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는 관혜(觀惠)조사는 화엄사에 계셨으며, 당시 희랑법사(希郞法師)와
함께 화엄종사로서 쌍벽을 이루었다. 그런데 관혜조사는 후 백제의 견훤왕의
왕사가 되어 남악인 화엄사에 머물렀고, 희랑법사는 해인사에 머물면서 고려
태조의 왕사가 되었으므로 남관혜(南觀惠), 북희랑(北希郞)이라 일컬게 되었다.
관혜조사 문하에는 백제국의 고지(故地)출신인 견훤(甄萱)과 서라벌의 왕족출
신인 궁예(弓裔)가 있었다. 두 제자는 불법은 물론 학문과 무술에 능하지만
복덕(福德)이 부족하였다. 그후 견훤은 후백제(後百濟)를 세우고, 궁예는 태봉
국(泰封國)을 세우니 신라와 함께 삼국이 되었다.
그후 후백제가 망하고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관혜조사에게 국사(國師) 간청
(懇請)을 하였다. 관혜조사는 왕건 부름에 응하지 않고 끝내 사양 하시고
화엄사에 주석하면서 명성이 크케 떨쳐서 의상조사 이후 화엄원교지지(華嚴
圓敎之旨)가 크게 선양되었다.
태조 26년(943)에 왕명으로 최초로 중수함은 도선국사의 주처(主處)였던
화엄사에 왕실(王室)로서는 최대의 배려를 않끼지 않았던 것이다.
남악(南岳)의 법손(法孫)인 법량(法亮)스님이 일찍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상주치처(常主之處)인 화엄사에 오셔서 선정(禪定)을 닦더니 처음에는 석종
(石鐘)소리를 듣고 다음에는 별빛이 방안에 비춰 밝아 대낮 같이 밝기를 21일
이나 하였으며 이로서 다라니(陀羅尼) 차운총지(此云總持)를 얻어서 당시에
혜해(慧解)가 제일이라고 일컬었다. 지리산을 자신의 근본도량으로 삼고
화엄사에 살면서 때로는 구정암(九精庵)같은 한적한 곳에 노닐면서 줄곧 수행
에 힘 쓰셨던 것이다.
광종 대에는 어명을 받은 홍경선사(弘慶禪師)가 퇴락한 당우와 암자를 중수하
였고, 문종대에는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의 삼도에서 곡물을 화엄사에 헌납
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의상조사의 덕을 흠모하였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
천(義天)이 이곳에 머물렀던 것도 또한 이때였다.
대각국사는 화엄사를 참배하고 연기존자(鷰起尊者)를 기리는 찬송(讚頌)을 올
렸으니
적멸당전다승경(寂滅堂前多勝景)
길상봉상절섬애(吉祥峰上絶纖埃)
방황진일사전사(彷徨盡日思前事)
박모비풍기효대(薄暮悲風起孝臺)
적멸당 그 앞엔 승경도 많고
길상봉 높은 봉우리 티끌도 끊겼네
진종일 서성이며 지난 일 생각하니
저문날 슬픈 바람 효대에 감도네
의상조사(義湘祖師)를 흠모하는 찬송(讚頌)은
위론웅경망불통(偉論雄經罔不通)
일생옹호유심공(一生擁護有深功)
삼천의학분등후(三千義學分燈後)
원교종풍만해동(圓敎宗風滿海東)
기신론과 화엄경을 모두 통달해
일생을 옹호하신 공이 깊어라
삼천제자 저들에 법등 나눈 뒤
원교(화엄경)종풍이 해동에 가득하였네
화엄사 주지인 준소법사(俊昭法師)는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문도(門徒)로
서화엄종의 제3조인 현수(賢首)의 교관(敎觀)을 배워 화엄현풍(華嚴玄風)전
통을 계승하였다. 화엄사의 정신(精神)은 한마디로 진리(眞理)의 바다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表現) 할 길리 없는 심원(深遠)한 이념을 지닌 사찰(寺刹)
이다. 모든 것을 다 포괄하며 또 포괄된 그 하나 하나에 제 가끔의 개성(個
性)을 갖게끔 하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경지인 화엄의 세계를 이상으로
한 것이 화엄사이기에 준소법사는 화엄현풍을 잇고자 한 것이다.
인종 대는 화엄법사라는 칭호를 들었던 정인왕사(定仁王師)가 왕명으로 중
수, 명종 2년(1172)에 도선국사비 건립하였다.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스님이 증림원(證林院)에 백련사(白蓮社)을
창건하였다. 충렬왕대 원소암(圓炤庵) 중창했다.
혜심진각국사(慧諶眞覺國師)는 화엄사 증림원에 속한 오산((鰲山) 오산사
(鰲山寺 현 : 사성암(四聖庵) 있을 때는 반석(盤石) 위에 앉아 밤낮으로
선경(禪境)을 익혔고 오경(五更)이면 게송(偈頌)을 읊었는데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려 듣는 사람들이 이로써 시간을 짐작했다고 한다.
천인정명국사(天因靜明國師)는 화엄사 증림원 백련사(白蓮社)에서 수행하
면서 큰힘을 얻고 천태지관을 전해 받고 크게 깨달음 얻었다.
충숙왕 대 조형왕사(祖衡王師)에게 가람에 대한 전면적인 보수및 명산대천
의 사찰을 중수하고 불보살의 가호를 빌었다.
공민왕 대에는 적기암(赤旗庵)를 창건하였다. 고려 대에 있어서의 화엄사의
중수는 도선국사의 유지와 풍수지리에 따른 비보사찰(裨補寺刹)로 가장 그
위용을 자랑했다.
조선시대에는 화엄사를 중심으로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고, 또 국난의 위기
에는 여러 의승(義僧)이 구국(救國)의 선봉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청련조사(靑蓮祖師)께서 길상봉(吉祥峰)아래에 청련암(靑蓮庵)을 창건하였다.
세종 6년(1424년)에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었으며, 성종 때 설응
(雪凝)선사께서 선교(禪敎)을 강설(講說)했다.
비물선사(非勿禪師)는 화엄학과 불유선(佛儒仙)의 삼교(三敎)에 통달한 선사
(禪師)로서 자신의 수행은 물론 도중(徒衆)을 양성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우
렸으며, 항상 선교(禪敎)를 강설하여 많은 승속(僧俗)을 깨우쳐 주었다.
중종 15년(1520)에 숭인장노(崇仁長老)가 청련암에서 선회(禪會)를 열었고
명종17년(1562) 설응(雪凝)선사가 금정암(金井菴)을 창건했다.
벽송지엄대사(碧松智嚴大師)는 후학을 가르치는데 있어 화엄사에서 대승경
(大乘經)을 강설하여 부처님의 교설에 흠뻑 젖게 하였다. 부용영관대사(芙蓉
靈觀大師)는 화엄성지(華嚴聖地) 화엄사 주지로 살면서 원교종풍(圓敎宗風)
과 선교(禪敎)의 대가람의 위세(威勢)를 더욱 발전 계승(繼承)하였다.
서산청허대사(西山淸虛大師)는 화엄사 청련암에서 숭인장로(崇仁長老)의
권유로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5년 동안 전등록(傳燈錄), 염송(拈頌).
화엄경,능엄경(楞嚴經),반야경, 원각경(圓覺經)등의 교리를 탐구하다가 깨달
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머리를 깎았으며, 1540년(중종 35)에 일선
(一禪)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뒤 부용영관(芙蓉靈觀)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부에만 전념했다. 1549년(명종 4년) 승과에 합격
했으며,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올랐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를 버리고 등지를
돌아다니며 선수행을 금강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그리고 화엄사 창건주
인도승 연기존자께서 지리산 반야봉(般若峰) 아래에 조그만 토굴을 하나 짓
고 묘향대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선수행과 더불어 후학지도에 전념했다
선조 17년(1584)에는 해동화엄의 중흥조 부휴당선수(浮休堂善修)대사가 대
장경(大藏經)을 강설하자 수많은 고승대덕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어 이로 인하
여화엄일승 원교지교(圓頓之敎)가 세상에 다시금 일어났다. 선조 20년(1587)
에는 중관당해안(中觀堂 海眼)대사가 대장경을 강설하였고, 청매인오선사(靑
梅印悟禪師)는 화엄사 주지로 살때 명을 받들어 오대성사(五大聖師)인 연기
(鷰起)존자, 지엄(智儼)조사, 원효(元曉)성사, 의상(義湘)조사, 원측(圓測)조사
스님의 위패를 모실 조당(祖堂)을 중개(重開)하였다. 선조 24년(1591)에는 무
렴당 계훈(無染堂 戒訓)선사가 선교(禪敎)를 강설하였다.
