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스토시야 성당을 다 같이 보고 나서 가이드가 한 시간 채 되지 않는 자유시간을 준다.
밴드멤버들은 여자들로서 도시의 역사나 성당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곳에서 파는 옷이나 기념품
들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혼자서 성 스토시야 성당에서 동남쪽으로 나 있는 골목길을 가보기로
하여 걸어가는데 교회(성당)들이 많이 있다.
동유럽은 로만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성당들이 공존하고 있는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가운데를
남북으로 갈라서 동쪽은 동방정교회, 서쪽은 로만가톨릭이 자리를 잡았는데 쟈다르는 로만가톨릭
지역이지만 동방정교회도 이곳에 있는 것이 보인다.
길 양옆에는 기념품을 파는 가게와 음식점들이 있고 환전소와 조그마한 광장들이 있으며 길의
끝에는 로마시대의 성문터가 있고 성문의 머릿돌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쟈다르 성안의 중심거리...관광객들이 차고 넘친다.
길 가의 노점상들
아주머니들의 눈길을 사로 잡는 의류들...
뒤로 돌아본 도나투스 성당의 종탑...조금전에 정오의 종이 울렸다.
잏행 중의 한 사람은 늘 발걸음이 빨라서 단체사진(?)에서 사라진다.
전에는 교회였던 곳 같은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앞 광장은 피플 광장이다.
로마시대의 기둥이 지금도 남아 있다.
숲이 있는 곳으로는 출입금지를 해 놓았다....저 안이 다섯 우물이 있는 광장이다.
로마시대의 성문터라는데....
200미터가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성당이 세 개나 있다.
군데 군데 광장도 있고....
길거리에서 공예품을 파는 할아버지
더 가보고 싶지만 출입을 금지하기도 하고 시간도 없어서 되돌아 와서 성 스토시야 5성당과 마주보고 있는
성 도나투스 성당의 종탑을 올라가서 쟈다르의 전경을 보기로 했다.
발칸반도의 아드리아 해안 쪽에 있는 모든 도시들은 로마제국과 관련이 있는 도시들로 로마제국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흥미가 있는 도시들로 쟈다르 또한 그런
곳이다.
성 도나투스 성당은 9세기에 성당을 건축한 도나투스 주교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으로 한글
안내서에 되어 있으며 지금은 교회가 아닌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성당은
로만가톨릭의 형식이 아닌 비잔틴교회양식(동방정교회)으로 지어졌으며 터키의 소피아 성당과
같이 둥근 돔 형태로 지어져 있다.
그 당시에는 이곳이 콘스탄티노플의 지배하에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도나투스 성당의 종소리
교회로는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종탑은 지금도 종소리를 들려주고 있어서 우리가 성 스토시야
성당을 관람하고 나올 때인 12시에 우렁찬 종소리를 들려 주었다.
높이는 그리 높지 않지만 날씨도 덥고 시간도 없어서 급히 올라가서 종탑의 관람대에서 로마시대의
쟈다르 성 안과 주변 경치를 구경하고는 급히 내려 온다.
도나투스 성당
흔히 보던 성당과는 모양이 다르게 생겼다.
종탑으로 오르는 나선형 계단
네 개의 종
종탑에서 바라본 쟈다르
가운데 보이는 길은 조금 전에 다녀온 길이다.
쟈댜르 광장의 파괴된 로마유적들
지금은 음악홀로 쓰이고 있다는 성당 건물
로마시대의 건출물 터
이번 여행에는 일행들이 그리 많지 않고 가이드 속을 썩이는 사람들이 없어서 제시간 정해진 장소에
잘 모인다. 들어올 때와는 다른 문으로 나가서 자다르 시내의 조그마한 레스토랑으로
점심을 먹으로 간다.
레스토랑은 길가에 아담해 보이는 곳으로 이곳의 주인이 가이드와 친한 사람이라고 하며 전에는
다른 곳에서 레스토랑을 크게 했는데 이곳에 새로 조그맣게 오픈을 했다고 한다.
