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연합왕정
0410277 오형석
주변국의 압력과 내부의 필요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부족연맹체제를 벗어나 좀더 강력한 왕
국을 형성할 필요가 있었고 그리하여 사울로부터 솔로몬에 이르는 연합왕국이 형성되었다.
이스라엘인들에게 가장 ‘황금기’였던 이 연합왕정시대를 연구하는 것은 쉬우나 쉽지 않다.
풍부한 성서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 확보가 유리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성서에
만 사료를 의지해야하는 고로 정확성과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성서의 기록이 다분히
의도적이고 편향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때문에 문학 비평과 고고학적 방법론을 도입함에 있
어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 최대주의자들과 최소주의자들의 견해가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건 어느 정도 당연한 것 같다.
1. 사울(기원전 1030?-1009년경)
사울은 북쪽에서 이주해온 해양민족중의 하나로 생각되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 이들 해양민족이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남방에 정착하고 그 세력을
넓히면서 팔레스타인 중부산지에 있던 이스라엘의 세력과 부딪히게 된 것이다. 아벡에서 부
딪힌 두 세력의 두 차례에 걸친 싸움에서 블레셋이 승리한다. 그들이 가장 발달된 군사장비
를 사용했기 때문인 것 같다. 결국 이스라엘은 언약궤마저 빼앗기고 그들의 영토를 일부 블
레셋인들에게 내어주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울이 왕으로 등장하게 된다.
사울의 왕위 취득에 관한 전승은 3개의 다른 이야기에 나타난다. 각각의 스토리는 다르지
만 공통적으로 사울은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임명되어 기름부음을 받는다.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로부터 카리스마적 권력을 위임받은 사울의 임무는 이전의 지도자들이 그러했듯이 해
방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전사’로의 왕의 역할을 수행했다. 왕위에
있는동안 끊임없이 큰 싸움을 했다고 한다. 주된 것으로 생각되는 블레셋과의 대립뿐 아니
라 모압/암몬/에돔/소바/아말렉 등과의 전쟁도 성경에 언급되어있다. 특히 아말렉과의 전투
가 특이하게 언급되는데,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죽여서 바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은 까
닭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계기가 된다.
사울의 시기에는 아직 이스라엘이 철기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한것 같다. 그리고 가족중심의
소규모 부족국가 시스템을 구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경의 사울에 대한 기사는 다분히 편향적이라고 생각된다. 삼상 16-27장의 주제가 사울
과 다윗의 대립인데, 이 기록의 대부분이 다윗쪽의 인맥에 의해 작성되었기 때문에 신뢰도
가 그리 높을 수 없다. 이 부분의 이야기들은 다윗의 관점에서 쓰였기 때문에 다윗의 행동
--관점에 따라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것으로 보이는--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
다.
블레셋 이외의 세력과의 전쟁은 역사성에 대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는다. 강력한 세력중
하나인 블레셋과 대치하던 형국에서 다른 곳에 여유를 쏟을 수 없었고, 사울의 세력은 생각
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이렇게 역사적 근거가 빈약하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사울이 왕국을 경영했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성서기록을 통해 알 수있는 사울의 왕권은 그 고고학적인 근거를 남기지 않았다. 고고학에
서는 기원전 1000년경까지의 이스라엘 사회가 조직화되지 않은 농부와 목축업자 중심의 사
회였음을 보여준다. 대조적으로 동일시대에 블레셋의 문명은 도시의 발달에 의해 번창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력불균형속에서 사울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고 그 왕위는 다윗에게로 넘
어가게 된다.
2. 다윗(기원전 1009/1001-969년경)
다윗에 이르러 비로소 이스라엘 역사는 고고학적 근거를 갖기 시작한다. 부족연맹체가 국
가적 실체로 등장하고, 강력한 1인중심의 통치로 변모되었다. 물론 크나우프등의 반론을 감
안할 때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라던가 고대국가의 발전모델에 따라 변화한 왕국이라고 보기까
지는 힘들겠지만, 일종의 정치권력으로서의 다윗왕조가 존재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기
원전 9세기 하사엘의 명문에서 잘 드러난다.
앞의 3장과 본문을 참조해볼때 다윗이 이스라엘의 중심권력에 섰으며 그의 통치가 철저하
게 미화되어 성경에 드러난 것은 약간 이상한 일이다.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이스라엘
지파(에브라임/므낫세/베냐민)중 하나가 아닌 변방의 유다지파의 수장이었기 때문이며, 길보
아 전투 당시 다윗은 자기의 몸을 적국인 블레셋의 도시인 가드의 왕에게 의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사울의 밑으로 들어간 일은 2가지 전승에 드러난다. 첫 번째는 사울이 자신의 병기
드는 자로 그를 불렀음이고(16:14-23), 두 번째는 골리앗을 격퇴시킨 후 본격적으로 부각
된 다윗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자 사울에 의해 구팽당했고 그는 길
고 긴 도피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유다 여러 지역에 숨어 지내다가 결국 블레셋으로 망명한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의 밑에서 지내다가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후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으로 등장한다. 이스보셋과의 잠시(2년간)의 분쟁이 있은 후 다윗은 연합왕조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를 방해하려 했던 블레셋의 도전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에 도읍한
다윗은 언약궤를 가져왔고, 야훼종교는 이스라엘 온 민족을 단합시켜주는 계기가 된다.
여러차례에 걸친 전쟁을 통해 블레셋/모압/암몬/에돔 등과의 전투에서 계속 승리한 다윗왕
국의 세는 더욱 커졌고, 팔레스타인의 국제적 교역로를 통제함으로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
로 부강하게 되었다.
미숙한 초기국가
다윗왕국은 강력한 일인통치 혹은 일종의 제국의 모양새를 갖췄지만 중앙행정조직이 정비
되어있지 않았다. 다윗이 성전건축을 위해 실시했던 인구조사는 내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
혔고, 그 아들 솔로몬에 의해서 비로소 폭넓게 실현되었다.
계승의 문제
사울의 뒤를 잇는 연합왕국의 왕으로서, 다윗 다음의 왕위계승의 문제는 국가 전체에 중요
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었다. 비록 강력한 왕국을 세웠지만 왕조의 문제는 불안했다.
사울의 혈맥인 미갈과 므비보셋을 감시하고 천대함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울의 자손들
중 일곱명을 기브온 사람에게 보수를 위하여 내어줌으로서 유다지파와 이스라엘간의 갈등이
내재적으로 커져가고 있었다. 또한 압살롬의 반란으로 대표되는 내부의 문제도 있었고, 더
욱이 그 일들이 이스라엘 지파간의 경쟁에 의한 표출이었다는 점에서 다윗의 왕권은 불안하
기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솔로몬에게 양위하였지만 불씨는 아직도 있었다.
다윗왕조에 대한 성서기록의 평가
후대에 첨가된 부분이 있으며, 기록자가 다윗과 솔로몬에게 좋은 쪽으로 편향적 서술을 했
다는 점이 문제로 등장하지만, 이 기록은 어느정도 신뢰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수는 없다. 예컨대 솔로몬의 왕위승계에 대한 기사나 다윗의 세력범위
에 대한 것이다. ‘정치적 통제’와 ‘군사적 승리에 의한 굴복’은 다른 개념인데 성경에서는 모
호하게 등장하며, 모든 국제정세를 다윗왕조에 유리하게 편집서술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고대국가들 사이에 불안하게 존재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강력한
왕권으로 통일하고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고대 근동의 패권국가로 이스라엘을 성장시
켰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는 또한 수천년동안 이어진 야훼종교의 기초를 놓았다.
3. 솔로몬(기원전 970/969-931년경)
다윗이 전쟁을 수행하고 확장해놓은 영토에서 솔로몬은 이 영토를 공고히 하고 왕국의 행
정을 조직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등극 초기 아도니야와 시아문의 위협을 극복하고 본격적인 국가 정비를 시작한 솔로몬은
외교적으로는 정략결혼을 통해, 내부로는 행정의 재정비를 통해 국가조직을 공고히 했다.
중앙 내각을 정비하고, 열두개의 행정구역으로 국가를 나눈후 총독을 두는 시스템을 통해
중앙집권형 정치를 보다 명확히 추구했다. 이 솔로몬의 중앙집권 시스템에서 조세와 부역의
부담이 상당히 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이 적었던 이유로 전리품은 많지 않았지만, 교역루트의 개발을 통해 솔로몬의 왕국은
부를 누리기 시작한다. 팔레스타인을 낀 교역로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중개무역 등을 통해
이윤을 축적했다.
전쟁이 많지 않았으나 군대를 현대화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전차부대를 도입하고 주
둔지를 건설했다. 그리고 토목/건축의 업적으로는 예루살렘의 방어벽을 세우고 하솔, 므깃
도, 게셀의 세 요새를 건설했다. 성전을 건축하고 자신의 왕국을 만들고, 밀로를 세웠다.
겉으로 보기에 솔로몬의 왕국은 번성했지만, 과중한 노역과 내 외부의 불안한 상황은 그의
집권후반기와 차기에 결정적인 악영향으로 작용한다. 더욱이 야훼신앙을 가졌던 이스라엘
국가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외국인들과 정략결혼을 한 것이 성서전승을 통해 강하게 비판되
고 있다.
성서와 역사
역시 성서 이외의 사료적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 대부분 그를 전형적인 현군으로 묘사하
고, 장점만을 부각시킨다. 때로는 있지 않은 사실을 첨가해가면서까지 솔로몬을 정당화하고
찬미한다. 스바여왕의 이야기도 그러한 맥락에서 첨가된것 같다. 그렇지만 그런 아부를 걷
어내고 좀더 RAW text를 들여다볼때 성서전승은 어느정도 신뢰성을 가진다. 이 시기의 종
교사에 대한 성서 외적인 지식을 가지고 성서를 들여다보면 솔로몬의 통치에 대해 보다 객
관적인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집트와의 관계
시아문의 공격, 애굽공주와의 혼인 등 이전 다윗시대와는 다르게 솔로몬의 시대에는 애굽
에 대한 언급이 자주 있다. 또한 조정의 조직과 광역행정구역의 모습이 비슷한 것 등을 볼
때 이스라엘과 애굽의 관계를 추론할 수 있다.
솔로몬의 통치에 관한 성서기록에서 언급되는 또 하나의 파라오는 시삭이다. 시아문이 강
화를 통해 어느정도 평화적 세력균형을 유지하던 것에 반해 시삭은 이스라엘의 모든 적을
지지했고, 르호보암때는 직접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시삭의 위협은 당시 쇠퇴의 기미를
보이던 솔로몬 왕국에 영향을 미쳤다. 방어를 위해 더 많은 돈을 써야했기 때문에 재정적
궁핍을 심화시킨 것이다.
스바여왕과 오빌원정
당대의 아시리아 문서를 참조할 때 스바의 공식 사절단이 예루살렘으로 왔을 개연성은 충분
하다. 스바 여왕에 관한 이야기가 솔로몬을 찬양하기 위해 쓰인 것이지만 그 사실의 가능성
까지 부인되지는 않는다.
기록
금석학적 유물로 거의 유일한 것이 게셀 월령이다. 이것 빼고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되는데,
다윗/솔로몬 시대의 문학창작은 주로 국가의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
이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을 통해 실제적 역사가 다윗/솔로몬 시대로부터 추정되는 것도 다
양한 전승이 결합되어 기록으로 자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J문서가 기록된 것이 빠르게는
이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솔로몬의 저작등으로 추론해 볼때 왕정이념을 전하기 위한
문서(잠언/전도서 등)에 관한 창작이 등장했을 것이다.
고고학적 근거가 솔로몬의 건축활동과 이스라엘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준다. 10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집중적으로 요새와 새로운 도시등이 건설되었다. 고고학의 관점에서 이 시
기는 촌락중심의 사회에서 도시중심의 사회로 변해가는 과도기적 시기라고 하는데, 이것은
경제적 성장과 그로 인한 평화와 번영의 시대에 대한 근거로 생각된다.
사회적 긴장과 갈등
이처럼 급속하게 발전하는 가운데 내부의 불만도 많았다. 북이스라엘 지파들의 상대적 박
탈감과 과중한 부역, 이방 문화의 혼합 등에 의해 불안하던 다윗/솔로몬 왕조는 다음세대의
실수를 통해 그 취약함을 드러낸다. 결국 다음 세대에 이르러 분열왕국으로 가는 단초가 된
것이다.
-질문-
1. 예전에 어떤 주석에서 사울 시대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영역이 정확하게 나뉘어 있던
것이 아니라 두 민족이 같은 땅에 혼재했다는 이야기를 봤던 것 같은데(근거구절 삼상
13:19-22) 이 이론에 대해 혹시 자세히 알고 계시면 설명 부탁드립니다.
2. 사울과 사무엘에 관한 전승 3가지가 있는데 본 내용에서는 3가지를 별도의 전승으로 서
술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에서의 ‘연결된’ 관점도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고
생각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 저자가 마지막 전승에만 무게를 싣는 근거를 알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역사4>
- 연합 왕정 (사울, 다윗, 솔로몬)-
앙드레 르메르(ANDRE LEMAIRE)
Ⅰ. 도입
만약, 이스라엘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를 꼽으라면, 모두 연합왕국이라고 답할 것이다. 역사
의 주변부에 있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왕국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윌리엄
E. 에번즈는 “그 추진력은 .... 블레셋의 위협 이었다”라고 이야기 한다. 물론 블레셋도 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단 브렛셋민이 아닐 것이다. 주변의 암몬, 내부의(사회, 경제,
인구학적) 압력 등의 요인이 있었으리라 예상한다. 이렇게 생긴 연합 왕정은, 한 세기 동안
(기원전 1030-931경) 지속되었다. 사울, 다윗, 솔로몬 이라는 세 명의 강한 인물이 권좌에
앉았다. 그 후 연합 왕국은 북부의 이스라엘과 남부의 유다로 나뉘게 된다.
사울의 집권당시, 소규모의 영토로 시작해서,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아래 이스라엘은 영토
확장을 계속해서, 주변의 속국들을 거느릴 수 있게 되었고, 큰 규모의 통일왕국이 되었다.
다행히 이 시기의 성서기록은 어느 때 보다 풍부하지만, 이것이 역사 재구성에 있어서는 난
제이다. 다양한 자료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확신의 결여와, 성서기자의 의도적 진술, 역사로
서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J. 맥스웰 밀러는 이스라엘 기원과 초
기 역사에 히브리 역사를 사용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지적하며, 비평적으로, 다른 증거와 더불어 사용해야함을 강조하였다. 그러하기에 이
시의 역사를 살펴봄에 있어, 전승들의 차이점, 고고학적 접근(최대주의, 최소주의견해)들을
성서기록과 비교함에 있어, 접근의 신중성이 요구된다. 이제 각 왕의 통치에 따른 다른 양
상의 문제를 살펴보자
Ⅱ. 사울
① 블레셋의 위협
사무엘상 15:10-11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사울은 대조적인 면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이스라엘 왕의 초대 왕 이었지만, 교만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은 모습, 사무엘과 다윗
이라는 인물 틈에서, 그의 모습은 왕 이라기보다는 정신질환자에 가깝다고 느껴질 정도다.
이런 자가 어떻게 왕이 되었을까? 성서기록은 그가 블레셋과 군사적 대치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것으로 묘사한다. 이때의 블레셋은, 이집트 명문에도 언급하듯이, 해양민족들(Sea
Peaples)중 하나이다. 외관상으로 해양민족들은 원래 에게 지방이나 아나톨리아 남부에서
온 것 같다. 이 해양민족들은 기원전 12세기 초에 시리아-페니키아 해얀의 수많은 도시들
을 파괴했고, 심지어는 이집트까지 점령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파라오 람세스 3세의
통치 제 8년(기원전 1177년경)에 육지와 바다에서 치러진 대규모 전투에서 저지되었다. (근
거: 테베 람세스 3세의 메디네트 하루신사의 벽에 그 전투를 묘사한 부조와 상형문자 기록
) 이로 인해, 블레셋은 이집트의 허락 하에 가사와 야파사이의 해안평원을 차지했고, 크페타
사람들은 네겝(개역성서의 ‘남방’)이라 불리는 곳에 정착했다. (삼상 30:14)
해안 평원의 블레셋 사람들은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의 다섯 도시 연맹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들은 청동과 더불어 철기무기를 사용하는 노련한 전사이었고, 이를 통
해 후에 블레셋이 북쪽 아벡 근처까지 군사적으로 확장하였고, 이스라엘 연맹이 차지하고
있던 영토와 가까이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1단계 전투가 벌어지고, 이스라엘이 패하여 사
천명 가량이 죽게 되었다.(삼상 4:2) 다시 이스라엘은 2단계 전투를 아벡에서 시작 하였고,
이때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가져왔다. 그러나 다시 패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언약궤까지 빼
앗기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에벤에셀 전투(삼상 4장)이후, 블레셋은 에브라임 산지 일부를
차지, 이곳에 수비대를 두었다.
② 사울의 선택
이렇게 위급한 상황 하에, 백성들은 마지막 사시인 사무엘의 지도력에 불신감을 표하며, 왕
이라는 존재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세편의 다른 전승으로 내려온다. 삼상
9:3-10, 삼상 10-17-27, 사무엘상 11:15에 기록된 세 가지 다른 전승 중, 세 번째 전승-
이스라엘 군대의 우두머리인 사울이 야베스-길르앗을 암몬의 공격으로 구해냈고, 사람들이
사무엘의 동의아래 길갈에서 사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전승-이 가장 믿을만하다. 이에
각 지파의 장로들은 사무엘을 찾아가“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
소서”(삼상 8:5)라고 요청하였다. 외관상으로 키가 크고 강인하여, 실제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던 경험을 미루어 보아, 이스라엘의 적들을 대항하여 전쟁을 잘수행할것이라고 생
각하고 그를 지명했던 장로들의 예상처럼 그는 믹바스의 첫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승리
로 이끌었다.
③ 전사사울
끊임없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사람들을 중심밖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한
듯 보인다. 그러나 블레셋의 공격은 계속되었으며, 이제는 경로를 바꾸어 남쪽으로부터 공
격해서 유다를 위협했고, 이때 다윗의 존재가 나타난다. (삼상 17장) 이때까지 산간에서의
전투가 승리했었다는 것과는 상반되게, 평지의 전투는 패했다. 그리고 성서의 다양한 기록
이 이스라엘의 재난에 대해 냉정한 한목소리를 낸다. (삼상 31:3-5, 삼하1:6-10)
이외에도, 모압, 암몬, 에돔, 소바의 왕, 아말렉과의 전쟁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사무엘은 아
말렉 전투에서 실수를 하고 만다. 당시 헤렘의 전통은 승리의 열매를 야훼에만 돌렸고, 사
무엘은 사울부대에 모든 아말렉 사람들과 가축을 죽이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
의 왕 아각과 아말렉 사람들의 가축들 중 가장 좋은 것을 살려둔다. 이 죄 때문에 사무엘은
사울을 규탄하면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시며, 영원히 버리셨다고
선포한다. (삼상 15:35)
④ 사울 통치에 대한 잠정적인 평가
전통적인 히브리어 본문마저도 사울의 통치기간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야기 해주고 있지 않
기 때문에, 그의 재임기간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구절 상 그의 통치기간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정보는 삼상 13:19-22과 삼상 14:49-50에서 알 수 있다. 이 두 구절
에서 알 수 있는 시대상은, 철제도구가 귀하고, 농부와 목자로 구성된 비전문화 사회라는
것과, 가족중심의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사무엘상 16-27에서 다윗과 대조를 이루는 부분을 통해서 가늠
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 은 이 장들의 대부분이 다윗의 동료이자, 제사장인
아비아달이나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기록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 장들에 대한 신뢰를 주는
정보도, 편향적이고 의도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 그래서 그의 통치에 대한 것도 역사적으
로 균형 잡힌 평가를 내리기 힘들다. 또한 사울이 치렀다는 여러 전쟁은 그 역사성을 의심
받고 있다. 모암, 에돔, 소바의 왕, 심지어 아말렉에 대해 대항하여 싸움 전쟁은 유다출신
역사가에 의해, 단순히 옮겨진 것 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블레셋과 비교해서, 형편없었던
사울의 군대가 본거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했음을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보아 사울과 그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힘들다.
그러나 확실한 점은 블레셋사람들이 남서부쪽에서 부터 중부산지로 침공하려 할 때 유다의
베들레헴에서 온 사람들이 사울과 힘을 합해 싸웠다는 사실(삼상 17:1)로 보아, 사울은 예
루살렘 남쪽에 있는 유다산지에서도 어느 정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이것은 다윗의 통치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연정 복선이 된다. 또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사람을 지도하기 위해 사울이 왕으로 임명 된 것 같다는 점이다. 사울의 왕국은
그다지 넓지 않았고, 에브라임 산, 베냐민, 길르앗 정도를 포함했을 것으로 보인다.
성서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울의 “왕권”은 고고학적으로는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므낫세, 에브라임, 베냐민 등의 산지나 이즈벳 사르타와 같은 유적들에 대한 조사와 발굴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농경지, 작은 노천, 노천 예배소등을 드러내 줄뿐이다. 그나마 기원전
11세기 중반에 대형화재로 소실되었다고 추정되는 실로는 블레셋 사람들이 에벤에셀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무찌르고 난후의 후속공격의 결과의 산물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로의
언급은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에서 단 한번 있을 뿐이다. (삼상 14:3) 고고학은 제1철기시대
말인 기원전 1000년경까지의 이스라엘 사회가 진정한 중앙 집중 조직과 행정이 없는, 기본
적으로 농부들과 목축업자들의 사회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의 인구추
산에 따르면 “기원전 11세기 말에 요단강 서쪽에 약 50,000명 정도가 살고 있었으며, 이와
는 대조적으로 기원전 11세기의 블레셋 도시문명은 번창하고 있었다.
사울의 통치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과 더불어 총체적인 실패로 마무리된다. 길보아 산에서의
대패 이후에 블레셋의 지배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란은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사울의
적수였던 다윗의 지도력 아래에서 블레셋으로부터의 독립투쟁은 다시 한번 시작되었다.
Ⅲ. 다윗(기원전 1009/ 1001-969년경)
다윗의 통치와 더불어 이스라엘은 국가적 실체로 등장하며, 지파연맹은 강력한 일인통치로
변모된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존재는 왕, 군대, 왕실 내각, 확장된 영토, 이웃국가들과의 관
계 등에서 확인된다. 이것은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 관해 말하기를 주저하는 마리오 리베라
니나 J. 알베르토 소진과 같은 역사학자들조차 기원전 1000년경부터 “이스라엘의 역사는
제의적 민간전승이라는 전(前)역사의 영역을 벗어나 진정한 역사의 무대로 들어선다”는 그
들의 말을 통해서 재확인 할 수 있다. 또한 기원전 9세기의 모압왕 메사와 다메섹의 하사엘
에 의해 쓰인 명문에서 다윗왕조의 외교적 공식 명칭 이을 것으로 보이는 베트다윗(Be
〔y〕t Dawid; "다윗의 집“)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① 모범적인 왕
다윗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7년 반을 헤브론에서, 33년을 예루살렘에서 다
스렸다”(기원전 1009/1001-969년경) 그의 통치기간은 후대에 이스라엘의 “황금기”로 여겨
졌고 다윗은 모범적인 왕으로 이해되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잘 알듯이(삼상 6:1-13) 다
윗은 이세의 막내아들이며, 사무엘의 기름부음으로 이날이후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었
다고 말하고 있다. 다윗은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에서 지지를 받았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다윗이 사울의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성서는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사울이 다윗을 그의 병기든 자로 삼아 자기를 섬기게 했다(삼상 16:14-23)는 것이고, 둘째
는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한차례의 전투에서 죽인 후(삼상17장) 사울 앞에 공식적
영웅으로 소개된다. 이러한 다른 진술은 사울 초기의 상이한 전승들의 융합임을 보여주고
있을 수 도 있다. 이렇게 등장한 다윗은 백성의 지지를 받았으며, 곧 사울에 대해 공모했다
는 혐의로 도망자의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은, 아비아달(실로의 제사장이었던
엘리자손으로 놉 제사장과 아히둡의 손자이며, 아히멜렉의 아들)과 선지자 갓등의 종교지도
자들과 함께 산간지방으로 피신했다. 이때 종교지도자들이 다윗과 함께 했다는 사실은 다윗
의 당파에서 야훼종교의 중요성을 시사해준다. 유다의 여러 지역과 블레셋 영토 등을 은둔
하던 다윗은 유다의 적인 아말렉 사람들과 싸움으로써 유다영토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
지하려고 힘썼으며, 곧 유다사람들이 기름을 부어 유다족속의 왕이 되었다.
② 다윗 왕
삼하3장에 이르러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이일은 결정적으로 블
레셋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들은 르바임 골짜기 근처와, 기브온 근처를 공격했으며, 다윗
은 두 번다 그들을 물리쳤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예루살렘의 여부스 사람들을 공격에서
당시 가나안의 수중이었던 그 도시를 빼앗았다(삼하 5:9)
얼마 후, 예루살렘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
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다윗은 언약궤를 다윗성 으로 가져왔다. 전승에 의하면 이 궤는 시
내에서 이스라엘과 동행했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실로의 성막에 있었고,
블레셋 사람들이 돌려준 이후에는 기랏 여아림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윗이 그 궤를
예루살렘에 가져오자 야훼종교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결속을 강화하는 통합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다윗은 재위 초기부터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분명히 했고, 이런 사실
은 제사장 아비아달과 선지자 갓이 신하로 있었다는 사실로도 확인된다.
다윗은 결혼을 통해 다양한 정치적, 국가적 관계를 공고히 했으며, 그의 조카인 요압 진두
하의 잘 훈련된 군대도 갖추었다(삼하 8:16) 이런 조직을 바탕으로 서부국경의 블레셋을 저
지한 후,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만만찮은 상대였던 암몬을 비롯해, 모압, 에돔과 싸워,
승리를 거둔다(삼하 8장2-14) 특히 암몬과의 전쟁에서 완승함으로, 암몬의 수도 랍바를 점
령하였으며, 이를 통해, 홍해부터 유프라테스 강의 만곡까지 정치적 통치영역을 확장했다.
이 국제적인 교역로를 통제함으로 이스라엘 왕국은 경제 강국이 되었으며, 이외에도 전리품
과 공물을 통해 더욱 그 부가 튼튼해졌다.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정한 후, 두로왕 히
람 조차도 그와 무역을 했다고 성서는 기술하고 있다(삼하 5:11-12)
③ 초기 국가의 미숙성
다윗은 보잘 것 없었던, 소규모 도시국가였던 예루살렘을 이스라엘과 유다연합왕국의 수도
로 바꿔놓았다. 공식적인 연합왕국의 경계는 단에서 브엘세바에 까지 이르렀지만, 여러 관
할 영토들과 종속 국가들을 합하면 그보다 훨씬 넓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듯 외적으로
는 엄청난 영토 팽창에 이르렀지만, 중앙의 행정 조직은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지배원
리는 조직화와 중앙 집중화였으나, 실질적 중앙 집중화 과정은 실제로 다윗 통치의 말년에
가서야 시작되었고, 후계자 솔로몬에 의해서 좀 더 폭넓게 실현되었다.
④ 계승의 문제
이 문제는 “계승의 역사”라고 불리는 삼하 6장부터 왕상 2장까지의 주요주제로서, 쉽지 않
은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엔 사울의 집안에 환심을 사려고 했으며, 사울의 딸인 미
갈과 결혼했다. 그리고 사울의 상속인인 므리바알(므비보셋)을 정기적으로 식탁에 초대했다.
