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경북에 있는 군사고등학교를 나와
졸업과 동시에 간부로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입대하는 그 시점에서 저에게는
중학교 3학년때부터 사귀어 왔던
여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의무적으로 5년이라는 긴 시간을
군복무 해야하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그 때 여자친구와 저는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를 평생의 반려자로 생각할 만큼
서로에겐 정신적 지주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여자 친구는 더 좋은 학교를 가기위해
재수를 하였고 전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하여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힘들때면 5년후의 우리의 모습을 생각했고
하루중 그녀와의 잠깐의 통화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것처럼 시원했고
가슴속에 그 무엇이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렸고
1년동안 서로를 그리워 하며 더욱더
정신적인 신뢰를 쌓아갈 쯤
그녀는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의 전화음성이
평소와는 달랐고 편지에 대한 답장도
여느때와는 틀렸습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부대 선배에게 부탁해 2박3일 특박을 낸후
그녀에게 달렸갔습니다.
그녀를 만났지만 그녀는
내 얼굴을 보지 못했고 ...
눈물만 글썽이는 것이였습니다.
전 너무 흥분해 다른 남자 생겼냐고
다짜고짜 물었고 여자친구는 아무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전 가버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건 알지만
내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내뜻과는
전혀 반대로 그녀에게 모질게 대했습니다.
한 참후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전 순간적으로 정신이 몽롱했습니다.
잠시 후 정신이 들어 왔을때
방금 전까지 그녀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엔
빈 공허함만이 남아 있습니다.
전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잡으로
달려 나갔지만 여름 장마비 속에
그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내 머리는 혼돈에 빠졌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없었습니다.
제 군생활은 엉망이 되였고
저녁이 되여서는 매일 술과
생전 피지도 못하는 담배를 피웠고
나중에는 잠을 자기 위해
수면제를 복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제 건강은 나빠졌고
결국에는 근무하다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병원에 실려간 저는 허혈증 판정을 받았고
원한다면 제대할 수도 있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서도 사회의 첫 발인
군대에서 의가사 제대하면 제 인생을
평생 포기하는 삶이 될거 같은 불안감이
제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제가 병가를 마치고 부대에 복귀하자
또 큰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저와 같이 군사 고등학교를 마치고
같은 부대에 입대한 친한 동기 한명이
한 쪽 눈을 실명한후 시력을 점점 잃어 가서
의가사 제대한다는 것이였습니다.
이 친구는 너무도 착한 나머지
선배들이 하기 싫은 용접을 하라고 하니까
생전 처음하는 용접을
눈보호대도 하지 않은채 너무 장시간을
몇 달동안 작업해서
그런 병을 얻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싫어졌습니다.
자신의 편함을 위해 한 전우의 인생을
끝마치게 만든 그 모든 사람이 미웠습니다.
친구는 제대해서 병원에 입원했지만
결국 두 눈을 잃고야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병원에 입원 했을때
한명도 찾아오지 않았던 동료와
전혀 보상을 해주지 않았던 군 당국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가 내가 남긴 말 한마디는
"내 팔자가 이런걸 어떻하냐?
그냥 살아야지." 하는 것이였습니다.
저에게는 더더욱 세상을 살아가는
그 어느 낙도 없었습니다.
여자친구의 배신보다 정말 믿었던 신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절친한 친구를 잃었다는 생각과
그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싫어졌습니다.
결국 저는 우울증으로 정신병에 다녔고
하루하루를 그저 시계보는 낙으로 살아갔습니다.
세월이 지나 어느덧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왔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새해는 없었습니다.
여느 때와 똑같이 출근해서
책상앞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사병이 편지 한통을 들고 왔습니다.
봉투에는 간신히 내 이름만
알아 볼수 있을 정도로 거의 글씨가 아니라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악필이였습니다.
궁금한 나머지 봉투를 뜯었고
그 안에는 아무 내용도 없는
카드 하나가 있었습니다.
카드 맨 위에는 "새 해 복 많이 받으셔요."라는
문구가 있었고 그 외에는
어느 글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 누군가 제에게 장난치는 줄 알고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습니다.
잠시 시간이 흘렸고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다시 쓰레기통을 뒤져 구겨져 있는
카드를 찾았습니다.
우표에 보낸곳을 살펴보니 두눈을 실명한
그 친구의 고향인 상주인 것이였습니다.
어느 덧 제 두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았습니다.
두 눈이 안 보여 엉망으로 그린
편지 봉투의 글이며 그 카드안에는
그 어느 글자도 쓰지 못했던 것입니다.
전 휴가를 내서 그 친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상주에서도 한참을 들어가
친구 집에 들어갔을때 친구 표정은
두 눈을 잃은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표정이였습니다.
마치 초등학생의 천진 난만한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그 친구와 식사를 하고
동네 구경을 하기 위해
우리는 밖에 나왔습니다.
우리는 조금 지나자 정말
멋있는 경치를 보게 되였습니다.
난 나도 모르게 그친구에게
"야 저기 정말 멋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그냥 웃고만 있습니다.
난 머슥했고 우리는 그냥 아무 말없이 걸었습니다.
조금 지나자, 저수지가 나왔습니다.
저수지에는 고기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나도 모르게 "야 고기좀 봐봐.
정말 크다. 그지?"하고 물었습니다.
이번에도 아무런 답변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미안해서 그냥 집에 들어가자고
제의했고 집에 들어와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잠든 후
아침이 되서 전 집으로 향했습니다.
터미날에서 그 친구는
지금 한의학 공부를 하고 있고
벌써 점자도 다 배워 조금만 더 공부하고
침술원을 개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버스가 왔고 전 몸을 실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전 몇 년동안
나에게 스쳐 지나간
그 수 많은 일들을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두 눈을 잃은
저 친구는 내일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데 내 몸 어느 한부분도
잃지 않은 난 지금
무얼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대에 돌아와 전 그 날부터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그 다음해에
서울에 있는 그래도 약간의 이름이 있는
4년제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취업전쟁이라는 오늘날 전 대기업에
118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지금 현재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전 아직도 그 친구와
한 달에 한 두번 정도 통화하며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의 그 카드가 제 인생에 있어서
희망을 전해주는 메시지였던 것이였습니다.
이글은 MBC라디오의 지금은 라디오시대에서 스크랩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