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써 놓은 것도 없이 일부터 저지르려니 더 막막한 것도 있지만, 좀만 더 써
놓고 올리자니 그러다가는 한도끝도 없을 것 같아서 덜컥 저지르고 보는 거랍
니다. 제가 원래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하는 스타일이라서...(ㅠㅠ) 성실연재를
하고픈 마음은 굴뚝이지만 언제나 마음 뿐, 몸이 굼뜬 관계로 늘상 생각에 그치
고 마는 이 타고난 게으름이 문제인 듯 싶습니다. 하하하~
격하게 반가워해주신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면서, 이번 글도 격하
게 반가워해 주시기를 감히 바래봅니다. 댓글과 추천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고
프기만 하답니다. 부디, 아낌없이(?) 적선해 주세요~ 점점 살기 고달파지는 웬
수 같은 현실에서 제 글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라고도 있습니다.
멋진 신이와 쿨한 채경이의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부디 즐겨주시길.....
*라니냐님! 메일과 선물, 넘넘 고맙습니다. 늘 감사드리고 있답니다.^^
*좋은꿈님! 멋진 대문 정말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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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 1.....미친 짓을 벌이다
"후우......"
너무 힘들었다. 숨은 가쁘고, 머리도 어지럽고, 몸도 천근만근이었다. 그러나 여
기까지 온 이상,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무거운 발길을 한발한발 옮겼다.
이러다 죽는 건 아닐까... 아직 죽기에는 한참 이른 나이고, 아직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이런 쓸데없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너무너무 힘든 채경
이었다.
"................"
기어코 도착한 정상.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청명한 날씨와 더불어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금 채경의 마음에는 아무런 감흥도
깃들지 못하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경치가 매우 훌륭하기는 하지만, 이런 고생
을 하면서까지 볼만한 가치가 과연 있는 걸까. 등산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라면 혹
모르겠지만, 역시 채경은 등산이란 것에 대해서 여전히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수경이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주 어느 날, 한 커피 전문점.
"또 싸웠어? 너네들은 정말 지치지도 않고 싸우는구나."
채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수경이 항의하듯 말했다.
"우리가 언제~ 그냥 좀, 가끔 의견충돌이 있는 것 뿐이라고."
"그냥 좀 가끔? 입술에 침은 바르셨나요?"
사흘이 멀다하고 그놈의 '의견충돌'이라는 것을 해대는 동생과 동생의 남친을 보
면 대체 연애는 왜 하고 있는 건지를 알다가도 모르겠는 채경이었다. 동갑내기인
데다가 성격도 영 딴판이어서 그런지 싸움이 잦았지만, 또 그래도 계속 만나는 걸
보면 5년이란 세월 동안 그놈의 징글징글한 '정'이란 녀석이 이 애들한테도 제대
로 붙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하기사, 서로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걸 보면 잦은
다툼 역시 일종의 애정표현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어떡해. 선우가 나더러 다짜고짜 올해 안에 결혼을 하자는데."
"뭐?"
동생의 듬직한 남자친구인 김선우는 외과의사를 꿈꾸는 유능한 레지던트로, 수
선스럽고 덜렁대는 수경과는 달리 침착하고 차분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런 그가 얼추 내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던 결혼을 난데없이 당기자니, 그냥 넘길
문제는 분명 아닌 듯 싶었다.
"갑자기 결혼이라니?"
"그게..."
수경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선우네 집안이 대대로 의사 집안이잖아. 그래서..."
말끝을 흐리는 동생을 보니 감이 잡히는, 눈치빠른 채경이었다.
"아, 집안에서 미리 정해놓은 신부감이 있었다는 뜻이야?"
수경은 풀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 어머니는 널 마음에 들어하셨잖아."
"마음에 들어하는 거 하고, 며느리감하고는 다른 거지."
대체 뭐가? 상류층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하여간에 이해불가다.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무작정 결혼하자는 거야?"
"(한숨) 선우, 한 번 발동걸리면 아무도 못 말리는 기질 있잖아."
보통 때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지만, 화가 나면 제대로 무서워지는 타입이
라서 대책없어 보이는 수경도 그에게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싸울 때
조차도.
"넌 어쩔 거야?"