자비를 베푸는 듯한 이 행동은 후에, 미갈을 버리고, 기브온 사람들에게 사울의 자손 중 일
곱 명에게 보복하도록 허락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또한 다윗집안 내부에도, 어미니 다른 여러 아들들이 왕권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으
며, 실제로 장남인 암논은 셋째압살롬에 의해 살해되었다(삼하 13)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켜
왕권을 강탈하고자 했으나,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에게 살해당함으로 끝난다. 이 두 왕자가
죽은 후, 아도니야가 다윗의 예비 후계자가 되었으나, 후에 밧세바 에게는 솔로몬이 왕이
될 것이라 약속했다. 그리고 실제로 선지자 나단과 제사장 사독 및 시위대장 브나야 등의
도움으로 솔로몬은 다윗생전에, 순리적인 방식으로 왕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다
윗은 숨을 거둔다. (왕상 2:10-12)
⑤ 성서에 대한 평가
동시대 비교문서가 없는 상황에서 다윗의 통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렵지만, 성서전승을
문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이런 사건들의 기록이 다윗 혹은 솔로몬시대, 그러니까 사건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록되었기에, 신뢰할만한 증거가 되는 것이라 추정한다.
물론 여기서도 의도성은 보인다. 실제로 다윗과 솔로몬에 대한 미화는 눈에 띈다. 다윗의
인간적인 성품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그의 왕권의 정당성을 표시하려고 한다. 솔로몬의 왕
위 계승 또한 밧세바 에게 약속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이것은 역사보다는 문학적 창작이
나, 밧세바와 선지자와 제사장들과 결탁하여, 쿠테타를 정당화시킨 흔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뿐 아니라, 다윗의 대외 정책도, 정치적 통제보다는 군사적 승리를 더 강조한다. 다윗왕국
의 영향력이 홍해에서 유프라데스 강까지 이르렀다 하더라도, 실제의 원거리 지역에 대한
다윗의 영향력은 군사적 위협에 주로 의존하는 명목적인 것에 불과하기도 했다. 성서전승에
서도 다윗의 통치는 전쟁으로 규명된다.
다윗의 통치에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는 파괴로 추정되는 가나안 도시들의 흔적을 제외하고
는 빈약하다. 단과 브엘세바의 자료는 10세기 초라는 의견이 지지받지 못하고, 예루살렘 오
벨 남쪽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파편들을 다윗왕의 궁궐의 것으로 보기보다는 솔로몬시대의
것으로 보는 입장이 강하다. 또한 다윗 성 동쪽 경사면의 “여부스 인의 경사로”도 아직 논
쟁 중에 있다. 그나마 다윗통치 연대의 적절성을 논하기에 적합한 헤브론과 유다산지조사는
다윗왕조의 급진적 발전의 일면을 보여주나, 10세 초엽의 연대를 결정하기에는 무리가 있
다. 10세기의 대부분의 건축 활동은 아마도 후반부, 즉 솔로몬의 통치 시기의 것으로 보인
다.
이모든 제한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통치는 영광스런 성취의 시대임은 확실하다. 아
시리아와 이집트가 약해진 틈을 강하고 현명한 인물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결합하고 예루살
렘을 공통의 수도로 삼으면서 이 통일을 그의 지배의 기반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 상황의 호기로, 다윗은 잠시 동안 이나마 고대근동의 강국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이
스라엘의 영역을 확장했다. 또한 그로인해, 수천년 동안 히브리 신 야훼의 숭배를 뒷받침할
종교적 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Ⅳ. 솔로몬(기원전 970/969-931년경)
① 솔로몬 통치에 대한 위협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이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왕으로서 입지 강화였다. 다윗의 장남
이자, 이미 후계자 임명을 한번 받은바 있는 아도니야의 존재는 솔로몬에겐 골칫거리였다.
결국 아도니야는 솔로몬을 대항하여, 음모를 꾸민다는 혐의로 처형되었고, 아도니야의 신복
요압, 사울가문의 시므이를 처형했다. 내부는 이렇게 솔로몬의 손에서 견고해졌다고 성서기
자는 전한다.(왕상 2:46)
이스라엘 외부에서는 시아문으로 추측되는 이집트 파라오가 통치자의 교체를 이용해 개입하
려고 했다. 그러나 곧 정책을 바꿔, 딸 한명을 솔로몬의 아내로 보내면서, 게셀 이라는 영토
를 신부 지참금으로 주었다. 이렇게 게셀 이라는 영토가 추가되었고, 그 외의 양적팽창이나,
정책의 변화는 없던 것으로 보인다. 솔로몬의 외부정책 중 하나였던 정략결혼으로, 암몬 여
인 나아마와 결혼하였고, 그 여인의 아들이 나중에 르호보암 왕이 된다.
이렇게 대내외의 입지를 강화한 솔로몬은 이제 왕국의 행정을 재정비 한다. 이런 솔로몬의
노력에 성서전승은 솔로몬에게 “현자”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그의 정책 중 하나는, 중앙
정부였고, 여기에 새로운 왕실내각이 임명되었다. 또한 관료제도가 전반적으로 더 복잡해지
고 더 널리 보급되었다.
② 솔로몬 통치기의 교역과 건설
다윗이 끊이지 않고 전쟁을 치뤘다면, 솔로몬의 통치는 비교적 평온했지만, 군대를 현대화
하려고 애썼다. 이집트에서 수많은 전차와 말들을 수입했다.
또한 건설활동으로 유명하다. 그는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벽을 세웠고, 하솔, 므깃도, 게셀의
세 요새를 건설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7년이 걸렸고, 자신의 왕궁을 건설하는
데에는 13년이 걸렸다. 솔로몬은 이런 건축물을 짓고 관리하는데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 외국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제노역의 의무를 부과하기에 이르렀다. 그
리고 이것은 솔로몬 통치에 대한 대중적인 불만을 초래하게 되었다.
솔로몬의 통치후반부는 이러한 내부불만들이 자라갔고, 외부의 위협도 생겨났다. 성서에 기
록된 바에 의하면 에돔사람 하닷과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이다. 또한 내부불만은 여로보암을
선봉으로 한 반란으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불만의 표출에는 아마도 많은 외국인 아내들의
다양한 종교에서 비롯된 백성들과의 마찰이었던 것으로 성서는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
히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고 있으며, 그의 통치기간을 40년으로 보고 있다.
(왕상 11:42)
③ 성서와 역사
솔로몬 역시 히브리문서나 고대근동 문서가 없는 상황에서, 전적으로 성서와 고고학에 의존
해야한다는 점에서는 다윗과 상이하게 역사적 평가는 어렵다. “솔로몬의 행장(왕상1-11장)”
은 솔로몬의 사후 얼마 후, 기록된 것으로 보이며, 여기엔 사라진 기록에서 발췌한 것으로
보이는 초기전승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왕상 9:26-10:13에 오빌진출과 스바여왕의
방문에 관한 두 개의 다른 문서전승의 결합이 보인다. 이는, 역대하와 열왕기상의 본문의
건설사업에 대한 지명차이와 전 후 문서의 과장, 아부 섞인 문체 등의 차이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사항은 대체로 믿을 만 하며, 성서외적 지식은, 솔로몬과 이집트,
페니키아, 스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고고학은 솔로몬의 통치기의 사회변화와 건축
가로서 명성에 대해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④ 이집트와의 관계
다윗과는 상반되게 이집트시대의 파라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또한 몇몇 연구에서는 솔로
몬 왕실의 조정구도와 12행정구역조직이 강력한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 있었음을 보여주었
다. 괴스타 W. 알스트룀은 야곱의 열두 아들과 이스라엘 열두지파에 관한 문서전승의 근원
을 12행정 구역의 조직에서 찾을 수 있다고 제안했고, 이것이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 이렇
게 된다면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개념은 이시대로부터 족장시대의 투사가 되는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왕상 11-26-42의 파라오는 ‘시삭’이라 불리며, 이는 22왕조의 창시자인
파라오 셰숑크이다. 시삭은 고대 이집트의 속주였던 가나안에서 이집트의 세력을 회복을 고
대했던 인물이며, 그의 재위 중 입장이 이스라엘과 적대적이었으며, 이스라엘의 모든적 들
을 지지 했다는 것 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여러보암의 반란군을 지지했음도 쉽
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⑤ 페니키아와의 관계
다행이 문서전승이 이스라엘과 페니키아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에베소의 메난더, 알렉산더
디우스 폴리 히스터, 요세프스를 통해 우리에게 전수되어 왔다. 이 작품들에는 페니키아 왕
들의 주요군사원정과 건축 활동에 대해 말하는 실제 두로의 문서나 연대기를 사용한 흔적이
드러난다. 물론, 역사적인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진정한 문서전승의 일
부이며, 동일한 연대기에 근거로 하는 등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히람
과 솔로몬 사이의 문화적 관계와 교역관계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다. 페니키아 사람들, 주로
두로 사람들이 기원전 제 1천 년대에 홍해의 해상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확인해
준다.
⑥ 스바의 여왕
현재 성서는 홍해를 통한 오빌원정의 이야기가 스바여왕의 원정과 얽혀있지만, 이 두 사건
에서 구별 지어야 할 것이 있다. 스바 여왕에 관한 이야기가 다양한 문학적, 전설적 소재를
내포하고 있으며, 솔로몬을 찬미하기 위한 목적은 분명하나, 스바여왕은 홍해를 정기적으로
왕복하는 페니키아-이스라엘 선적의 배들을 타고 온것이 아니라, 낙타를 타고 향료를 싣고,
남부 아라비아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왔을 것으로 보인다.
⑦ 에돔-혹은 아람?과의 관계
“에돔사람” 하닷과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에 관한 혼란스런 이야기는 아마도 다메섹의 초
대왕이며, 아람의 군주이며 엘리아다의 아들인 하닷과 관련된 역사적 전승의 왜곡된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아람지역에서 일어난 그의 반란을 통제하지 못했음에 나타난 왜곡으
로 보여진다.
⑧ 기록
게셀 월령이라는 자그마한 석회암석 판에서 농업활동과 관련된 기록이 씌여진 유물이 발견
되었다. 이러한 금석학적 자료의 희소성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솔로몬시대에는 문학창작이
중요한 시대였다. 학문적 토론, 역사 편찬 등을 위해 이러한 활동이 장려되었을 것이라 보
인다.
또한 솔로몬의 복잡한 국가행정 관리를 위해서, 식자층의 서기관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예
루살렘과 행정구역의 수도에는 서기관들이 존재했으며, 학교도 있었음을 가정해 볼 수 있
다. 물론 솔로몬이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라는 전승은 과장된 경향
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 시대에 왕정 이념과 관련된 히브리어 문학의 중요한 조류가 태
동했을 것이란 사실이다.
⑨ 솔로몬과 고고학
고고학은 솔로몬의 건축가로서의 활동과 당대 이스라엘 사회의 변혁을 위한 활동을 어느 정
도 밝히고 있다. 솔로몬 성전은 아마도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으
며, 이후 제2성전이 건축되었다. 이 건물은 기원전 1세기 헤롯대제에 의해 개축되었고, 그
후 로마인들에 의해 서기 70년에 소실되었다. 고고학은 여기서 연대기적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지고 있고, 지금역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드러난 사실은 고대 이
스라엘의 많은 고고학적 유적들이 10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건설되거나 재건된 것처럼 보이
며, 실제로 네겝의 초기 철기시데 요새들은 솔로몬의 통치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 중 일부는 기원전 925년경의 파라오 시삭의 원정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기원전 10세기 중엽의 전반적인 모습은 급속히 발전하는 과도기적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고고학은 초기 국가에서 나타나는 재도시화 과정이 시작되는 증거를 보여준다. 실제로
이 무렵에서 발견된 자그만 보물들이며, 도자기류에서, 평화의 시대와 번영의 시대의 증거
를 볼 수 있으며, 이 반증으로 흔히 나타나는 인구증가의 사실을 여기서도 확인 할 수 있
다.
⑩ 사회 정치적 긴장
앞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고유의 정치, 종교적 전승을 보존하고 싶어 한 “이스라엘 집(북
부지파)”, 솔로몬의 징병과 강제징집과정, 그로인한 인구 혼합 등이 사회적 긴장감을 야기했
으며,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과 유다사이 적대감을 고조시켰다. 이러한 긴장감은 다윗과 솔
로몬 사후의 대립에서 붉어진 문제들로 이스라엘의 기반이 약했음을 알게 되고, 이러한 취
약한 기반으로 인해, 유다 사회가 조직적 민주국가로 발전하는 일이 지체되었을 것이다. 더
욱이 이제는 두 개의 분리된 국가를 통해 이뤄지게 되었다.
<질문>
1. 이번 장을 읽으면서, 다윗의 모습에 대한 인식에 혼란이 생겼습니다. 특히, 므비보셋과
겸상을 하는 다윗의 모습은, 전통적으로는 겸손하고 온화함의 상징으로 여겨졌는데, 여기서
는 겉으로는 자비를 베푸는것처럼 보이는 행동이 다윗이 므비보셋을 감시하려는 측면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그런 종의 모습 이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전쟁을 통해서,
그의 영역을 넓혀가는 인상을 많이 받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2. 선지자 나단은 솔로몬의 후원자였고, 제사장 아비아달은 아도니야를 지지하였습니다. 선
지자와 제사장의 활동이 비록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이 한분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
다는, 힘의 방식으로 왕위다툼을 한 듯 보이는데, 과연 하나님이 지목하신 후계자가 솔로몬
이었다면, 이렇게 무력이 동원되고 불안해 했어야 하는지, 같은 신아래있는 제사장과 선지
자였는지, 또한 피묻힌 솔로몬이 어떻게 성전을 지을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겼습니
다.
제 4장 연합 왕정
-사울, 다윗, 솔로몬-
0110702 이 혜성
1. 서론
# 이스라엘 왕정이 생겨나게 된 계기
- 외부의 압력이었던 블레셋 (윌리엄 E. 에반스: “추진력은....... 블레셋의 위협이었다.”)
-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보호하던 느슨한 지파 연맹
- 암몬의 위협
- 내부적(사회적, 경제적, 인구학적) 압력
- 카리스마적 지파 지도자들의 역량이 역부족
=> 결과: 이스라엘 연합 왕국 약 1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사울, 다윗, 솔로몬 등 3명의 왕)
* 연합 왕국에 대한 풍부한 성서의 병행 역사 기록: 삼상8장부터 왕상11장, 대상3장부터 대
하9장까지.
# 이 시기의 성서 이해
- 이 시기의 역사 재구성이 어려운 이유
① 외부 자료들의 결여. 성서에만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이다.
② 성서의 기록이 의도적으로 이 시기를 이상화하려는 경향이 보인다는 점이다.
- J.맥스웰 밀러: 이스라엘 기원과 초기 역사를 이해하기위해, 히브리 성서를 비평적으로 접
근해야 한다.
- 앙드레 르메르의 이스라엘의 역사 이해 방법: ① 성서에 보존되어 있는 다양한 전승들의
차이점들.
② 문학 비평의 문제 고려. ③ 고고학적 자료도 고려.
- 기원전 10세기에 대한 두 가지의 다른 견해
① 최대주의(maximalist): 연합 왕정에 대한 성서의 기록이 역사적 핵을 담고 있다고 주장
한다.
② 최소주의(minimalist): 이 시기에 관한 성서 전승에는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경향
이 있다.
=> 논쟁의 이유: 문학 비평의 결과와 고고학적 발견의 해석이 명쾌하지 않음.
* 성서 기록이 말하는 것과 그것을 고고학에 근거해 역사적으로 해석한 것을 잘 구분해야
한다.
2. 사울 (기원전1030?-1009년경)
1) 블레셋의 위협
- 사울의 등장: 블레셋의 군사 위협에 직면하여 왕위에 오르게 된다.
- 블레셋: 이집트 명문들에 해양 민족들 중 하나로 언급한다. 이들은 에게 지방이나 아나톨
리아 남부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 해양 민족들: 체커, 셰클레슈, 다눈나, 웨셰슈 등 블레셋 외의 해양 민족들이 있다. 해양
민족들은 기원전 12세기 초에 시리아-페니키아 해안에 있는 수많은 도시를 파괴했고, 심지
어 이집트를 점령하려고 까지 했다. 그러나 람세스3세 8년(기원전 1177년경)에 저지되었다.
- 테베에 있는 람세스 3세의 메디네트 하부 신사의 벽에 나타난다.
- 해양 민족들의 가나안 정착: 블레셋-가사와 야파 사이의 해안 평원을 차지, 체케-돌 근방
의 샤론 평원을 차지, 그렛 사람들-네겝 지역에 정착했다.(삼상30:14)
- 블레셋의 도시 연맹: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의 5도시 연맹으로 조직 되었
다. 각 도시는 세렌이 지배함.(수13:3, 삿16:5,823,27, 삼상5:8-11) 후에 아벡 근처까지 군
사적 확장을 이룬다.
- 가장 발달된 군사 장비 시설: 기원전 12세기경의 지배적 금속인 청동과 더불어 철로 만
든 무기였다.
- 에벤에셀에서의 이스라엘과의 2단계 전투: 1단계에서 이스라엘은 4천 명 가량의 피해자
발생하고, 2단계 때는 실로에서 언약궤를 가져 왔으나, 블레셋에게 빼앗겨 버리고 에브라임
산지 일부 또한 빼앗긴다. 블레셋은 에브라임과 베냐민 산간 지방에 수비대(또는 총독들)를
두었는데, 가장 중요한 수비대는 게바에 있었다. (삼상13:3-5)
- 이스라엘 반응: 산간 지방으로 가서 동굴 등에 몸을 숨겼다. (삼상 14:11, 22)
2) 사울의 선택
- 사울 왕 선택에 대한 3전승: ① 아버지의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다가 사무엘을 만나 기
름부음을 받게 된다.(삼상9:3-10:16) ② 사무엘이 왕을 선택하기 위해 미스바에서 제비를
뽑을 때 사울이 짐짝 뒤에 숨어 있다.(삼상10:17-27) ③ 가장 믿을 만한 전승: 이스라엘 군
대의 우두머리인 사울은 야베스 길르앗을 암몬의 공격으로부터 구해냈고, 사람들은 사무엘
의 동의 아래 길갈에서 사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삼상11:15) -각각 기록에서 사무엘에게
사울은 기름부음 받아 왕이 된다.
- 사울의 주요 임무: 해방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 믹마스 전투에서 사울은 첫 승리를 이스라엘에게 안겨 준다. (삼상 13:5-14:46)
* 사무엘
·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인 사사들 중 마지막 사람으로 여겨졌다.(삼상7:6,15, 8:1-3)
· 다른 전승에서 선지자로 여겨지기도 한다.(삼상3:20)
· 사무엘의 지도력: 이 부족하다고 인식되어, 장로들은 왕을 임명하는 것을 역사적 필연성으
로 본다.
· 사무엘: 키가 크고 강인하여 이스라엘의 적들을 대항해 전쟁을 수행할 자격이 잘 갖춰진
사람으로 묘사
3) 전사 사울
- 군인 모집: 힘 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불러 모았다.(삼상 14:52)
- 사울의 전쟁 전략: 매복과 적진에 대한 기습 공격인 유격전-많은 군인 수가 필요치 않음
- 사울은 기브아 근처에서 약 600명가량의 군사를 데리고 있었다. (삼상14:2)
- 성서의 기록: 블레셋과의 전쟁의 세부사항에 대해선 간략한 암시만을 준다. 사울은 블레
셋을 이스라엘 중심에서 몰아낸 듯하다. 블레셋이 남쪽 유다를 공격할 때 다윗이란 젊은 유
다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기도 한다. (삼상17장)
- 길보아산 전투에서의 사울의 죽음: 평지보다 산간지방에서의 전투에 강했던 사울은 길보
아산 근처 평지에서 전투를 벌이다 그의 아들들과 죽게 된다.(삼상31:1-7, 삼하1:6-10)
* 사울 통치 때의 전쟁 기록
- 블레셋 전쟁 외에도 모압, 암몬, 에돔 사람들과 소바의 왕과 아말렉인들과의 전쟁 기록
(삼상14:47,8)
- 아말렉과의 전투(삼상 15장):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부하들에게 아말렉 사람과 그들의 가
축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다.-하렘전승(수6:18, 7장) 사울은 아각 왕과 가장 좋은 가축들
을 살려둔다. ->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 받는 중요한 사건이 된다.
4) 사울 통치에 대한 잠정적인 평가
- 히브리어 본문(마소라 본문)의 기록: 사울은 1살 때 왕이 되었고, 통치 기간은 2년으로
기록되어 있다.(삼상 13:1) -> 주석가들은 본문을 수정하여 22년으로 읽는다.
- 사울의 통치 기간 중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관한 정보들
① 이스라엘엔 철공이 없었고(블레셋은 이스라엘이 철로 창이나 칼을 만들까 두려워 함) 보
습, 삽, 도끼, 괭이 등 사울과 요나단만이 칼과 창을 소유했었다. (삼상13:19-22) => 철제
도구가 귀했던 농부들과 목자들로 구성된 비전문화된 사회의 모습을 보여 준다.
② 사울의 왕위가 가족 중심이었음(삼상14:49-50): 군대 통솔권이 삼촌인 아브넬에게 있었
다.
- 사울의 통치에 역사적으로 균형 잡힌 평가의 어려움
· 다윗과 대조를 이루는 전형적인 악한 왕으로 기록됨(삼상16장-27장의 주제): 다윗의 동료
나 제사장 아비아달아나 또는 그의 가까운 사람이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 편향적이고 의도적인 방식으로 다윗 사이의 적대적 관계 묘사-때때로 일치하지 않는 전승
을 사용한다.
· 사울을 질투심이 심한 자로 묘사: 사위인 다윗이 자신에 대해 공모한다고 혐의를 씌운다.
· 사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블레셋 땅으로 망명한 것을 좋게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
다.
-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연합으로 이끄는 길을 예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삼상17:1)
블레셋이 남쪽으로부터 중부 산지로 침공해 올 때, 유다의 베들레헴 사람들이 사울과 힘을
합해 싸웠다.
- 사울이 치른 모암, 에돔, 소바의 왕, 아말렉 사람들과의 전쟁들에 대해 역사성이 의심스럽
다.-> 사울에 대해 거의 정보가 없는 다윗의 역사가가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울의
약한 군사 조직 상황에서 위협적인 블레셋과 대항하기 위해 사울의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 사울의 왕국의 영토: 에브라임 산지, 베냐민, 길르앗 -수도:기브아 변경 미그론에 있는 석
류나무 아래.
- 고고학적 기록: 사울의 왕권에 대한 거의 흔적이 없다.
· 에브라임, 베냐민 산지와 이즈벳 사르타 유적지: 농경지, 작은 촌락, 노천 예배소 등 조사
발굴됨.
· 실로: 기원전 11세기 중반 경에 대화제로 소실 된 것 같다. cf)다윗때 실로 단 1회 언급
됨.
· 제1철기시대 말인 기원전 1세기경 중앙 집중 조직과 행정이 없는 기본 농부들과 목축업
자들의 사회였다. 기원전 11세기 말에 요단강 서쪽에 5만명 정도의 인구 거주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 아스돗, 텔 게리사, 텔 미크네(아글론), 아스글론은 도시문명이 번창했던 것으로 발굴에서
드러났다.
3. 다윗 (기원전 1009/1001-969년경)
- 다윗 때 이스라엘이 국가적 실체로 등장한다.: 느슨한 지파 연맹에서 강력한 일인 통치로
변모 함. 왕, 군대, 왕실 내각의 행정 조직과 확장된 영토, 주변 국가와의 관계로서 보여 준
다.
- 마리오 리베라나와 J. 알베르토 소진: 기원전 10세기경부터 제의적 이스라엘에서 전 역사
의 영역을 벗어나 진정한 역사의 무대로 나아간다 라고 말함.
- 에른스트 A. 크나우프: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9세기와 기원전 8세기 이전에는 유다에 국
가적 성격을 찾아 볼 수 없다.
- 기원전 9세기의 명문: 유다 왕국을 지칭할 때, 다윗 왕조의 외교적 공식 명칭이었을 ‘베
트 다윗’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 이스라엘이 국가나 중앙집권적 제국의 성격은 띠고
있지만, 정치권력으로서 다윗 왕국의 역사성을 부정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1) 모범적인 왕
- 통치 기간: 40년; 7년 반을 헤브론에서 33년은 이스라엘에서 통치하였다. -이스라엘의
‘황금기’
- 다윗에 대해 미화되어 기록되었을 가능성: ① 초기의 북부 지파들(에브라임, 므낫세, 베냐
민)이 아니라 유다 지파 출신으로 베들레헴 사람이었다는 것. ② 사울의 적수 중 하나이고
이스라엘의 적수인 블레셋 군대에서 용병으로 복무하였다는 것.
- 다윗이 사울의 집안에 들어오게 된 2가지 설명: ① 사울이 다윗을 자신의 병기든 자로
삼아 섬기게 한다.(삼상16:14-23) ② 다윗은 장수 골리앗을 죽인 후 공식적으로 사울 앞에
영웅이 된다. (삼상17장)
- 다윗의 등극에 대한 성서의 설명은 상이한 전승들의 융합으로 보인다.
· 요나단의 지지를 받았고, 사울이 다윗을 천부장으로 삼음. 얼마 후 사울에게 공모를 꾀했
다는 이유로 혐의 받아 산간 지방으로 피신한다.
· 다윗을 따르던 자들: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자, 마음에 원통한 자, 아비아달, 선지자 갓
등 약 400명. -> 종교 지도자들이 다윗과 함께 했음은 야훼 종교의 중요성을 시사해 준다.
2) 다윗 왕
- 사울 집안의 내분: 아브넬과 이스보셋이 분열. 개인적 보복의 결과로 둘 다 살해당함.(삼
하3-4)
- 다윗의 활약
· 블레셋이 중부 산지의 르바임 골짜기 근처와 기브온 근처를 2차례 공격하였으나, 다윗이
물리쳤고, 블레셋은 군사적 팽창 노력을 포기하였다.
· 당시까지도 가나안 여부스 사람들이 살던 예루살렘 지역을 빼앗아 그곳을 다윗성이라 부
른다.(삼하5:9)
- 예루살렘: 유다와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이면서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가 된다. - 블
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돌려 준 이 후에 기랴 여야림에 보관 되어 있는 것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옴 => 야훼 종교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결속을 강화하는 통합 요소가 됨.
- 야훼 숭배: 다윗은 제위 초기부터 열렬한 야훼 숭배자임을 드러낸다. 종교적 열정은 제사
장 아비아달과 선지자 갓을 가까이 두었던 것에서 볼 수 있고, 이로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다윗을 왕으로 인정이 쉬웠을 것이다.
- 다윗의 정략결혼: 다양한 정치적, 국가적 집단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도구로 사용.
-> 그의 아내들: 갈멜사람 아비가일, 이스르엘 사람 아히노암, 요단 동편 그술 왕의 딸인
마아가 등
- 군사 정비: 군대장관-조카 요압, 사울을 피해 다닐 때 같이 다닌 훈련된 군대가 개인 경
호대와 정규군의 핵심 간부가 되었다.
