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영 해병 중위 - 충무무공훈장
대 표 제 목 강길영 해병 중위
작 성 자 전쟁기념관
감 수 자 전쟁기념관
발 행 일 2004/10/18
갱 신 일 2004/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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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 姜吉泳
● 생몰연대 : 1930.9.22-1951.9.1
● 출신지역 : 경북 상주
● 최종계급 : 해병 중위
● 상훈내용 : 충무무공훈장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 제6집, 해병발달사
1. 생애(1930∼1951)
1930년 9월 22일 경상북도 상주군 상주읍 서성동 14번지에서 강석주(姜錫周)의 3남으로 출생한 강길영(姜吉泳) 해병 중위는 1949년 4월 15일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여 소총병으로 진동리전투, 통영지구작전, 인천상륙작전, 수도서울 탈환작전 등에 참여해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후 해병간부후보생 제3기로 종합학교에 입교하여 소정의 군사교육 및 훈련을 받고 1951년 3월 3일 해병 소위(군번 60018)로 임관한 그는 가리산 및 화천지구전투에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특히 그는 1951년 9월 1일 해병 제1연대 3대대 11중대 선임장교로 보임되어 강원도 양구 전방의 펀치볼 확보를 위한 전술적 요새인 924고지전투에 참가해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이 전투에서 그는 적탄에 쓰러진 중대장을 대리해 중대의 진두에서 돌격전을 감행하던 중 적탄에 의해 전사하였다.
그는 이러한 공로로 해병 중위로 일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1999년 6월 20일 해병대사령부는 김일성고지전투에서 해병의 신화를 남기고 산화한 그와 대원들의 위훈을 기리기 위해 격전장이었던 펀치볼 지역에 전적비를 세우고 추모식을 거행하였으며, 전쟁기념관도 동년 9월에 '이 달의 호국인물'로 선정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2. 공적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공산군은 5월과 6월에 입은 손실을 보충하기에 광분하는 듯 하더니 8월 하순에 접어들어서는 일시적으로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자 고의로 회담을 방해하기 시작하여 끝내 결렬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미 해병 제1사단은 1951년 7월 18일 이래로 미 제10군단의 예비대로 계속 홍천부근에 배치되어 있으며, 해병 제1연대는 홍천 동북방 15㎞지점에 위치한 한계에서 1달 여에 걸쳐 도솔산전투의 후유증을 씻으며 자체교육에 정진하고 있었다. 8월 26일 미 해병 제1사단으로부터 '공격작전을 수행할 준비를 하라'는 준비명령을 받은 해병 제1연대는 즉각 출동태세에 들어갔다.
당시 연대는 대부분 신병으로 재편되었지만, 그 동안 실시된 훈련으로 전투능력과 사기가 고양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연대는 8월 27일 23시를 기해 미 해병 제1사단과 함께 호우 속에 홍천지역을 출발하였는데, 그간 내린 호우로 소양강이 범람, 도로는 침수되고 교량은 유실된 곳이 많아 차량기동에 많은 지장이 뒤따랐다. 이런 악천후 속에서 해병대는 관대리-인제-원통을 잇는 70㎞의 험로를 철야로 기동한 끝에 28일 아침 인제 북쪽 21㎞지점에 위치한 평촌에 당도하였다.
이 무렵 연대와 대치하게 된 적은 8월 하순부터 전선에 나타난 북한군 제2군단과 임무를 교대한 북한군 최강부대인 제3군단 예하의 제1사단 3연대로서 1,600여 명의 병력으로 월산령 서북쪽 2㎞지점의 924고지와 1026고지 및 그 후방지구에 각 1개 대대를 배치하였는데, 그 병력은 대대 평균 500명이고 장비는 82㎜ 박격포 8문, 중기관총 6정, 경기관총 20정, 대전차총 6정을 보유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적은 휴전회담 기간의 소강상태를 이용하여 산악지형의 이점을 교묘히 살려 화기진지를 종심 깊게 배치하고 지뢰를 매설하는 등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도솔산전투에서 패배한 오명을 설욕하고자 하였다.
반면 8월 28일 새로운 집결지인 평촌에 도착한 해병 제1연대는 휴식을 취할 여유도 없이 캔사스선의 방어진지를 인수하기 위해 도보로 기동을 하였는데, 이때 연대장 김대식(金大植) 대령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하였다.
'① 제2대대는 8월 29일 09시까지 연대 우일선으로 미 해병 제5연대 및 미 제23연대의 일부와 방어임무를 교대하라. ② 제1대대는 8월 29일 09시까지 연대 좌일선으로 미 해병 제5연대의 일부와 방어임무를 교대하라. ③ 제3대대는 연대 예비대로 753고지에 이동하고 1개 중대를 793고지에 정진시켜 전진부대임무를 인수하게 하라. ④ 각 대대는 임무교대 후 즉시 보고하고 별도의 명령이 있으면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이리하여 각 대대는 28일 17시에 호우 속의 평촌을 출발하여 캔사스선을 목표로 을 시작하였는데, 중도에 범람한 소양강 지류에 부닥쳐 그 부근에서 야영하고 다음날 날이 밝으면서 로우프를 이용해 도하한 다음 캔사스선에 진출하여 진지를 인수하였다.