다음 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소요(逍遙),윤눌(潤訥), 해안(海眼), 각성(覺性)
등 선교대덕(禪敎大德)이 모두 하산하여 승장(僧將)이 되어 출전 했다.
윤눌대사는 전라좌수영에서 수군통제사인 이순신장군과 함께 군사(軍師)로
수군에 참전했으며, 진주성 함락시에 훈공을 세워 나라에서는 자운대장(慈雲
大將)의 직첩을 내려서 좌수영 충무사에 동형국제(同亨國祭)하였다.
각성스님은 19세에 윤눌스님을 따라 해전에서 공을 세웠으며, 해안대사는 진
주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나라에 공헌하였으며, 설홍대사는 당시 화엄사
주지로서 정유년(丁酉年: 1597년) 11월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진주에 주둔한 병력 2천여명 대부대가 진주, 하동. 구례 방면으로 통과한다는
소식을 석주진(石柱鎭)에 모였던 육의사(六義士)들이 진(鎭)을 방어를 위하여
병력과 군량의 보충을 위해 필요하여 화엄사에 격문(檄文)을 보내 원조를 요
청하였다. 설홍대사는 승대장(僧大將)이 되어 군량 103석으로 153명의 승병
을 거느리고 석주진(石柱鎭)을 고수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무렴당 계훈스님등 98대덕(大德)이 오백여명의 잔류(殘留)한 승려들과 절을
지켯지만 이듬해인 선조 31년(1598)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화엄
사에 침입하여 모든 전각을 불태워 8원 81암자가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백여명의 대덕들은 수행의 도량을 잃어 화엄사 뒷산에 토굴을 파서
은신하면서 복구를 위해 진력 하였다.
벽암각성대사는 남한산성을 축성한 훈공으로 국일도대선사(國一道大禪師)가
되어 인조로부터 의발을 하사받았고, 인조 8년(1630)에 화엄사 중건을 시작하
여 대웅전을 비롯해 몇몇 법당, 전각을 중창하였으며 아쉽게 장육전은 중건되
지 못하고 인조14년(1636)에 끝맺었다. 인조18년(1640) 5월에는 벽암대사가
삼도도총섭(三南都摠攝)이 되었다.
대가희옥선사(待賈希玉禪師)는 남한산성축성시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겸 남
한도총섭(南漢都摠攝)이되어 벽암스님과 더불어 함게 축성사업을 마친후 방
가[邦家 : 영토(領土)와 국민(國民)과 주권(主權)을 갖춘 사회] 고국(故國)에
공(功)이 있어 팔도도승통대선사(八道都僧統大禪師)의 칭호를 받았다.
일오선사(一悟禪師)께서 인조 8년(1630)에 보적암(寶積庵)을 창건하고, 인조
14년(1636) 벽암선사가 화엄사를 중창후 문도들이 산중(山中)에 대덕인 중관
당 해안선사에게 화엄사 사적을 부탁하니 필사(筆寫)를 하셨으며, 산내암자인
용문암(龍門庵)에서 수도를 하면서 후진을 양성하셨다.
인조 25년(1647)에 백곡당처능(白谷堂處能)법사가 화엄사상을 강설하니 그 법
석이 장관이었으며, 인조 25년 丁亥年(1647)에 지리산화엄사 구층대(智異山
華嚴寺 九層臺)를 중창했다. 인조 26년 취미수초(翠微守初)대종사가 교장(敎
藏)을 하니 승려와 불자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효종 원년(1650) 예조는 화엄사를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승격하였으
며, 효종 4년(1653)에는 벽암등 50여명의 시주로 지영(智英) 등 6인의 화원
(畵員)에 의하여 괘불탱화가 조성되었다. 상월(霜月)스님은 화엄사에서 논의
하여대중이 항상 300여명이 넘었으며 수논제자(受論弟子)로 용담(龍潭)대사
가 상수(上首)였다.
숙종 18년(1692)에 백암성총(栢庵性聰)대사가 대화엄회(大華嚴會)를 설치 했
으며 숙종 25년(1699)에는 벽암대사의 문도인 계파당 성능(桂坡堂 性能)대사
가 스승의유명을 받들었다.
장육전의 중건을 발원하여 백일기도를 올린 99째되던날, 문수보살의 선몽에
의해 물 묻은 손을 밀가루 항아리에 넣어 밀가루가 묻지 않는 사람이 화주승
으로 뽑힌 스님은 10년을 공양주한 스님이 되었다.
대웅전에서 기도중 문수보살님이 "그대는 걱정말고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
게 시주를 권하라" 하여 일주문을 나선 후 화주승은 화엄사에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 가는 거지 노파를 만나게 되었고 노파는 시주를
간청하는 화주승의 정성에 감동이 되어 눈믈을 흘리며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
하고 화엄사를 향해 합장하고 대서원을 발원하며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
나서 큰 불사를 이룩하오리 문수대성이시여 ! 가호를 내리소서" 하고 물에
몸을 던진후,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둘째 공주로 태어나면서부
터 한쪽 손을 쥔채로 펴지 않았다.
5년후 공주와 화주승과 상면하여 손을 만지니 손이 펴지고 손바닥에는 장육전
이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숙종대왕은 노파의 깨끗한 원력으로 오늘의 공주(전생의 노파)을 위해 장육전
을 중창할 비용 십만냥(十萬兩)을 하사하셨고 영조(英祖)의 모친(母親)이며 후
궁(後宮)인 숙빈최씨(淑嬪崔氏)도 同參하여 숙종 28년(1702년)에 완공하였는
데 무릇 2층 70칸으로서 그 장엄함은 비길 데 없었으며 연잉군(영조)의 원당
(願堂)으로 삼고 다음 해에 삼존불과 4보살을 완성하여 칠주야동안 경찬대법
회(慶讚大法會)를 베풀어 장육전 중건불사를 회향하자 조정에서는 사액하여
각황전(覺皇殿)이라 하고, 예조는 한격 높여서 올려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
大伽藍)이라 하였으며, 또한 이때에 원통전(圓通殿)이 창건되었다.
숙종 29년(1703) 사자자 삼층 사리석탑 옆쪽으로 견성당(見性堂)과 칠성각
(七星閣)을 계파선사께서 중창했다.
숙종 32년(1706)에 명곡현안(明谷玄眼)대선사께서 선교를 강설하니 그 법석
의 계기로 선교양종대가람이 더욱 빛나 화엄연화장법계가 되었다. 숙종 34년
(1708)에 화엄종주이신 설암추붕(雪巖秋鵬)종사께서 대장경을 강설하였다.
숙종 37년(1711) 사월 북한산성의 시축에 본사의 성능(性能)대사는 팔방도승
통겸팔도도총섭(八方都僧統兼 八道都摠攝)으로서 승영(僧營)의 축성을 감독하
여 9월에 완성하였더니 교지에 가희대부팔도도총섭겸 승대장성능(嘉儀大夫八
道都摠攝兼 僧大將性能)이라하여 360주(州)의 승군사(僧軍事)를 총섭(統攝)케
하였고, 숙종39년(1713)에는 팔방도승통 홍각증계국일도대선사(八方都僧統
弘覺登階國一都大禪師)가 되었다.
숙종 44년(1718)에도 응환(應還)대사가 팔도승풍규정도승통(八道僧風糾正都
僧統)이되는 등 본사는 호국불교 내지 조선 불교중흥의 기치를 유감없이 발휘
하고 있었다.
상월새봉선사(霜月璽篈禪師)는 수행을 문자보다는 계율(戒律)과 진해(眞解)를
더욱 존중하며 화엄의 정신을 생활화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영조 24년
(1748) 선교양종도총섭국일도대선사(禪敎兩宗都摠攝國一都大禪師)가 되었으
며, 매일 일불(一佛)과 오보살(五菩薩)의 명호를 5천번, 염불을 천번하였다.