- 에돔과 소금 골짜기 전투에서의 승리로 에돔은 이스라엘의 종이 된다.(삼하8:14)
-암몬과의 전쟁: 다윗의 친구인 나하스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조문객을 나하스의 후계자인
하눈에게 보냈는데, 하눈은 정탐군이라며 턱수염 반과 옷의 반을 잘라 모욕함. -> 요압은
암몬 수도 근처를 공격했다. 암몬의 동맹자인 소바의 왕 르흡사람 하닷에셀이 다윗에 대항
하여 싸웠지만, 다윗이 승리함
- 암몬에게 승리한 결과: 암몬에 속한 다메섹 아람 사람이 조공을 바치고, 하닷에셀에게 속
한 도이왕을 포함한 왕들이 이스라엘과 화친하게 됨.
->직, 간접적으로 유프라데스 강의 만곡까지 정치적 통치 영역 확장케 됨
- 국제적인 교역로 통제함으로 이스라엘이 경제 왕국이 됨. 예루살렘 수도 이전 후, 두로왕
히람과 무역시작함.
3) 초기 국가의 미숙성
- 연합 왕국의 경계: 단에서 브엘세바에까지 이르렀지만, 관할 영토들과 종속 국가들을 합
치면 더 넓음.
- 중앙 행정 조직이 잘 정비되었고, 일종의 왕실 내각제였고, 군대장관 요압이 중요 역할을
했다.
- 지방에서 장로들이 사법권을 집행했지만, 왕에게 직접 항소 가능했다.
- 예루살렘 새 성전 건축 계획: 행정, 조세, 부역위해 인구조사 실시(삼하24:1-9) ->성전
건축과 인구조사는 내부적 반대 (선지자 갓)에 직면함. 그러나 다윗의 성전 건축위해 구입
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제단 세우는 것은 지지하였다.
- 연합 왕국의 지배 원리: 조직화와 중앙 집중화(다윗 말기에 시작되고, 솔로몬 때 실현됨)
4) 계승의 문제 (삼하 6장~왕상 2장; “계승의 역사”라 부름)
* 내부적으로 사울의 뒤를 이은 후계자로서 다윗의 정당성의 문제는 불안하다.
- 다윗과 사울 집안
· 다윗은 사울 집안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고, 사울의 딸인 미갈과 결혼한다. 그러나 사실
상 미갈을 버린다. 미갈에게서는 자식을 낳지 않음.
· 다윗은 사울의 상속이며 장애인이었던 므리바알(므비보셋)을 정기적으로 식탁에 초대하여
그의 활동을 감시한다. (삼하 9장)
·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사울의 자손들 중 7명에게 보복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삼하
21:1-14)
* 다윗의 집안: 아들들 사이의 경쟁과 시기로 인한 어려움
- 장자인 암논은 압살롬의 지시로 인해 상해된다.
-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에 대항하는 반란을 주도하지만, 다윗의 군대장관인 요압에게 살해
당한다.
- 압살롬의 반란은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경쟁 관계나 다윗에 대한 베냐민 사람들의 저
항과 관련되어 있다. (시므이와 비그리의 아들 세바는 모두 베냐민 사람들이다.)
- 암논과 압살롬이 죽은 후 아도니야가 다윗의 후계자가 됨-요압과 아비아달의 적극적 지
지.
- 선지자 나단과 제사장 사독 및 시위대장 브니야의 지지로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된다.
5) 성서에 대한 평가
# 성서의 기록과 동시대에 쓰인 문서가 없는 상황이라 역사적 평가는 어렵지만, 다윗과 솔
로몬의 시대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록되어진 것으로 보아 신뢰할 만한 증거가 된다고 추정
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 전승의 의도성이 보이기도 한다.
(1)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을 미화된 기록
- 다윗의 등극 관련 이야기: 다윗의 인간성이 훌륭하게 기록하여 왕권에 대한 주장을 정당
화하려는 의도
- 솔로몬의 등극 관련 이야기: 다윗의 가장 나이 어린 아들이 어떻게 정당한 후계자가 될
수 있는가를 설명. -> 1.연로한 다윗이 밧세바에게 그녀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한 약속은 문학적 창작인 듯함. 2.연로하고 노약한 다윗을 설득하여 솔로몬을 추대하려는
그들의 공모를 지지하게 하여 쿠데타를 정당화하는데 성공하였을 가능성이 보인다.
(2) 다윗의 대외 정책들에 관한 기록의 의도성의 흔적
- 성서는 정복한 영토에 대한 다윗의 정치적 통제보다 군사적 승리를 더 강조하고 있다.
-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굴복시켰다’라는 내용(삼하8:1,11-12)과 삼하5:25의 다윗이 블
레셋 사람들을 게셀까지 무찔렀다는 것의 성서의 진술이 모호하다. 게셀은 블레셋 영토의
동쪽 경계이다. -> 그러나 게셀은 솔로몬 통치 때 가서야 이스라엘에 복속되었다.
(3) 다윗과 두로 왕 히람의 관계
- 페니키아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기술적으로 우월했으므로 그들의 관계는 근본적
으로 상업적인 것일 뿐 봉건적 종속관계는 없었다.
- 이 상업적 관계도 다윗 통치의 말년이나 또는 솔로몬 통치의 초기로 연대를 정할 수 있
다.
(4) 암몬과의 전쟁 후에 다윗이 암몬의 왕관을 썼다면, 그는 암몬의 왕을 폐위하고 다윗을
지지하는 다른 사람을 앉혔을 것이다. 다윗이 관할한 아람 영토의 총독들은 현지 지도자들
가운데 선택되었을 것인데, 모압과 같은 종속 왕국은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기는 했지만 자
가네 왕들이 계속 다스렸다. -> 때때로 종속 국가와 동맹 왕국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5) 다윗의 영향력이 홍해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렀다 해도 여러 정치적 통제가 있었
을 것이다.
ex) 원거리 지역에 대한 다윗의 영향력은 군사적 위협에 주로 의존하는 명목적인 것이었다.
=> 다윗의 정치적 영역은 ‘초기 국가’ 나 ‘제국’이라기보다 가력한 일인 통치로 규정해야 할
것 같다.
- 다윗은 통치 말년에야 자신의 권력을 조직하고 집중화하기 시작했다. (다윗의 통치는 전
쟁으로 성격이 규정되기 때문이다)
(6) 다윗 통치에 관련된 고고학 증거
- 파괴로 추정되는 가나안 도시들의 흔적 외에 빈약하다.
-요하난 아하로니(1970년대): 단과 브엘세바가 다윗에 의해 재건되었고, 이 도시들의 철기
시대 성문들은 기원전 10세기 초로 연대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 현대 고고학자들은 거
의 지지하지 않음.
- 에일라트 마자르: 예루살렘에 있는 오벨 남쪽에서 발견되 대규모의 고고학적 파편들을 다
윗 왕의 궁궐과 동일시할 수 있다고 한다. -> 그러나 솔로몬의 궁궐의 파편일 가능성이 더
높다. 다윗성의 동쪽 경사면에 건설된 돌계단 구조물인 ‘여부스인의 경사로’의 연대 문제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 오페르: 다윗의 통치기간으로 연대 추정 가능한 고고학적 유적은 헤브론과 유다 산지에
있다. -> 그러나 어떤 물품이나 건축물도 10세기 초엽의 것으로 연대 정하기 어렵고, 솔로
몬의 통치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 이런 제한적 증거에도 불구한고 다윗의 통치는 영광스런 성취의 시대였다. 아시리아와
이집트가 약해진 틈을 이용해 이스라엘과 유다를 결합하고 예루살렘을 공통의 수도로 삼으
면서 통일을 그의 지배의 기반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그는 당시 고대 근동의 가장 중요한
강국들 중 하나로 만들어 냈고, 수천 년 동안 히브리의 신 야훼 숭배를 뒷받침한 종교적 제
도의 기초를 놓았다.
4. 솔로몬 (기원전 970/969-931년경)
- 솔로몬은 다윗이 획득한 영토를 공고히 하고 왕국의 행정을 조직하는 일에 관심가지며,
왕으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였다.
1) 솔로몬의 통치 대한 위협
(1) 내부적 위협:
- 아도니야: 다윗의 아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아도니야가 살아있다는 것. 그래서 아도니야는
솔로몬을 대항하여 음모를 꾸민다는 혐의를 받자마자 처형당한다.
- 요압: 다윗의 유능한 군대 장관이었고, 아도니야를 지지했었기 때문에 처형된다.
- 아비아달: 제사장인 그는 아나돗에 있는 자기 고향으로 추방당한다.
- 시므이: 사울 가문의 지지자인 시므이를 처형한다.
(2) 이스라엘 외부적 위협
- 이집트: 시아문으로 추측되는 이집트 파라오가 통치자의 교체를 이용해 개입하려 했다.
그는 게셀을 점령 파괴한다. (=> 이 파괴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시아
문은 솔로몬과 동맹을 맺고 신부 지참금으로 게셀성을 준다.->이것은 이집트의 쇠퇴를 반
영한다. => 솔로몬은 그 대가로 블레셋 영토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아마 블레셋이 이
집트 주권 아래 있었던 듯하다.
==> 게셀이 추가되면 다윗의 왕국과 같은 규모일 텐데, 아무런 대회 정책의 변화가 일어나
지 않는다.
(3) 솔로몬의 외교 정책
- 주변 왕국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외교적 정략 결혼하였다.
ex) 암논 여인 나아마와의 결혼: 그 여인의 아들들 중 르호보암이 후에 왕이 된다.
- 왕상 4:21의 기록: 다윗과 마찬가지로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따에 이르
기 까지와 애굽 지경에 미치기 까지의 모든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 블레셋과 다메섹, 시리아 북부와 두로 북쪽의 페니키아 해안에 대해서는 많은 수정이
필요하다.
(4) 행정의 재정비
- 성서 전승에서는 솔로몬을 현명한 정치가, 훌륭한 행정가로 부른다.
- 중앙 정부에 새로운 왕실 내각이 임명되었다.- 솔로몬의 관료 임명은 다윗의 왕실 내각
의 연속성을 보이는데, 대게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는다.
- 관료조직에 이집트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ex) 관리들/ 총독들을 감독하는 사람, 왕궁의 행정을 책임지는 사람, 강제 노역 징집을 책임
지는 사람 등 새로운 관료를 뽑았다. => 관료제도가 전반적으로 더 복잡해지고 널리 보급
되었다.
- 나단 선지자의 두 아들도 내각의 일원이 됨-솔로몬 왕이 되는데 나단이 중요 역할했기
때문일 것이다.
(5) 행정구역
- 이스라엘 영토는 돌, 므깃도, 벳-스안과 같은 합병된 여러 가나안 도시국가들을 포함한
다.
- 행정의 중앙 집중화: 12개의 행정구역 혹은 도로 나누었다. 각 도에는 왕이 임명한 지사
혹은 총독이 우두머리가 되었고,(왕상4:8-19)
==> 고대 근동의 다른 행정상의 목록과 아주 유사하다.
- 두 명의 총독이 솔로몬의 딸들과 결혼하여 통치 행정을 중앙 집중화하고 통제하였다.
- 각 행정 구역은 왕과 왕궁을 매년 한 달씩 부양해야 했다.-보기보다는 과중한 경제적 책
임이었다. 여기에는 왕의 처첩들과 수많은 관리들을 부양하고 군대를 위해 말과 전차를 제
공하는 비용이 포함된다.
2) 솔로몬 통치기의 교역과 건설
(1) 국제 교역으로부터 주요 수입원을 새롭게 개발했다. 정부가 이를 권장하여 이로부터 왕
실국고는 이익을 얻어 냈다.
- 페니키아와의 교역: 목재(삼나무와 소나무)와 기술원조(솔로몬 공공건물 건축위한)를 가져
왔다. 대가로 이스라엘 농작물(밀과 감람유)를 제공했다.
- 두로 사람들과 협력하여 오빌로 통상사절단을 보내기도 한다. 이들은 홍해를 건너 금, 보
석, 열대지방 특산물(알무그나무, 원숭이, 비비)를 가져왔다.
- 아라비아 사막을 통과하는 대상들은 향료를 갖고 돌아왔다.
- 군대의 현대화: 이집트에서 전차를 수입하여 군대를 강화했고, 크웨(시실리아)왕국에서는
말들을 수입했다. 여러 행정 구역에 자기 전차들과 말들을 위해 특별 주둔지를 건설하기도
했다.
(2) 솔로몬의 건설 활동
- 예루살렘을 둘러싸는 하솔, 므깃도, 게셀의 세 요새를 건설했다. ->군사적 방어 기능
- 성전 건축: 7년
- 솔로몬의 왕궁 건설: 13년
- 밀로 건설: 밀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지만, 일종의 계단식 구조물이었을 것으로 추
정한다.
- 페니키아 사람들의 기술적 도움: 기본적인 건축과 구조에 대한 기술적 도움과 건물의 장
식과 원자재(재목, 상아, 금)의 입수도 도움을 주었다.
- 금속 주조: 성전과 왕궁을 장식하기위해 금속 주형을 사용했다. 이것은 청동 기술의 전문
가인 페니키아 사람이 감독한 것으로 보인다. 금속의 출처는 언급되지 않음.
- 공공건물들에 대한 상세한 묘사의 이유: 왕의 영광을 위해서 뿐 아니라, 백성들도 새로운
정치적 조직을 정당화하는 데 그러한 위업을 보고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 값싼 노동력의 이용: 강제 노역을 시키기 위해 부역의 의무를 지게 했다. 외국인뿐 아니
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부과시켰다. => 솔로몬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를 삼지 않았
다는 왕상9:22과 모순된다.
==>> 강제노역과 군대 징집은 솔로몬의 통치에 대한 대중적 불만에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 이스라엘 내부의 불화와 속국들의 동요에 대한 약간의 암시
- 에돔[아람] 사람 하닷: 이집트의 왕족인 하닷은 이집트로 망명해서 왕비의 동생과 결혼하
여 이집트로 망명하려 한다.
-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 그는 자기 주군인 소바왕 하닷에셀에게서 달아나 산간지방의 소규
모 군대의 우두머리가 된다.
* 내부적 불만
-여로보암을 선봉으로 한 반란으로 표출되었다. 그는 에브라임 사람으로 실로 출신의 선지
자 아히야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 성서전승: 솔로몬에 대한 불만이 외국인 아내들에 대한 종교적 이유라고 주장한다.
3) 성서와 역사
솔로몬에 대한 성서 전승을 역사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같은 시대의 히브리어 문서나 솔로
몬에 대히 언급하는 고대 근동 문서가 없는 상황이므로 거의 전적으로 성서와 고고학에 의
존해야 한다.
- 왕상 1-11을 “솔로몬 행장”이라고 한다. 이것은 솔로몬 사후 얼마 안 되어 기록된 것으
로 보인다.
- 솔로몬 통치에 관한 현존하지 않는 기록에서 발췌한 듯한 초기 문서 전승이 포함되어 있
다. 사라진 기록은 솔로몬의 전쟁에서의 성과를 자랑할 수 없기에 전형적인 현군으로 묘사
하고 있다.
- 이 초기 전승은 후대의 신명기 사가의 첨가 및 후대 편집자들의 수정과 혼합되어 있다.
ex) 황상 9:26-10:13 오빌 진출과 스바 여와의 방문에 대한 2개의 다른 문서 전승이 결합
된것 같다.
- 초기 전승 중 일부는 솔로몬을 정당화하고 찬미하려는 경향이 있다.
ex) 역대하8:3-4 솔로몬의 북부 시리아 원정에 대한 언급에서, 하맛소바를 취하고, 다드몰
을 건축하고, 하맛에 국고성을 건축했다고 하지만, 왕상 9:15-18의 히브리어 본문은 하맛소
바나 다드몰을 언급하지 않는다. => 역대기 저자가 왕상9:15-18을 따르기 위해 이 지명들
을 적어 넣었을 것이다.
ex) 왕상9:19 히브리어 본문에는 솔로몬이 건축 활동을 수행한 곳이 예루살렘 외에도 레바
논을 언급하고있지만, 70인역에는 빠져있고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것 같다.
- 종교사에 대한 성서 외적인 지식은 솔로몬 여러 측면에 대하여 정보를 제공해 준다. : 솔
로몬과 이집트와의 관계, 페니키아 및 스바와의 관계, 고고학은 솔로몬 통치기의 사회적 변
화와 건축가로서의 명성에 대해 이해하도록 도와 준다.
(1) 이집트와의 관계
- 솔로몬 시대의 이집트 파라오: 게셀을 공격한 파라오는 제 21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들 중
하나인 시아문이었을 것이다.
- 지금까지 이집트 문서 중에서 솔로몬과 파라오의 딸이 정략결혼을 확인해 주는 증거는
없지만, 솔로몬 왕실에 강력한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 증거: 조정의 구도, 12행정 구역(영향력이 반대로 퍼져 나갔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 거의 같은 시기에 이스라엘과 이집트에 12행정 조직이 나타난다.
- 괴스타 W. 알스트룀: 야곱의 12아들과 이스라엘의 12지파에 관한 문서 전승의 근원을
12행정 구역의 조직에서 찾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 이스라엘 12지파의 개념이 이 시대로부터 족장시대로 투사가 되는 셈이 된다.
- 여로보암의 반란과 관련(왕상11:26-42)하여 언급되는 파라오는 ‘시삭’인데, 이는 제 22왕
조의 창시자인 파라오 셰숑크이다. -> 고대 이집트의 속주였던 가나안에서 이집트의 세력
을 회복하기 원했던 인물.
(2) 페니키아와의 관계
- 에베소의 메난더, 알렉산더 디우스 폴리히스터, 요세푸스 등을 통해 전수된 내용: 페니키
아 연대기에 보존되어 있는 이 전승은 페니키아 왕들의 주요 군사 원정과 건축활동에 대해
말하는 실제 두로의 문서나 연대기를 사용한 흔적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솔로몬 연대기가
동시대에 병행 문서로 존재했을 것인데, 페니키아 연대기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3) 스바의 여왕 (왕상9: 26-10:22)
- 홍해를 통한 오빌 원정 이야기와 스바 여왕 원정이야기가 얽혀 있어서 혼동될 수 있다.
- 오빌 원정은 홍해를 정기적으로 왕복하는 페니키아-이스라엘 선적의 배들을 타고 왕래
함.
- 스바 여왕은 낙타를 타고 향료들을 주로 싣고 왔다.
- 스바 여왕 이야기는 문학적이고 전설적인 소재를 내포하여 솔로몬을 찬미하기 위해 쓰였
다.
- 기원전 8세기와 7세기의 아시리아 문서들은 실제로 스바 왕국에 대해, 북부 아라비아 왕
국들에 있는 몇몇 여왕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유프라테스 중류에 있던 힌다누와 연관되어 있는 다른 아시리아 문서들은 국제적인 남부
아리비아 무역이 기원전890년경에 이미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 이런 문서들에 비
추어, 스바의 공식 사절단이 기원전 10세기 후반에 남부 아라비아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왔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4) 에돔-혹은 아람?-과의 관계
- 에돔 사람 하닷과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에 관한 혼란스런 이야기는 아마 다메섹의 초대
왕으로, 아람의 군주이며 엘리아다의 아들인 하닷에 관련된 역사적 전승의 왜곡된 모습을
보여 주는 듯하다.
=> 솔로몬은 그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고, 아마 아람 사람들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 같다.
(5) 기록 (금석학적 유물)
- 게셀 월령: 자그마한 석회암 판석에 매달 이루어지는 농업 활동과 연관되는 12달의 몰록
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 명문은 히브리어가 아니라 블레셋 셈어일 가능성도 있다.
- 이런 금석학적 자료는 희소하지만,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는 국가의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목표를 뒷받침하기 위한 문학 창작의 중요한 시대였던 것 같다.
- 이스라엘의 역사 편찬: 페니키아의 역사 편찬과 병행해서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는 아비아달 제사장이나 그와 가까운 사람이 기록한 다윗 계승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 다양한 성소들(세겜, 헤브론, 브엘세바, 실로 등)과 연관된 초기 이스라엘 전승들을 한데
묶는 역사 기록을 장려했다.
- 초기 전승들의 결합은 야훼기자에 의해 야곱의 열두 아들에 관한 전승을 확립하고 아브
라함, 이삭, 야곱을 처음으로 동일한 가계의 구성원으로 소개한 것 같다.
- 솔로몬의 복잡한 국가 행정은 읽고 쓸 줄 아는 관리들을 필요했다. : 새로운 왕정 이념과
국가의 역사적, 법률적 전승의 발전 또한 글을 아는 서기관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고대 가나안의 도시국가들처럼 서기관들이 있었고, 학교도 있었을 것으로 가정해 본다.
- 솔로몬의 잠언 3천, 노래 1005이라는 전승은 과장이지만, 솔로몬의시대가 부분적으로 이
집트의 영향력아래에 있었을 것을 감안해 볼 때, 이 시대에 왕정 이념과 관련된 히브리어
문학의 중요한 조류가 태동되었을 것으로 본다.
4) 솔로몬과 고고학
- 윌리엄 G.디버: 10B.C. 의 건축물 유적은 고대 이스라엘의 웅장한 건축물로서 최초의 증
거물이라고 함.
- 성전의 역사: 기원전 586년 바빌론 사람들에 의해 솔로몬 성전 파괴. 제2성전은 유수기
이후에 건축됨. 이 건물은 기원전 1세기 헤롯 대제에 의해 개축되었고, 그 후 로마인에 의
해 서기 70년에 소실되었다.
- 어니스트-마리 라페루사즈: 성전 언덕의 일부가 오늘날에도 성전 언덕 동편에 여전히 보
인다고 한다.
- 이갈 실로: 다윗성에 대한 최근 발굴: 다윗 성 북부 꼭대기에 넓은 대지를 지지하기 위해
건설된 것 같은 거대한 계단식 석조 구조물이 발견되었다. (왕상9:15의 밀로일 가능성)->아
직 연대에 대해 논쟁.
* 다윗성에서 나온 기원전 10세기로 연대 추정되는 유적들
- 이갈 실로가 발견한 성벽
- 캐틀린 케년이 발굴한 성벽 조각
- 제인 캐힐의 최근 주장: 계단식 석조구조물 꼭대기에 가옥들을 건설하기위해 10B.C에 부
분적 철거됨.
* 이가엘 야딘과 그의 입장을 따르는 학자들의 주장
- 솔로몬 왕국의 일부가 된 세 가나안 도시가 기원전 10세기 중엽(솔로몬 시대)에 재건되
었다고 주장.
- 세 유적 모두에서 거의 똑같은 요새 구도가 발견
- 각 도시는 포곽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관문 양편으로는 3개의 방과 세 관문의 마름돌들은
같은 방식으로 다듬어짐.
- 설계의 유사성: 솔로몬 통치기에 있었던 동일한 건축가나 동일한 건축학파의 작품으로 이
해 가능하다.
==> 이 연대와 이 해석이 윌리엄 디버의 게셀 발굴과 암논 벤-토르의 하솔 발굴에 의해 입
증되었다.
* 므깃도 성문의 연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 제2철기 시대(10B.C년경에 시작되는) 초의 므깃도의 층위는 분명하지 않다.
ex) 초기 미국인 발굴자들에 의해 솔로몬의 마굿간으로 확인된 구조물이 야딘에 의해 9B.C
로 연대조정됨.
- 그레이엄 데이비스: 므깃도의 비슷한 형태를 띤 좀 더 이른 시대의 건물이 솔로몬 마굿간
일 수 있다함.
- 데이비드 우시슈킨: 솔로몬 시대의 성문만 봐도 이 층은 9세기의 것이라고 주장.
- G. J. 와이트먼과 핑켈슈타인: 전반적인 연대의 이동을 제안하면서 10B.C 유적으로 여기
던 것을 9B.C.로 끌어 내렸다.
=> 므깃도에 대한 새로운 발굴이 그곳의 연대를 밝혀 줄 것을 기대할 따름이다.
* ‘광야에 있는 다말’ (왕상9:18)-엔 하제바로 확인되었다.
- 루돌프 코헨과 이갈 이스라엘: 이 유적에서 솔로몬의 건물과 일치하는 듯한 10B.C 의 층
을 발굴하였다.
=> 고대 이스라엘의 많은 고고학적 유적들이 10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건설 또는 재건된 것
으로 보인다.
ex) 네겝-초기 철기 시대 요새들; 솔로몬의 통치와 연관의 가능성. 일부는 925년 파라오
시삭의 군상 원정에 의해 파괴됨.
* 고고학의 관점에서
- 기원전 10세기 중엽의 전반적인 모습은 급속한 발전의 과도기적 사회의 모습이다.
- 10세기부터는 군대와 정부 행정 조직에서 일하면서 요새화된 왕의 직할 도시에 사는 수
공업자, 상인, 관리들도 있었다. -> 초기 국가에서 나타나는 재도시와 과정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를 보여 준다.
- 요하난 아하로니: 10세기의 물질문화 변동은 고급 물건뿐 아니라, 도자기류에서도 식별
가능 제시
- 경제적 성장과 새로운 도시들의 발전은 급격한 인구 증가가 됨. 사울 통치~솔로몬 말기=
약 2배 증가됨.
5) 사회적 정치적 긴장
* 이스라엘 사회의 초기 국가를 향한 변모와 새로운 국가 행정 체계의 요구 사항들은 저항
을 불러일으킴.
- 고유의 종교적, 정치적 전승들을 보존하기 원하는 ‘이스라엘 집’(북부 지파들)의 경우 더
심함.
- 솔로몬의 징병과 강제 징집(부역) 과정에서 인구의 혼합에 의한 사회적 긴장 야기.
- 이스라엘 집의 구성원들보다 유다 사람들이 더 나은 민간 정부와 군부에 직위를 차지함.
- 솔로몬의 죽음과 그의 후계자의 정치적 실수는 솔로몬과 다윗이 자신들의 업적을 올려놓
은 기반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 조직적인 민족 국가로의 발전이 지체됨.
이스라엘역사 과제4 / 연합왕정 / 04 소은혜
제 4장 연합왕정
- 사울, 다윗, 솔로몬 -
이스라엘 왕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윌리엄 E. 에번스의 말을 빌면, “그 추진력은……
블레셋의 위협이었다.” 그리고 암몬의 위협도 한몫을 감당했다. 더 나아가 내부적(사회적,
경제적, 인구학적) 압력도 고려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연합 왕국은 약 한 세기 동안(기원전
1030-931경) 지속되었다. 그동안 사울, 다윗, 솔로몬 등 세 명의 강한 인물이 권좌에 앉았
다. 그 후 연합 왕국은 북부의 이스라엘(:여로보암)과 남부(:르호보암)의 유다로 나뉘게 된
다.
사울(기원전 1030?-1009년경)
블레셋의 위협
성서는 사울이 블레셋의 군사 위협에 직면하여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집트
명문들은 이들을 소위 해양 민족들 중 하나로 언급한다. 해양 평원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가
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글론의 다섯 도시 연맹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블레셋 사람들
은 당시 가장 발달된 군사 장비를 사용하는 노련한 전사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의 무기는
기원전 1200년경까지 지배적인 금속이었던 청동과 더불어 점점 더 많이 통용되고 있던 철
로 만들어졌다.
사울의 선택
긴박한 상황을 맞이하여 이스라엘 지파들은 자기들에게 왕이 있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사
울은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임명되어 기름 부음을 받는다. 사무엘은 위기를 맞을 때 출연했
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인 사사들 중 마지막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무엘의 (정치,
군사적인) 지도력은 부족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베냐민 사람인 사울은 키가 크고 강인하여
이스라엘의 적들을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할 자격이 잘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던
것 같다. 믹마스에 있었던 첫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승리했다.