이때 제2대대는 연대 우일선으로 미 제2사단 23연대 일부와 임무를 교대하고 후덕리 동측에서 역시 이날 진지를 점령한 미 해병 제7연대 3대대와 연계하고 제1대대는 연대 좌일선으로 미 해병 제5연대 1대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평촌 서쪽 6㎞지점에 위치한 917고지 서측에서 제5사단 27연대 2대대와 연계하였다.
제3대대는 주력으로 평촌에 위치하여 연대CP를 경계하고 제9중대는 793고지에 추진시켜 전진진지를 인수하도록 하였는데, 다음날엔 다시 제10중대를 증파하였다.
그런데 이때 미 해병사단으로부터 부여된 연대목표는 월산령 서북방으로 뻗은 924고지-1016고지-1055고지를 포함하였는데, 이 지역은 펀치볼 확보를 위한 전술적 요지로 그 동안 피아간에 격렬한 쟁탈의 초점이 되어왔으며, 여기를 점령하면 펀치볼을 완전히 장악하여 적의 본거지로 알려진 내금강을 제어할 수 있는 발판을 굳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북방 깊숙이 쐐기를 박는 형세가 되어 중동부전선을 북방으로 끌어올리는 관건이 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적정과 지형상으로 보아 격돌이 예상되었으며, 아군에서는 924고지를 김일성고지, 1026고지를 모택동고지로 각각 명명하여 장병들의 적개심을 제고시켰다.
한편, 924고지의 공격을 담당한 것은 제3대대였는데, 8월 31일 공격개시선인 월산령에 집결하여 우선 정찰소대로 하여금 924고지를 정찰토록 한 후 각 대는 상호 밀접한 연락하에 적의 저항을 배제하면서 고지전방 100야드까지 이르렀으나, 기상의 악화로 인한 아군 관측의 착오로 아군의 지원사격포탄이 공격부대 주위에 낙하하여 혼란을 야기하였고 속출되는 지뢰에 의한 부상자로 부득이 공격을 중지하고 월산령에서 일단 철수하였다.
이날 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제3대대의 최전방중대인 제11중대를 시찰 격려하고 돌아가다 지뢰를 밟아 부상을 당하였다. 이에 부연대장 김동하(金東河) 중령이 연대장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9월 1일 07시에 재차 행동을 개시한 제3대대는 924고지의 동북방 1㎞의 능선 일대에 이르러 제11중대를 우일선, 제10중대를 좌일선으로 전개하여 10시 30분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허술할 것으로 예상했던 924고지의 우측 후방은 그 수비태세가 견고하였으며, 적은 치열한 포격과 집중사격으로 저항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제11중대는 전진을 거듭하여 적진 100m 전방까지 육박하였는데, 이때 최후의 돌격을 지휘하던 중대장 육동욱(陸東旭) 중위가 적탄으로 목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러자 중대 선임장교인 강길영 소위는 쓰러진 중대장을 잡고 '중대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일성 고지는 우리가 꼭 점령하겠습니다'라고 위로하고 중대를 지휘하여 적진으로 더욱 육박하였다. 그러나 그는 중대의 선두에서 적진으로 돌격하던 중 적의 총탄에 의해 현장에서 전사하였다.
한편, 전날의 실패를 거울삼아 육박전을 전개한 제10중대는 전방 300야드까지 진출하였고, 제11중대는 924고지 100야드 전방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하여 그 위치를 확보하고 적의 야간역습을 저지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9월 2일이 되자 제3중대와 제6중대는 9시 30분에 공격을 개시하여 12시 20분 924고지를 점령하였다. 그런데 이날의 공격이 비교적 용이했던 것은 제12중대의 박격포연막탄에 의한 연막차단이 적절히 되어 측방으로부터 날아오는 적의 기관총사격을 피할 수 있었고, 청명한 날씨로 항공지원, 야포지원이 적절하게 제공되었기 때문이었다.
924고지에서 3일간의 혈전으로 제1, 제3대대는 수많은 손실을 입었으므로 1026고지의 공격은 예비대로 있던 제2대대가 담당하였다. 제2대대는 제3대대가 924고지를 점령하자 곧이어 1026고지를 향해 공격을 개시하여 일몰까지 924고지와 1026고지의 중간지점까지 진출하였고, 다음날인 9월 3일 새벽 5시를 기해 여명공격을 개시하도록 준비중에 있었으나, 4시 30분 경 적의 야습으로 제2대대는 준비했던 공격태세를 이용해 을 가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9월 3일 정오가 되기 전에 1026고지 전체를 점령 완료하였다. 이어 해병대는 924고지, 1026고지, 1056고지 일대에 견고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방어에 돌입하였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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