"지금은 아무 것도 모르겠어. 사면초가. 그게 지금 내 상황이야."
기운없이 커피만 마시는 동생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채경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위로 뿐이었기에 더 안타까운 건지도 모르겠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아있는 두 여자의 모습은 연년생 자매답게 많
이 닮은 모습이었지만, 성격은 대조적이었다. 밝고, 좀 수선스러울 정도로 명랑한
수경과는 달리 채경은 냉정하고도 덤덤해 보이는 표정과 말투를 지니고 있어 많
은 사람들이 속고 있었다. 그러다 간혹 나타나는 엉뚱한 말이나 행동에 또한 많은
사람들이 놀라곤 했다. 물론 본인은 상대의 반응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성격이기
도 했다.
"다음 주에 우리 회사에서 야유회 가는 거 알지? 근데, 이번엔 대체 무슨 생각들인
지 등산을 한다는 거 있지."
"정말? 어느 산?"
"도봉산." (한숨)
풀죽었던 수경의 눈이 생기를 되찾았다.
"와, 우리 언니 어떡하나."
"미치겠다. 왜 하필 등산인지."
학교 다닐 때도 체육을 제일 싫어했던 채경이었다. 하물며 등산 같은 건 미친 짓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녀였기에 이번 야유회가 달가울 리 없었다.
"아무래도, 난 빠져야겠어. 집에 일이 있다고 하던지, 아프다고 하던지."
"신채경이 아프다고? 누가 그 말을 믿을까?"
놀리는 수경의 말에 채경은 인상을 찌푸렸다.
"난 사람 아니냐? 지난 주에 감기로 고생했으니까, 통할 거야."
"그러지 말고 그냥 해 봐. 혹시 알아? 등산의 참맛을 느끼고 그 매력에 빠져버릴
지."
그러나 채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안 돼."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다. 그리고, 사람이 살면서 가끔 한 번씩 미친 짓 해 주
는 것도 나쁘지 않대. 스트레스 해소도 되고,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도 있고."
"누가 그래?"
"내~가. 회사 야유회만 아니라면 나도 따라가고 싶다."
채경과는 달리 운동을 좋아하는 수경이었다.
"참, 신이 오빠는 잘 있지? 왜 요샌 통 안 보여?"
"걔도 바빠. 얼마 전에 팀장으로 승진했잖아."
"아, 맞다. 이젠 오빠가 상사가 돼 버렸지."
잠깐 말을 멈춘 수경, 채경을 한 번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언니보다 2년이나 늦게 입사했는데 (물론 군대 때문이었지만) 먼저 승진하는 거,
기분 나쁘지 않아? 언니 능력도 누구나 다 알아주는 건데."
그러나 채경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할 수 없잖아. 걔는 로열 패밀리니까."
녀석이 물론 사주의 아들-배다른 아들이기는 하나-이라 해도, 그의 승진은 너무
빠른 것이긴 했다. 입사한 지 1년 만에 대리 직함을 단 것도 모자라 그 1년 후에는
중간 과정도 생략하고 바로 팀장으로 승진해 버렸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오너의
자식이라는 타이틀에 앞서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했었다. 누구도 불만을 품을 수 없을 만큼, 녀석은 자신의 능력을 확실하
게 입증했었다.
채경도 승진은 빠른 편이었지만, 아직도 대리직함을 달고 있었다.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어떤 배경도 없는 상태에서 신이처럼 빛의 속도로 승진할 수는 없는 노릇
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았고, 녀석을 질투하지도 않았다. 채경도
인정하고 있었다. 녀석은 확실히, 보기드문 인재라는 것을 말이다. 성격이 제멋대
로인 것이 문제일 뿐.
"아무리 로열패밀리라도, 좀 너무한 거 아닌가 해서."
"너무할 게 어딨어. 배경도, 운도, 다 능력에 포함되는 거거든."
수경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나 쿨한 우리 언니.
"그리고, 신이 녀석 능력은 뭐,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까."
"하긴... 오빠는 팔방미인이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수경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오빠도 그렇고, 언니도 솔로인지 오래면서, 둘이 왜 안 사귀어?"
마시던 커피가 목에 걸릴 뻔한 채경이었다.
"뭐?"