전사 사울
블레셋과의 전쟁은 매복과 적진에 대한 기습 공격이 빈번한 유격전이 되었다. 사울은 산
간지방에서 싸울 때에는 보통 성공했던 것 같지만 평지 전투에서는 이길 수 없었다. 블레셋
과의 전쟁 외에도 아말렉 사람들과의 전쟁 중 주요한 전투가 사무엘상 15장에 묘사되어 있
다.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부하들에게 모든 아말렉 사람과 그들의 가축들을 죽이라고 지시
했다. 이는 승리의 열매를 야훼께만 돌리는 헤렘 전승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아
말렉의 왕 아각과 아말렉 사람들의 가축들 중 가장 좋은 것을 살려 두었다. 이 죄(불순종)
때문에 사무엘은 사울을 규탄하면서 주께서 영원히 그를 버리셨다고 선포했다.
사울 통치에 대한 잠정적인 평가
사울의 통치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과 더불어 총체적인 실패로 마무리 된다. 길보아 산에
서의 대패 이후에 블레셋의 지배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란은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사
울의 적수였던 다윗의 지도력 아래에서 블레셋으로부터의 독립 투쟁은 다시 한 번 시작되었
다.
다윗(기원전 1009/1001-969년경)
다윗의 통치와 더불어 우리는 이스라엘이 국가적 실체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모범적인 왕
다윗은 유대 지파 출신의 베들레헴 사람이었다. 사무엘상 6:1-13에 따르면 다윗은 이새의
막내아들이었다. 선지자-제사장인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
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었다.
다윗 왕
다윗은 재위 초기부터 열렬한 야훼 숭배자임을 드러냈다. 그의 종교적 열정은 그의 신하
들 중에 제사장 아비아달과 선지가 갓이 있었다는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윗은 결혼을
통해 다양한 정치적, 국가적 집단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다. 군사적으로 볼 때 다윗은 사울
을 피해 다닐 때부터 잘 훈련된 군대의 틀을 이미 구축해 놓았었다. 다윗은 자신의 직접적
이거나 혹은 간접적인 정치적 통치 영역을 홍해로부터 유프라테스 강의 만곡까지 확장하게
되었다. 또한 국제적인 교역로를 통제함으로써 이스라엘 왕국은 경제 강국이 되었다.
초기 국가의 미성숙
다윗 왕국의 확장은 예루살렘의 지위를 바꾸어 놓았다. 연합 왕국의 경계는 단에서 브엘
세바에까지 이르렀지만 여러 관할 영토들과 종속 국가들을 합하면 그보다 훨씬 넓었다. 그
러나 다윗의 왕국은 강력한 일인통치 혹은 일종의 제국이었을 것 같긴 하지만 중앙 행정 조
직은 여전히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연합 왕국의 지배 원리는 조직화와 중앙 집중화였
다. 그러나 중앙 집중화의 과정은 실제로 다윗 통치의 말년에 가서야 시작되었으며,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솔로몬에 의해서 좀 더 폭 넓게 실현되었다.
계승의 문제
내부적으로 볼 때 사울의 뒤를 이은 후계자로서 다윗의 정당성의 문제가 불안하게 남아
있었다. 또한 다윗의 집안은 다윗의 아들들 사이의 경쟁과 시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열왕기상 1장에 따르면 연로한 다윗은 밧세바에게 자기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솔로몬이
왕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성서에 대한 평가
성서 전승에 따르면 다윗의 통치는 전쟁으로 그 성격이 규정된다. 다윗의 통치는 영광스
러운 성취의 시대였다. 아시리아와 이집트가 약해진 틈을 이용해 강하고 현명한 한 인물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결합하고 예루살렘을 공통의 수도로 삼으면서 이 통일을 그의 지배의 기
반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 국제 상황의 호기를 맞아 다윗은 잠시 동안이나마 고대 근동
에서 가장 중요한 강국들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 그는 또한 수천 년 동안 히브리의 신 야훼
의 숭배를 뒷받침할 종교적 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솔로몬(기원전 970/969-931년경)
솔로몬은 주로 다윗이 획득한 영토를 공고히 하고 왕국의 행정을 조직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 일에 착수하기 전에 먼저 왕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야
했다.
솔로몬의 통치에 대한 위협
통치 첫 해에 솔로몬은 처음엔 내부적인 위협에, 그 다음에는 외부적인 위협에 직면했다.
살아 있는 다윗의 아들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아도니야가 살아 있는 동안 이 예비 후계자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아도니야가 자기를 다윗의 정당한 후계자라 주장하고 나올 가능성은 언
제나 있었던 것이다. 아도니야는 솔로몬을 대항하여 음모를 꾸민다는 혐의를 받자마자 처형
되었다. 이스라엘 외부에서는, 아마도 시아문으로 추측되는 이집트 파라오가 통치자의 교체
를 이용해 개입하려 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솔로몬도 주변 왕국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
해 외교적 정략결혼을 이용했다. 또한 솔로몬은 자기 왕국의 행정을 재정비했다. 솔로몬은
이 일에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성서 전승은 이 일에 대해 솔로몬에게 현자(지혜의
왕)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있다.
솔로몬 통치기의 교역과 건설
솔로몬은 또한 그의 평화로웠던 통치기에 아주 중요하게 된 국제교역으로부터 주요 수입
원을 새롭게 개발했다. 또한 솔로몬은 건설 활동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예루살렘을 에워싸
는 벽을 세웠고 하솔, 므깃도, 게셀의 세 요새를 건설했다. 이 건설 활동은 군사적 방어와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솔로몬의 공공사업은 주요한 업적이었다. 솔
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데에는 7년이 걸렸고 자신의 왕궁을 건설하는 데에는 13년이 걸렸
다. 솔로몬 시대의 공공건물들, 특히 성전에 대한 성서의 자세한 묘사는 이 대형 건물들이
왕의 영광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중요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이
건축물들을 짓고 관리하기 위해 솔로몬은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의 해결책은 부역의
의무, 즉 강제 노동이었다. 강제 노역을 부과한 것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징집한 것은 아마
도 솔로몬의 통치에 대한 대중적 불만에 주요한 두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솔로몬의 통치
후반부에는 내부 불만이 자라갔다. 동시에 심각한 외부의 위협도 생겨났다. 성서 전승은 이
스라엘 내부의 불화와 속국들의 동요에 대한 약간의 암시를 준다. 솔로몬의 통치에 대한 불
만족에는 아마도 여러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 전승은 솔로몬의 많은 외국인 아
내들에 대해 백성들이 종교적인 이유에서 반대한 것을 주로 강조한다. 솔로몬의 통치에 대
한 성서의 기록은 다시 한 번 솔로몬의 지혜를 언급하고 그의 통치 기간을 40년으로 확정
하면서 마무리된다.
성서와 역사
다윗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통치에 대한 성서 전승을 역사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과장과 후대의 첨가를 제쳐두고 본문 대부분에 나오는 아부 섞인 문투를 무시한다면
성서 전승의 주요 사항들은 대체로 믿을 만한 것 같다.
이집트와의 관계
솔로몬의 통치 초기에 어느 파라오가 게셀을 공격했다. 이 파라오는 아마 제 21왕조의 마
지막 파라오들 중 하나인 시아문이었을 것이다. 솔로몬의 통치에 관한 성서 기록에 언급되
는 또 하나의 파라오는 “시삭”이라 불린다. 이 인물은 제 22왕조의 창시자인 파라오 셰숑크
이다. 시삭은 특별히 고대 이집트의 속주였던 가나안에서 이집트의 세력을 회복하기 원했던
강한 인물이었다. 그의 등극(기원전 945년경)은 아마도 솔로몬 통치기에 전환점을 이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페니키아와의 관계
문서 전승이 이 시기 이스라엘과 페니키아와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밝혀 준다.
스바의 여왕
스바 여왕에 관한 이야기가 다양한 문학적이고 전설적인 소재를 내포하고 있으며 솔로몬
을 찬미하기 위해 쓰인 것은 분명하지만 기원전 8세기와 7세기의 아시리아 문서들은 실제
로 아라비아에 있는 스바 왕국에 대해, 그리고 북부 아라비아 왕국들에 있는 몇몇 여왕들에
대해 언급한다.
에돔(혹은 아람?)과의 관계
솔로몬은 아마도 아람 지역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 같다.
기록
솔로몬의 복잡한 국가 행정은 읽고 쓸 줄 아는 관리들을 필요로 했다. 새로운 왕정 이념
과 국가의 역사적, 법률적 전승의 발전 또한 글을 아는 서기관들을 필요로 했다. 솔로몬이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라는 전승은 분명 과장이다(어째서?). 그렇
지만 분명 이 시대에 왕정 이념과 관련된 히브리어 문학의 중요한 조류가 태동했을 것이다.
솔로몬과 고고학
고고학 역시 솔로몬의 건축가로서의 활동과 당대 이스라엘 사회의 변혁을 위한 활동을 어
느 정도 밝혀 주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많은 고고학적 유적들이 10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건설되거나 재건된 것처럼 보인다. 이 유적들에는 요새뿐만 아니라 새로운 도시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네겝에 있는 초기 철기 시대 요새들은 솔로몬의 통치와 연관되어 있을 수 있
다.
사회적 정치적 긴장
이스라엘 사회의 초기 국가를 향한 이러한 변모와 더불어 새로운 국가 행정 체계의 요구
사항들은 이스라엘 사회의 여러 층으로부터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고유의 종교적, 정치적
전승들을 보존하고 싶어 했던 “이스라엘 집”(북부 지파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또한
솔로몬의 징병과 강제 징집(부역) 과정에서 인구의 혼합에 의해 사회적 긴장이 야기되었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적대감을 첨예화하는 데 일조했음이 분명하다. 결국
이스라엘 연합 왕국은 남(:르호보암)과 북(:여로보암)으로 분리되어 진다.
※ 나의 생각
본문의 ‘성서의 기록은 흔히 의도적이며 역사로서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전승들을 포함
하고 있다’는 내용은 성서의 역사성에 대하여 너무 회의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솔로몬이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라는 전승은 분명 과장’이라는 주장
이 내세울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성서는 다윗에게 있어서 인생 최대의 실수(오점)였던
밧세바(부장 우리야의 아내)와의 간통 사건을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
고 하나님의 말씀이 일개 사람인 다윗을 위한 기록일수 없음을 생각할 때에, 성서가 말하는
다윗의 생애가 성서 기자의 의도적인 미화(혹은 그것을 목적으로 한 과장이나 첨가)라는 견
해는 지나친 억지이다. 성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자료)가 아니라
살아계시는(실재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다. 진리의 말씀 속에 어떻게 거짓이 포함
될 수 있는가? 진리의 말씀 속에 하나님의 신적 의지(거룩한 목적)에 의한 비유나 상징은
있겠으나,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애나 행적들이 어떠한 종교적인 목적을 이유로 만들어진
거짓일 수는 없다. 따라서 사울, 다윗, 솔로몬을 포함한 모든 성서 인물들의 생애와 이스라
엘을 포함한 성서 속에 나타나는 모든 민족들의 사건은 역사적 실재인 것이다.
제 4 장 연합 왕정
0245003 신학과 4학년 최홍민
요약
연합 왕국은 국제 무대에서 이스라엘의 영광의 순간이었다. 윌리엄 E. 에번스는 연합 왕정
발생의 추진력이 블레셋의 위협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부 사실이지만 이 외에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암몬의 위협도 한 몫을 했고 필요할 때마다 등장하는 카리스마적
인인 지파 지도자들로는 신생 국가를 이끌기에 역부족이었다.
이스라엘의 연합 왕정은 약 한 세기 동안(기원전 1030-931) 지속되었으며 사울, 다윗, 솔
로몬 등 세명의 강한 인물이 권좌에 앉았다. 그 후 연합 왕국은 북부의 이스라엘과 남부의
유다로 나뉘게 된다.
이스라엘 왕정은 사울의 통치 아래서는 소규모의 영토를 다스렸지만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아래에서는 이스라엘 주변에 속국을 거느린 큰 규모의 통일 왕국으로 변모했다. 이 왕국은
이제 어느 정도 국제적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고대 근동은 다른 열강들도 이스라엘은
인정해야만 했다.
이 시기는 후대에 황금기로 여겨졌기 때문에 성서 기록이 풍부하다. 하지만 이 시기를 연
구하는데 있어 거의 성서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다는 점이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어
려움을 갖게 한다. 성서외의 다른 자료들로부터 역사적인 근거를 찾기 어려우며 성서의 기
록 자체가 의도적이며 역사로서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전승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하는데 있어 다른 두 견해가 나타나는데 이는 최대주의와 최소주의이
다. 최대주의자들은 연합왕정에 대한 성서의 기록이 역사적 핵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고, 최
소주의자들은 이 시기에 관한 성서 전승에는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울(기원전 1030?-1009년경)
블레셋의 위협
성서는 사울을 대조적인 면을 가진 연구 대상으로 묘사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
지만 결국 버림받은 인물이다. 성서는 사울을 블레셋의 군사 위협에 직면하여 왕위에 오르
는 것으로 묘사한다. 성서외의 자료에서도 모두 등장하는 블레셋은 소위 해양민족들 하나로
보이는데 이 해양 민족들은 기원전 12세기 초에 시리아-페니키아 해안에 있는 수많은 도시
를 파괴했고 심지어 이집트를 점령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람세스 3세의 의해 저지되었고
후에 이집트 식민지의 여러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블레셋은 가사와 야파 사이의 해안 평
원을 차지했는데 후에 아벡 근처까지 군사적으로 확장하게 되면서 이스라엘 연맹이 차지하
고 있던 영토 가까이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은 기원전 1200년까지 지배적인 금속이었던 청
동은 물론 철기 무기까지 갖춘 당시 가장 발달된 군사 장비를 사용하는 노련한 전사들이었
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전투의 제 1단계에서 크게 패하여 약 4000명 가량의 군사가 죽임을
당하였고 제2단계에서도 패하며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 가져온 언약궤마저 빼앗겼다. 에벤에
셀 전투 이후에 블레셋인들은 적어도 에브라임 산지의 일부를 차지 한 것으로 보이며 이스
라엘 인들은 산간 지방으로 가서 자연 동굴에 몸을 숨기게 되었다(삼상 14:11,22)
사울의 선택
긴박한 상황을 맞이한 이스라엘 지파들은 자기들에게 왕이 있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결국
사울이 왕으로 선택되었는데 그 이야기는 세편의 다른 전승에서 나타난다. 첫째 전승에서
사울은 아버지의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아다니다가 사무엘을 마나 그에게 기름 부음을 받
아 이스라엘의 군주가 된다. 두 번째 전승에서는 사무엘이 왕을 선택하기 위해 미스바에서
제비를 뽑을 때 사울이 짐짝 사이에 숨어 있다가 왕이 되고 세 번째 전승이 가장 믿을만한
전승인데 이스라엘 군대의 우두머리인 사울은 야베스-길르앗을 암몬의 공격으로부터 구해
냈고 사람들은 사물엘의 동의 아래 길갈에서 사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이 각각의 전승들
의 공통점은 나이지긋한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임명되어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무엘은 위기를 맞을 때마다 이스라엘에 등장했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인 사사들 중 마
지막 사람으로 여겨진다. 사무엘은 전쟁의 수행과 제사장으로서 일을 수행하는 인물이었지
만 지도력은 부족한 것으로 인식되어 지파들의 장로들은 왕을 임명하는 것이 역사적 필연이
라고 느꼈던 것 같다. 결국 사울이 왕으로 임명되었으며 사울의 주요 임무는 과거의 카리스
마적인 지도자들처럼 해방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제 사울은 조직력이 뛰어나고 장
비가 우세할 뿐만 아니라 요단 서부지방 전역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포함하는 영통확장 이념
으로 무장한 블레셋에 대항하여 싸워야 했다. 믹마스에서 있었던 첫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승리하게 되지만 결코 이 정쟁이 마지막 전투는 아니었다.
전사 사울
블레셋 전쟁은 매복과 적진에 대한 기습 공격이 빈번한 유격전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수의 군인이 필요치 않았으며 사울이 기브아 근처에서 데리고 있던 사람은 육백명 가
량 밖에 없었다. 성서는 블레셋 사람과의 전쟁에 대해서 간략한 암시밖에 주지 않는다. 사
울은 산간지방에서 싸울 때에는 승리했던 것 같지만 평지에서는 이길 수 없었다. 사무엘상
31장 1정, 6-7절에 보면 평지에서 이스라엘은 대패하게 되고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은 처참
하게 죽고 그를 본 이스라엘 인들이 모두 도망간다. 사울의 죽음에 관한 다양한 전승들이
있지만 이스라엘의 재난에 대한 냉정한 표현이 이 전승이 진실이라는 인상을 준다.
블레셋과의 전쟁 이외에도 모압 사람들, 암몬 사람들, 에돔 사람들, 소바의 왕, 아말렉 사
람들에 대한 전쟁은 언급하고 있는데 아말렉과의 전투 이후에 사울은 버림받게 된다. 그 이
유는 아말렉 사람들과의 전쟁에 승리한 후 승리의 열매를 야훼께만 돌리는 헤렘 정승에 의
해 모든 아말렉 사람들과 그들의 가축을 죽이라고 지시하지만 사울이 가축들 중 가장 좋은
살려 두었다. 이로 인해 사무엘은 사울을 규탄하며 주께서 영원히 그를 버리셨다고 선포했
다.
사울의 통치에 대한 잠정적인 평가
사울의 통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그 어디에서도 쉽게 얻을 수 없다. 대부분 추정하는 것
이며 그 추정하는 근거가 되는 성서조차도 다윗의 측근에 의해 써졌기 때문에 그 역사적 핵
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사울이 얼마나 오랫동안 다스렸는지 알 수 없다. 전통적인 히
브리어 본문인 마소라 본문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 사울의 통치 기간은 불분명하지만 사
무엘상의 기록을 통해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유추할 수 있다. 사무엘상 13:19-22절
을 통해 철제 도구들이 귀했던, 농부들과 목자들로 구성된 비 전문화된 사회였던 것을 알
수 있고 사무엘상 14:49-50절을 통해 사울을 왕위가 본질적으로 가족 중심이었음을 보여
준다. 가장 중요한 전문적 임무인 군대의 통솔권은 사울의 사촌인 아브넬의 수중에 있었다.
앞에서 밝힌바와 같이 사울의 통치에 대해 역사적으로 균형 잡힌 시각으로 평가를 내리기가
어렵다. 성서 전승에서 그는 자신의 적수이자 계승자인 다윗과 대조를 이루는 전형적인 악
한 왕으로 표현된다. 사무엘상 16-27장에 잘 드러나는데 이 장들의 대부분인 다윗의 동료
이자 제사장인 아비아달과 그와 가까운 사람이 기록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 장들의 내용
속에도 역사적 핵이 존재할 수 있지만 그러한 역사적 정보마저도 편향적이고 의도적인 방식
으로 제시된다(사울의 추적으로 인해 다윗이 원수인 블레셋으로 망명하지만 성서는 그마저
도 좋게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불행히도 사울과 그의 통치에 관한 믿을 만한 정보가 거의 없으며 확실한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 사울이 왕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사울의 통치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과 함께 총체적인 실패로 마무리되며 길보아 산에서의 대패 이후에 블레
셋의 지배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란은 가망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울의 적수이자 계승자
인 다윗의 등장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블레셋으로부터의 독립 투쟁이 다시 시작하게 된다.
다윗(기원전 1009/1001-969년경)
다윗의 통치와 더불어 이스라엘은 지파들의 느슨한 연맹에서 강력한 인일 통치로 변모한
국가적 실체로 등장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존재는 왕, 군대, 왕실 내각, 확장된 영토,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 등에서 확인되며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마리
오 리베라니나 알베르토 소전과 같은 역사학자들조차 기원전 1000년경부터 이스라엘의 역
사가 진정한 역사의 무대로 들어선 것에 동의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으로 모든
것이 명확해진 것은 아니며 여전히 논란이 남아 있다. 에른스트A. 크나우프에 따르면 고고
학적으로 기원전 9세기 이전의 이스라엘과 기원전 8세기 이전의 유다에 국가적 성격이 획
득되었다는 징후가 없다고 주장한다.
모범적인 왕
성서는 다윗 통치에 관해 이야기를 자세하게 다룸으로써 그 기간뿐만 아니라 그 중요성을
보여준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예루살렘에서 33년 이렇게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
렸는데 다윗의 오랜 통치 기간은 후대에 이스라엘의 “황금기”로 여겨졌고 다윗은 모범적인
왕으로 이해되었다.
이세의 막내아들인 다윗은 선지자이며 제사장인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는다. 성서는
다윗이 사울의 집안에 들어오게 된 경위에 대해서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사울이 “병
기 든 자”로 삼아 자기를 섬기게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전투에서 죽인 후 사울 앞에 공식적으로 영웅으로 소개되었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다윗
은 친구 요나단의 지지를 받았고 사울이 천부장을 삼았고 승승장구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사울에 대해 공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받고 피신하게 된다. 사울이 추적하는 동안
유다 여러 지역에 숨어 지내던 다윗은 블레셋 영토로 망명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다윗은 유
다의 적인 아말렉 사람들과 싸움으로써 유다 영토의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힘
썼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결식을 맺어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후 유다사람들로부터 유
다 족속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반면에 사울의 군장 넬의 아들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
셋을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다윗 왕
사울과 다윗 집안의 싸움은 장기간 지속되었지만 사울 집안의 내분으로 인하여(아브넬과
이스보셋의 의견충돌, 결국 둘다 보복의 결과로 살해당하게 됨)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블레셋 인들은 자신들의 오랜 적수가 통일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스라엘의 중부
산지(르바임 골짜기, 기브온 근처)를 공격하지만 다윗은 두 차례 공격 모두를 막아냈고 그
후 불레셋 사람들은 군사적 팽창 노력을 포기하게 되었다.
블레셋을 물리친 다윗은 예루살렘의 여부수를 공격해 빼앗고 그 되를 다윗성이라 이름 하
였다. 예루살렘은 유대와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가 되었으며 다윗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가져오면서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다윗은 재위 초기부터 열렬한 야훼 숭배자임을 드러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신한들 중에
제사장 아비아달과 선자자 갓이 있었다는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다윗을 자기들의 왕으로 인정하기 더 쉬었을 것이다.
다윗은 결혼을 통해 다양한 정치적, 국가적 집단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다.
사울을 피해 다닐 때부터 구축해 놓았던 잘 훈련대 군대의 틀과 군사들은 예루살렘에서 그
의 개인 경호대가 되었으며 정규군의 핵심 간부들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서부 국경에 대한 블레셋을 진출을 저지한 다윗은 동쪽으로 자신의 영토를 확
장하게 된다. 모압, 암몬, 엠돈을 무찔러 자신의 종으로 만들었다. 특히 암몬과의 전쟁의 전
승은 다음과 갔다. 암몬은 블레셋 다음가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적국이었다. 자신의 친
구인 암몬의 왕 나하스가 죽자 다윗은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하눈에게 조문객을 보낸다.
하지만 이 조문객들이 정탐꾼이라는 혐의가 씌워져 모욕을 당하게 되자 이 일은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하눈은 요단 동평 북부와 시리아 남부의 아람 왕국들과 동맹을 맺었기에 이
일을 잘 넘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동맹군은 다윗에게 참패하게 된다. 엄청난 승
리를 거둔 다윗은 암몬의 수도 랍바를 점령하게 되었고 암몬은 다윗의 종이 되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의 직접적이거나 혹은 간접적인 정치적 통치 영역을 홍해로부터 유프라테스 강
의 막곡 까지 확장하게 되었다.
또한 국제적인 교역로를 통제함으로써 이스라엘 왕국은 경제 강국이 되었다.
초기 국가의 미숙성
다윗의 여러 차례에 걸친 승리는 이스라엘을 더욱 넓게 확장하였다. 연합 왕국의 경계는
단에서 브엘세바에까지 이르렀지만 여러 관할 영토들과 종속 국가들을 합하면 그보다 훨씬
넓었다. 하지만 이 다윗 왕국은 강력한 일인통치 혹은 일종의 제국이었을 것 같긴 하지만
중앙 행정 조직은 여전히 잘 정비 되어 있지 않았다.
다윗의 통치가 끝날 무렵에는 예루살렘에 일종의 왕실 내각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중요한 역항을 했다. 모든 전리품과 조세, 공물, 토지 생산물이 왕실 금고
를 채웠으며 지방에서 도시의 장로들이 사법권을 집행하긴 했지만 이제는 왕에게 직접 할
수도 있게 되었다. 또한 예루살렘에 새 성전을 건축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행정, 조세 부
역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인구조사를 실시했던 것 같다.
연합 왕국의 지배 원리는 조직화와 중앙 집중화였지만 실제로 다윗 통치의 말년에 가서야
시작되었으며,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솔로몬에 의해서 좀 더 폭넓게 실현되었다.
계승의 문제
사울의 뒤를 이은 후계자로서 다윗의 정당성의 문제가 불안하게 남아 있었다.
다윗은 사울 딸인 미갈과 결혼하고, 사울의 상속인이며 장애인이었던 므리바알을 정기적
으로 자기 식탁에 초대하는 등 사울 집안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므리바알에게
베푼 행위는 므리바알의 활동을 감시할 수 있게 하였고 사실상 미갈은 다윗에게 버림당하였
다 또한 기브론 사람들에게 사울을 자손들 중 일곱명에게 복수를 허락하며 화해는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내부적으로 다윗을 아들들 사이의 경쟁과 시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의 장자인
암논은 다윗의 셋째 아들인 압살롬의 지시로 살해 되었으며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에 대항하
는 반란을 주도했지만 실패하고 다윗의 군대 장관인 요압하게 살해당했다. 후에 아도니야가
다윗의 예비 후계자가 되지만 연로한 다윗이 밧세바에게 자기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솔로
몬이 왕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결국 솔로몬은 선지자 나단과 제사장 사독 및 시위대장
브나야 등을 도움에 힘입어 다윗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왕으로 인정되었다.
성서에 대한 평가
다윗에 대한 성서의 기록과 동시대에 쓰인 문서가 없기 때문에 다윗의 통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렵다. 물론 상당 부분이 다윗시대 혹은, 솔로몬 시대 즉, 사건이 일어난지 얼마 후
에 쓰였기 때문에 신뢰할 만안 증거가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러한 초기 전승들 조차도 의도적인 기록일 수 있다. 실제로 다윗 통치에 관한 대
부분의 기록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을 미화하기 위해 쓰인 것 같다. 다윗의 대외 정책
들에 관한 기록이나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와 같은 것도 의도적이고 미화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다들 예상할 수 있듯이 다윗 통치에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는 파괴로 추정되는
가나안 도시들의 흔적을 제외하고는 빈약하다.
이렇게 불확실한 제한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통치는 영광스런 성취의 시대였다. 이
스라엘과 유다를 통합했고 아시리아와 이집트가 약해진 틈을 이용해 잠시 동안이나마 고대
근동에서 가장 중요한 강국들 중 하나로 만들었다. 또한 수천 년 동안 히브리의 신 야훼의
숭배를 뒷받침할 종교적 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솔로몬(기원전 970/969-931)
솔로몬은 주로 다윗이 획득한 영토를 공고히 하고 왕국의 행정을 조직하는 일에 관심을 기
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착수하기 전에 왕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야 했다.
솔로몬의 통치에 대한 위협
솔로몬의 왕으로서 입지에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위협적인 요소가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살아 있는 다윗을 아들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아도니야가 살아있었다는 것이
다. 언제 아도니야가 자신이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로몬
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민다는 혐의가 생겨 아니야는 곧 처형되었고 아도니야를 지지했던 다
윗의 유능한 군대 장관이었던 요압이 처형당했고, 제사장 아비아달이 고향인 아나돗으로 추
방당했다. 또한 사울 가문의 지지자인 시므이를 처형함으로 입지를 단단히 했다.