용담조관선사(龍潭慥冠禪師)는 상월스님을 수년간 모시면서 선교(禪敎)를 배우
며 수행에 전념하였다.
혜암윤장대사(惠菴玧藏大師)는 용담조관의 전발(傳鉢)의 제자로써 수행정진 하
면서 또한 강석(講席)을 열었는데 수 많은 대중이 모였다고 하므로 상월스님의
경우보다 더 성황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영조 33년(1757)에는 주지 회심(會心)대사와 처관(處寬), 학찬(學贊), 섭심
(攝心), 탁계(卓戒)스님이 대웅전을 중수하고, 삼존불의 개금과 함께 후불탱화
삼폭을 안치(安置)하였으며, 영조37년(1761)에는 주지 송운(松蕓)선사가 원통
전을 중수하였고, 영조 42년(1766) 윤헌(允軒)스님이 화엄사 구층대 중수, 영
조45년(1767)에는 자운당처관(慈雲堂處寬)선사에 의하여 각황전이 중수되었
는데 이때는 본현(本懸)의 청계사, 연곡사 및 여러 마을의 민간과 군인 그리고
남원 감로사(현 천은사)등지에서 부역하였다.
묵암최눌선사(黙庵最訥禪師)는 화엄사에서 화엄경에 심취하여 경지에 올랐으
며 화엄학에 일가를 이루어 화엄종 승려로 손꼽히고 있다. 그에게 많은 제자
가 있었음은 물론이나 그의 선(禪)은 와월교평에게, 그리고 교학(敎學)은 봉봉․
성봉 등에게 전해졌다.
영조 48년(1772) 봉암낙현(鳳巖樂賢) 장노등이 구층난야에서 경찬대법회(經
讚大法會)를 했다. 눌암식활선사(訥岩識活禪師)는 선교(禪敎)를 배우면서 수
행 정진하였으며 또한 상월(霜月)의 법손(法孫)인 혜암윤장(惠庵玧藏)의 선
법(禪法)을 이었다.
정조 2년(1778)에는 승니(僧尼)와 도유(道儒) 300여 사람이 대웅전과 각황전
등의향화(香火) 자재를 위하여 토지를 헌납 결연하였고, 정조 8년(1784) 학윤
(學贇)스님이 보적암 중수하고 다음해에 이곳에서 영송(永松),축연(竺涓)선사
가 선(禪)을 설했고 정조 19년(1795)에는 담인(曇仁)선사가 나한전을 창건하
였으며, 정조 22년(1798)에는 황악당행원(黃岳堂幸元)선사가 대웅전, 적묵당
(寂默堂)을 중수하였다.
초의의순선사(草衣意恂禪師)는 전국의 선지식(善知識)들을 찾아다니며 화엄
성지(華嚴聖地)이며 선교양종(禪敎兩宗)대가람 화엄사에서 고승대덕(高僧大
德)에게 경선(經禪)을 지도를 받고 범패(梵唄)도 익혔으며 특히 화엄사 고승대
덕께서는 차(茶)와 교(敎)와 선(禪)과 염불(念佛)이 화엄원융(華嚴圓融)하여
불이선교(不二禪敎), 다선삼매(茶禪三昧), 다염삼매(茶念三昧), 즉 화엄원융
다선교염(華嚴圓融 茶禪敎念)에 젖어 수행 정진 하시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
다..
순조 27년(1827)에는 금봉당우익(錦峰堂祐益)선사 및 랑규(朗圭)선사가 보제
루(普濟樓)를 중건하였으며 금봉선사가 팔도도승통이 되었고 이 때의 화엄
사는 담인, 황악, 금봉 세분의 공이 많았다고 한다.
헌종 2년(1836)에 금봉(錦峰)스님, 창수(暢守)스님, 취봉오한(鷲峰悟幻)스님
이 응향각(凝香閣) 및 삼전(三殿)을 중건하였고, 금봉선사께서 다음해에 내원
암(內院庵)을 창건하였다. 헌종 7년(1841)에는 금봉우익선사가 원통전을 중
수하였으며, 헌종 12년(1846) 금봉선사가 대웅전을 중수 및 후봉(嗅峰)스님이
봉천암(鳳泉庵)을 창건했다.
백파긍선선사(白坡亘璇禪師)는 율(律)과 화엄(華嚴)과 선(禪)의 정수를 모두
갖춘 거장이었으며 평소에 교유가 깊었던 추사 김정희는 초상화를 그린 뒤
그를 ‘해동의 달마’라고 격찬한 바 있다. 1840년 부터는 화엄사(華嚴寺)의 선
사 영당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수행정진 하며 좌선하다가 1852년(철종 3년)
4월 24일에 입적하였다. 세속 나이는 86세, 법랍은 75년이었다.
취봉오한 (鷲峰悟幻)대사는 범패 계승자 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1748년 영조 4년 대휘화상 작성한 범음종보에 범패 계보를 다음
과 같이 서술하고있다.
1대 국융(國融 : 세종 1418년-1450년 때 활약) => 2대 응준(應俊) => 3대 혜
운(惠雲) => 4대 천휘(天煇) => 5대 연청(演淸) => 6대 상환(尙還 : 임진왜란
1592년 이후 활약) => 7대 설호(雪湖) => 8대 운계당법민(雲溪堂法敏 : 효종
1650년~1659년 때 활약) => 9대 혜감(惠鑑) =>
화엄사의 전승자를 보면
10대 각선(覺禪)(화엄사), => 11대 계환(戒還) => 12대 홍해(洪海)
10대 대휘(大輝) => 역관(潁寬)(화엄사) => 덕홍(德洪) => 취봉오한(鷲峰悟幻)
하여 화엄사 법패 맥을 계승하면서 많은 제자를 베출한다.
헌종 13년(1847)의헌(義憲), 윤행(允行), 도실(道實)스님이 각황전 중수를 했
으며 경봉(景峰)대종사 가 보적암에서 강설 하셨다. 또한 정조, 순조, 헌종, 철
종대에도 예조에서는 계속해서 해남 대흥사의 표충사 수호전곡 유사(表充祠
守護典穀 有司) 및 찰헌관(祭獻官)에 화엄사의 행원, 우익 스님를 비롯하여 응
민(應敏),지원(智圓), 준원(俊彦)등을 임명하였으며 특히 행원은 팔도도승통,
지원은 팔도선교도총섭, 준언은 선교양종도유사가 되는 등 여전히 본사의 사
세(寺勢)는 국내 으뜸의 위치에있었다.
개운대사(開雲大師)는 조선조 후기 우리나라에 크게 득도(得道)한 선도인(仙
道人)들이 계속 배출되었다. 그들 중에 불가(佛家)의 스님으로서 선인(仙人)
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희양산 백련암에서 얻은 수다원과의 경지에 오르고 속리산 동쪽에 자리잡은
도장산(道臟山) 심원사(深源寺)로 들어가 51세가 되던 해까지 머물며 정진을
계속하여 여기서 사다함과와 아나함과를 얻었다. 1840년에 지리산으로 가서
용맹 수행정진 하여 아라한과 경지에 올랐다.
개운대사께서 들어가 수도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 반야봉 어디쯤이라
는 비의처(秘義處로 유명한 곳 금강굴이 전해오고 있다. 금강굴이 발견되는
않는 것은 굴이 발견될수 없는 절묘한 곳, 그러니까 울창한 숲에 가려진 험
한 개울을 건너고 사람이 그냥 올라설수 없는 사람키의 두배나 되는 직벽위
에 있는데, 밑에서 보면 굴위의 바위가 처마처럼 덮어 올라 서면서만 보인다
고 한다. 금강굴 주변에는 무협지에서 말하는 진법(陣法)이라는 것이 설치되
어 있기 때문에 속인의 눈에는 절대 띄지 않는다고 하며 시공이 다른 차원의
세계일 것이다.
고종 3년(1866) 주지 지선(之善)스님이 일주문 연목과 부연보수, 고종 4년
(1867)에는 초운당섭률(草雲堂攝律)선사가 문수암을 창건하였고, 고종 11년
(1869)에는 구례 현감 방효함(方孝涵)이 시주하여 각황전봉향각(覺皇殿奉香
閣)을 주지 금준(錦準)스님이 창건하였으며, 1900년에 청하(淸霞)선사께서
사리탑 옆에 있는 견성당(見性堂)에 월유선원(月遊禪院)을 개설하였고, 상원
암(上院庵) 선방을 복원 개설했을 때 경허(鏡虛)선사께서 참석하여 화엄사
상원암복설선실정완규문(華嚴寺上院庵復設禪室定完規文)을 썼다.