"신이오빠하고 언니. 꽤 잘 어울리는데. 둘이 죽도 잘 맞잖아."
"그 녀석하고 난 친구야."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어버리는 채경을 보며 수경이 고개를 또다시 갸우뚱거렸다.
"친구?"
"그래, 친구."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수경에게 딱 잘라 말한 채경이었지만,
마음은 그다지 편하지 못했다. 접어버린 지 오래이건만 아직도 이런 류의 이야기
를 들으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지곤 했다. 이미 오래전에 접어버린 마음이 다시
펼쳐질 것만 같아서 두려운 것인지도.
(내가, 너를? ........)
한 번쯤 미친 짓을 벌이는 것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수경의 말이 묘
하게 채경의 가슴에 남았다. 그래서 빠지려던 마음을 바꿔 그냥 참가한 채경이었
다. 작년도 빠졌었기 때문에 올해는 하루를 곱게 희생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
었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막급이었다. 역시 등산은 내 체질이 아니다. 아니, 운동
자체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
"그렇게 힘들어?"
바위에 걸터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채경의 귓가에 들려오는 반갑지 않은 목소리.
"보면 모르냐.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채경의 퉁명스런 반응에도 해맑게 웃는 얄미운 놈.
"수능 대신 체력장으로 대학입시를 치렀으면 넌 평생 가야 대학 구경도 못했을
텐데."
"그래. 그래서 천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힘들어 죽겠으면서도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채경을 보는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해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오늘, 빠질 줄 알았더니 의외였어. 신채경, 다시 봐야겠는데."
"지금까지는 어떻게 봤는데?"
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는 다른 말을 했다.
"이제 내려가야지. 근데 어쩌냐. 아마 내려가는 게 더 힘들 텐데."
"뭐? 왜?"
그가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몸 상태가 아마 십중팔구는 그럴 걸."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한 놈이었다. 과연, 그 말대로 다리에 이미 힘이 풀린 채경
이었기에 내려가는 것이 오히려 더 힘에 부쳤다. 자꾸 미끄러지고, 몸은 휘청대고,
다리는 뻣뻣해져서 한 발 내딛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옆에서 가뿐한 몸짓으로 내려가는 놈을 보니 더 기분이 상했다. 이 정도는 가벼
운 산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여유있는 발걸음을 보니 왠지 혼자만 바보가
된 느낌마저 들었다.
"신채경."
힘들어 죽겠는데 왜 부르고 난리야!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온 채경의 대답은 짧았다.
"왜."
"한마디면 되는데."
"뭐가."
놈이 또다시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줘... 이 한마디면 된다고."
"미친 놈."
내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너한테는 절대 도움을 청하지 않을 거다!
"너 그러다 쓰러져도 난 모른다."
"몰라도 되거든."
"오늘은 몰라도, 내일 되면 너 일어나지도 못할 걸."
"됐으니까, 그만 이죽거리고 얼른 사라져라."
"내가 옆에 없으면 아쉬울 텐데."
잠시 걸음을 멈춘 채경, 놈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것도 아주 매혹적으로.
"나, 도와주고 싶어?"
"............."
갑작스런 미소에 움찔한 그가 대답을 못하는 사이 채경의 미소는 더욱 달콤해졌
다.
"그럼, 기꺼이 도울 기회를 주지."
말과 동시에 그의 등 뒤로 간 채경이 덥석 업혀버렸다.
"윽~ 무슨 짓이야, 너!"
"너 힘 좋잖아. 나 업고 내려가라."
"미쳤냐!"
팔로 목을 감아죄는 채경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는 그였다.
"매일 운동하면서 이 정도 힘도 없단 말이야? 운동, 뭐하러 하냐?"
"야! 아무리 힘이 좋아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비탈길을 사람을 업고 내려가냐?
다친 것도 아니고..."
그러나 그의 말은 전적으로 실수였다.
"그래? 그럼 내가 다리를 다친 걸로 치지, 뭐."
여전히 그의 등에 업힌 자세로 얄밉게 생글거리는 채경이었다.
"뭐? 야, 신채경! 뻔데기를 사발로 먹었냐? 뻔뻔함이 하늘을 찌른다."
"틀렸어. 함지박으로 먹었다."