외부적으로는 이집트 파라오의 간섭이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통치자의 교체를 이용해 개
입하려 했으나 고고학적인 발견으로 확인되는바에 의하면 그는 솔로몬의 영통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솔로몬과 동맹을 맺으며 자기 딸 한명을 솔로몬에게 아내로 주고 게셀성을
신부 지참금으로 주었다.
게셀이 추가된 것 외에는 솔로몬의 왕국은 아마도 다윗의 왕국과 같은 규모였을 것이며 두
로왕 히람과의 교역관계가 발전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대외 정책의 변화가 없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주변 왕국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외교적 정략결혼을 이용했으며 우
에 암몸 여인 나아마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 르호보암왕이 된다.
솔로몬의 자기 왕국의 행정을 재정비했는데 중앙 정부를 만들었고 중앙 정부에는 왕실 대
각이 임명되었다. 솔로몬의 관료 임명은 아들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는 어떤 연속성을
반영했따. 또한 이집트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는데 이로 인에 관료 제도가 전반적으로 더
복잡해지고(관리들/총독들을 감독하는 사람, 왕궁의 행정을 책임지는 사람, 강제 노역 징집
을 책임지는 사람 등) 더 널리 보급되었다.
이스라엘의 영통는 돌, 므깃도, 벳-스안과 같은 합병된 여러 가나안 도시 국가들을 포함하
게 되었으며 12개의 행정구역 혹은 도로 나우어 각 도에 총독 혹은 지사를 임명하게 행정
의 중앙 집중화를 이루었다.
각 행정 구역은 왕과 왕궁을 매년 한 달씩 부양해야 했다. 이는 보기보다 과중한 경제적
책임이었는데 여기에는 왕의 처첩들과 수많은 관리들을 부양하고 군대를 위해 말과 전차를
제공하는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솔로몬 통치기의 교역과 건설
솔로몬은 국제 교역으로부터 주요 수입원을 새롭게 개발했다. 정부가 이 교역을 건장하였
고 왕실 국고는 이로부터 여러 면에서 이익을 얻었다. 페니키아와의 교역을 통해 목재와 기
술 원조를 받았고 대가로 농작물을 제공했다. 두로 사람들과 협력하여 오빌로 통사사절단을
보냈으며 이 사절단은 홍해를 건너 금, 보석, 열대지방 특산물을 가져왔고 아라비아 사막을
통과하는 대상들은 향료를 가지고 돌아왔다.
솔로몬의 시대는 평온했지만 군대를 현대화하려 애썼다. 이집트에서 전차를, 크웨(시실리
아) 왕국에서 말들을 수입 하여 군대를 강화했으며 여러 행정구역에 자기 전차들과 말들을
위해 특별 주둔지를 건설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벽을 세웠고 하솔, 므깃도, 게셀의 세 요새를 건설 했는데
이는 군사적 방어와 연결된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솔로몬의 공공사업은 주요한 업적 이었
는데 성전 건축하는데에 7년, 자신의 왕궁을 건설하는데 13년이 걸렸다. 이외에도 밀로라
불리는 구조물을 건설했는데 오늘날 밀로가 무엇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지만, 일종의
계단식 구조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공공 건축물을 계획하고 건설하기 위해 페니키아 사람으로부터 도움이 필요 했는데
이들은 기본적인 건축과 구조에 대한 기술적 도움은 물론 건물의 장신과 원자재(재목, 상아,
금)의 입수에도 도움을 주었다. 성전과 왕궁을 장식하는 많은 청동 제품을 주조하기 위해
솔로몬은 요단 계곡의 “숙곳과 사르단 사이”에 있는 금속 주형을 사용 했는데 이것 역시 페
니키아 사람의 도움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솔로몬 시대에는 대형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특히, 성전에 대해서는 성서에 자세하게 묘사
되어 있다. 이 대형 건물들은 왕의 영광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중요했을 것이
며 그 위업을 보고 백성들 역시 자랑스러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건축물을 짓고 관
리하기 위해서는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으며 그로 인해 등장한 것이 강제 노역이다. 이는 외
국인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인들에게도 부과되었는데 후에 솔로몬의 군대로 징집한 것과
함께 솔로몬 통지에 대한 대중적 불만에 주요한 두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솔로몬의 통치의 후반부에는 내외부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했다. 성서는 외부적으로 “에돔
사람 하닷”과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 이 두 외국인을 솔로몬의 적수로 묘사했다. 또한 내
부로도 여로보암을 선봉으로 한 반란이 표출 되었다.
성서와 역사
다윗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통치에 대한 성서의 전승을 역사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같은 시대의 히브리어 문서나 솔로몬에 대해 언급하는 고대 근동 문서가 없는 상황
에서 전적으로 성서와 고고학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열왕기상 1-11을장 “솔로몬 행장”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솔로몬 사후 얼마 안 되어 기록된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는 솔로몬 통치에 관한 현존하지 않는 기록에서 발췌한 듯한 초기 문
서 전승이 포함되어 있다. 사라진 기록은 솔로몬의 전쟁에서의 성과를 자랑할 수 없기에 전
형적인 현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초기 전승은 후대의 신명기 사가의 첨가 및 후대 편집자들의 수정과 혼합되었고 열왕기
에 기록되어 있는 초기 전승 중 일부는 솔로몬을 정당화하고 찬미하려는 경향이 있다. 후대
전승들은 그런 경향이 더 많다. 이러한 찬미적 경향을 문트를 무시하면 성서 전승의 주요
사항들은 대체로 믿을 만 한 것 같다. 특히 당대의 연대기나 행정 문서와 비슷한 문체를 가
진 구절들은 가장 신뢰 할 수 있다. 이 시기 종교사에 대한 성서 외적인 지식은 솔로몬의
여러 측면에 대하여 정보를 제공하는데 솔로몬과 이집트와의 관계, 페니키아 및 스바와의
관계, 고고학은 솔로몬 토치기의 사회적 변화 뿐만 아니라 건축가로서의 명성에 대해서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이집트와의 관계
솔로몬 시대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되는 파라오는 다음의 두 인물이다. 게셀을 공격
한 파라오는 제 21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들 중 하나인 시아문 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
된 이집트 문서 중에서 솔로몬과 파라오의 딸 사이의 정략결혼을 확인해 주는 것은 아무것
도 없지만 솔로몬이 나라를 12행정구역으로 조직한 것과 같이 솔로몬 왕실에 강력한 이집
트 문화의 영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하나의 파라오는 제 22왕조의 창시자인 파라오 셰숑크이다. 이는 고대 이집트의 속주
였던 가나안에서 이집트의 세력을 회복하기 원했던 강한 인물로 이스라엘 왕들에 대해 적대
적이었다. 따라서 셰숑크가 여러보암의 지지한 것도 놀랄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페니키아와의 관계
페니키와와의 관계는 문서 전승을 통해 어느 정도 밝혀진다. 페니키아 연대기에 보존되어
있던 이 전승은 에베소의 메난더, 알렉산더 디우스 폴리히스터, 요세푸를 통해 우리에게 이
차적 혹은 삼차적으로 전수되어 왔다. 이 문서들에는 페니키아왕들의 주요 군사 원정과 건
축 활동에 대해 말하는 시제 둘로의 문서나 연대기를 사용한 흔적이 드러나며 일종의 솔로
몬 연대기가 동시대에 병행 문서로 존재했을 것인데, 이는 페니키아 연대기에서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스바의 여왕
현재 성서에서는 홍해를 통한 오빌 원정의 이야기가 스바 여왕의 원정과 얽혀 있지만 이
사건이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스바 여왕은 홍해를 정기적으로 왕복하는 페니키아-이스라엘
선적의 배들의 타고 온 것이 아니라 낙타를 타고 향료들을 주로 싣고 왔다. 이러한 두가지
특색은 아라비아 반도의 독특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 솔로몬을 찬미하기 위해 쓰인
것이지만 기원전 8세기 7세기의 아시리아 문서들로 미루어 보아 스바의 공식 사절단이 기
원전 10세기 후반에 남부 아라비아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에돔-혹은 아람?-과의 관계
“에돔 사람”하닷과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에 관한 이야기가 성서에 등장하는데 솔로몬이
이들의 반란에 대한 진압을 감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아람 지역을 통제하지 못했
던 것 같다.
기록
연합 왕국 시대의 금석학적 유물 역시 여전히 무척 드물다. 하지만 자료의 희소성에도 불
구하고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는 전반적으로 볼 때 국가의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목표를 뒷받
침하기 위해 수행된 문학 창작의 중요한 시대였던 것 같다. 이스라엘의 역사 편찬도 아마
이 시대에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스라엘의 역사 편찬은 페니키아의 역사 편찬과 병
행해서 발전했을 것 같다. 또한 솔로몬의 복잡한 국가 행정은 읽고 쓸 줄 아는 관리들을 필
요로 했다. 이 시대에는 시대의 왕정 이념과 관련된 히브리어 문학의 조류가 태동했을 것이
다.
솔로몬과 고고학
고고학 역시 솔로몬의 건축가로서의 활동과 당대 이스라엘 사회의 변혁을 위한 활동을 어
느 정도 밝혀 준다. 솔로몬의 성전과 다윗 성에 대한 발굴을 통해 일부의 터와 파편들이 발
견되었다. 다만 이러한 파편과 구조물들은 연대가 논쟁을 대상이 되지만 말이다.
또한 솔로몬 왕국의 일부가 된 세 가나안 도시-하솔,므깃도,게셀-에서 거의 똑같은 요새
구도가 발견 되었다는 점에 근거해 이가엘 야딘과 그의 의견을 따르는 많은 학자들은 이 세
도시가 솔로몬의 시대에 재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려 한다.
고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기원전 10세기 중엽의 전반적인 모습은 급속히 발전하는 과도기
적 사회의 모습을 띈다. 촌락에 사는 농부들과 목축업자들뿐만 아니라 10세기부터는 군대와
정부 행정 조직에서 일하면서 요새화된 왕의 직할 도시에 사는 수공업자, 상인, 관리들도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물질문명 문화가 급속하게 발전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인구의 급
격한 증가와 연관되어 있다.
사회적 정치적 긴장
이스라엘 사회의 초기 국가를 향한 이러한 변모와 더불어 새로운 국가 행정 체계의 요구
사항들은 이스라엘 사회의 여러 층으로부터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솔로몬의 징병과 강제
징집 과정에서 인구의 혼합에 의해 사회적 긴장이 야기되었을 것이며 이스라엘 집(북부지파
들)의 구성원들은 민간 정부와 군부에서 더 나은 직위를 차지하고 있는 유다사람들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솔로몬의 죽음과 그의 후계자의 정치적 실수는 솔로몬과 다윗의 정
치적 기반이 얼마나 취약하였는가를 드러내 주었으며 아마도 이 취약한 기반은 후에 두 개
의 분리된 국가를 만들어 낸다.
질 문
1.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쓰인다고 합니다. 사울은 분명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패자였으며
따라서 사울의 많은 업적들이 감추어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왕위가 승계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초대 왕으로 추대될 정도의 사람이 가졌던 영웅성이 이 정도에 그칠 것이라 생각
하기는 어렵습니다. 혹시 사울에 대해 감추어진 역사가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2. 성서를 통한 왕정시대의 이스라엘 역사의 기술은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
윗의 치부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원수인 바벨론으로 망명한 것, 간음하고, 살인
한 것 등) 하지만 반면에 그러한 치부를 덮어주고 그것을 미화시키려 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중성은 현대의 문학의 관점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측면입니다. 사실을 사
실 그대로 보여주려면 미화시키지 않아야 하며, 완벽히 미화시키려 했다면 기록에서 치부를
완전히 감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성서의 기록은 어떤 의도로 이중적인 모습으로
기록한 것인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3. 저자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잠시 동아이나마 고대 근동에서 가장 중요한 강국들 중 하나
로 만들어 냈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저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대 근동의 다른 자료에서
이를 역사적으로 증명할 만한 증거가 발견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국인 나라의 기록이 없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상훈
- 연합 왕정 -
연합 왕국은 국제무대에서 이스라엘의 영광의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왕정은 어
떻게 생겨났을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원인을 블레셋의 위협에서 찾는다. 하지만 저자는
이 원인과 함께 암몬의 위협과 내부적 압력도 한몫을 감당했다고 말한다.
이 시기는 후대의 황금기로 여겨졌기 때문에 성서 기록이 풍부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아마도 고대 이스라엘의 다른 어떤 세기보다 이 세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 같
다. 그러나 이 시기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전적으로 성서만을
의존하려는 데 있다. 저자는 성서 기록에는 비역사적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역
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서에 보존되어 있는 다양한 전승들의 차이점들뿐만 아니라 문학
비평의 문제도 고려해야 하고, 고고학이 왕정에 비춰주는 해결의 빛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연합 왕정의 시기에 대해 두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그것은 최대주의 견해와 최소주의 견
해이다. 최대주의자들은 연합 왕정에 대한 성서의 기록이 역사적 핵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
는 반면 최소주의자들은 이 시기에 관한 성서 전승에는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다고 생각
한다. 저자는 이러한 논쟁들은 문학 비평의 결과와 고고학적 발견의 해석이 명쾌하지 않기
때문에 성서 기록이 말하는 것과 그것을 고고학에 근거해 역사적으로 해석한 것을 매우 조
심스럽게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서는 사울을 대조적인 면을 가진 연구 대상으로 묘사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
지만 결국 버림 받았다. 성서는 사울이 블레셋의 군사 위협에 직면하여 왕위에 오르는 것으
로 묘사한다. 이 블레셋 사람들은 소위 해양 민족들 중 하나였다. 해양 민족들은 기원전 12
세기 초에 시리아-페니키아 해안에 있는 수많은 도시를 파괴했고 심지어 이집트를 점령하
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집트와의 대규모 전투에서 패하고, 이집트의 동의를 얻어 가나
안에 있는 이집트 식민지의 여러 지역에 정착했다. 해안 평원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의 다섯 도시 연맹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후에 블레셋이 아
벡근처까지 군사적으로 확장하게 되면서 그들은 이스라엘 연맹이 차지하고 있던 영토 가까
이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발달된 군사 장비를 사용한 전사들 이였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2단계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이
스라엘은 언약궤를 빼앗겼고, 에브라임 산지와 베냐민 산간지대 일부를 빼앗기게 되었다.
이렇게 긴박한 상황을 맞아 이스라엘 지파들은 자기들을 위한 왕을 원했고, 블레셋에 대항
하여 해방의 전쟁을 수행할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사울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제
그는 백성을 이끌고 블레셋에 대항하여 싸우라는 요청을 받았고 첫 전투인 믹마스에서 승리
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전쟁의 마지막 전투는 결코 아니었다.
사울이 사는 날 동안 블레셋 사람과 계속해서 큰 싸움을 버렸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사
울은 아마도 블레셋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중심부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블레셋은
포기하지 않았다. 사울은 산간지방에서 싸울 때에는 보통 성공했던 것 같지만 평지 전투에
서는 이길 수 없었다.
사울 통치의 주요한 특징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블레셋 전쟁 이외에도 성서는 모압, 암몬,
에돔, 소바의 왕, 아말렉 사람들에 대한 전쟁도 언급하고 있다. 특히 아말렉 사람들과의 전
쟁 중 주요한 전투가 사무엘상 15장에 묘사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부하들에게 모든 아말렉 사람과 그들의 가축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
의 왕 아각과 아말렉 사람들의 가축들 중 가장 좋은 것을 살려 두었다. 이 죄 때문에 사무
엘은 사울을 규탄하면서 주께서 영원히 그를 버리셨다고 선포했다.
사울의 통치에 대해 균형 잡힌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상ㄹ과 그의 통치에 관
해서 믿을 만한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블레셋과의 전
쟁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기 위해 사울이 왕으로 임명된 것 같다는 점이다.
사울의 “왕국”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아마도 에브라임 산, 베냐민, 길르앗 정도를 포함했
을 것이다. 사울은 또한 유다의 북부 산지와 이스르엘 계곡 너머에 얼마간 영향력을 행사했
다. 그러나 이 또한 고고학적 흔적이 거의 없다.
고고학은 제1철기시대 말인 기원전 1000년경까지의 이스라엘 사회가 진정한 중앙 집중 조
직과 행정이 없는 기본적으로 농부들과 목축업자들의 사회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 같다. 그와 대조적으로 기원전 11세기에 블레셋의 도시 문명은 번창하고 있었다. 사울의
통치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과 더불어 총체적인 실패로 마무리 된다.
다윗의 통치와 더불어 이스라엘이 국가적 실체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지파들이 느슨
한 연맹은 강력한 일인통치로 변모되었다. 몇몇 학자들은 다윗이 정치권력으로서의 예루살
렘 왕국을 정말로 세웠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까지 하지만 저자는 이스라엘이 잘 정비된 행정
조직을 갖춘 국가나 중앙 집권적 제국보다는 강력한 일인통치에 더 가까운 것이 사실일 수
도 있지만 일종의 정치권력으로서 다윗 왕국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
다.
성서는 다윗 통치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다룸으로써 그 기간뿐만 아니라 그 중요성을
부여 주고 있다. 그의 오랜 통치 기간은 후대에 이스라엘의 “황금기”로 여겨졌고 다윗은 모
범적인 왕으로 이해되었다.
성서는 다윗이 어떻게 사울의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두 가지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다윗의 등극에 대한 설명이 차이를 나타내는 것은 다윗과 사울의 초기 관계에 대한
상이한 전승들의 융합을 보여 주는 듯하다.
어찌되었든, 다윗은 요나단의 지지와 사울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이 행복한 상황은 오
래 지속되지 않았다. 다윗은 머지않아 사울에 대해 공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산간 지
방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 피신 중에는 제사장 아비아달과 선지자 갓도 있었다. 이런 종
교 지도자들이 다윗과 함께 했다는 사실은 다윗의 당파에서 야훼 종교의 중요성을 시사해
준다.
사울이 추적하는 동안 유다 여려 지역에 얼마간 숨어 지내던 다윗은 블레셋 영토로 망명하
게 되고, 그후 시글락에 정착하게 된다. 이 시기에 다윗은 유다의 적인 아말렉 사람들과 싸
움으로써 유다 영토의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힘썼고,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
었다.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후, 다윗은 유다족속의 왕이 된다.
사울 집안과의 사이에 “장기전”이 끝나자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후 다윗은
블레셋과의 두 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사적 팽창 노력을 포기시킨
다.
블레셋 사람들을 몰아낸 후 다윗은 홀가분하게 예루살렘의 여부스 사람들을 공격해서 그
도시를 빼앗는다. 다윗은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가져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은 유
다와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서부 국경에 대한 블레셋의 진출을 저지한 다윗은 자신의 왕국을 동쪽으로 확
장할 여유를 얻게 되었다. 그는 모압과 암몬을 무찔러 종속 국가로 만든 후 조공을 바치게
했다. 이리하여 다윗은 자신의 직접적이거나 혹은 간접적인 정치적 통치 영역을 홍해로부터
유프라테스강의 만곡까지 확장하게 되었다.
국제적인 교역로를 통제함으로써 이스라엘 왕국은 경제적 강국이 되었다. 다윗의 왕국은
강격한 일인통치 혹은 일종의 제국이었을 것 같긴 하지만 중앙 행정 조직은 여전히 잘 정비
되어 있지 않았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새 성전을 건축할 계획을 세웠으나 내부적 반대에 직
면했다.
연합 왕국의 지배 원리는 조직화와 중앙 집중화였다. 그러나 중앙 집중화의 과정은 실제로
다윗 통치의 말년에 가서야 시작되었으며,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솔로몬에 의해서 좀 더
폭넓게 실현되었다.
내부적으로 볼 때 사울의 뒤를 이은 후계자로서 다윗의 정당성의 문제가 불안하게 남아 있
었다. 그 문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불안한 연합에 의해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처음에 다윗은 사울 집안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로 하여
금 사울의 자손들 중 일곱 명에게 보복하도록 허락하면서 두 집안 사이의 화해는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다윗의 집안은 다윗의 아들들 사이의 경쟁과 시기로 어려움
을 겪었다. 압살롬에 의한 반란도 있었지만 연로한 다윗이 밧세바를 통해 얻은 솔로몬이 선
지자 나단과 제사장 사독과 및 시위대장 보나야 등의 도움을 얻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성서의 기록과 동시대에 쓰인 문서가 없는 상황에서 다윗의 통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
렵지만, 성서 전승을 문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상당 부분이 다윗 혹은 솔로몬의 시대에, 즉
사건들이 일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쓰였기 때문에 신뢰할 만한 증거가 되는 것으로 추정
된다.
물론 초기 전승이라 할지라도 의도적일 수 있음을 성서의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솔로몬 등극에 관한 기록, 다윗의 대외 정책들에 관한 기
록, 다윗과 두로 왕 히람의 관계 등을 통해 의도적 기록의 예를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다
윗 통치에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가 빈약하다는 것은 다윗 통치에 관한 역사적 평가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저자는 이 모든 제한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통치는 영관스런
성취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솔로몬은 주로 다윗이 획득한 영토를 공고히 하고 왕국의 행정을 조직하는 일에 관심을 기
울였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 일에 착수하기 전에 먼저 왕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야 했
다. 그래서 솔로몬은 숙청의 칼을 들게된다. 이 숙청 작업으로 인해 아도니야, 요얍, 시므이
가 목숨을 잃었고, 제사장 이비아달이 자기 고향으로 추방당했다.
이스라엘 외부에서는 시아문으로 추측되는 이집트 파라오가 통치자의 교체를 이용해 개입
하려 했다. 그는 게셀을 점령하여 솔로몬과 동맹을 위해 정략적으로 이용한다. 이것은 당시
이집트의 쇠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솔로몬은 다윗과 마찬가지로 주변 왕국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외교적 정략결혼을 이용
했다. 성서는 솔로몬이 방대한 땅을 다스리며 조공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
는 솔로몬의 통치영역에 대한 성서의 진술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솔로몬은 자기 왕국의 행정을 재정비 했다. 첫째, 중앙 정부였다. 중앙 정부에는 새로운 황
실 내각이 임명되었다. 둘째, 이스라엘의 행정 구역을 12개로 나누고 각 도에는 지사 또는
총독을 파견하였다. 이렇게 해서 행정의 중앙 집중이 이루어 졌다.
솔로몬은 또한 국제 교역과 건설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페니키아, 두로와 교역을 하
였고,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벽을 세웠으며, 하솔?므깃도?게셀의 세 요새를 건설하였다. 솔로
몬은 성전 건축, 왕궁의 건설, 밀로라는 구조물을 건설하였는데, 이러한 공공 건축물들의 건
설로 인해 무역 적자를 떠안게 되었고 이 적자를 청산하기 위해 “갈릴리 땅의 성읍 이십을
히람에게” 내어주게 되었다.
오랜 재위 기간에서 볼 수 있듯이 솔로몬의 통치 후반부에는 내부 불만이 자라났다. 특히,
강제노역을 부과한 것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솔로몬의 군대로 징집한 것이 주요한 두 요인이
었을 것이다. 성서 전승에서는 솔로몬의 많은 외국인 아내들에 대해 백성들이 종교적인 이
유에서 반대한 것을 주로 강조한다. 이러한 내부적 불만은 마침내 여로보암을 선봉으로한
반란으로 표출되었다. 이렇게 후기의 혼란의 과정 속에 솔로몬은 40년의 통치 기간의 막을
내린다.
다윗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통치에 대한 성서 전승을 역사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같은 시대 히브리어 문서나 솔로몬에 대해 언급하는 고대 근동 문서가 없는 상황
에서 전적으로 성서와 고고학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성
서 전승들 중 당대의 연대기나 행정 문서와 비슷한 문체를 가진 구절들은 대체로 믿을 만한
것 같다고 말한다.
다윗의 통치에 관한 성서 전승에서는 이집트가 정치적 세력으로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지
만 솔로몬의 시대에는 몇몇 파라오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집트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로는 조정의 구조와 12행정 구역이 있다.
이스라엘과 페니키아와의 관계에 있어서 페니키아 연대기에 보존되어 있던 전승은 히람과
솔로몬 사이의 문화적 관계와 교역관계를 어느 정도 밝혀 준다.
저자는 성서에 기록된 오빌 원정의 이야기와 스바 여왕의 원정을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말
한다. 왜냐하면 스바 여왕은 낙타를 타고 향료들을 주로 싣고 왔기 때문이다. 아시리아 문
서들을 통해 스바의 공식 사절단이 기원전 10세기 후반에 남부 아라비아로부터 예루살렘에
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솔로몬이 아람의 군주 하닷의 반란에 대한 진압을 감행하지 않은 것을 볼 때, 솔로몬은 아
마도 아람 지역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는 전반적으로 볼 때 국가의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목표를 뒷받침하기
위해 수행된 문학 창작의 중요한 시대였던 것 같다. 또한 솔로몬의 복잡한 국가 행정은 읽
고 쓸 줄 아는 관리들을 필요로 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과 행정 구역의 수도에도 서기관들
이 있었고, 아마도 학교도 있었으리라 가정해 볼 수 있다. 분명 이 시대에 왕정 이념과 관
련된 히브리어 문학의 중요한 조류가 태동했을 것이다.
고고학 역시 솔로몬의 건축가로서의 활동과 당대 이스라엘 사회의 변혁을 위한 활동을 어
는 정도 밝혀 주고 있다. 그 한 예로 솔로몬이 재건했다는 세 가나안 도시-하솔,므깃도,게셀
- 중 게셀과 하솔의 발굴에 의해 이 세 도시가 솔로몬의 시대에 재건되었음이 증명되었다.
고고학의 관점에서 보면 기원전 10세기 중엽의 전반적인 모습은 그복히 발전하는 과도기
적 사회의 모습이다. 경제적 성장과 새로운 도시들의 발전은 아마도 평화와 번영의 시대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이스라엘 사회의 초기 국가를 향한 이러한 변모와 더불어 새로운 국가 행정 체계의 요구
사항들은 이스라엘 사회의 여러 층으로부터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러한 불만은 이스라
엘과 유다 사이의 적대감을 첨예화하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솔로몬과 다윗이 많은 업적을
쌓기는 했지만, 이러한 기반은 굉장히 취약했으며, 이 취약한 기반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유
다 사회가 조직적 민족국가로 발전하는 일이 지체되었을 것이다.
천사
제4장 연합왕정
이스라엘 왕정의 형성은 윌리엄 에번스에 의하면 블레셋의 위협이 그 주된 원인으로 보았
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저자는 이스라엘의 왕정형성의 주된 원인을 블레셋외의 다른 외부의
압력으로 보았다. 이 위협은 암몬의 위협, 그리고 내부적인 위협인 사회적, 경제적, 인구학
적 압력도 고려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런 대내외적 압력속 에서 지파 지도자가
아닌 이스라엘을 연합할 왕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이 연합왕국은 결국 사울을 비롯해서
다윗과 솔론에 의해서 이어가게 된다.
