 울림을 낳는 목재가 됩니다.
모든 것을 취하지 않고, 해로운 것을 버리는 사람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마틴 슐레스케, 『울림』, 31-32면 참조).
악습과 악덕이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달콤하여 버리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또는 이것을 잘라내는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잘라내지 않기도 합니다.
달콤한 것을 버리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삶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삶이며, 그 삶은 우리를 하늘 나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