사장이 가이드와 우리를 무척 반가워하며 시원한 맥주를 각 한 병씩 서비스를 한다. 여태껏 여행을
하면서 식당 주인이 여행자들에게 통 크게 서비스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공짜로 얻어먹는
맥주라서 더 맛있다.
종탑을 배경으로
이번엔 골목에서...한 명은 득템을 한 모양이다.
마네킹 분장을 한 커플
점심 식사를 하러 가나(?)
들어올 때와는 다른 문을 통해서 성 밖으로 나간다.
로마시대의 성벽
약간 촌스럽게 생긴 레스토랑
리도라는 레스토랑의 사장이 맥주를 일인당 한 병씩 서비스를...술을 먹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서
횡재를 한 사람들도 있다.
촌스럽지만...공짜 맥주 때문에 즐거웠다.
식사를 하고 다시 해변가의 도시인 쉬베닉을 보기 위해서 출발을 하는데 쉬베닉은 이곳에서 90㎞
정도 떨어진 곳으로 한 시간 정도 가야 한다.
시베닉으로 ...
바닷가로 가지 않고 산길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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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투스라는 성당과 관련하여 도나투스라는 이름을 사전에서 찾아 보았더니 카르타고의 주교인
도나투스 밖에 나오지 않는다. 도나투스 성당이 4세기의 카르타고의 주교 도나투스와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타투스는 도나투스 논쟁으로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관심 있는 분은 아래를 한 번 읽어 보세여...
특히 기독교인들이라면....
도나투스 논쟁에 대하여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기 이전 그리스도교인은 종종 박해의 대상이었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는 통치 말기에 제국이 점차 쇠락하자 로마의 옛 신들에 대한
숭배정책을 구심점으로 삼아 로마제국 부흥의 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 303년경 로마의 옛 신들과 황제 숭배를 공공연히 거부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박해시대'가 시작되면서 교회는 파괴되고 성직자는 추방당하고 성경은 몰수되었다. 이 와중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하였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신앙을 포기하였고, 성직자 중 일부는 교회의 보물인 성경을 넘겨줌으로써 배교(背敎)의 길을
걸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는 2년 쯤 지속 되다가 그가 황제의 직위에서 돌연 물러남으로써
막을 내렸다. 박해가 지나가자 또 다른 문제가 교회를 혼란과 분열로 몰아갔다. 배반자, 특히 교회의
성물인 성경을 넘겨준 '배교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더욱이 그가 교회에서 양떼를 책임진
성직자라면 그 죄가 훨씬 무겁지 않는가?
배교자들에게게 관용을 베풀어야 할지, 엄격한 권징으로 출교(黜敎)시켜야 할지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312년 카르타고의 새로운 감독으로 카이킬리아누스가
선출되었는데, 안수위원 세 명 중 한 사람인 펠릭스가 배교자였다. 모진 박해의 시기 동안 고난을
감수하고 신앙을 지켜낸 '고백자'들은 배교자가 행한 안수의 효력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고백자들은 따로 모여 마요리누스를 새로운 감독으로 안수하여 세웠고, 그가 죽은 후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도나투스이다. 때문에 고백자들을 중심으로 한 무리를 도나수트주의자라고
부른다. 강경파인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배교자가 행한 세례, 성찬, 안수와 같은 성례는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온건파에 속한 사람들은 배교자라 할지라도 회개의 일정한 절차를
거친다면 다시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어야 하며, 성례란 그 자체가 효력을 지닌 은혜의 방편이지,
사람이 도덕성에 따라 효력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배교자가 행한 성례도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성례가 그것을 행한 사람에 따라 효력이 좌우된다는 인효론(認效論)과 성례 그 자체가
효력을 지닌다는 사효룐(死效論)이 팽팽하게 맞섰다.
