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는 기독교적인 사회는 아닐지라도 숫자통계학적으로 전국민의 약 1/4이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는 사회이다. 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한국이라는 사회를 형성해 가고 있다지만 실제 우리 주위에는 기독교적인 색채가 물씬 풍겨나는 분위기나 문화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교
회는 수없이 많이 세워져 있지만 그곳으로부터 흘러나는 것들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왜 이럴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한가지는 교회다니는 사람들의 이중적인 삶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두 다리중 하나는 세상에, 다른 하나는 교회에 두고서 살아가기 때문에 실지 그의 모습이 무엇인가하는 정체성조차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고서야 어찌 세상과
뚜렷이 구별되는 교회의 독특성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판을 치는 사회를 생각할 때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그는 다름 아닌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단신(單身)으로 물리친 엘리야 선지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을 때 그는 분연히
일어서서 갈멜산에서의 영적 전투에서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심과 자신이 그 하나님의 종됨을 보여줌으로 백성들을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어디로 가야 바른 길로 가는 것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할 때, 다시 말하자면 세상을 보면 세상의 길이 바른 것 같고 교회에 가면 하나님의 길이 바른 것 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는 바로 엘리야와 같은 영적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실로 현 사회는 가치관이 극도로 혼란에 빠져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 당신은 세상에서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준비하지 않으면 이 시대는 얼마나 더 큰 가치관의 혼돈에 빠져들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 될 경우에는 어쩌면 21세기는 기독교적인 가치관이란 말 자체가 의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구나 엘리야와 같은 영적 지도자를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둠이 깊을수록 밝은 새벽은 더 가까이 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속에는 거룩하고 가치있는 자기 백성들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도 아합의 시대처럼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를 준비시키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우리로 하여금 갖게 한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자 사역자로 자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삶 속에서 그것을 입증하고 있는 '참' 지도자는 드물다. 그것은 모두가 자신의 기준이나 판단에 따라 행동하고 있지 결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기준을 갖춘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이 시대의 엘리야 선지자가 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기준이 우리에게는 더 까다로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속임수가 통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지도자는 많은 것 같은데 만인이 인정해주고 거기에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그러한 바르게 된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수천년 전의 엘리야만 그리워하고 있을 수 만은 없다. 누군가가 엘리야의 사역을 계승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시대적인 과제이자 임무이다. 모두가 두 세계 사이에서 주저해서는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다. 이 세상은 지금 450명이나 되는 바알의 선지자들이 활개치고 있는 시대와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이 세상의 원리를 좇아 진행되고 있는 느낌이다. 여기에 한줄기 빛과 같은 하나님의 법만이 참된 것임을 입증해보이는 엘리야가 오늘에 절실히 요청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