함지박... 그는 그 와중에도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옆으로 내려가는 동료들이나 등산객들이 힐끗거리는 것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
고 그의 등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하는 채경이었다. 사실, 그 역시도 남들의 시선
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알았어, 알았어. 그냥 가방이나 들어라. 에이, 내가 선심썼다."
채경의 말에 어처구니 없을 뿐인 그였지만 결국 배낭을 들어주는 것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저녁도 니가 사야 된다."
"뭐?"
얼결에 채경의 배낭을 받아들고 한 발을 내딛던 놈의 얼굴이 구겨졌다.
"내가 크게 양보했잖아. 그러니까 밥 정도는 사는 게 예의지."
"업어주지 않는다고 시위하는 거냐, 지금?"
"부하직원의 사기진작을 위해서 그냥 닥치고 한 끼 사시죠, 팀장님?"
생글거리는 채경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한숨을 쉬고는 다시 산을 내
려가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놈의 뒤를 따라서 내려가는
채경이었다.
(내가 신채경, 너 때문에 몬 살겠다! / 내가 뭘?)
원래는 산 아래 다같이 모여서 저녁 겸 회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산 정상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피곤과 근육통을 호소한 관계로 회식은 없던 일로 돌려지고, 각
자 알아서 집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같은 오피스텔 건물에 사는 신과 채경
은 자연스럽게 같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녁은 집 근처에서 먹기로 이미 합의
를 보고서.
"칼칼한 찌개가 땡긴다~"
라는 채경의 말을 무시하고 신은 옆건물에 있는 편의점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버렸
다.
"여긴 왜?"
"저녁 먹으러."
"뭐?"
동그래진 그녀의 눈을 또다시 무시하고 신은 사발면을 두 개 집어들어 뜨거운 물
을 받았다.
"이게 저녁이야?"
"그럼, 내일 아침일까봐?"
신은 나무젓가락을 갈라서 채경에게 건넸다.
"너무한다, 이신. 짠돌이 같으니라고."
"얻어먹으면서 말버릇 좀 봐라."
"최소한 앉아서 먹을 수 있는 데로 들어오는 게 상식 아니냐? 다리 아파 죽겠구만."
"힘들다고 그대로 퍼지고 앉으면 엉덩이에 살만 찐다."
신이 얄밉게 대꾸하자 채경은 그를 흘겨보며 선언했다.
"내 엉덩이가 지구를 덮는다 해도, 난 앉아야 쓰겄다."
사발면을 들고 편의점 바깥으로 나가 파라솔 밑의 테이블에 앉는 채경의 등 뒤로
놈이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상하지마. 이 변태야."
"네가 말해놓고는 왜 멀쩡한 사람을 변태로 몰아?"
"말한다고 상상하는 게 변태지."
"하~"
신의 어이없는 눈초리를 무시하고 채경은 사발면 덮개를 벗기며 투덜거렸다.
"부대찌개, 낙지볶음, 해물탕, 이런 거 먹고 싶었는데 겨우 사발면이라니. 돈도 많
은 놈이 쩨쩨하기는 세계 제일이라니까."
"얻어먹는 주제에 왜 잔말이 많아? 닥치고 그냥 드시죠, 대리님."
채경의 말을 그대로 되돌리는 신이었다. 투덜거리면서도 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그녀를 신은 또 물끄러미 보았다. 그의 눈빛은 9년지기 친
구를 보는 눈빛은 분명 아니었다. 스스로도 깨닫고 있는 바대로, 지금 신의 눈빛은
한 여자를 바라보는 한 남자의 눈빛, 그것이었다. 그러나 채경이 고개를 들었을 때
는 그의 눈은 이미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연인'이었다. 말 그대로 선남선녀 커
플이랄까.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러움을 담고 오래 머물다 갈 만큼, 썩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 9년 동안 그저 '친구'일 뿐이었다.
편하고, 말도 잘 통하는 오래된 친구. 오해도 숱하게 받았고 서로의 애인들조차
그들의 사이를 의심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친구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기
로 계약이라도 맺은 듯 쿨하게 지내왔었다. 남들의 시선은 가볍게 무시로 일관하
면서.