사울의 통치기에는 소규모의 영토를 다스렸으나, 다윗과 솔로몬의 왕정기 시절에는 주변속
국을 거느린 통일 왕국으로 변하게 된다. 이시는 후대에 황금기로 여겨졌으며, 이시기에 대
해 성서의 기록은 풍부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성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다른 자료들을 얻을 수 없다는 점에서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다. 왜냐하면 성서의 기록은 의도적이며, 역사로서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전승들을 포함
하고 있고 또한 당시의 시대를 이상화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J.맥스웰
밀러는 ‘성서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관심을 갖고 성서를 비평적으로 접근하여 내적 유
형과 층위에서 주위를 기울여 조사해야 하며, 다른 증거와 더불어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해
야 할 것을 언급했다. 즉 성서의 다양한 전승들의 차이점과 문학 비평의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울
성서는 다윗과 다른 사울의 대조적인 면을 묘사하는데,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버림을 받
는다. 성서는 그가 해양민족인 블레셋의 군사 위협에 직면하여 왕에 오르고 있다고 묘사한
다. 가장 발달한 철기의 군사 장비를 보유한 이 해안 평원의 블레셋은 아벡 근처까지 확장
하면서 이스라엘의 위협이 되었다. 블세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빼앗기
며, 에브라임 산지 일부를 빼앗겼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은 왕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사울을 왕으
로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이 왕으로 선택된 사울에 대한 세 가지의 다른 전승이 있다. 먼
저, 아버지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다니다가 사무엘을 만나게 되고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
을 부어 이스라엘의 군주로 세운다. 두 번째 전승은 사무엘이 왕을 뽑을 때 미스바에서 제
비를 뽑을 때 사울이 짐짝 사이에 있다. 세 번째는 이스라엘 군대의 우두머리인 사울은 야
베스-길르앗을 암몬의 공격으로부터 구해냈고 사람들은 사무엘의 동의 아래 길갈에서 사울
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은 다른 전승에서는 선지자로 여겨지고 있고, 또한 언약궤가 있는 실
로에서 직무를 수행했는데, 이를 통해 그가 제사장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사무엘 지도
력은 부족하여서 지파들의 장로들은 왕의 요구를 필연적으로 여겼다. 사울왕은 해방의 전쟁
을 수행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믹마스의 전투에서 블레셋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블레
셋과의 전쟁은 소수 정예의 유격전이 주였다. 사울은 블레셋의 주력을 이스라엘 밖으로 몰
아내는데 성공하게 되지만, 블레셋은 남쪽으로부터 공격을 계속 한 것으로 보이는데 젊은
유다 청년, 다윗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사울은 전투에서 평지보다 산간지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결국 사울의 죽음은 길보아 산 근처의 전투에서 평지로 내려옴이 결정적인 요인
이었다. 사울의 통치기는 블레셋외에 모압, 암몬, 에돔, 소바의 왕, 그리고 아말렉과의 전쟁
도 언급하고 있다. 사울은 가나안 정복 때의 아멜렉과의 전쟁을 한 특별한 원수였는데, 사
무엘이 아멜렉과의 전쟁에서 사람들과 그들의 짐승을 죽이라는 사울에게 한 지시는 불순종
하여 죄를 범하게 된다.
사울에 대한 히브리어 본문은 잘 보존 되어 있지 않으며. 이것에 의하면 사울은 한 살 때
왕이 된 것으로 그의 통치기간은 2년으로 보인다. 몇몇 주석가들은 이에 대해서 22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상 13:19-22/14:49-50의 본문 구절에 의하면 사울의 왕위가 가족 중심
이었음을 볼 수가 있다. 군대의 통솔권은 아브넬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나 사울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균형 잡힌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성서는 그를 다윗과 대조되는 인물로 묘사하
고 있다. 이런 대조는 사무엘상 16-27장에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이 장은 다윗과 가까
운 대제사달 아비아달이나 그와 가까운 인물에 의해서 기록되어진 것 같다. 그러나 이 정보
는 편향적이고, 의도적인 방향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때로는 일치하지 않는 전승을 사용하
고 있다. 이 장은 다윗의 관점에서 씌여져서 다윗이 사울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블레
셋 땅으로 망명한 것에 대해 좋게 기술하고 있다.
사울의 역사성은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블레셋이 위협적이고 사울의 군대가 형편없
던 그 상황에서 사울의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이 있었을 것 같지 않다. 이는
아마 사울의 정보가 거의 없는 유다 출신의 역사에 의해 기록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블레셋의 위협 속에서 그를 왕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사울의 왕국은 에브
라임 산, 베냐민, 길르앗, 그리고 유다의 북부산지와 이스르엘 계곡 너머정도였다. 성서의
사울의 왕권은 고고학적으로 흔적을 추적하기 힘들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기원전
1000년경 제1철기 시대 말에는 진정한 중앙 집중 조직과 행정이 없는 농부들과 목축업자들
의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최근 인구 추산에 의하면 기원전 11세경에 요단강 서쪽에
50,000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 달리 아스돗, 텔 게리사, 텔 미크네, 아스글론의
발굴에 의하면 11세기 블레셋 도시문명은 번창하고 있었다. 사울의 통치는 그의 비극적 죽
음으로 총체적 실패로 마무리 된다.
다윗
다윗을 통해 느슨한 지파 연맹은 강력한 일인통치로 바뀌게 된다. 마리오 리베라니와 J. 알
베르토 소진은 기원전 100년경부터 “이스라엘 역사는 제의적 민간전승이라는 전 역사의 영
역을 벗어나 진정한 역사의 무대로 들어선다.”고 주장했다. 이와 달리 일부 학자들은 역사
적인 문제를 거론하며 다윗이 정치권력으로 예루살렘을 세웠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까지 했
다. 이중 에른스트 A. 크나우프는 “고고학적으로 말해서 기원전 9세기 이전의 이스라엘과
기원전 8세기 이전의 유다에 국가적 성격이 획득되었다는 징후는 없다.”고 보았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저자는 중앙집권적 제국보다는 강력한 일인통치에 더 가까운 것이 사실이지만
다윗왕국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기원전 9세기의 명문의 기록인
다윗왕조의 공식 명칭인 베트 다윗이라는 명칭을 볼 때에 이런 극단적인 입장의 취약성을
확인할 수가 있게 된다.
성서에 의하면 다윗의 통치기간인 40년간은 이스라엘의 “황금기”로 여겨졌다. 그의 왕의 자
리에 입성은 그가 초기의 북부지파 가 아닌 유다 출신이라는 점과 초대왕 사울의 적이었으
며, 블레셋 군대의 용병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역설적으로 보여진다. 성서는 그가 사
울의 집안에 들어온 배경을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첫째는 사울이 자신을 그의 “병기든 자”
로 섬기게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는 골리앗 장수를 한차례 전투에서 죽인 후 사울 앞에
서 공식적인 영웅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요나단의 지지로 받았으나, 사울에 대한 공모
를 꾀했다는 혐의로 피신하는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비아달과 같은 제사장과
선지자 갓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함으로서 다윗 당파의 야웨 종교의 중요성을 입증
해주고 있다. 그는 블레셋 영토로 망명하였으나 유다의 적인 아말렉 사람들과 싸움으로서
유다 지도자들과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사울과 다윗 가문의 “장기전” 가운데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의견 충돌과 살해당함으로서 결
국 다윗이 왕이 되었다. 오랜 적수가 통일되는 가운데 묵과할 수 없었던 블레셋은 두 차례
의 공격을 감행했으나, 다윗은 그들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의 여부스 사람들을 공격해서 그
도시를 빼앗을 수 있었다. 결국 이 도시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실
로에서 블레셋으로 빼앗긴 후에 다시 기럇 여아림에 있던 궤를 예루살렘에 가져와 야훼종교
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결속을 강화하는 통합 요소가 되었다. 그는 결혼을 통해 갈멜사람 아
비가일, 이스르엘 사람 아히노암, 그리고 요단 동편 그술 왕의 딸 미아와의 결혼 등으로 다
양한 정치적, 국가적 집단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다. 또한 군사적으로 잘 훈련된 군대를 가
지고 있었고, 대외적으로 블레셋의 진출을 저지하여 왕국을 동쪽으로 확장할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모압으로 부터 조공을 받았고,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함과 함께 에돔에 수비대
를 두어 에돔을 종으로 삼았다. 중요한 적국 중에 하나인 암몬과의 전쟁은 요압에 의해서
제압되었고, 수도 암몬의 수도 랍바를 점령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그의 직감접 통치영역
은 홍해에서 유프라테스 강 만곡까지 확장하게 되었다. 그는 국제적인 교역로를 통제하여
이스라엘은 경제 강국이 되었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이후에 두로왕 히람조차도 그와
무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런 그의 왕국의 확장은 예루살렘의 지위를 바꾸었고, 연합 왕국의 경계는 단에서 브엘세
바까지 이르지만 관할 영토와 종속 국가들을 합하면 그 영역은 훨씬 넓어진다. 그러나 이왕
국은 강력한 일인통치 혹은 제국이었을 것 같지만, 중앙 행정 조직은 여전히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다윗 통치 말기에 예루살렘에 왕실 내각이 있었는데, 군대장관 요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리품, 관할 영토들의 조세, 봉신 왕들의 공물 등이 다윗의 왕실 창고로 들어
왔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새 성전을 건축할 계획을 세웠고, 행정, 조세, 부역의 토대를 마련
코자 인구조사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성전 건축 계획과 인구조사는 내부적으로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연합왕국의 지배 원리는 조직화와 중앙 집중화였다. 그러나 중앙
집중화는 그의 통치 말년에 달성되었다.
사울의 후계자로서 다윗의 정당성 문제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불안한 연합에 의해서 들어난
다. 처음 다윗은 사울 집안의 환심을 사고자 그의 딸 미갈과 결혼을 하고 사울의 상속인인
므비보셋을 정기적으로 자기식탁에 초대한다. 그러나 결국 다윗은 미갈을 버리고, 기브온
사람들로 하여금 사울의 자손 일곱을 죽이도록 한다. 또한 다윗의 가정은 아들들 사이의 경
쟁과 시기로 어려움을 겪게된다. 그의 장자 암논은 셋째아들 압살롬에 의해서 살해된다. 그
는 반란을 꾀했으나 군대장관 요압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 압살롬의 반란은 이스랑엘과 유
다 사이의 경쟁관계와 베냐민 지파의 저항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후 요압과 아비아달의 아
도니야의 후계자 지지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다윗의 후계자가 된다.
성서전승을 문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상당부분이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사건이 일어난 후
얼마 후에 쓰여졌기 때문에 신뢰할 만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전승으로서 의도적으로 그
들의 왕권과 인간성을 미화 하기위해서, 그리고 대외정책에 대한 부분, 특히 블레셋 굴복과
두로 왕 히람과의 관계처럼 정복한 영토에 대한 부분의 모호한 진술도 미화하기 위해서 쓰
인 부분도 있다. 또한 다윗의 영향력이 홍해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렀어도 이것이 원
거리 지역에 대한 군사적 위협에 의존하는 명목적인 것일 수 있다. 그의 정치영역은 일인
통치로 규정해야하며. 그의 통치 말년에 자신의 권력을 조직하고 집중화하기 시작했다. 다
윗의 통치는 전쟁으로 규정해야 하며 다윗이 지은 소수의 건물은 솔로몬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이 통치기에 고고학적 증거는 가나안 도시의 흔적을 제외하고는 빈
약하다. 요하난 아하로니의 단과 브엘세바에 대한 다윗에 의한 재건설은 현대 고고학자들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다윗의 통치기간을 연대로 정하기에 가장 적절한 고고
학적 유적들은 헤브론과 유다 산지에 있다. 그러나 이 물품이나 건출물도 10세기 초엽으로
추정하기 어렵고, 10세기에 있었던 건축활동도 솔로몬의 통치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제한적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토이는 영광스런 성취의 시대로서 아시리아와 이
집트가 약해진 틈을 이용해 간하고 현명한 인물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결합하고 예루살렘을
공통의 수도로 삼으면서 이 통일을 그의 지배의 기반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솔로몬
솔로몬은 그의 통치기 처음에 내부적인 위협과 외부적인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다윗의 아
들 아도니야의 존재는 그가 후계자로 주장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솔로몬은 그가 음모
를 꾸민다는 혐의를 받자마자 처형하였고, 다윗의 군대장관이며 아도니야의 지지자인 요압
까지 처형하게 되고, 또한 그의 지지자인 제사장 아비아달은 아나돗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외부적으로 통치자의 교체를 이용해 이집트 파라오는 외교적 간섭하려고 했으나, 솔로몬의
힘을 알고 그와 동맹을 맺고, 자기 딸을 그의 아내로 주고 게셀 성을 신부 지참금으로 주었
다. 이것은 이집트의 쇠퇴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 후 솔로몬은 이집트의 영역에 들어가는
블레셋 영토를 공격하지 않았다. 솔로몬의 영토는 게셀이 추가된 것을 제외하면 다윗왕조의
규모와 같았을 것이다. 두로왕 히람과의 교역관계가 발전했으나, 그 외의 어떤 대외정책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솔로몬은 주변국가의 충성을 확보를 위해 외교적 정략결혼을 감행
했다.
솔로몬의 정치적 영향력은 공고했으나, 아마 성서의 블레셋 사람의 땅과 다메섹 왕국에 관
해, 그리고 시리아 북부와 두로 북쪽의 페니키아 해안에 대해서는 수정이 필요하다. 솔로몬
은 자기 왕국의 행정을 재정비 했는데, 그는 현자로서 중앙정부로서 새로운 왕실 내각을 만
들었고, 이 관료들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아들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는 경우가 있
었다. 또한 관료제도가 더 복잡해지고, 더 널리 보급되었다. 나단 선지자의 두 아들은 이 내
각의 일원이었다. 또한 이스라엘 영토는 돌, 므깃도, 벳-스안과 같은 합병된 가나안 도시국
가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확장되면서 열 두개의 행정 구역 혹은 도로 나뉘어져
서 지사 혹은 총독이 우두머리가 되었고, 이를 통해 행정의 중앙집중화가 이루어졌다. 각
행정구역은 왕과 왕궁을 위하여 매년 한 달씩 부양해야 했다.
솔로몬은 국제교역으로부터 새로운 수입원을 개발했는데, 정부가 이 교역을 관장했다. 페니
키아와의 교역은 목재와 기술원조를 받고, 이스라엘의 농작물을 제공했으며, 두로 사람들과
협력하여 오빌에 사절단을 보내어 금, 보석, 열대지방 특산물을 가져왔다. 또한 아라비아사
막을 통해서는 향료를 들여왔다.
그의 통치기는 비교적 평온했지만, 군대를 현대화하려고 힘썼는데, 이집트로부터 전차를들
여오고, 크웨 왕국으로부터 말들을 수입했다. 그는 건설 활동에도 주력했는데, 예루살렘에
벽을 세우고, 하솔, 므깃도, 게셀에 세 요세를 건설했다. 이 건설 활동은 군사적 방어와 연
결된 것같다. 그의 주요 업적은 공공 건축물인 7년간의 성전건축과 13년간의 왕궁을 건설
하는 것, 그리고 일종의 계단식 구조물로 추정되는 밀로를 건설한 일이다. 이 공공 건축물
은 페니키아 사람들의 기술도입으로 가능해졌다.
이 공공건물들 중에서 특히 성서는 왕의 영광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중요했다
는 것을 성서는 묘사하고 있다. 이 건물의 건축은 부역의 의무, 강제노역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외국인과 이스라엘인들에게 부과되었고, 이런 강제노역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군대
징집은 솔로몬에 대한 대중적 불만을 갖게 하였다. 솔로몬 통치 후반기에 내부 불만은 자라
남과 동시에 외부 위협인 속국들의 위협, 그 중 에돔사람 하닷과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이
위협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내부적 불만은 선지자 아히야의 지지를 받는 여로보암을
필두로 표출되게 된다. 그에 대한 불만은 많은 아내를 거느림으로 종교적 이유로 백성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솔로몬의 통치에 대한 성서전승을 역사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같은 시기에 히브리어 문
서나 솔로몬에 대해 언급하는 고대 근동문서가 없는 상황에서 성서와 고고학에 의존해야 하
는 문제점이 있다. 열왕기상 1-11장은 “솔로몬의 행정”이 언급되는데 이것은 현존하지 않
는 기록에서 발췌한 것으로 초기 문서전승이 포함되어있다. 이것은 그의 사후 얼마 후에 기
록된 것으로 그 사라진 기록은 솔로몬의 전과를 솔로몬의 전과를 자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전형적인 현군으로 묘사한다. 이 초기 전승은 후대 신명기 사가의 첨가 및 후대 편집
자들의 수정과 종종 혼합되었다. 이런 과장과 후대의 첨가를 제쳐두고 본문 대부분의 아부
섞인 문구를 무시하면 성서 전승의 주요사항은 대체로 믿을 만한 것이다. 당대의 연대기나
행정문서와 비슷한 문체를 가진 구절들은 신뢰할 수 있다.
솔로몬 시대에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게
셀을 공격했고, 이집트의 문서 중에서 확인이 되지 않지만 그의 딸과 솔로몬의 결혼이 있었
다. 솔로몬 왕실은 이집트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조정의 구도와 나라를 12행정구역으로 조
직한 것에서 입증되는데, 특히 괴스타 W. 알스트룀은 야곱의 열두 아들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관한 문서 전승의 근원을 12행정의 조직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사실
일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될 경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개념은 이 시대로부터 족장시대로
의 투사가 되는 셈이다. 또한 이집트의 파라오 시삭은 가나안에서 이집트의 세력을 회복하
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여로보암의 반란을 지지하면서 이스라엘 왕의 반대자들을 지지하며
르호보암 재위 5년에 유다와 이스라엘을 공격할 군사 원정대를 조직하게 된다.
이스라엘과 페니키아의 관계는 성서 외의 전승, 에베소의 메난더, 알렉산더 디우스 폴리히
스터, 요세푸스를 통해 우리에게 이차 혹은 삼차적인 자료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이 자료는
두, 세 사람의 중개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수되어 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작품은 페니키아 왕들의 군사 원정과 건축활동에 대해 말하는 실제 두로의 문서나
연대기를 사용한 흔적이 드러난다.
스바 여왕은 낙타를 타고 향료들을 주로 싣고 왔다. 이 사실은 솔로몬을 찬미하려 기록이지
만 기원전 8세기와 7세기의 아시리아 문서들은 실제로 아라비아에 있는 스바 왕국에 대해,
그리고 북부 아라비아 왕국의 여왕에 대해 언급한다. 또한 힌다누와 관련된 다른 아시리아
문서들은 남부 아라비아 무역이 이미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기원전 10세기 후반
에 남부 아라비아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또한 “에돔 사람” 하닷과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에 관한 혼란스러운 이야기는 솔로몬이 그의 반란에 대한 진압을 감
행하지 않고 아람지역을 그가 통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합왕국시대의 금석학적 유물은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시대는 국가의 이념적
이고, 정치적인 목표를 뒷받침하기 위해 문학 창작의 중요한 시대였던 것 같다. 아마 이스
라엘 역사의 편찬도 아마 이시기에 시작된 것 같다. 이스라엘의 역사편찬은 페니키아의 역
사 편찬과 병행해서 발전한 것 같다. 이는 아비아달 제사장이나 그와 가까운 사람이 기록한
다윗의 계승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을 수 있다. 다윗과 솔로몬은 다양한 성소들과 연관된
초기 이스라엘 전승, 야훼 전승의 가능성 있는 것들을 한데 묶는 역사 기록을 장려했을 것
이다. 이 J전승은 야곱의 열두 아들에 관한 전승을 확립하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처음
으로 동일한 가계의 구성원으로 소개한 것 같다. 솔로몬의 복잡한 국가 행정은 읽고 쓸 줄
아는 관리들을 필요로 했다 그러므로 저자는 예루살렘과 행정수도에도 일부 고대 가나안의
도시국가들처럼 서기관들이 있었고, 아마도 학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고학은 솔로몬 당시의 건축가로서의 활동과 당대 이스라엘 사회의 변혁을 위한 활동을 어
느 정도 밝혀 준다. 윌리엄 G.디버 에 의하면 기원전 10세기의 건축물 유적은 “고대 이스라
엘의 웅장한 건축물로서는 최초의 증거일 뿐아니라 매우 인상적이다.” 솔로몬의 성전은 기
원전 586년에 바빌론인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이외의 다윗 성의 밀로라고 추정하
는 계단식 석조 구조물, 다윗 성에서 나온 성벽과 성벽 조각, 그리고 하솔, 므깃도, 게셀에
솔로몬의 주요 도시로 추정되는 주요한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고대 이스라엘의 고
고학적 유적들은 10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건설되거나 재건된 것처럼 보인다. 고고학적 관점
에서 기원전 10세기의 모습은 발전하는 과도기적 사회라 할 수 있다. 이시기의 새로운 도시
들의 출현과 경제적 성장은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나타나는 인구의 증가가 나타났고, 솔로
몬 통치 말기에 두배 정도의 인구증가가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회의 초기 국가의 변모와 행정체계의 요구는 이스라엘의 다양한 층으로부터 저
항을 물러 일으켰을 것이다. 고유의 종교적, 정치적 전승들을 보존하고 싶어한 북부 이스라
엘은 더욱 그랬을 것이다. 또한 솔로몬의 징집과 강제 부역은 인구의 혼합에 의해 사회적
긴장을 야기시켰을 것이다. 이런 상황들이 이스라엘과 유다 간의 갈등을 더욱 크게 했을 것
이다.
질문 -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히브리 문학은 이집트 신관 서체에만 영향을 받은 것으
로 나오는데, 기원전 2000년 이전과 이후에 이집트와 더불어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글이 발
달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정학적으로 볼 때에 이스라엘의 히브리 문학은 당
시에 이집트와 고대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영향도 받지 않았을까 하는데요??? 궁금합니다..
0245050 남기은
제4장 연합왕정
블레셋을 비롯한 외부세력의 위협과 사회적, 경제적, 인구학적인 내부압력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이스라엘 연합 왕국은 사울, 다윗,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약 한 세기 동안 지속되다
가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나뉘게 된다. 이 시기는 성경의 기록이 가장 풍부한 시기
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거의 성경기록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고,
성경의 기록도 역사로서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전승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사울(기원전 1030?-1009년경)
성경은 사울이 블레셋의 군사 위협에 직면하여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집트의
명문들은 블레셋을 해양 민족 중 하나로 언급하고 있다. 에게 지방이나 아나톨리아 남부에
서 온 것 같은 해양민족들은 기원전 12세기 초에 가나안에 있는 이집트 식민지의 여러 지
역에 정착했는데 그 중에 블레셋은 가사와 야파 사이에 있는 해안 평원을 차지했고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의 다섯 도시 연맹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후에 블레셋은 아
벡 근처까지 군사력을 확장하고 이 때부터 이스라엘 연맹의 영토와 충돌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가장 발달된 군사 장비인 철제 무기로 무장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패배하
여 언약궤마저 빼앗겼고, 블레셋 사람들은 적어도 에브라임 산지의 일부를 차지해 수비대를
두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은 자기들에게 왕이 있어야 한다고 결정했고 사울이
왕으로 임명되었다.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는 이야기는 세 편의 전승에 나타나는데 그 중 야
베스-길르앗을 암몬의 공격으로부터 구해내어 왕으로 임명된 전승이 가장 믿을 만한 전승
인 것 같다. 그는 백성을 이끌고 블레셋에 대항해 싸우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성경에
서는 블레셋과의 전쟁에 대한 세부사항에 대해 간략한 암시밖에 주지 않는다. 아마도 사울
은 블레셋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중심부 밖으로 몰아내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같지만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고 결국 길보아산 전투에서 패배하며 죽음을 당했다.
사울의 통치기간은 불분명하지만 성경을 통해서 철제 도구들이 귀하고 가족중심의 왕위체제
상황이었던 것은 알 수 있는데 그의 통치에 관해 역사적으로 균형 잡힌 평가를 내리기는 어
렵다. 다윗의 동료인 아비아달이나 그와 가까운 사람이 기록한 것 같은 사무엘상 16-27장
은 신뢰할 만한 정보도 들어 있을 수 있지만 그 정보도 다윗에게 유리하도록 편향적이고 의
도적인 방향으로 제시되면서 사울을 악한 왕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모압, 에돔,
소바, 심지어 아말렉에 이르기까지, 사울이 치렀다는 여러 전쟁은 형편없는 그의 군대조직
상황과 먼 거리를 감안할 때 역사성이 의심스럽다.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블레셋
과의 전쟁을 위해 사울이 왕으로 임명된 것 같다는 것뿐이다.
유다북부 산지와 이스르엘 계곡 너머에 대한 얼마간의 영향력과 함께 에브라임 산, 베냐민,
길르앗 정도를 포함했을 그의 왕국은 고고학적으로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작은 촌락,
농경지, 노천 예배소 등이 드러난 그 지역의 조사와 발굴은 기원전 1000년경까지의 이스라
엘이 중앙 집권 조직과 행정이 없는 농부들과 목축업자들의 사회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 같다. 반면 기원전 11세기에 블레셋의 도시문명은 번창하고 있었다.
다윗(기원전 1009/1001-969년경)
다윗의 통치와 더불어 이스라엘은 국가적 실체로 등장하게 된다. 명확하지 못한 부분과 남
아있는 역사적 문제로 다윗 왕국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학자들도 있기는 하지만, 모압 왕 메
사와 다메섹의 하사엘이 기록한 기원전 9세기 명문에 ‘베트 다윗’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유다 왕국을 지칭한 점 등은 그런 극단적인 입장의 취약성을 드러나게 한다.
유다 지파 출신, 사울로부터의 추방, 블레셋에서의 용병생활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의 통
치의 중요성을 보여주는데 후대에 다윗은 모범적인 왕으로, 그의 통치기간은 이스라엘의 황
금기로 여겨졌다.
사울이 죽고 그의 아들 이스보셋 마저 죽은 후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먼저 서쪽 국
경에 대한 블레셋의 팽창 위협을 저지함으로써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에 여부스 사람들
에게서 취득한 예루살렘을 온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수도로 삼고 동쪽으로 영토를 확
장하기 시작했는데 에돔, 모압, 암몬과 그의 동맹인 시리아 남부 아람 왕국 등 다윗의 직?
간접적인 통치영역은 홍해로부터 유프라테스강 만곡까지 확장되었다. 또한 국제적인 교역로
를 통제함으로서 얻은 이익과 전리품, 공물 등으로 이스라엘은 경제 강국이 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중앙 행정 조직은 여전히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중앙 집중화의 과정
은 다윗 통치의 말년에 가서야 시작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솔로몬에 의해서 좀 더 폭넓게
실현되었다.
내부적으로는 사울의 후계자로서 다윗의 정당성 문제와 왕자들의 경쟁 문제가 있었다. 처음
다윗은 미갈과 결혼하기도 하고 므비보셋을 초대하기도 하면서 사울 집안과의 화해를 꾀하
였으나 사실상 미갈을 버리고 사울 자손에 대한 기브온 사람의 보복을 허락하면서 화해는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다윗의 장자인 암논은 압살롬의 지시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압살
롬은 반란을 주도하다 살해당했고 아도니야와 솔로몬 사이에서도 왕위 계승 다툼이 있었다.
다윗의 통치도 동시대에 쓰인 문서가 없는 상황에서 역사적인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성경
전승의 상당부분이 다윗, 솔로몬 시대에 쓰여 신뢰할 만한 증거가 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초기 전승이라 할지라도 의도적일 수 있다. 실제로 다윗의 통치에 간한 대부분의 기록은 다
윗과 솔로몬을 미화하기 위하여 쓰인 것 같다. 다윗의 대외정책들에 관한 기록도 의도성의
흔적이 보인다. 성경은 다윗의 정치적 통제보다는 군사적 승리를 더 강조하지만 블레셋 영
토 중 게셀만 차지했던 것 등을 볼 때 다윗의 영역 안에는 종속왕국에서 동맹왕국에 이르기
까지 여러 수준의 정치적 통제가 있음을 알아야한다. 고고학적 증거도 파괴로 추정되는 가
나안 도시들의 흔적 외에는 빈약하다.