도나투스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교회가 거룩한 성도의 모임이기 때문에, 배교자를 비롯한 범죄자
들을 과감하게 출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온건파는 이 땅 위의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혼합된 곳이기 때문에 지나친 순결주의는 교회의 보편성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일치를 파괴하는 분파주의로 빠지게 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도나투스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오히려 온건파의 원칙 없는 혼합주의가 교회의 교회다움을
무너뜨릴 뿐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배교자가 행한 세례가 효력이 없다는 강경파의 주장은 재세례
(再洗禮)의 필요성을 낳았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세례는 반복할 수 없는 성례이기 때문에 재세례
는
수많은 신학적 논란을 일으켰다. 16세기 재세례파 논쟁도 사실상 4세기 북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이러한 재세례 논쟁의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나투스주의 논쟁은 교회의 성격과 성례전(聖禮典)의 유효성 등을 둘러싼 신학적 다툼인 동시에
북아프리카 민족주의와 긴밀하게 연관된 정치적 논쟁이었다. 도나투스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주로 아프리카 토착 전통을 옹호하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누미디아와 모리타니아와 같이 농업에
기반을 둔 지역 출신인 반면에, 온건한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카르타고와 같은 상업 중심의 도시에 근거를 둔 경우가 많았다.
한 세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교회는 분쟁과 다툼에 휩싸여 있었고, 북아프리카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도나투스주의라는 누룩을 칼을 사용해서라도 제거할
수 밖에 없다며 '정당한 전쟁'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기까지 했다. 결국 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도나투스주의를 이단으로 금지하고 누구든지 도나투스주의를 따르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공표했다. 한 세기 동안 이어진 도나투스주의 논쟁으로 초대교회 중요한 축이었던 아프리카 교회는
그 영향력을 현저하게 상실하였고 이것이 이후 7세기 이슬람 세력이 아프리카에 진입했을 때 대륙
전체가 순식간에 이슬람의 수중에 떨어진 내적인 이유였다는 평가까지 있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지키려는 순결주의와 교회의 하나됨과 보편성을 지키려는
포용주의 사이에 갈등이 있다. 어떻게 하면 순수성을 지키면서도 하나됨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것은 어렵지만 이루려고 노력해야 하는 숙명과 같은 과제이다.
(인터넷에서)
우리나라에서도 일제 강점기 시대에 신사참배를 한 목회자들 때문에 해방이 되면서 교회가 교파가
분열이 되는 역사가 있었다.
첫댓글 일행 중에 성격이 급해 늘 혼자 먼저 가 버리기에 단체사진에서 빠지시는 분이 꼭 있죠.
특히 산행할 때.....
여행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소박한 국민성, 적절한 기온,
그러나 유서깊은 건물들을 많이
보유한 작은 나라 발칸 3국.
나에게도 추억의 글 입니다 ㅎ
일행들이 넘 머찌십니다 저도 아드리드해변을 마니돌아다녔네요 ~~
찍사로 따라 갔었지요...
그 해 8월에 중앙아시아 배낭여행을 다녀 와서 힘이 들었었는데 충성을 하기 위해서
따라 갔습니다.
이곳을 다녀 오고 나서 코로나 터지면서 3년을 나가지 못하게 되었었지요...
슬로베니아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지요..
이곳도 꼭 가 보아야 할 곳 중의 한 곳입니다..
멋진분들이 서있으니
유럽이 꽉찬듯 합니다.
활기가 있어보입니다.
그런분들과 여행하는건 즐겁지요.
자다르. .
바다.
저는 술은좋아하지않지만
그도시의 맥주한잔씩은
꼭 마셔봤습니다. .
유럽은 직접 그집에서 만든맥주로 고기잡냄세도잡고
맛도 순하고 좋았던기억있슙니다.
글을 주욱읽다보니
뽕망치님의 여행은
그냥눈흘기듯.지나치는법이없고
역사적현장.깊이있게 보시고
메모해서.마음으로
글을쓰신다는점 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현제의 고뇌를 이해하고
풀어나가는것. .
정치인들이 일깨워야될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