고종 광무(光武)5년(1901)에는 환원(幻月)선사가 보적암(寶積庵)에 선불장
(選佛場)을 베풀고 진응종사(震應宗師)는 대교(大敎)를 강설하니 한 때의 종
풍을 크게 떨쳤다.
이 해 삼월에 포월(抱月)스님 주도(主導)로 남호(南湖), 호운(浩雲), 흥주(興
珠)스님과 승속(僧俗) 60인이 구층향대(九層香臺)에서 백련사(白蓮社)를 결
사(結社)하고 원묘국사께서 화엄사 증림원 백련사를 창건하여 염불수행 발원
과 발징화상(發徵和尙)의 건봉사(乾鳳寺)에서 행하였던 미타염불만일회(彌陀
念佛萬日會)의 유풍(遺風)을 크게 떨쳐 일으켰다.
그리고 포월스님도 범패의 계승자로서 맥을 살펴보면 취봉오한(鷲峰(悟幻) =>
인암정오(忍庵正悟) => 긍암(肯庵)長老 =>포월영신(抱月永信) => 경산(鏡山)
스님, 수산(水山)스님, 진음(震音스님), 진응(振應)스님등 화엄사 법패를
전수하면서 많은 제자를 베출한다.
1909년 춘삼월에 조선불교청년회 발기를 최초로 보제루에서 전남의 화엄사,
송광사대표 27인과 경남의 통도사, 범어사, 대원사 청년대표 13인이 회집하
여 협의하였다.
일본총독 치하로 1911년 7월 8일에 30본산(本山) 사찰령(寺刹令)이 시행되었
으며 1924년 당시 각본산에서 보통학교를 설립하여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화엄사에서는 진응스님이 사중스님들과 합심하여 화엄사 경내에 신학문 교육
기관인 신명학교(新明學校)를 설립했다. 이때가 1908년 8월20일이다.
1909년 4월 신명학교 교원으로 취임한 스님은 같은 해 11월15일부터 1910년
6월까지 신명학교 교장을 맡아 ‘새로운 빛’을 비춰 조선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3년간 혼신을 다해 의욕적으로 교육 불사에 매진했다
1913년 1월27일에 호은(虎隱)율사를 전계사(傳戒師)로 190명이 계를 받았
으며 1915년 대웅전 중수되고, 1917년 2월 15일(음)에 염송회(念誦會)가 창
립되었으며, 1918년 금정암 세월(世月)비구니 운고각 중건, 1919년 진응스
님이 일주문 도리일부 부연, 연목보수 했으며 지리산화엄사조계문중수연기
(智異山華嚴寺曺溪門重修緣起)을 쓰고 상량에 넣었다
.
1913년에 7월 포월(抱月)스님에 의해 본산운동이 시작되어 1924년에 본격적
으로 진응문하인(震應門下人)과 병헌(秉憲)스님의 주도아래 그 뜻을 이루어
30본산은 구례화엄사를 추가함으로 써 31본산이 되어서, 1924년 화엄사가 선
암사로부터 독립본산으로 승격되었다.
제13본산 화엄사(華嚴寺) 용화운호(龍華雲鎬)스님이 본산 초대주지가 되었다.
1927년 8월 박 사시화(朴 四時華), 김 청정화(金 淸淨華) 등이 시주로 각황전
보살상(관세음, 보현, 문수, 지적)을 개금 하였다.
주지 만우(曼宇)대사가 각황전을 해체보수 대하여 1934년부터 당사(當寺)와
군민(君民)이 운동을 계속하여 오게 되었다.
총공비(總工費) 약(約) 13만원을 예산하는데 그 내역을 들면 본부보조(本府
補助)가 9만원에 근(近)하고 기타 잔액은 지방관청 또는 일반 선남녀(善男女)
의 희사(喜捨)에 우러러하게 되었다.
1935년 만전을 기하고 공사를 진행하려고 하는 날인 4월 1일 (음력 2월
28일)은 화엄사 개산조(開山祖) 연기존자의 재일(祭日)임으로 본말사 일동이
모여서 불전(佛前)에 각황전수리진행봉고식(覺皇殿修理進行奉告式)을 행하
였으며 신도 박필종(朴弼種)氏는 이 중수를 축하하기 위하여 일금 3백원을
희사해서 5월 1일부터 약15일간에 베플어서 화엄사 대중 고덕(高德)을 청해
서 대장경열독회(大藏經閱讀會)를 개최하니 비탄에 빠져던 화엄사는 광명
변조(光明遍照)의 서광(瑞光)을 잇게되어 도민(道民)과 함께 기뻐하며 이일
을 듣고 매일 화엄사에 참배하는 사람이 수백명에이르게 되었다.
국비 12만원 들어서 각황전 중수 낙성 봉불식을 1938년 4월 18일에 신남
신녀 수가 만명이 참석하여 성대하게 거행했으며, 1737년 견성당(탑전) 중
건하였다.
계파 스님에 의해 장육전이 각황전으로 다시 중건될 때 화엄석경 파편들
을 불전 근처에 정리하여 쌓아 놓은 것을 각황전 해체 복원후 진응 스님의
각고의 노력으로 정리했다.
구층암을 일현(一玄)스님의 주선(周旋)으로 1936년 여름부터 시작하여
1937년 3월까지 이리(裡里) 신도의 시주금으로써 구층암 법당 및 요사전부
를 훼철(毁撤) 중건하였다.
제주도 구좌면 하도리(濟州道 舊左面 下道里) 대본산 화엄사 포교당에서는
4월 16일부터 법당 신축공사를 착수함에 있어 포교당주임(布敎堂主任) 성
봉화상(星峰和尙)은 교당건설이래로 견인구신(堅忍持久 : 굳게 참고 견디어
오래 버팀) 적성보은(赤誠報佛 :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 부처
님께 보답)의 성의로서 많은 노력을 하여 오던중 현재의 법당이 협소한 바
를 느겨오는바 오 극락심(吳 極樂心), 김 대광화(金 大光花), 박 자비행(朴
慈悲行), 일반신도의 적극적인 동참으로 당당한 법당을 1938년 5월에 준
공하였다.
1950년 6.25 동란을 전후하여 지장암, 내원암, 보적암, 상원암, 용문암, 청
련암등을 비롯하여 만월당이 소실되었다.
1955년 불교정화 이후 인곡(麟谷)선사께서 조계종 화엄사 초대주지로 오셨
으며, 전강(田岡)선사는 1956년에 덕장전을 중건하였고, 1959년에 원응선
사(源應禪師)가 지장암(地藏庵)을 중창, 금오(金烏)선사는 1961년 견성당
(탑전)을중수하였다.
6.25 동란전후에 전란중에 일제때 분류 포장 되었던 화엄석경 상자들이 노
천에 방치된 비운을 맏게 되었는데 석경 파편이 다시 정리된 것은 1961년
9월 8일부터 10월 6일까지 29일에 걸쳐 이루어졌다. 석경편은 14,242점으
로 이들을 크기별로 대 중 소로 나누어 163상자로 나누어 각황전 불단 밑에
보관 했는데 많게는 50여자에서 적게는 몇자 미만인것도 있다.
구례 화엄사 올 벚꽃나무 천연기념물 38호 - 1962년 12월 3일에 지정되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국보 12호, 구례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국보
35호, 구례 화엄사 각황전 67호 - 1962년 12월 20일에 지정되다.
구례 화엄사 동 오층석탑 보물 132호,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 보물 133호,
구례 화엄사 대웅전 보물 299호,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 보물 300호
- 1963넌 1월 21일에 지정되다
주지 도광(導光)선사(1969∼1975)는 당시 모든 전각이 퇴락일로에 있어
걸망에 검은 고무신으로 전국각지에 원력을 세워 화주 수행하니 그의 인욕,
자비, 외호심은 사부대중에 감화되어 발심 출가자, 구참납자(舊參衲子)가
구름같이 모여드니 구층암 백련결사로 선교양종의 종지가 재현 되었다.