그러나, 스스로의 마음의 소리는 그렇게 가볍게 무시할 만한 물건이 결코 아니었
다. 너무 오래 '친구'로 지내와서 이 관계에 변화가 오는 것이 어쩌면 두렵기까지
조차 하지만, 또한 너무 오래 참아왔다. 감정이라는 것이 억누른다고 얌전해지는
물건이 또 결코 아닌 관계로, 이젠 억누를 힘도 다 소진된 상태였다. 적어도 신은
그랬다. 집에서 자신의 결혼 이야기가 거론되었을 때부터,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른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었다.
"어이."
"왜?"
라면을 먹으며 무심하게 대꾸하는 채경과 그런 채경을 유심(?)하게 보는 신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넌 집에서 별 말 없냐?"
"무슨 말?"
"결혼 말이야."
마지막 면발을 건져올리던 채경의 손이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어?"
채경의 말에 오히려 어리둥절해진 건 신이었다.
"응?"
"집에서 선 보라고 난리인 거, 어떻게 알았냐고."
신의 눈이 확 커졌다.
"날마다 전화를 해대시는데 아주 미칠 지경이다."
정초에 엄마의 엄숙한 선언이 있었다. 이제 너도 내일 모레면 서른이라며, 서른
전에 무조건 보내고 봐야겠다는 엄마의 말을 처음에는 가볍게 여겼었다. 그러나
봄으로 접어들면서 정말로 끊임없는 전화가 이어졌다. 서른 전후의 남자들을 줄
줄이 엮어오는 폼새가 순간 마담 뚜로 나서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 대한민국 미혼남의 신상정보는 죄다 엄마의 손에 쥐어진 모양이었다.
"선... 볼 거야?"
그의 흔들리는 표정을 보지 못한 채경이 역시 무심하게 대답했다.
"보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지. 내가 거절을 하건 퇴짜를 맞건
엄마의 잔소리가 또 끊임없을 테니까. 내가 싫다고 하면 어디 돼먹지 못하게 눈
만 높아서 감히 퇴짜를 놓냐면서 그만한 신랑감을 또 어디서 구하겠냐고 들들
볶을 것이며, 내가 퇴짜를 맞으면 대체 행동거지를 어떻게 했길래 그러는 거냐
며 또 들들 볶을 테니까."
채경이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을 보는 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채경의 모친의 모습이 그에게도 자연스럽게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난 전생에 멸치였나봐. 사람으로 태어났어도 계속 들들 볶이다니. (한숨) 그 놈의
결혼! 아주 지긋지긋하다."
멸치라는 말에 픽 웃다가 뒷말에 정색하는 신.
"결혼이 지긋지긋해? 너, 독신주의였어?"
신의 질문에 채경은 눈을 크게 떴다.
"독신주의? ..............내가 그랬나? 아, 그래서 결혼 생각이 별로 안 나는 거였나?"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신이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말하자 그냥 하하 웃어버리는 채경이었다.
"그러게."
국물까지 말끔하게 다 마신 채경이 빈 사발면 용기를 내려놓으며 불쑥 물었다.
"너도 집에서 재촉하니?"
신도 무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뭐, 네 말대로 우리 나이가 나이니만큼, 집에서야 결혼 생각을 안 할 수 없겠지."
이 녀석의 상대라면... 모르긴 몰라도 대단한 집안의 딸들일 것이다. 저 녀석의 출
신성분이 비록 정품(?)은 아니지만, 본가의 배다른 형제들 중에 큰 형님을 제외하
고 그만큼 뛰어난 능력자는 없었다. (큰형을 제외하고는 능력자는 아예 없다고 보
는 편이 맞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서라도
그런 결혼을 당연히 시키고 싶어할 것이다. 역시 큰형님은 또 제외하고-큰형과
신은 의외로 사이가 좋다-정품 자식들은 모두 저 녀석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으
니 말이다.
만약, 신이가 결혼을 한다면... 갑자기 막막해지는 이 기분은 또 뭔가. 당연히 앞
으로 생길 일이고, 친구로서 마땅히 축복해줘야하는 일인 것이 분명한데, 내 마음
은 왜 이렇게 불편해지는 걸까. 채경은 후식으로 산 캔커피만 괜시리 만지작거리
다가 마치 어지러운 생각을 마셔서 없애버리려는 듯 벌컥벌컥 마셨다.
