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가 큰 물고기의 배속에서 부르짖었던 외침은 시련 속에서 피는 꽃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고난은 혐오의 대상만은 아닙니다. 고난 속에는 실로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가 들어있습니다.
‘닥터 그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의 가장 좋은 일들은 때때로 슬픔이나 고난의 보자기에 싸여 있음을 발견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형통할 때 기뻐하고 곤고할 때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전7:14).
요나는 욥의 고난에 비견할 만한 큰 고난을 맛보았습니다. 문제는 이런 고난이 요나의 삶을 어떻게 변모시켰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요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응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2절)
고난당하기 전 요나는 기도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선지자였으면서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 전도의 사명을 받고서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풍랑이 엄습하는 가운데서도 선장으로부터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욘 1:6)는 기도의 권면을 받고서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전히 잠자는 신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물고기 뱃속의 숨 막히는 고난을 체험하면서 드디어 기도의 입을 열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결국 요나로 하여금 놀라운 사고의 변화를 체험케 했습니다. 기도하기 전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바다에 던져버린 줄 알았습니다(욘 1:15)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자기를 바다에 던진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손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은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3절)
이 깊은 깨달음은 그로 하여금 곤고한 중에서나마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 입장만 생각하던 그가 기도로 고난을 견디는 중에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한 단계 성숙한 신앙입니다.
요나에게 있어서 감사는 이런 과정 속에서 우러나온 신앙의 행위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9절)
참된 감사는 풍요의 산물이 아닙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참된 구원의 은혜를 맛봄으로써 우러나오는 신앙의 참된 표현입니다.
감사는 요나에게 있어 시련 속에 피는 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감사 신앙의 경지에 이른 요나를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로 하여금 물고기 뱃속에서 나오게 하시므로 축복의 문을 여셨습니다(10절)
얼마 전 국민일보를 보니까 맨홀에 빠진 4살짜리 남자아이가 하수관에서 사흘 만에 기적같이 구출된 기사가 있었습니다. 지난 11일 경기도 양주군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한 주부가 하수구에 물을 버리다가 하수구 속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같은 ‘우∼’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그것을 알려 이 마을에서 이틀 전에 실종된 한 집의 외아들인 것으로 생각되어 곧장 파출소에 신고를 했습니다.
이 아이는 길을 걸어가다가 맨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하수구 속에 빨려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신고 후 아이의 아버지가 도착하여 연신 아이 이름을 부르며 “찬웅아! 아빠다. 아빠왔다”고 외치자 밑에서 “추워, 추워”하면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119구조대가 굴착기로 1미터쯤 파내려가 하수관을 쪼개어 들어 보니 어린아이는 지름 30센티미터가 되는 하수관 속에 끼여 온몸이 파랗고 싸늘한 채 길게 누워 울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팔꿈치와 허벅지에 긁힌 상처만 있고 부모를 알아 봤으나 두려움에 질려 말을 못하고 병원에 실려 갔다는 기사인 것입니다. 사흘 동안 하수관 속에 꼼짝 못하고 드러누워서 울고 있던 어린아이가 구출을 받았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이 기사를 읽을 때 마치 현대판 요나의 기적을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의 고통과 고독과 절망감은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도와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지중해 밑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요나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어느 곳에서 기도하든 진심으로 기도하는 소리는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응답을 요나의 마음속에 심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요나의 현실은 너무나 암담했습니다. 좁은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물고기의 심장소리를 계속 들어야 했고 물고기 위장의 꿈틀거리는 요동 속에 있어야 했습니다. 물고기 위장이 뿜어내는 퀴퀴한 소화액 냄새를 맡아야 했으며 빛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감각으로나 이성으로나 경험으로 비춰볼 때 구원의 여망은 전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여기에서 영적인 맹렬한 전쟁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즉 현실을 받아들이고 절망하여 죽을 것이냐,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믿고 현실을 극복하고 살아날 것이냐는 무시무시한 현실과 믿음의 괴리 속에서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놀라운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현실을 거짓되고 헛된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만다’ (8절)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고 감사드리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9)이라고 그는 외쳤습니다. 그는 영적전쟁에서 이겼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경험에서 우리가 배워야 될 몇 가지 사항을 나누고자 합니다.
1. 내 안에 이런 외침이 있는가?
하나님을 향한 이런 외침 말입니다.
나를 가둬둔 환경 속에서 이렇게 부르짖는 소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삼켜버린 곳에서 이런 외침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피가 토해지는 외침이 있어야 합니다.
요나가 어떤 소리를 질렀겠습니까?
가만히 속삭였겠습니까?
소곤소곤 거렸겠습니까?
요나는 피를 토하는 외침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이 외침이 있는자는 살아납니다.