각황전, 대웅전 보제루, 원통전, 덕장전, 천왕문, 금강문, 견성당(탑전), 일
주문 등 중수, 도제양성, 포교전념,이(理)사(事)겸비(兼備) 1954년 종단정
화 불사 삼대목표 공헌으로 종정 표창을 받았으며 도광선사는 본사 중흥조
이시다.
화엄사 보제루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49호 - 1974년 9월 24일에 지정되다
주지 명선(明煽)선사(1975∼1980)는 1976년 5월 6일(사월 초파일) 영전에
모신 고승영정 여러 점을 도난당했다.
운고각 뒤에 낮은 축대를 운고각 땅 높이 까지 쌓고 운고각 앞에다 11월 28
일에 반야범종(般若梵鐘) 248㎝, 직경 145㎝, 무게는 1600관(6000㎏) 범종
주조와 함께 범종각 건립했으며 운고각은 보제루 오른쪽으로 옮겼다.
괘불대(掛佛臺 조성, 1977년 5월 25일 초파일 부처님 오신날에 영산회 괘불
탱화(靈山會 掛佛幀畵)를 대웅전앞 도량애 60년만에 모셨는데 오후에 바람
으로 인해 탱화가 가로로 찢어지는 불상사가 생겼다. 6월 괘불텡화 뒷면을
배접하여 보수, 자연적인 백팔계단이 눈비가 오면 땅이 질퍽해서 올라갈때
불편함이 있어서 전면적으로 다듬은 돌로 계단과 바닥에 돌판으로 사라탑
까지 보수했다.
1978년 적묵당 해체보수, 원통전 법당안 왼쪽에 목판이 차곡 차곡 쌓여 있
지만 도난에 무방비 상태였는데 원통전 해체 보수와 더불어 목판 보관실
을 만들었다. 1979년 적묵당 방안에서 수각(水閣) 방향으로 밑에는 바라지
창 2개가 있는 2간 벽을 헐고 마루로 반 이상 나오게 하여 나무로 벽장을
만들어 하단에는 학인스님 이불장 상단에는 서고(書庫)를 만들었다.
전두환 군부 세력이 1980년 10월 27일 새벽에 전국 사찰에 무장한 군인들
을 투입시켜 잠자는 스님들을 무차별 안기부로 끌고가 물고문 전기고문으
로 없는죄 자백 받아내서 탄압했던 불교법난으로 인해 명선스님이 주지에
서 물러났다.
도광선사(1980 ~ 1984)께서 재취임 하시고, 1982년 덕장전 큰방을 보수하
여 수련장으로 만듬, 1983년 영전 왼쪽 뒷방 개조, 1984년 명부전 지장보살
상 개금및 십대왕 개채불사(改彩佛事), 나한전에 가섭존자 아란존자 특히
하얀 나한상을 색채를 입히는 개채불사를 했다.
1982년 4월 2일에 지리선자(智利禪子) 진조(眞肇)스님이 화엄사 불교학생
회(화엄회)를 창립했으며 1983년 2월 4일에 화엄회 수료한 청년불자 연화
회(蓮華會)도 창립했다.
주지 종원(宗源)선사(1984∼1988) 1984년 일주문 옆에 화엄사 불교옹품
점을 도광선사 친척이 운영 하던 것을 다른 불자에게 임대해 주었다.
10월 대웅전 삼존불탱화 개채보수 및 괘불탱화 개채보수, 1986년 만월당 복
원및 연못을 만들었다.
화엄사 구층암 석등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32호 - 1986년 2월 7일에 지정
되다.
화엄사 포교당 흥륜사는 순천 시내에 위치하고, 시민들의 유일한 휴식처인
죽도봉(竹島峰) 공원의 남쪽 사면에 위치한다. 과거 1984년 이전까지 국궁
(國弓)활터로 사용되었던 곳에 새로이 건물을 이전하여 법당을 만들고, 석가
모니불상을 모시고 1986년에 화엄사 포교당 흥륜사(興輪寺)를 창건했다.
1987년 구례읍 봉서리에 위치한 주택을 사서 1층은 요사체 2층은 법당으로
꾸며 석가모니 불상을 봉안하고 화엄사 포교당 봉성산 도광사(鳳聖山 導光寺)
를 창건했다.
재임(1988 ~ 1992)하면서 1988년 10월31일 지리산대화엄사산문(智異山大
華嚴寺 山門) 창건, 만월당에 화엄편집실 만듬, 11월 2일 화엄사 만월당에
서 구례지구 다(茶)동호인들이 모 여서 지리산 다회(智異山 茶會) 창립총회
를 가졌다.
1989년 1월 15일에 화엄사보(華嚴寺報)인 화엄(華嚴)을 창간, 4월 16일 불
기 2533년 부처님 오신날 기념특집 방송 “ 온 누리에 비추소서 ” 3일간 화
엄사에서 현지 제작하여 5월 12일 오후 5시에 KBS - 1TV를 통해 방영되었
으며 이 작품은 조계종 교무부와 KBS 공동제작 한것이다.
4월 24일 각황전에 모신 괘불탱화와 대웅전 후불탱화 보수불사 회향식을
가졌다.
1987년 9월 15일에 착공식을 가졌던 원융요(圓融寮), 청풍당(淸風堂)과
더불어 적묵당뒤 전각이 있는 수각채를 없에고 창고 형테로 수각 만들
고 1988년 3월 만월당 세심각(洗心閣) 준공과 1989년 6월 청풍당(淸風堂)
세심루(洗心樓) 준공과 함께 1989년 7월1일에 창건 낙성식을 거행 했으며,
1989년 11월 2일 화엄사 합창단 창단, 1990년 3월 3일 불교방송 BBS 합
창제에서 화엄사 합창단 동상 수상했다.
구례 화엄사 화엄석경 보물 1040호 - 1990년 5월 21일에 지정 되다
1991년 2월 구례군 향토사단 제3대대에서 초청법회를 건의하니 수렴하여
매주 수요일 정기법회를 부대에서 진조스님이 집전하기로 하였으며, 2월
24일 종원 주지스님이 총무원에서 포교대상 원력상을 받았다.
1991년 도량에 판석(板石)과 금강문 앞에서부터 보제루밑 계단까지 판석
불사를 했다.
미얀마에서 성자 아라한으로 온 국민의 존경을 받고 계시던 사이야도 타웅
출루․카바 아예 사찰의 큰스님께서는 1815년전에 건립되여 붕괴된 사리탑
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발견하셨으나 미얀마는 정치적으로
불안과 불교에 대한 적대행위로 말미암아 사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미국
캘리포니아로 건너 가셨다. 91세까지 미국 열반하시기 직전 스님의 속가
제자인 헨리․T․첸에게 불교의 중심지가 될 만한 성스러운 곳에 이 진신사리
를 기증하여 탑을 세우도록 유언을 하셨다.
불 사리탑의 건립을 추진 중이시던 화엄사 주지 종원스님께서는 종석스님
과 스리랑카에 가서 라타나사라 스님을 만나서 봉송 절차를 의논하였으며
3월 11일 라타나사라 스님이 화엄사 연기암을 방문하시고 처음 사리를 전
달한 사이야도 큰스님의 유지에 따라 화엄사의 연기암이 이 사리를 모실만
한 가장 이상적인 장소라는 결론에 도달하셨다.
1991년 5월 14일(음력 4월 1일) 거행된 진신사리 이운식은 바로 이러한 절
차를 걸쳐 이루어진 뜻깊은 행사가 되었다
1992년 5월 6일 효대시비(孝臺詩碑) 제막식을 거행했다.
1985년부터 재임(在任)시 까지 연기암(緣起庵) 중창 불사를 시작하여 1992
년 6월 21일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6.25사변때 전소 된 보적암을 1989년에 종지(宗智)스님이 중창하였다.
명곤(明坤)스님이 1992년에 길상암(吉祥庵)을 개창,
종경(宗鏡)스님이 1992년에 청계암(聽溪庵)을 創建하였다.