캔커피를 들어 벌컥벌컥 마시기는 신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조심스레 내미
는 사진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서 마음에 둔 사람이 있으니 그런 식의 정략결혼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은 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아무 것도 모르고 나
를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고, 나 자신은 그런 사람의 곁에서 마음 한 자락도 비추
지 못하고 빙빙 겉돌고만 있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뚝뚝하고 마음도 강철로 만들어졌을 것 같은 아버지가 결
혼에 대해서는 내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는 점이었다. 정말 뜻
밖이었다. 평소 하는 걸로 봐서는 그냥 밀어붙이실 줄 알았는데. 어쨌든, 이제 문
제는 저 고집쟁이, 신채경이다.
"하아..."
동시에 한숨을 내쉬는 두 사람.
"우리네 인생이 왜 이렇게 된 걸까."
"내 말이."
잠시 뜸을 들이던 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결혼할 생각 없어?"
"글쎄... 지금까지 살면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별로 없어서. 이 사람
이다, 란 생각도 든 적 없고."
"..............."
"넌, 그 많~은 여자들 중에 이 사람이다, 란 감이 온 여자는 하나도 없었던 거야?"
채경의 장난기어린 물음에 신이 인상을 썼다.
"그 많은 여자들이라니. 내가 무슨 카사노바냐?"
"어, 그거 네 별명이었잖아. S대학 최고의 카사노바, 이신."
그의 인상이 더 안 좋아졌지만 반박은 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 오는 여자는 웬만
하면 안 막고, 가는 여자에겐 사뿐히 즈려밟고 가라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것은
분명 사실이었기에. 그러나,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없었다. 그 이유가...
"난, 네가 지난 날에 한 짓을 몽땅 다 알고 있다~라는 명제를 잊지 말거라. 수틀리
면 만천하에 다 불어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앞에서 의뭉스럽게 씨익 웃는 너 때문이었다는 거. 말하면 믿어줄까.
"완벽한 이팀장의 실체를 알게 되면 아마 회사가 네 팬들의 눈물로 잠길 거다."
내 마음도 모르고 키득거리면서 농담만 하는 너. 바로 너 때문이라고.
"협박은 중죄야."
"협박이라니. 애정어린 충고일 뿐."
"하~ 두 번만 애정이 어렸다가는 아주 날 잡아드시겠다."
"널 먹어?"
채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신의 군더더기 하나 없는, 보기좋은 긴 몸을 훑어내렸다.
"살이 없어서 됐음이야."
"협박에 성희롱까지 추가다. 아무래도 형을 좀 사셔야겠는데요."
"성희롱? (하~) 말도 안 돼. 난 단지 관찰을 한 것 뿐이야. 따라서, 난 무죄야."
"좋은 변호사나 구해놔. 곧 연락 갈 거니까."
"네가 그러고도 친구냐?"
친구란 말에 순간 멈칫했지만 신은 곧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너야말로 그러고도 친구냐? 대학 졸업하면서 방랑생활 깨끗하게 청산한 거, 니
가 더 잘 알잖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지. 제 버릇 남 주랴, 라는 속담도 있고."
이런 식의 말싸움에서 별로 이겨본 적이 없는 신이었다. 어째, 지금도 상황은 그
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과거를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그녀가 이
럴 때만큼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다 자초한 일이니 남을 탓할 수는 없는 일. 자
신이 뿌린 씨앗은 자신이 거둬야하는 법이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저 고집쟁이
가 쉽게 마음을 열어줄 것 같지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말해봤자 어디서 익
은 밥 먹고 설은 소리나 하냐며 핀잔이나 던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길. 산들산들 불어오는 봄바람을 기분좋게 느끼면서 걷던
채경에게, 옆에서 나란히 걷던 그가 입을 열었다.
"채경아."
"응."
3초 정도의 텀이 흘렀을까. 그가 불쑥 말했다.
"우리... 결혼할까?"
(뭐라고 했냐, 시방?)
(뭘 그렇게 놀래나~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는감?)
첫댓글 ok...좋아요.....죽나가줌이.....다음 기대합니다...궁필통병....예쁜연휴..되세요..
오호 뉴글 !!!간만에 눈이 호강하는군요...열글!!
그래 결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