이 모든 제한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통치는 영광스런 성취의 시대였다. 다윗은 아시
리아와 이집트가 약해진 틈을 이용해 이스라엘은 통합하고 고대근동에서 가장 중요한 강국
중 하나를 냈으며 수천 년 동안 야훼 숭배를 뒷받침할 종교적 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솔로몬(기원전 970/969-931년경)
주로 전쟁을 수행하고 정치적?군사적 수완으로 왕국을 확장하던 다윗에 비해 솔로몬은 다윗
이 획득한 영토를 공고히 하고 왕국의 행정을 조직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솔로
몬은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야만 했다. 왕권에 위협적인 존재였
던 배다른 형제 아도니야는 음모혐의를 받자마자 처형당했고 그의 지지자인 요압과 아비아
달도 처형당하거나 추방당했다. 또 솔로몬은 사울 가문의 지지자인 시므이도 처형했다. 외
부적으로는 시아문으로 추측되는 이집트 파라오가 통치자 교체를 이용해 개입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솔로몬에게 게셀 성과 딸을 주면서 동맹을 맺었다.
솔로몬 왕국의 대외관계는 게셀이 추가된 것과 두로 왕 히람과의 교역관계가 발전한 것 외
에는 다윗왕국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솔로몬도 정략결혼을 이용하여
주변 왕국의 충성을 확보하였으며 왕국의 행정을 재정비했다. 중앙정부에는 새로운 왕실 내
각을 임명했으며 이스라엘은 12개의 행정구역 혹은 ‘도‘로 나뉘어졌다. 각 도에는 왕이 임
명한 총독들이 세워 통치 행정을 중앙 집중화하고 통제했으며, 각 행정구역은 과중한 경제
적 책임을 들여 매년 한달씩 왕과 왕궁을 부양해야 했다. 관할 영토와 속국으로부터도 정기
적으로 공물을 받았다.
솔로몬은 페니키아나 오빌 등과의 국제적 교역을 통해 주요 수입원을 새롭게 개발했다. 이
집트와 크웨에서 수입한 전차와 말들로 군대를 현대화했으며 하솔, 므깃도, 게셀에 요새를
건설했다. 솔로몬은 건설 활동으로도 유명한데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 건설 등의 공공사업은
주요한 업적이었다. 이 공공건축물들을 계획하고 건설하기 위해 페니키아 사람들의 기술적
도움과 강제노동을 통한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다. 강제노역과 강제 징집은 솔로몬 통치에
대한 대중적 불만의 주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솔로몬의 통치 후반부에는 내부의 불만이 자라갔으며 동시에 외부의 위협이 생겨났다. 성경
은 솔로몬의 적수로 에돔 사람 하닷과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말하는데 실제로 이 두 적수
는 동일 인물(엘리아다의 아들 하닷)이었을 수도 있다. 이스라엘의 내부 불만은 마침내 여
로보암을 선봉으로 한 반란으로 표출되었다. 솔로몬의 통치에 대한 불만은 여러 원인이 있
었겠지만 성경은 이방신을 섬겼던 솔로몬의 많은 외국인 아내들의 이야기를 강조한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성경 전승을 역사적으로 평가하기는 매우 어렵다. 동시대의 고
대 근동 문서가 없는 상황에서 거의 전적으로 성경이나 고고학에 의존해야 한다. 성경의 내
용도 오빌 진출과 스바 여왕의 방문 전승의 결합 가능성, 하맛소바나 다드몰, 레바논 지명
에 관한 전승 비교에 비추어 볼 때, 후대 신명기 사가의 첨가 및 후대 편집자들의 수정이
혼합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솔로몬의 정당화하고 찬미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부분
들을 무시하고 본다면 성경 전승의 주요사항들은 대체로 믿을 만한 것 같다. 이 시기 종교
사에 대한 성경 외적인 지식은 솔로몬과 이집트, 페니키아 및 스바와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며 고고학은 솔로몬 통치기의 사회적 변화뿐만 아니라 그의 건축가로서의 활동에
대해서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다윗에 대한 성경 전승과는 다르게 솔로몬 시대에는 몇몇 파라오들이 등장하는데 통치 초기
에는 시아문으로 추정되는 파라오가 게셀을 공격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문서 중에서는 솔로
몬과 파라오의 딸 사이의 정략결혼을 확인해 주는 것은 없지만 몇몇 학자들은 12행정구역
인 솔로몬의 조정 구도와 이집트 문화와의 연대성을 증거로 삼는다. 성경 기록에 등장하는
또 다른 파라오는 ‘시삭(셰숑크)’이다. 그는 가나안의 이집트 세력을 회복하기 원했고 결국
르호보암 5년에 유다?이스라엘 왕국을 공격할 원정대를 조직했다. 에베소의 메난더, 디우스
폴리히스터, 요세푸스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수된 문서 전승은 히람과 솔로몬 사이의 교역관
계를 어느 정도 밝혀준다. 뿐만 아니라 일부 페니키아 명문들과 후대의 다른 전승들은 두로
사람들이 기원전 1천년대에 홍해의 해상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확인해준다. 성경에
서는 오빌 원정과 스바 여왕의 이야기가 얽혀 있지만 두 사건을 다른 것으로써 스바 여왕은
낙타를 타고 왔다. 이 이야기가 문학적?전설적 소재를 내포하고 있으며 솔로몬을 찬미하기
위하여 쓰인 것은 분명하지만 스바 왕국과 아라비아의 몇몇 여왕, 기원전 890년 경의 국제
적인 아라비아 무역에 대해 언습하고 있는 기원전 7?8세기 아시리아 문서들을 볼 때 충분
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또한 엘리아다의 아들 하닷으로 추정되는 하닷과 르손의 반란
에 솔로몬이 진압을 감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솔로몬은 아마도 아람지역을 통제하지 못했
던 것 같다.
게셀 월령을 제외하면 다윗?솔로몬 시대의 금석학적 유물도 매우 드물다. 하지만 솔로몬의
복잡한 국가 행정이나 이집트의 부분적인 영향력을 감안하여 볼 때 이 시대는 문화 창작의
중요한 시대였던 것 같고, 논란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편찬도 이 시대에 시
작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 때 이뤄진 초기 전승들의 결합은 저 유명한 야훼기자의 작품
이었을 수도 있다. 고고학 역시 건축가로서의 솔로몬의 활동과 당대 이스라엘 사회 변혁을
위한 활동을 어느 정도 밝혀주고 있다. 파괴되었던 성전 언덕의 벽면 일부나 다윗 성의 성
벽 조각들, 오벨 북쪽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파편들은 논쟁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솔로몬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솔로몬이 요새를 건축했던 므깃도, 하솔, 게셀의 세 도시에서는 거
의 똑같은 요새 구도가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말해 고대 이스라엘의 많은 고고학적 유적들
이 10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건설되거나 재건된 것처럼 보인다. 또한 고고학적 관점에서 이
시기는 급속히 발전하는 과도기적 사회이다. 재도시화 과정이 시작되고 인구가 증가했으면
수공업자, 상인, 관리들도 있었다.
이스라엘 사회의 이러한 변모와 새로운 행정 체계들은 이스라엘 사회의 여러 층으로부터 저
항을 일으켰다. 특히 인구의 혼합이나 차별적인 직위 등은 북부 이스라엘과 유다사리의 적
대감을 첨예화하는데 일조했다. 결국 솔로몬 죽음 후 이스라엘은 두 개의 나라로 분리되어
발전한다.
0245027 김성민
<연합 왕정>
-사울, 다윗, 솔로몬-
연합 왕국은 국제무대에서 이스라엘의 영광의 순간이었다. 이스라엘 왕정은 어떻게 생겨났
는지에 대해, 블레셋의 위협 또는 다른 외부의 압력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내부적 압력도 고려해야 된다는 말도 있다. 필요할 때마다 등장하는 지도자들로는 신생 국
가를 이끌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연합 왕국은 약 한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 후
왕국은 분열하게 된다. 사울의 아래에서는 소규모의 영토를 다스렸지만 다윗과 솔로몬 때에
큰 규모로 변모하게 된다. 특히나 이 시기에 해당하는 성서 기록이 풍부하기 때문에, 연구
가 쉬울 듯하지만, 성서에만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점 때문에 이 시기의 역사를 재구성
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또한 관련된 전승도 신뢰할 수 없고 저자의 의도가 과도히 반영
된 만큼 이 시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서에 보존되어 있는 다양한 전승의 차이점뿐만 아
니라 문학 비평의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세기에 대한 ‘최대주의’ 와 ‘최소주의’
견해에서 나타나듯이 성서기록과 고고학의 근거를 매우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한다.
King Saul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지만 버림받았다. 그는 사무엘과 다윗 사이에 끼여 있어서
대조적으로 더 사악하게 보인다. 그가 왕에 오르는 계기는 블레셋의 군사 위협으로 설명된
다. 블레셋은 당시 이스라엘 연맹이 차지하고 있던 영토 근처까지 영토를 확장함에 따라 이
러한 위협이 일어나게 됐다. 첫 번째 전투는 성서에서 밝히듯이 이스라엘이 크게 패배했고,
두 번째 전투에서는 언약궤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에벤에셀의 전투 이후 블레셋이
에브라임가 베냐민 산간 지방에 수비대를 두는 등 압박을 가했고, 이스라엘은 산간지방으로
가서 몸을 숨기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사울이 왕이 되는 데에는 3가지의
전승-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다가 사무엘을 만남, 사무엘이 왕을 선택하기 위해 미스바에서
제비를 뽑을 때 사울이 짐짝 사이에 숨어 있었던 일, 그리고 가장 믿을 만한 전승으로 사울
이 야베스-길르앗을 암몬의 공격으로부터 구해내어 사람들이 길갈에서 사울에게 충성을 맹
세한 일-에서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이 이야기들에서 사울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다.
사울의 주요 임무는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블레셋과의 전투들에 관해 세부사항은 찾아
볼 수 없지만 사울은 아마도 블레셋을 이스라엘의 중심부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을 것
이다. 하지만 사울은 평지전투에서는 이길 수 없었다. 그러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버림받게 된다.
사울의 통치 기간은 불분명하지만 성서의 구절에서 철제 도구들이 귀했던 상황을 보여주며,
사울의 왕위가 본질적으로 가족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통치에 대해 역사적으로 균
형 잡힌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성서 전승에서 그는 다윗과 대조를 이루는 전형적인 악한
왕으로 표현되는 듯하다. 그의 왕국도 그다지 넓지 않았다. 그의 왕권에 대한 고고학적 증
거도 발견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이스라엘의 상황과는 반대로 블레셋의 발전과 번
창은 계속되고 있었다. 사울의 통치는 실패로 마무리되고 이스라엘의 회생은 불가능해 보였
다. 그러나 다윗의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다시 한번 투쟁을 시도하게 된다.
King David
다윗의 통치와 더불어 이스라엘은 국가적 실체로 등장한다. 지파들의 연맹적인 유대는 강력
한 일인통치로 바뀌었고, 이 사실은 왕, 군대, 영토, 이웃국가들과의 관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명확하고 고고학적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입장의 방법론 역시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서는 그의
통치에 관해 자세하기 다루고 있는데, 그는 오랜 통치 기간은 ‘황금기’로 여겨졌고, 그 역시
모범적인 왕으로 이해되었다. 그는 이세의 막내아들로써, 사울의 집안에 들어오게 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첫째로 사울이 다윗을 자신의 'Armor-bearer'로 삼은 것이
고, 두 번째 설명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 앞에 소개되는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친
구 요나단의 지지를 받았고 평탄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사울의 눈 밖에
나게 되고 음모를 받아 피신하게 된다. 사울이 추적하는 동안 그는 유다 여러 지역에서 숨
어 지내다가 블레셋 영토로 망명한다. 그리고 사울이 죽은 후 유다의 왕이 된다. 얼마 후
사울 아들들이 살해당하자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이
러한 꼴을 블레셋이 가만 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공격을 감행했고, 이스라엘은 그들을
모두 물리쳤다. 블레셋을 무찌른 다음, 예루살렘을 빼앗아 오게 된다. 그리하여 이 예루살렘
을 중심으로 궤를 옮겨옴과 동시에 야훼종교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결속을 강화하게 되었다.
다윗은 열렬한 야훼 숭배자였다. 그리고 그는 결혼을 통해 다양한 정치적, 국가적 집단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다. 또한 잘 훈련된 군사력을 구축했다. 블레셋의 진출을 저지한 그는 왕
국을 동쪽으로 확장하게 된다. 그리고 뒤이어 암몬도 정복하게 된다. 또한 국제적인 교역로
를 통제함으로써 경제 강국으로의 길로 이끌었다.
이러한 다윗의 업적은 예루살렘의 지위를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많은 전리품, 조세, 공물
등이 다윗의 왕실 창고로 들어왔고, 이에 다윗은 예루살렘에 새 성전을 건축할 계획을 세웠
다. 그리하여 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내부적 반대에 부딪혔다. 이런 연합왕국의 원리는 중
앙집권화였으나 실제로 다윗 통치의 말년에 가서야 시작되었으며, 솔로몬에 의해서 더 확실
히 실현되었다.
그는 내부적으로 사울의 후계자로서의 정당성에 문제가 있었다. 그는 사울의 딸과 결혼하기
도 하였으며, 사울의 상속인이던 므비보셋을 자기 식탁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그의 노력을 보이는 듯 했지만 실제로 그는 사울의 딸인 미갈을 버렸으며, 기브온 사람들로
하여금 사울 자손들 중 일곱 명에게 보복하도록 허락하면서 사울 집안과의 화해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의 장자인 암논은 셋
째 아들 압살롬의 지시로 살해되었다. 압살롬은 반역을 꾀하다 군대장관 요압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후에 솔로몬이 왕으로 인정되어 다윗은 평화롭게 숨을 거두게 된다.
그의 대한 역사적 평가는 사실상 어렵지만, 그에 관한 성서전승이 사건들이 일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쓰였다는 점에서 볼 때 신뢰할 만한 증거가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의
도적일 수도 있는 것이, 실제로 다윗 통치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은 다윗과 솔로몬을 미화하
기 위해 쓰인 것 같기 때문이다. 다윗의 등극에 관한 이야기와 대외 정책들에 관한 기록에
서 그 흔적이 엿보인다. 그의 통치에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는 매우 빈약하며, 그의 통치 기
간으로 연대를 정하기에 가장 적절한 고고학적 유적들이 헤브론과 유다 산지에 있다는 정도
이다. 하지만 이 모든 제한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통치는 영광스런 성취의 시대였다.
King Solomon
다윗이 주로 영토를 확장하는데 골몰해 있었다면, 솔로몬은 그 영토를 공고히 하는 데에 관
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통치 첫 해에 내부적인 위협과 외부적인 위협이 있었다. 내부적인 위협으로는,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가 살아 있는 동안 솔로몬의 후계자 자리가 위태로웠던 것을 꼽을 수
있고 외부적인 위협으로 이집트 파라오가 개입하려는 시도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솔로몬
의 힘에 대해 오히려 동맹을 맺게 되면서 위기를 넘기게 된다.
그의 통치 아래 이스라엘의 영토는 아마도 다윗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는
자기 왕국의 행정을 재정비했다. 그는 그의 평화로웠던 통치기에 국제 교역으로부터 주요
수입원을 새롭게 개발했고, 이로부터 많은 이익을 얻어 내었다.
그의 통치는 비교적 평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대의 개편에 애를 썼다. 또한 그는 공
공 건축물들을 계획하고 건설하였는데, 여기 필요한 값싼 노동력의 해결책으로 강제 노역을
부과함으로써 대중적 불만을 야기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점점 자라감에 따라 내부 불만이
쌓이고 동시에 외부의 위협도 생겨났다. 솔로몬에 대한 불만 중 하나는 그의 많은 외국인
아내들이었다.
솔로몬의 통치에 대한 성서 전승 또한 역사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시기 종교사에
대한 성서 외적인 지식은 그의 통치기에 일어난 사회적 변화, 건축가로서의 그의 명성에 대
해서도 이해를 시사해준다.
그의 시대에는 이집트의 몇몇 파라오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페니키아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정보가 문서 전승을 통해 내보여진다.
일반인에게도 유명한 스바 여왕의 이야기에 관해서는, 그 이야기가 다양한 문학적이고 전설
적인 소재를 내포하고 있으며 솔로몬을 찬미하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로 아시리아 문서들은 아라비아에 있는 스바 왕국의 여왕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기
에 이러한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다.
금석학적 자료의 희소성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는 국가의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목표를 뒷받침하기 위해 수행된 문학 창작의 중요한 시대였던 것 같다. 이스라엘의 역사 편
찬도 아마 이 시대에 시작되었던 것 같다. 초기 이스라엘의 전승들의 결합은 야훼 자료일수
도 있다. 또한 그 시대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관리의 배출을 위해 학교가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고고학 역시 솔로몬의 건축가로서의 활동과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변혁을 위한 활동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
솔로몬의 성전은 아마도 BC586 경에 바빌론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 것 같다.
국가로서의 이스라엘 초기 모습은 많은 변화와 더불어 저항을 일으켰다. 고유의 전승들을
보존하고 싶어 했던 북부지파들에 경우에 더 심했으며, 솔로몬의 강제 부역 과정에서 긴장
이 야기됐다. 솔로몬의 죽음과 그 후의 일들은 다윗과 솔로몬의 업적을 지탱하던 기반이 얼
마나 취약했는가를 보여준다. 아마도 이러한 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조직적인 민족국가로 유
지, 발전되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국가는 두 개로 나눠지게 되었다.
0345045 최두현
연합 왕정
요약
느슨한 지파 동맹에서 연합왕정이 탄생한 주요요인은 블레셋의 위협이었다. 그러나 암몬의
위협과 이스라엘의 내부적 압력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얀합 왕정은 약 한 세기
동안 사우르,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고, 그후 불열되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게 된
다. 사울의 왕정 아래 소규모의 영토를 갖았던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아래 주변
에 속국을 거느린 큰 규모의 통일 왕국이 된다. 이 시기에 대한 성서의 기록은 풍부하지만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거의 전적으로 성서만 의존함으로 문제가 생긴다. 즉, 성서의 기록이
의도적이고 이 시기를 이상화하려 함으로 성서를 신뢰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밀러의 지적대
로 성서의 기록을 역사재구성에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성서에 대해서 다양한 전승
들의 차이점과 문학 비평 문제를 고려하여 성서의 증언을 바르게 보고 이와 명쾌하게 양립
되지 않는 고고학적 해석을 구분하여 다루어야 한다.
사울
블레셋의 위협
성서에서 사울은 초대 왕이면서도 결국은 버림 받는, 게다가 다윗과 대조되어 더욱 부정적
으로 보이는 왕이다. 성서는 이런 사울의 출현을 블레셋의 군사 위협 때문이라 한다. 블레
셋은 이집트 명문들이 말하는 소위 해양민족들 중 하나이다. 이들은 주전 12세기 초 시리아
-페니키아 해안과 이집트를 침입하여 파괴했고 람세스 3세가 남긴 메디네트 하부신사의 벽
에 이들과의 전투가 잘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가나안에 있는 이집트 식민지에도 정착했는
데 블레셋은 가사와 야파 사이의 해안 평원을 차지했고 체커는 돌 근방의 샤론 평원, 그렛
사람들은 네겝지역에 정착했다. 해안 평원의 블레셋은 가사, 아스돗, 아스그론, 가드, 에그론
의 다섯 도시 연맹으로 조직되어 있었고 세렌이 지배했다. 후에 이들은 아벡 근처까지 군사
적으로 확정하여 이스라엘 연맹의 영토 가까이 이르게 된다. 이들은 그 시대 첨단 군사 장
비인 철을 사용했다. 성서는 바로 이 경계에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2차례의 전투를 말한
다. 첫 전투 때 이스라엘은 패배하고 2차 전투때는 실로의 법궤까지 동원하지만 결국 패배
하고 법궤도 빼앗긴다. 이 에벤에설 전투 이후에 블레셋은 에브라임 산지의 일부를 차지했
고 에브라임과 베냐민의 산간 지방에 수배대를 두었다. 어떤 이스라엘인들은 다시 히브리인
들처럼 흩어져 사간지방이나 자연동굴로 몸을 숨겼다.
사울의 선택
이런 위기 가운데 이스라엘 지파는 왕정을 결정한다. 사울이 왕이 되는 이야기는 세편의 다
른 전승이 있는데, 세 전승다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이 있고 이중 사울이 야베스-길르앗
에서 암몬의 공격을 막고 사람들과 사무엘의 동의하여 왕이 되는 전승이 가장 신뢰받는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로 후의 다른 전승에서는 선지자로 여기지고 있다. 그는 언약궤가 보
관되어 있는 실로의 성막에서도 직무를 수행했는데, 이는 그가 제사장이었음을 말한다. 그
러나 이스라엘의 위기상황에 사울의 지도력은 부족했고 암몬을 무찌른 사울이 왕으로 추대
되고 블레셋과 싸울 것을 요청 받는다.
전사 사울
사울의 일생동안 주로 블레셋과 싸우는데, 그들과의 전쟁은 주로 소인원으로 가능한 매복과
적진에 대한 기습 공격이 빈번한 유격전이었다. 사울은 기브아 근처에서 육백 명 가량의 군
사로 이를 수행하며 아마 블레셋을 이스라엘 중심부 밖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산간지방이 아닌 평지 전투, 길보아 산 근처에서 결국 블레셋과 싸우다 전사하고 만
다. 사울의 통치 동안 블레셋 외에도 모압, 암몬, 에돔, 소바의 왕, 아말렉과도 싸우는데, 아
말렉은 출애굽 광야노정 때 사건으로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이었다. 승리의 열매를 야훼께만
드리는 헤렘 전승에 따라, 사무엘은 사울에게 아말렉 사람과 가축을 모두 죽이라고 지시하
지만 사울은 이를 어기고 이 죄때문에 사무엘은 사울을 향한 지지를 접고 야웨도 사울을 왕
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한다.
사울 통치에 대한 잠정적인 평가
사울의 통치 기간은 불분명하지만 성서의 두 구절을 통해 사울 시대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
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이시기 이스라엘은 철제 도구들이 귀했던, 농부
들과 목자들로 구성된 비전문화 사회의 모습이었고 사울의 왕위가 가족중심적이었다.
사울의 통치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균형잡힌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다. 그에 대한 사무엘상
16-27장의 이야기들은 다윗 중심의 다윗을 미화하고 사울을 이런 그와 대조시키려는 의도
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 사울이 치뤘다는 여러 전쟁들의 자료들도 유대 역사가에 의해 다
윗에서 사울로 단순히 옮겨진 것일수도 있다, 강한 블레셋의 위협을 받으며 형편 없는 사울
군대가 본거지를 떠나 멀리서 전쟁을 수행했을 거 같지 않다.
사울과 그의 통치에 관해서 확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블레셋의 전쟁을 위해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울 왕국은 아마 에브라임 산, 베냐민, 길르앗 정도를 포함했을 것이고
유다의 북주 산지와 이스르엘 계곡 너머에도 얼마간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울 시대의 고고
학적 흔적은 거의 없다. 전체적으로 그의 영토 내의 인구는 적었고 100명 정도 되는 촌락
이 큰 촌락이었을 것이다. 또 주전 11세기 중반에 대형 화재로 파괴된 실로는 블레셋 때문
인거 같다. 고고학은 주전 100년경까지 이스라엘 사회가 진정한 중앙 집중 조직과 행적이
없는 농부들과 목축업자들의 사회였다는 사실을 지지한다. 그 시기의 요단강 서쪽에 약 5만
정도가 살았던 걸로 추정된다. 대조적으로 블레셋의 해양평야 지역엔 도시문명이 번창했다.
다윗
다윗 통치와 더불어 이스라엘이 국가적 실체로 등장하고 지파들의 느산한 연맹은 강력한 일
인통치로 변모된다. 이는 왕, 군대, 왕실 내각, 확장된 영토,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 등에서
확인된다. 어떤 학자들은 고고학적으로 그 시기에 이스라엘과 유다에 국가적 성격을 갖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의 적수 국가, 모압 왕 메사와 다메섹의 하사엘에 의해
쓰인 주전 9세기의 명문들에 유다왕국을 베트 다윗이라고 명칭하는 걸로봐서 국가탄생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모범적인 왕
성서는 다윗 통치에 관해서 이상화한다. 그 기간을 황금기로 여기고 다윗 왕을 모범적인 왕
으로 이해한다. 성서는 다윗은 유다지파 출신으로 이세의 막내 아들이고 사무엘에 의해 기
름 부음받고 여호와의 신에 감동했다고 말한다. 또 다윗이 사울의 집안에 들어오게 되는 이
야기는 사울이 왕이되는 이야기처럼, 상이한 전승의 융합을 보여준다. 그렇게 다윗은 사울
밑에서 번영하지만 사울에 대해 공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받아 산간 지방으로 피신하고 급기
야 블레셋 영토로 망령하여 아기스에게 시글락을 하사 받는다. 이런 다윗에게 엘리의 자손
으로 제사장안 아비아달과 선지자 갓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했다는 사실은 다윗의 당
파에서 야헤 종교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다윗은 시글락에 있는 동안 유다의 적인 아멜렉 사
람들과 싸어 유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 결실로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후 유다
족속의 왕으로 추대된다.
다윗 왕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의 장기전은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내부분열로 다윗의 승리로 끝
나고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블레셋은 적국의 통일에 맞서 중부 산지를 두 차례
공격하지만 르바임 골짜기 근처에서, 기브온 근처에서의 두 전투다 다윗이 물리쳐 그 후 블
레셋은 군사적 팽창 노력을 포기한다. 그 후 다윗은 여부스에게서 예루살렘을 빼앗고 다윗
성이라 이름 짓는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가 되고 언약궤도 이곳
으로 옮겨진다. 이렇게 야웨 종교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결속을 강화하는 통합 요소가 되었
다. 다윗은 열렬한 야웨 숭배자였는데, 그의 신하 가운데 제사장 아비아달과 선지자 갓이
있음이 이를 확인시켜준다. 다윗의 야웨신앙으로 인해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다윗을 왕으로
인정기가 쉬었을 것이다. 다윗은 결혼을 통해 다양한 정치적 국자적 집단과의 관계를 공고
히 힜고 군사적으로도 사울을 피해 다닐 때부터 잘 훈련된 군대의 틀을 이미 구축해 놓았었
다. 이들은 다윗의 개인 경호대가 되고 그의 정규군의 핵심 간부들이 된다. 그의 조카 요압
은 군대장관이 되었다. 블레셋의 진출을 저지한 후 다윗은 동쪽으로 왕국을 확장 시키는데,
모압, 에돔, 암몬을 속국으로 삼는다. 특히 암몬은 블레셋 다음으로 강한 적수였지만 다윗은
요단 동편 북부와 시리아 남부의 아람 왕국의 동맹국까지 모두 복속시킨다. 이로써 다윗의
직간접적인 정치적 통치 영역은 홍해로부터 유프라테스 강의 만곡까지 확장하게 된다. 게다
가 국제적인 교역로를 통제함으로 이스라엘 왕국은 경제 강국이 되고 다윗은 속국으로부터
의 전리품과 공물들로 부유해진다.