평전(平田)선사(1992 ~ 1994) 1992년 원융요에 있는 원주실 마루을 접대실
방으로 개조, 1993년 1월 14일 구례 다도회가 재창립되어 만월당에서 신토
불이(身土不二)의 진리를 강조 하면서 모임을 가졌으며, 2월 21일 화엄사
불교학생회와 남원 불교학생회가 화엄사 만월당에서 합동법회를 갖고 친목
을 다졌다.
화엄사 미주 포교당 보광원(普光院) 주지 종매(宗梅)스님이 캘리포니아 국
제승가협회(12개국 50여 단체가 가입힌 승가회)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
되었으며 보광원에서 LA 흑인지역에 포교당을 설립하여 원주는 흑인 혜문
법사가 맡았다.
1993년 3월 10일 유물전시관 상량식을 했으며, 6월 6일부터 15일까지 대
웅전, 각황전, 관음전, 명부전, 영전, 나한전, 보제루에 방연제 도포 실시
하였다. 8월 12일에서 14일까지 민족과 역사앞에 다시 일어서는 한국승가
(韓國僧家)라 슬로건을 걸고 적묵당에서 제1회 실천불교전국승가회가 수
련대회를 가졌다. 8월 17일부터 사찰 옆에 나 있는 노고단 등산로를 계곡
건너편으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1994년 유물전시관이 성보박물관으로 건립되였으나 기능적으로 미흡하
여 부적합 판정을 받고 박물관이 취소되여 2층을 수련장으로 활용하기
로 하고 전각을 이름을 연화당(蓮華堂 )이라 하였다.
종렬(宗烈)스님(1994 ~1998) 1995년 8월 17일 서오층석탑해체 보수공사
에서 불사리22과 성보문화재 16종 72점이 발견 되었으며, 9월 일주문 옆에
화엄사 불교옹품점을 수리 증측하여 천수천안 개원, 후원채에 있는 보사님
방 2개를 합쳐 불교 전문서점 화엄서림을 개원하여 두 곳을 사중에서 운영
하기로 했다.
1996년 1월 덕장전 왼쪽 뒷편 방으로 화엄편집실 옮겼으며, 2월 만월당에
불단 모신 수련장을 종무소로 만들고 불상과 불화는 연화당으로 옮겨졌으
며, 오른 쪽에서 4번째칸 앞뒤 2방을 터서 방 하나로 만들고 세 번칸마루
대접실도 방으로 만들어 칠직 소임을 맡은 스님방으로 사용하고, 7월 20
일 삼전신축 상량식, 지난해 부터 부처님 친신사리 친견법회를 봉행해
왔던 행사를 11월5일(음 9월 25일)에 회향식을 갖고 사리를 서오층석탑에
봉안했으며 더불어 10만등 불사 회향도 했다.
화엄지가 1989년에 발행 되었으며 1997년 1,2호(통권 제 35호)로 마지막
발행되면서 화엄지는 폐간 되었다.
1997년에 삼전신축 중건했으며, 5월 화엄사에서 종열 스님이 조성해 주
신 석가모니 불상을 진조스님이 모시고 오스트리아 화엄사 포교당 묵림
원에서 종매스님 진조스님 베트남스님외 오스트리아 불자와 함께 동참하
여 부처님 점안식과 더불어 수계식도 거행했다.
7월 제1회 화엄사 어린이 여름불교학교를 28 ~ 30일까지 포교국장 진조스
님 지도로 거행했다.
각황전(불단해체보수, 불보살 개금불사, 법당마루불사), 대웅전, 원통전,
명부전, 나한전 개금불사, 천왕문 사천왕상 개체, 영전보수, 각황전 불단에
있던 화엄석경을 영전으로 옮겼다.
화엄사 영산회쾌불탱 국보 301호 - 1997년 9월 22일에 지정되다
원통전앞 수각조성, 영산전앞 수각조성, 상왕문앞 수각 조성, 천수천안앞
수각조성, 10월에 덕장전 수련장 3칸을 앞뒤로 6개 처사님 방으로 만들고
종무소와 수련장 1칸을 합쳐 종열스님이 주지 퇴임후 거처할 방으로 보수
했다.
1998년 운고각 단청과 기와번와 및 금강문 단청불사와 문수동자 보현동자
금강역사를 개체(改彩)를 하였으며 조왕탱화를 다시 조성해서 교체봉안
했으며, 방장교 건너편 반야다원 찻집을 개원했다.
한국전쟁 당시 정부는 지리산에서 활약하는 빨치산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
해 화엄사를 소각할 것을 명령하였는데, 차일혁 대장은 국보인 화엄사 각황
전의 문짝 하나만 떼내어 불태우고는 상부에 화엄사를 소각하였다고 보고하
였다. 그때 차일혁 대장이 아무런 역사 의식 없이 명령대로 화엄사를 불태웠
다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공을 기리기
위해 1998년 6월20일 차일혁 총경 공적비 제막식을 거행하였으며 연화당 바
로 밑 넓은 공터에 세워졌다
금정암이 1991년 7월에 화재로 인해 소실된 후, 비구니인 각심(覺心)스님
께서1993년에 후원요사중건, 1998년 법당중건 및 요사를 중건 하였다.
종걸(宗乞)선사(1998∼2002)는 1998년 일주문, 각황전봉향각(영산전)해체
보수하면서 왼쪽 방 뒤에 있던 부엌을 없에고 방 하나로 만들고 두번 쩨 방
안 뒷편에 방문 열면 마루와 유리를 낀 문짝 있는데 마루에서 오른쪽 옆에
들어가는 문을 막고 뒷방 2번째칸 창문이 있는 방과 앞방을 터서 방 하나로
만들었으며, 적묵당 옆 총원소(惣 院所)를 해체후 대중방(大衆方)인 혜원당
(惠圓堂)을 신축중건, 만월당 종무소를 개조하여 방 3개롤 만들고 종무소를
연화당 1층으로 옮겼으며,1998년 적묵당 이불장과 서고(書庫)를 없에고 벽
으로 만듬, 1998년 8월 8일 나한전 금강역사상 한분과 녹사 2분을 도난 당
했고 12월 복원하여 모셨다.
1999년 각황전에 탑형태 불등단 2개 설치 했다.
1999년 지리선자 진조스님이 화엄사역대주지명록(華嚴寺歷代住持名錄)을
편찬했다.
1999년 대웅전뒤 자연석 축대서 부터 나한전 까지 이어지는 축대 정비공사
를 했으며 원융요 1층인 공양채 위로 2층 왼쪽편에 2칸이 없으니 전각의 모
양세가 별로 좋지 못했다. 이어 붙혀 2칸을 만드니 전각의 균형미가 완벽해
졌으며 이방을 행자실로 사용, 만월당 왼쪽 옆칸 대문안에 있던 보일러 시
설들을 왼편 마당을 파서 지하시설로 만들어 보일러를 완비했으며, 1999년
구층암, 봉천암 해체보수,1999년 10월 7일∼8일에 동오층석탑해체 보수 중
이탑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8과를 비롯 330여점의 성보 유물이 나왔다.
12월 12일 다도 생활화를 활성하기 위하여 화엄연기다회(華嚴鷰起茶會)를
지리선자(智利禪子) 진조(眞肇)스님이 창립했다.
2000년 대웅전 천개(天蓋)보수 및 마루불사, 2001년 광학장 복원, 대중스
님 목욕탕 건립, 10월 25일(음력 9월 9일) 화엄사 창건이래 역대 주지스님
고승대덕을 위한 산사 다례재를 부도전에서 처음 거행 했으며, 26일 화엄사.
화엄석경의 보존 복원을 위한 학술 세미나를 각황전에서 했다.
2001년에 종거(宗巨)스님이 상암(上庵)을 개창,
각운(覺雲)스님이 용혈암(龍穴庵)을 개창,
각초(覺超)스님이 미타암(彌陀庵)을 개창하였다.
2001년 화엄사 포교당 도광사(導光寺)를 비구니에게 팔았으며 2001년 12월
28일 명부전 지장탱화와 왼편 시왕탱화 도난 당했고 2002년 복원하여 모셨
으며, 2002년 선방인 선등전을 복원하였다.
2002년에 1층은 총무소 2층은 수련장인 연화당이 전기누전 화재로 소실
되었다.