나의 형편과 처지를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지금의 내 처지를 수긍하지 마십시오.
현실에 갇혀 있지 마십시오.
거대한 세상에 갇혀 있음을 느낄 때에 외치십시오.
여러분의 심성에 부르짖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픈만큼 크게 외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외치십시오.
저울공장 사장의 IMF극복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다니는 교회의 예배당을 건축하는데 성전 건축에 10억을 작정했습니다. 그러다가 부도가 났습니다. -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공장의 직원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공장이 불났습니다! 빨리 오십시오.” 전국적인 금모으기 운동에 저울이 필요해서 저울을 만드느라 온 직원이 철야하면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안에 뜨거운 기도가 나와야 합니다. 내 입술에 뜨거운 입김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외침을 들으십니다.
2. 영적전쟁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영적 전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입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으니 우리는 진리를 가지고 자유를 선포하고 우리를 포박하려는 거짓되고 헛된 것을 내어 쫓아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으므로 마음에 믿은 것을 입으로 자꾸 이야기하고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18장 20절로 21절에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서 나온다고 하니 입술의 고백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입술의 고백에 달렸습니다.
‘내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리라’고 했는데 무엇이 매고 풉니까? 입술의 고백인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매면 하늘에서도 부정적으로 매일 것이요, 긍정적으로 매면 하늘에서도 긍정적으로 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진리를 강하게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깊이 감사하십시오.
요나는 하나님을 믿은 이상 물고기 뱃속에 있는 현실을 거짓되고 헛된 것으로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감사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항상 찬미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14절로 15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 감옥문에 진동으로 열렸습니다.
요나는 감사로 요나를 삼킨 물고기의 배를 열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죄제, 속건제, 감사제, 번제물, 화목제를 드렸지만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한 제물이 되셨으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갇힌 삶의 환경에서 감사의 향기가 하늘 보좌에 진동하도록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문제 즉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던 체험이 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오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고 맙니다. 나를 가둬둔 곳에서 나와야만 합니다. 그리고 나올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멜 테리 선교사가 쓴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이라는 책에는 전도팀이 토착신을 섬기는 마을에 전도하러 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마을에 들어가니 토착신을 섬기는 제사장이 나와 “만일 우리에게 예수 신을 전하고 싶으면 예수가 우리 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 토착 신 제사장은 천여 명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 자리에서 “너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먼저 예수신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멜 테리 선교사님은 같이 간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예수의 보혈을 의지해서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은 떠나갈지어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가라” 말했습니다.
그러자 맨 앞에 있던 토착신 제사장이 덜덜 떨면서 하는 말이 “선생님, 나는 당신들이 섬기는 예수 신을 믿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왜 그러시오?”라고 물었을 때 제사장은 “당신들이 지금 그 말을 하자마자 내가 섬기던 신들이 모두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마을의 제사장으로써 늘 신들과 대화를 해왔는데 당신들이 예수 이름으로 떠나가라고 명하자 이곳에 있던 가장 큰 신부터 작은 신까지 ‘우리가 이곳에 머무는 것을 예수가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외치며 모두 달아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내 앞에서 전부 달아나 버린 신들을 믿었다가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예수 믿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온 마을사람들이 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전쟁에서 예수의 보혈을 의지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그 능력이 아무리 커도 우리에게서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고,
마귀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억압할 때가 있습니다. 귀신의 억압으로 가정에서는 불화가 끊이지 않게 됩니다. 날마다 싸움과 분쟁이 있고 절망과 우울함이 가득 들어차 있을 때 이러한 귀신을 물리칠 가장 좋은 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사밧 왕이 모압, 암몬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나라가 위태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난 다음 적군들 앞에 나가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역대하 20장 22절로 23절에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야훼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 죽였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할 때 하나님은 일하시고 천사들이 동원됩니다. 천사들은 우리의 찬송 가운데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창세기 28장 12절에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찬송이 바로 그 사닥다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찬송을 하면 모든 마귀의 억압이 구름이 떠나가듯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취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우울하고 화가 나고 낙심이 되면 이때가 마귀가 억압하는 때인 줄 알고 바로 ‘주를 찬미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찬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미합니다. 십자가를 찬미 합니다’라고 찬송을 부르면 마귀가 떠나가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를 노리고 있으므로 우리가 대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로 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어느 곳에 가나 기승을 부립니다. 마귀는 귀신들과 함께 각종 매체와 방송과 신문, 잡지를 통해서 그리고 사람의 말을 통해서 어찌하든지 우리의 마음을 억누르고 우리에게 잘못된 정보를 가져와 우리가 세상을 따라가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마귀를 대적하여 쫓아내므로 하나님의 생명 속에 살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