명섭(明燮)스님(2002~ 2005) 2002년 봉향각 오른쪽 두칸 방을 터서 방 하
나로 만들고, 새번째 방은 뒷 마루를 없에고 세면시설을 만들고 주지스님
거처로 사용했으며, 화엄서림, 천수천안, 반야다원을 사중에서 운영을 그
만 두고 임대해 주었으며, 2002년 만월당 오른쪽 옆칸 대문안에 있던 부엌
시설을 방으로 만들었다.
2002년 10월 4일 11시 40분경에 티베트 14대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스승이신
링 린포체께서 화엄사에 오셨다. 진조스님이 화엄사 도량을 다니면서 1시간
반 가량 안내를 해드리고 기념사진도 찍고 점심공양 하시고 가셨다.
링 린포체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위치한 인도북부 히말리야 산록의 다람살라
에서 1983년 12월 25일 81살로 열반하시고 승왕 달라이라마는 입적한 스승의
청정육신을 등신불로 모셨으며 그후 1년 8개월후 1985년 11월 18일 다람살라
티베트 어린이 마을애서 톈진 초광 아이로 환생했다. 조사단을 몹시 반기며
전생 시봉자 쿵우를 보자 와락 품에 안겼으며 이후 108가지 시험을 거쳐 달라
이라마는 1987년 8월 31일 환생한 링 린포체를 인정하여 1987년 9월 28일
새벽에 왕사(王師)로 즉위식을 했다. 그는 무려 22번 전생을 거듭하면서 중생
에게 윤회를 실증하겠다는 큰 서원을 실천하고 계시는 분이다.
화엄사 서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보물 1348호 - 2002년 10월 19일에 지정
되다
2003년 종무소인 성행당(省行堂)과 일주문 왼쪽에 있던 천수천안을 폐쇄
하고 오른쪽에 불교용품점 천수천안 관정요(觀靜寮)를 지었다.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탱 보물 1363호 - 2003년 2월 3일에 지정되다.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에서 실시한 제 3회 승가고시 산림을 2003년 10월
1일 ~ 7일 까지 화엄사에서 했으며, 10월 4일 ~ 5일(2일간) 화엄석경 정대
불사및 지리산 전쟁희생자 합동위령재를 거행했다.
2004년 11월 2일 일본사찰과 자매결혼을 맺였으며, 11월 23일 환경위원
회 창립식을 각황전에서 했다.
2005년 명부전 시왕탱화 2폭과 나한전 후불탱화 및 나한탱화 4폭, 신장
탱화 2폭을 조성했다. 명부전, 나한전 주련을 달았다.
종삼(宗三)스님(2005∼ 2009 )는 2005년 봉향각 세면시설을 없에고 방으로
하고 뒤는 벽과 창문을 만들었고 계단 옆으로 지하를 만들어 그안에 세면시
설을 꾸몄다. 2005년 광학장 단청불사,10월 8일 증산혜님 대강백께서 지엄
스님 지관스님에게 강맥(講脈)을 전하는 전강식을 각황전애서 거행했다.
2006년 1월 적묵당 옆 공양채와 대문 공간을 방으로 만들어 화엄사 안내실
로 사용하다가 사집 강의실로 변경하였으며, 2월에 만월당앞 연못 없애고,
범음료(梵音寮) 복원하고 조왕탱화를 공양채로 옮겼으며, 3월에 법당앞에
있던 화단및 도량주변 꽃과 나무와 원통전앞 수각을 없에고 도량복원 정비
불사, 호국 돌두꺼비를 청풍당 담벼락으로 옮겼다.
구례 화엄사 목조 비로자나 삼신불 좌상 보물 1548호 - 2006년 3월 12일에
지정되다.
4월 구례농민회와 자매결연, 2006년 4월 29일 군민마음 부처님마음으로 이
라는 슬러건 아래 구례불교사암연합회가 부처님 오신날 봉축 축제인 지리산
연등축제를 거행했으며, 7월애 각황전영단 영구위패단 및 아미타불입상 조
성하였으며, 8월에 선등선원인 선등전및 당우를 단청불사 하였고, 9월 옛
괘불대(掛佛臺 : 1976년 명선스님이 조성)를 없애고 새롭게 조성정비, 금강
문 앞에서 부터 보제루 밑에까지 문양계단(文樣階段)과 석판(板石)을 교체
조성(交替造成)했다.
화엄사 불교학생회는 몇 년전 부터 어렵게 면면이 이어오면서 2005년 12월
10일 23기 수료하고 2006년에는 포교활동애 어려움이 생기니 학생들이 대
부분 타 종교인들이 많아 신입생 모집이 어려웠고 몇 명이 되지 않는 회원
이 법회에 참석하는 것이 적었는데 또한 학교에서 격주로 토요일은 쉬니
법회를 못하고 법회 있는날에는 개인 사정으로 법회에 참석하지 않은 회원
횟수가 많아지고 여름방학 끝난 이후로 나오지 않아서 불교학생회가 안타
갑게 없어지고 말았다.
2006년 11월 18일 <화엄제> 1회 국제 영성음악제는 다른 피부색과 다른
말, 다른 사상과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그 소리들의 향연을 펼쳤다.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노래로 영혼의 교감을 나눈다는 의미에서 화엄사
도량에서 거행했고 화엄음악제는 이곳에서 연중 행사로 할것이다
6.25 사변를 겪으면서 내원암(內院庵)이 거주하기 어렵도록 쇠락 소멸 되어
터만 남은 것을 2006년에 보광지암(普光智岩)스님이 중창하였다.
2006년 11월에 덕장전을 왼편 앞 뒤방 전체를 방 하나로 만들고 세면시설을
갖추는 개보수(改補修)하고 12월에 단청을 하였다. 12월에 적묵당앞 도량에
판석을 교체조성(交替造成), 덕장전 단청불사, 동서오층석탑(東西五層石塔)
의 이끼제거 하여 탑(塔)이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보존공사를 하였다.
2006년 12월에 시작하여 2007년 1월에 원융요 1층 식당채를 보수하여
보사님 처사님 방사로 만듬 , 2007년 2월에는 사사자감로탑(四獅子甘露塔)
의 이끼제거 하여 탑(塔)이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보존공사를 하였다.
2007년 일주문에서 금강문까지 대형 석판길 조성과 더불어 관정요옆 수각
을 없에고, 6월 19일 (음력 5월 5일) 단오(수릿날)는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니 소금단지를 묻는 것은 삼재팔난을 퇴치하고 사찰 화마(火魔)를 쫓
는다는 풍수지리학적으로 금정암 뒤 비로봉 정상 자리가 적합한 장소로 결
정하고 연례 행사로 하기로 했다.
6월 구례 화엄사.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 통일쌀 공동경작을 최초로 시작
하였다. 통일쌀 보내기는 화엄사에서 통일쌀 재배를 위한 농토 20,000평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스님과 노동자, 농민들이 공동으로 ‘통일경작단’을 조
직하고 공동으로 경작을 하여 그 이익금을 북한의 굶주린 동포들에게
보내는 행사이며 매년 할 것이다.
8월에 보제루 해체 보수가 된후 전에 보제루 바닥에 깔려있던 다담이가 없
어지고 왼쪽 창고에 있던 높이 2m 가량된 쌀뒤주 2개가 없어졌다.
보제루앞과 운고각뒤 석벽담장 조성 및 10월 계단 교체 조성하면서 당간지
주 뒤에 있던 분홍매(粉紅梅)를 한그루는 잘라버리고 한그루는 청풍당 앞
으로 옮겨 심었으며, 차일혁 총경 공적비를 시의 동산으로 옮겼다.
구례 화엄사 매화 천연기념물 485호 - 2007년 10월 8일에 지정되다 (길상
암 앞에 있음)
2007년 11월 23일 구례읍 축협 하나로마트 건너편 건물 2층에 화엄사
구례불교 문화원을개관했다.
2008년 1월 상왕문 계단및 축대조성과 금강문, 천왕문 계단옆 축대 교체
조성, 원융요 계단 교체조성, 종원 주지스님 때 건립한 효대시비(孝臺詩
碑)를 치워 버리고, 2008년 1월 22일 화엄사 성보박물관 기공식, 2008
년 2월에 탑과 석등에 테두리를 나무으로 설치와 4월에 청풍당, 상왕문,
감로문 기와번와, 5월에 범종각뒤 석담을 증축조성 하면서 왼쪽 끝에 있
던 보일러실을 석담 안에 지하실로 만들어 갖추었다.
청풍당 기와번와, 단청불사, 7월에 만월당 기와번와, 단청불사, 방문교체,
8월에 각황전 기단옆 수로를 석조수로(石造水路)로 보수와108계단앞 축
대, 계단보수, 일주문옆 대화엄사 철문 조성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신설 전시관 2층 불교회화실에서 “사찰밖으로의 첫나들이”
라는 제목으로 화엄사가 소장한 국보 제301호 '영산회괘불탱'전시를 2008
년 4월 29일 ~ 8월 31일 까지 했다.
9월 17일에 만월당앞 사자문과 담장철거, 22일에 도광대선사 부도및 비석
조성 , 지리산 대화엄사적비 조성, 일주문 왼쪽에 페쇄 되었던 옛 천수
천안 내부를 고쳐 농산물 직판장으로 개설했다.
연기암(緣起庵) 암주(庵主) 만해(萬海)스님이 2008년 10월 12일에 높이
13m인 문수보살(文殊菩薩) 석상(石像)을 조성했다.
재임(2009 ~ 2013) 하면서 2009년 구층암에다 화엄사 차제조 공방을 만들
었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만월당, 보제루, 적묵당, 봉향각, 범종각,
영전에 주련을 달고, 성행당(종무소) 석담과 담장철거 보수, 소화전시설 전
면교체, 2009년 9월 22일(음 8월 4일) 동헌당 태현 대종사(東軒堂 太玄 大
宗師) 26주기에 사리탑비(舍利塔碑)을 제막식(除幕式), 10월 24일부터 11
월 9일까지 17일간 화엄사 보제루에서 네팔 난민촌 지원을 목적으로 '극락
정토로 가는 영혼의 수레바퀴'라는 부제로 네팔 만다라 특별전을 열었다.
2009년 3월 진조(眞肇)스님과 종후(宗厚)스님이 계파선사께서 각황전을
중건한 기념으로 식목한 홍매화(장육매,각황매)가 후손 나무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만월당(滿月堂) 도량에 홍매화 가지로 삽목(揷木) 하였
으며 2대 홍매화를 만월매(滿月梅)라고 명명(命名)하였다.
2009년 12월 21일에 문화재 사적 505호 구례 화엄사 라고 지정되었다.
2010년1월 30일에 적묵당 기와번와, 2월 1일에 범종각 기와번와, 3월 1일
화엄원 상량식을 했다. 화엄사 성보박물관 단청불사를 했다. 10월 21일
운고각 해체 신축불사 중건을 했다. 석옹각(石甕閣)을 건립했다.
2012년 2월에 4사자 감로탑 해체보수및 보존처리공사, 4월에 선등선원
본체 선방을 좌우 1칸씩 막아 방을 만들고 또한 왼쪽요사체 좌우 1칸씩
증축했다.
스리랑카인 6명이 화엄사에 출가하여 수마나 도연(道緣)의 은사는 와찌사라
스리랑카스님, 하시타 법연(法緣)의 은사는 만해(滿海)스님, 디싸 봉연(峰緣)
의 은사는 영관(靈觀)스님, 우디타 우연(愚緣)의 은사는 종삼(宗三)스님,
사미타 광연(廣緣)의 은사는 일문(一門)스님, 아미타 오연(梧緣)의 은사는
원문(圓門)스님으로 정하여 단일계단 직지사에서 2011년 9월 2일 사미계를
받았다.
성목인 영산홍(靈山紅)은 조선조 인조때(1630년)의 벽암선사(碧巖禪師)께서
화엄사를 중건하라는 계시로 알고 8원중 중심 사원인 화엄원 도량에 두 그
루 나무를 가지고 와서 영산홍은 각황전앞에 심고 또 한 그루는 지장암에
올 벚꽃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벽암스님의 화엄사 중창원력 성목을 2012년
6월 4일(음 4월 15일)에 주지스님이 뽑아 내고 소나무를 심고 영산홍은 화
엄사 성보박물관 옆으로 옮겨 심어 놓았다.
2012년 5월에 화엄원(華嚴院) 2층 단청불사, 산사 다례재를 21일(음력 4월
1일)로 옮겨 거행했으며 매년 음력 4월 1일에 하기로 결정했다. 6월 2일
화엄사 문장(門長)이신 종산대종사(宗山大宗師)를 조실로 추대했다.
6월10일에 현판및 주련을 달았으며, 6월에 운고각 단청불사및 운고루 현판
를 달았다. 화엄사 성보박물관 내부 전시시설만 완료, 2012년 10월 27일에
화엄원 1층 수련생 처소가 완성되었다.
청풍당 앞에 세심루(洗心樓) 수각을 2012년 1월에 없애고, 분홍매를 석옹
(石擁) 옆으로 옮겨 심었으며, 뒷편인 청풍당 왼쪽으로 2칸 5칸 요사체및
정자(亭子)와 저장고 지하시설 증측하여 2012년 10월 25일에 완공 하였다.
2012년 10월에 성행당 (省行堂)을 책육당이라고 바꿔 현판을 달고 만월당도
금색 현판으로 바꿔으며, 청풍당 현판과 주련을 달았으며 영전에도 주련을
달았다. 10월 7일 이산당(离山堂) 도광대선사(導光大禪師) 28주기 추모기념
으로 용성스님의 한글화엄경과 화엄사 주제로 화엄사, 대각사상(大覺思想)
연구원 학술세미나가 화엄원(華嚴院)에서 거행했다.
2012년 원융요 1층에 각방마다 세면시설을 만들었으며, 새로운 화엄성종
조성을 위해 1차로 2012년 11월 4일에 종각 건물을 해체하여 담양 보광사로
옮겨갔으며, 2012년 11월 6월 광학장 자연석 기단을 해체하고 2012년 11월
26일 종무소 기단부 해체, 11월 28일 덕장전 기단부 해체하여 12월 광학장
덕장전 종무소 기단부 완성하였다.
2013년 2월 대웅전 양족 옆문 교체및 2012년 10월 5일에 방화된 각황전
문짝를 교체, 2013년 1월 덕장전 처사방 6개를 터서 수련원장 방으로 2월
17일에 개조 완공하였다.
2013년 3월 8일에 화엄성종각 상량식, 2013년 3월 일주문안에 농산물
직판장 해체하고, 각황전 내림마루 기와번와, 3월11일 화엄원에 불화 봉안,
3월 22일 삼전 밑 구층암으로 올라가는 길을 넓게 확장공사, 3월 27일 광
학장 청풍당에 주련을 달고 원융요 현판교체및 주련을 달았다.
화엄사 8원 중에 안지원(安智院)의 암자를 복원하여 주지 퇴임후 수행처로
사용할 암자 남암(南庵) 상량식을 2012년 6월 26일에 거행했으며 2013년
3월에 극락보전(極樂寶殿) 인법당과 처소(處所)를 갖춘 본채를 단청하면서
남암(南庵)을 개창 하였다.
4월 12일(음력 3월 3일) 화엄성종(華嚴聖鐘) 무게 3300관 범종주조와 함께
새로운 범종각을 건립하고 타종식을 거행했으며 2013년 4월 18일 화엄사
반야범종(般若梵鐘)을 담양 보광사로 보냈다.
사부대중과 더불어 문도스님과 많은 불제자가 불사에 동참하여 옛 화엄불
국 연화장법계를 이루도록 하고 있다.
불사리탑이 있는 불보사찰, 화엄석경이 있는 법보사찰, 보림도량 승보사
찰로 삼보사찰의 면모를 갖춘 선교양종대가람 지리산화엄사 화엄적멸
보궁에서 불보살님과 중생들이 하나되어 연화장법계에 영원하리라.
뜨는해 품에안고 우뚝솟은 般若峰은
三界를 밝혀주는 華嚴의 大綱이요.
달빛에 구비치며 淸流하는 蟾津江은
正法을 이어가는 華嚴의 動脈이라.
이곳에 터를잡고 千年歲月 지켜오며
國亂도 이겨내고 華嚴도 널리폈네
佛子여 우리모두 放逸말고 精進하여
成佛의 話頭깨고 華嚴도 드높이세
智利禪子(지리선자) 眞肇(진조)
焚香謹書(분향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