초기 국가의 미숙성
다윗 왕국은 일인통치 혹은 일종의 제국으로 경제적으로 번성하고 영토도 확장되었지만 중
앙 행정 조직이 잘 정비되지는 않았다. 다윗 통치 말렵에는 예루살렘에 왕실 내각이 있었
고, 군대장관 요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윗의 왕실 창고는, 전리품, 조세, 봉신들의 공
물, 왕실 토지의 생산물로 가득 채워졌다. 지방에서 도시의 장로들이 사법권을 집행하긴 했
지만 왕에게 직접 항소 할 수도 있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새 생전을 세울 계획으로 행정,
조세, 부역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인구조사를 실시했지만 모두 내부적 반대에 직면하고 선지
자 갓조차도 인구조사에 반대한다. 연합 왕국의 지배 원리는 조직화와 중앙집중화지만 이는
다윗 통치 말기에 가서야 시작되며 솔로몬에 의해서 폭넓게 시행된다.
계승의 문제
사울의 뒤를 이은 다윗의 정당성은 불안정했다. 이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불안한 연합에 의
해 더 악화되었다. 이는 흔히 "계승의 역사"라 부르는 사무엘하 6장과 열왕기상 2장까지의
주요 주제이다. 다윗은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하기도 했고 사울의 상속인인 므리바알을 선
대하는 것 처럼 보이면서 감시하기도 했지만 사실상, 미갈을 버렸고 사울 자손들의 죽음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허용함으로써 사울 집안과 화해는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다윗의 집안에서도 계승 문제가 생긴다. 장자인 암몬은 셋째인 압살롬에게 살해 당하고 압
살롬은 아버지에게 반란하다가 요압에게 살해당한다. 이 발란에는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경쟁 관계나 다윗에 대한 베냐민 사람들의 저항이 관련되어 있다. 압살롬의 죽음 후 아도니
야가 예비 후계자가 되어 군대 장관장관 요압, 제사장 아비아달의 지지를 받지만 결국 선지
자 나단과 제사장 사독과 시위대장 브니야의 지지를 받는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이 왕으로
인정되고 다윗은 평화롭게 죽는다.
성서에 대한 평가
성서의 기록과 동시대에 쓰인 문서가 없기에 다윗 통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렵다. 후대
의 신명기적 사가의 영향을 반영하는 첨가와 해설 부분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다윗 혹은 솔
로몬 시대에 쓰였기에 신뢰할 만한 기록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초기 전승도 의도적일 수 있
다. 대부분의 기록은 다윗과 솔로몬을 미화하는데, 다윗의 인간성에 대해서 그렇다. 또 다윗
왕권의 정당화 하려하고 있고 막내인 솔로몬의 왕의 계승도 정당화 하려하고 있다. 특히 다
윗이 밧세바에게 그녀의 아들을 왕으로 삼아주겠다는 건 문학적 창작에 가깝다. 실상은 밧
세바가 지지세력을 얻어 연로한 다윗을 설득하여 솔로몬을 추대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윗의 대외정책에 관한 것도 의도성이 짙다. 정복 영토에 대한 정치적 통제보단 군사적 승
리를 더 강조한다. 블레셋과 싸워 이겼어도 그 영토를 통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윗이
겔셀까지 무찔렀다고 하지만 이곳은 블레셋 영토의 동쪽경계이며 솔로몬 때에야 복속되었
다. 두로 왕 히람의 관계도 종속관계라기보단 기술적으로 우월한 페니키아 사람들과의 상업
적 관계였고 이도 다윗 말년이나 솔로몬 때 이루어졌다. 암몬과 모압 같은 종속 왕국도 속
국으로 삼았다고 하나 현지 지도자들로 통치하게 했을 것이고 하맛 왕 도이는 동맹왕국이었
을 것이다. 다윗의 영향력이 홍해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라 하지만 그 통제력이 정도의 차
이가 있었고 먼 지역에 대해선 군사적 위협에 의존하는 명목적인 것에 불과했다. 다윗의 정
치적 영역은 제국이라기 보단 강력한 일인통치였고 말년에 가서야 자신의 권력을 조직하고
집중화하기 시작했다. 다윗의 통치는 전쟁으로 주이고 다윗이 지었다는 건물들은 솔로몬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놓다. 고고학은 이 시대에 파괴로 추정되는 가나안 도시들의 흔적을
제외하곤 빈약하다고 말하며 예루살렘도 그다시 변화된 것이 없었던 거 같다. 헤브론과 유
다 산지에서의 급진적 발전도 솔로몬 통치기였을 것이다. 이런 제한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통치는 영광스런 성취시대였다. 국제 상황의 호기를 맞아 다윗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일하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고 잠시동안 고대에서 중요한 강국이 되었고 야웨 숭배의 종
교적 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솔로몬
다윗이 주로 전쟁을 통한 왕국확장에 집중했다면 솔로몬은 그 나라를 더욱 공고히 하고 행
정을 조직하는 일에 집중했다.
솔로몬의 통치에 대한 위협
솔로몬 통치에 대한 위협은 내부적으로 다음에 외부적으로 이루어졌다. 솔로몬은 내부적인
요인으로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아도니와와 그의 추종세력, 그리고 사울 가문
의 지지자인 시므이를 처형한다. 또 외부위협으로 이집트 파라오 시아문은 통치자으 교체를
이용해 개입하려 했으나 게셀성을 점령만 점령하고 솔로만과의 전쟁을 피해 게셀성을 신부
지참금으로 하여 신부로 자신의 딸을 보내 동맹을 맺는다. 대신 솔로몬은 이집트의 주권 아
래 블레셋을 공격하지 않은 것 같다. 게셀이 추가된거 외에는 다윗 왕국과 같은 규모였을
것이고 두로왕 히람과의 교역관계가 발전했을 것이다. 솔로몬은 외교적 정략결혼으로 왕국
들의 충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성서에서 증언하는 솔로몬의 제국의 안정적 통치는 몇몇 지
역에서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솔로몬은 왕국의 행정을 재정비했고 성서는 그에게 현
명한 정치가이며 훌륭한 행정가였다는 의미의 현자라는 칭호를 준다. 그의 행정과 재정 정
비는 첫째 중앙 정부였다. 중앙 정부에 새로운 내각이 임명되었는데, 세습적이었고 이집트
의 영향을 받은 관직들이 생겼다. 관료제도는 전반적으로 더 복잡해지고 더 널리 보급되었
다. 이스라엘 영토는 12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졌으며 각 구역에는 총독이 임명되어 행정의
중앙 집중이 이루어졌다. 1년에 1달씩 한 구역이 왕과 왕굴을 부양해야했다. 왕실 국고는
다윗시대처럼 전리품은 없었으나 정기적으로 속국에 공물이 들어왔다.
솔로몬 통치기의 교역과 건설
솔로몬은 평화로운 시기에 장부가 관장하는 국제교역으로 주요 수입원을 개발했다. 페니키
아와의 교역은 목재와 기술 원조를 대가로 농작물을 제공했고 두로 사람들과 협력하여 오빌
로 통상사절단을 보냈다. 또 군대를 현대화하여 말과 전차를 수입했고 여러 행정 구역에 이
를 위한 주둔지를 건설했다.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벽을 세웠고 하솔, 므깃도, 게셀에 요새를
건설했다. 성전과 왕궁을 건축했고 이를 위해 페니키아와 무역하면서 적자를 청산하기 위해
땅을 주기도 했다. 이런 건축사업은 값싼 노동력을 위해 이스라엘인들을 강제노역시켜 대중
적 불만을 야기했다. 재위 후반부엔 외부로는 르손과 하닷이 대표하는 불만세력이 나타났고
내부로는 선지자 아히야의 지지를 받는 여로보암의 반란이 표출되었다. 하지만 성서는 솔로
몬의 외국인 아내들에 대한 백성들의 종교적인 이유의 불만을 강조한다.
성서와 역사
다윗과 마찬가지로 솔로몬 역시 그의 통치에 대한 고대 근동의 다른 문서 없이 전적으로 성
서와 고고학에 의지해야한다. 열왕기상 1-11장은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솔로몬의 행장'에
서 발췌한 초기 문서 전승이 있다. 이는 솔로몬 사후 얼마 후에 기록되었고 솔로몬을 현군
으로 묘사한다. 여기에 후대 신명기 사가의 첨가 및 후대 편집자들의 수정이 혼합되었다.
전체적으로 솔로몬을 미화시키거나 정당화시키려 하나, 그런 부분을 빼놓고는 다른 주요 사
항들은 신뢰할 만하다. 특히 연대기나 행정 문서와 비슷한 문체를 갖은 구절은 더욱 그렇
다. 성서 외적 지식은 솔로몬과 이집트, 페니키아 및 스바의 관계에 대해 정보를 주고 고고
학은 그 시기의 사회적 변화와 건춘에 대해서 이해를 도와준다.
이집트와의 관계
이집트 제 21왕조의 시아문으로 보이는 파라오가 게셀을 공격을 공격했다. 또 이를 지참금
으로 솔로몬과 정략결혼을 했다는데, 솔로몬 왕실의 이집트 문화, 즉 조정의 구도와 12행정
구역이 이를 나타내어 준다. 또 제 22왕조의 창시자 셰숑크, 즉 시삭은 솔로몬에 대적하여
가나안에서 이집트 세력을 회복하길 열망했고 솔로몬의 적대세력을 지지하였고 이중엔 여로
보함도 있다. 급기야 르호보암의 재위 5년엔 유다와 이스라엘을 치기위한 군사 원정대를 조
직한다.
페니키아와의 관계
이삼차적으로, 최종적으로는 오세푸스에 의해 전달된 페니키아 연대기는 진정성을 갖은 문
서로 솔로몬과 희람 사이의 문화적 관계와 교역관계에 대해 밝혀주며, 동시대 솔로몬의 연
대기도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거 같다. 그밖에 다른 페니키아어 명문들과 후대 전승은 두로
인들이 주전 1천년대에 홍해의 해상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말한다.
스바여왕
이 이야기는 솔로몬을 찬미하기 위해 쓰인 것이지만 아시리아 문서를 통해 기원전 10세기
후반에 스바의 공식 사절단이 예루살렘으로 왔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기록
다윗 솔로몬 시대에 국가의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목표를 위해 문학 창작이 중요했고 역사
편찬도 아마 이시기에 시작됬을 것이다. 아마도 이 일을 수행한 이들로 추정되는 야웨 기자
는 다양한 성소들의 전승을 결합하고 족장전승을 정리 계보를 확립했을 것이다. 솔로몬의
국가는 읽고 쓸 줄 아는 관리들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서기관과 학교를 두었을 것이다. 이
시기 이집트의 영향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솔로몬과 고고학
고고학은 솔로몬의 건축가로서의 활도오가 당대 이스라엘 사회의 변역을 위한 활동을 어느
정도 밝혀준다. 솔로몬이 지었다는 성전이나 마굿관, 요새들은 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진 것
도 있고 아직 합의를 보지 못한 것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고고학은 10세기 중반에 많은 유
적-요새나 도시-들이 건설되거나 재건된 것으로 본다. 또 고고학은 이시기를 급속히 발전
하는 과도기적 사회의 모습임을 밝혀준다.
사회적 정치적 긴장
이스라엘의 초기 국가로서의 발전과 변화와 저항을 불러이르켰는데, 특히 북부지파들은 자
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전승과 전통의 혼란, 솔로몬의 징병과 강제 징집으로 인한 인구 혼합
등등이 생겨 나아가 유다 지파의 우위에 대한 적대감으로 표출되어 나라가 분리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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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브라이트의 견해
왕정의 시작
존도 역시 블레셋의 위협을 왕정형성의 주요 원인으로 본다. 그 위협은 이스라엘 전체에 대
한 위협이었기에 전과는 다른 통일된 군사력과 조직력을 필요로 했다. 그 시기에 중앙성소
가 파괴되어 사무엘은 라마에 주로 거주하면서 유명 성소에 순회를 다니며 재판과 율법에
관한 일을 했다. 당시에 고대 근동에서 흔했던 황홀경 상태에서 예언하는 집단들이 나타나
는데, 존은 이 집단의 출현이 블레셋을 통한 위기의 상황때문이라고 말하며, 이 집단의 중
심이 사무엘이었으며 이들은 헤렘 전쟁을 주장하며 블레셋에 대한 적대감이 컸다고 한다.
사울의 시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사울이 나타났다. 존은 사울의 왕추대 전승 중, 사무엘이 백성들의 요
구에 어쩔수 없이 왕으로 지명했다는 전승을 더 신뢰한다. 사울은 옛 전통의 흐름 가운데
있다. 암몬을 무찔름으로 사사시대처럼 카리스마를 보인다. 이전 사사들과 다른 게 있다면
사무엘이라는 선지자의 지명이 있다는 것과 사사로서의 영향력과 그 시대적 요청이 범 이스
라엘적이었다는 것이다. 또 사울이 중앙에 위치한 작은 지파인 베냐민 출신이라는 것도 지
파들의 시기를 덜 받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사울은 조직이나 왕궁, 행정 같은 것과는 거리
가 멀었고 오로지 국가적 위기사항에 특수한 권한으로 임명된 왕같은 사사로서 전쟁을 수행
했다. 이런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산악지대에서 블레셋을 몰아낸 것으로 보이며 남쪽
의 아말렉과 싸울 정도로 이동적이었고 그 영향력이 범위가 컸다. 존은 사울의 몰락의 주요
원인으로 사울의 정서적 불안과 예질서에 대한 파괴 때문이라 한다. 존은 성서에서 나오는
다윗과 대비되는 사울의 미친 듯한 모습을 역사적 실제로 생각한다. 예질서에 대한 파괴로
는 기브온인들의 살해, 아멜렉에 대한 헤렘법을 위반함, 제사장직 남용이 있다. 특히 제사장
들을 몰살하고 그 남은 자손이 다윗에게 간 것은 사울의 몰락과 다윗의 등장에 있어 야웨종
교가 얼마나 중요했는 가를 시사한다. 옛 전통의 철저한 수호자인 사무엘은 이런 사울을 용
납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사울에 대한 지명을 철회했다. 이는 사울의 몰락에 중요한 요인이
었다. 존은 사울의 마지막 전투가 전술상으로 승산이 없었기에 아마 사울이 자포자기 상태
에서 최후의 도박을 하려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다윗의 시대
존은 다윗의 왕으로 추대됨에 있어 이전 시대의 카리스마의 역할을 강조한다. 다윗은 계속
되는 승리와 종교 지도자들의 지명은 그가 여호와의 영이 임했음을 확신시켜주었다. 반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왕의 자식이었지만 카리스마가 없었기에 기껏해야 사울의 세력들에
게만 지지받았다. 다윗은 왕이 되자마자 블레셋과 싸우는데, 존은 다윗이 블레셋을 이기고
욥바의 남쪽 지점까지 이르는 해안 평야까지는 분명 점령했을 거라 한다. 이곳은 나중에 솔
로몬의 행정 구역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 게셀을 점령하지 않은 것은 아마 조건부
항복을 받았거나 이집트의 영향때문이었을 거라 말한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것
은 이곳이 북부에도 남부에도 속하지 않으며 그 중간이라서 다른 지파들의 질시를 받지 않
았다. 하지만 비이스라엘적 배경이 있는 그곳을 자신의 사병으로 점령해 개인 소유지로 만
든 것은 분명 이전 전통과는 이질적이었다. 다윗은 법궤를 옮기고 그곳을 종교적 중심지로
만듬으로서 이를 극복하려한다, 역시나 사울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다윗은 팔레스타인의 여전히 남아있는 가나안족의 다른 도시 국가들, 갈멜산 북쪽과 남쪽의
해안평야, 에스드렐론 평야, 갈릴리에 많은 잔존 지역을 점령한다. 이들은 블레셋과 연계되
어 있었는데 그들이 지배력을 잃자 다윗이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다윗의 이스라엘 안에
이런 잔존 세력들을 정복하지 않고서는 결코 외부지역으로 나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이들은 이스라엘 지파체제에 동화되지 못하고 단순히 다윗의 신민이 되는데, 여기서 옛 체
제에 대한 어긋남이 깊어지고 가나안 문화 및 종교와의 적응과 알력의 문제가 새로운 차원
으로 접어든다.
존은 다윗의 암몬, 모압, 에돔, 아람 등의 정복에 대해서 그 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
서기사의 내용을 거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새로운 이 제국은 이제 지파라는 개념은 사
그라들고 다윗이라는 일인 왕에 의한 또 그에 대한 전 백성의 신민화로 이어져 왕권이 중심
이 되었다. 실로 숱한 전투를 이끈 것도 다윗과 그의 사병들이었고 새로운 수도도 다윗 개
인의 영유지였다.
국가의 행정
존은 다윗의 내각관료들은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으며 지방관료도 있었겠으나 이에 대한 기
록이 없어 알수없다고 말한다. 다윗은 국가의 경비를 대체로 왕실 자산이나 속국들의 공물
로 충당했다. 나중의 호구조사는 아마 전면적인 재정구조의 개편과 징병을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선지자 집단이 이를 여호와에 대한 죄라고 한건 이를 지지한다. 여호수아 20장의
도피성 목록이 다윗시대의 것이라면 이는 씨족간의 피의 복수를 억제하는 노력이며 다윗이
재판 문제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고 각 지방에 맡겼음을 보여준다. 물론 신하들이 왕에게 직
소하는 권리도 있었지만(삼하 14) 이는 효율적인 사법 기구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의 반증
이다. 다윗은 특히 종교문제에 관해서 이스라엘의 예 질서의 계승자로서 정통성을 나타내려
고 노력했다. 예루살렘에 언약궤를 두고 내각의 각료인 두 대제사장에게 종교문제를 처리하
게 했다. 또 역대기 사가에 의하면 다윗은 제의를 후원하여 제의를 풍부하게 하였고 특히
음악 부분이 그랬다. 또 전국토에 레위인의 재정착과 함께 국가의 공식 제의를 보급함으로
써 왕권에 대한 충성을 촉진시키고 국가적 연대를 강화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윗의 말년
존은 다윗 말년의 왕의 계승에 관한 혼란과 갖가지 발란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지파들의 불
만, 지역적인 갈등, 카리스마 전통에 의한 지도자 임명의 잔존, 다윗의 아들들의 경쟁과 싸
움이 빚어낸 결과라고 말한다. 특히 왕의 계승세서 아들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아버지 다
윗에게 1차적 책임이 있다. 또 솔로몬의 왕의 계승 기사를 존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
다.
솔로몬
존은 솔로몬 시대의 발전과 변화에 대해서 서술한 뒤 왕정과 왕정신학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솔로몬은 무역과 조공 등으로 많은 돈을 벌여들었지만 건축과 제의, 군대, 관료제 호화로운
생활로 인해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게 된다. 때문에 세금을 걷어들이고 강제부역을 시키게된
다. 이를 위해 솔로몬은 효과적 통치를 위해 지파간의 경계와 전통을 무시한채 12행정구역
으로 나누고 그 안에서 지파에 대한 정체성과 충성도를 낮추고 가나안 족을 행정구역의 신
민으로 통합하는 정책을 펼쳤을 것이다. 그동안 이스라엘 사회의 중요 요소였던 언약과 율
법의 역할은 줄어들고 대신 왕권과 관리가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 이와 더불어 경제적 발전
과 농민층 위해 상업 공업층의 상부구조가 생기면서 귀족이 생기고 계층간의 불평등이 생긴
다. 지파시대의 민주주의는 약회되고 지파체제는 끝이 난 것이다. 솔로몬은 왕권 아래 세속
공동체와 종교 공동체를 통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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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히브리인들, 민주적인 사람들, 자유로운 사람들, 신의 직접 통치를 받는 사람들.
바로 이들이 왕정을 요구했고 왕정의 잠깐의 영화가 있었지만 곧 올무가 된다.
얼핏보면 이스라엘 왕정의 역사는 이데올로기의 역사를 보는 듯 하다. 하지만 일찍이
J기자가 알았던 것 처럼 하나님은 인간들의 온갖 악과 우연과 고집과 죄를 통해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임을 기억한다.
다윗의 영토? 솔로몬의 영화와 부? 이것이 자유롭고 민주적이었던 신의 직접통치를
받는 히브리인 한사람 한사람에게 무슨 의미인가. 왕정에 반대했던 이들에게 난 많은
공감을 느낀다. 존 브라이트의 확언대로 블레셋의 위헙이라는 그런 극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결코 왕정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파체제, 민주주의는 아마도 고립되고 소규모이고 전쟁이 없는 곳이었다면 잘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히브리인들의 삶의 자리가 가장 격변의 시기에, 격변의 장소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에 야웨는 히브리인들을 둔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로만이 아닌 온 세계로 향하
고 깨닫고 선포해야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질문 1
이스라엘의 가장 모범적인 왕 다윗의 족보에 가나안 여인 다말이 끼고 모압 여자 룻이 낍니
다. 이는 신학적으로 어떤의미인지, 성서기자와 편집자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이런 기록을
남겼는지 궁금합니다.
질문 2
사울이 블레셋과의 마지막 전투 전에 자신이 몰아낸 무당에게 사무엘의 영을 불러내는 장
면. 그리고 다윗이 밧세바에게 난 아이나 죽고나서 취하는 행동에 관한 장면에서 볼 때,
그 시대 이스라엘인들은 죽음에 대해서 사후 세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합니
다.
4단원 연합왕정
번호 : 165 글쓴이 : 김현우
대략의 구약성서를 통해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부족사회의 혈맹공동체에서 신의 대리자인
사사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사사시대를 지나 외부의 압력에 대항하면서 국가적 지역, 영역공
동체인 국가개념으로 거듭나게 된다. 특히나 사울,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국가 개념의
확충과 연합 왕정체제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야훼종교가 안착하는데 있어서 두말
할 나위 없이 중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나안 정복과 정착을 진행하면서 이행된 부족연맹의 느슨함을 굳건히 해서 정체성을 확립
하기위해, 나아가 외부의 강대 세력에 대응하기위해 이스라엘 연합왕정은 약 한 세기(기원
전 1030-931) 가량 지속된다. 사울. 다윗, 솔로몬이 연합왕정을 이끌었으며 그 뒤로 연합
왕국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게 된다. 첫 국가의 모습을 띤 사울은 이후의 다윗,
솔로몬에 의해 비교적 작은 영토를 다스렸다. 다윗과 솔로몬은 실상 당대 고대 근동에서 여
러 주변국과의 외교와 전쟁을 치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료가 남았지만 많은 부분 여전히
성서에 크게 의존해야 한다는 점에서 많은 한계가 있다. 맥스웰 밀러가 주장하듯 성서는 이
시기를 이상화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시대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성서를 보다
비평적으로 조사하고 수용해야 할 것이다. 이 관념을 두 부류로 나눠 보자면, 최대주의와
최소주의로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사울(기원전 1030?-1009년경)
사울은 해양 민족인 블레셋의 군사위협에 직면해 왕위에 올랐다. 그들은 기원전 12세기 초
에 영역을 확장해 나가면서 이집트까지 뻗어나갔지만, 파라오 람세스 3세 통치 8년에 (기원
전 1177년경) 대규모 전투에서 저지되면서, 가나안에 있는 이집트 식민지의 여러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영향력이 컸던 블레셋은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으로 조직되었
으며 후에 군사적 영향력을 아벡에 까지 확장하면서 이스라엘 영토 가까이에 이르게 된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과 아스라엘과의 전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두차례 패하여
언약궤를 잃게 된다. 에벤에셀 전투에서 승리한 블레셋은 에브라임 베내민 산간 지방에 수
비대를 두었는데, 게바에 있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근간 산간지방으로 몸을 숨겼다. 이 긴
박한 상황을 맞이해 사울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등장전승에 다소 차이가 있다. 사무엘상
9:3-10:16에서 사울은 사무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고, 사무엘상 10:17-27 사
무엘이 제비를 뽑아서 사울이 왕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암몬의 공격으로부터 구해낸
사울이 영웅이 되어 왕위에 등장하는 사무엘상 11:15절 이하의 내용이 그것이다. 이 마지막
전승이 가장 신뢰받고 있는 전승이라 하겠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처럼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된 과정처럼, 해방전쟁을 수행한다는데서 왕
의 임무가 있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적국인 블레셋과의 전투에 대한 요청이 바로 그점일
것이다. 실상 왕이 된 후, 사울은 막바스에서 있었던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조
직력이 강한 블레셋은 포기하지 않았고, 이들과의 전투는 계속된다. 결국 길보아 산 전투에
서 평지 전에 약한 사울의 군대는 패하게 되고 사울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성서는 블레
셋과의 전쟁 외에도 모압, 암몬, 에돔, 소바의 왕, 아말렉 사람들에 대한 전쟁도 언급하고
있다. 사무엘 15장에 기록된 광야에서 가나안 정착을 훼방했던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사무엘
은 사울과 모든 가축, 사람을 멸절하라 하는데, 이는 승리의 열매를 야훼께만 돌리는 헤렘
전승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곧 명령을 어긴 죄로 사울은 주께서 영원히 버
린 자가 되고, 후왕인 다윗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전통 마소라 본문은 불행히도 사울이 얼마나 통치했는가에 대해 대답하고 있지 않다. 성서
에 나타난 바대로 보자면 2년 인데, 주석가들은 본문을 수정해 “22년”으로 읽는다. 하지만
이 역시 추측에 불과한 것이며, 우리는 사무엘상 13장과 14장의 두 구절을 통해 당대 사회
상에 대한 모습만 알 수 있다. 첫째는 농부와 목자로 구성된 비전문화 사회의 모습이고 둘
째는 사울의 왕위와 정치권이 가족중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사울과
그의 통치에 대해 믿을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다윗 등극이후에 사울은 참으로 악한 왕
으로 묘사됐고, 고고학적으로도 거의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더러 블레셋이 멀리 떨어져있
었다는 점에서 사울과의 전쟁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에 사울의 전쟁기록은 다윗에 대한 역
사적 지식으로 소급된 것이라고 추정되기까지 한다.
고고학은 제1철기 시대 말인 기원전 1000년경까지의 이스라엘이 진정한 중앙 집중 조직,
행정이 없는 농부, 목축업자들의 사회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 엣-다와라가 100명정도
의 촌락규모임에도 당시 사울시대에 큰 도시였다는 데서 이는 입증되었다, 그러나 최근 연
구에서는 기원전 11세기말 요단강 서쪽에 약 50.000명이 거주했다는 결과가 있다.
다윗(기원전 1009/1001-969년경)
다윗의 통치와 더불어 이스라엘은 국가적 실체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확실한 정치적
존재인 왕이 생겨났으며, 군대, 왕실 내각, 확장된 영토, 이웃 국가들 간의 외교 등이 보다
오늘날의 국가적 형태와 비슷해졌다. 알베르토 소진과 같은 학자도, 기원전 1000년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는 전역사의 영역을 벗어나 역사의 무대로 들어선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성서의 특성상 다윗에 있어서도 색깔이 짙은 해석이 결부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다
고 해서 모든 것이 명확하고 역사적 문제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실상 크나우프
와 같은 몇몇 학자는 극단적으로 치우쳐서 이스라엘이 중앙집권적 국가기 보다는 강력한 일
인 통치에 더 가까운 것이라는 주장도 한다. 그러나 기원전 9세기 명문에서도 나타나듯 다
윗 왕조의 공식 명칭이 있다는 것은 위 주장을 무력하게 한다.
성서는 다윗 통치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다룸으로 사울과 대조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다윗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실상 그의 오랜 통치기간은 황금기로 여겨진다. 명
확히 다윗의 모습은 기록되어졌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의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전승은 사울과 같이 차이가 나고 있다. 사울은 다윗을 그의 ‘병기 든 자’로 삼아 자기를 섬
기게 했다는 삼상 16장의 이야기와 17장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리친 후 사울 앞에 공식
적으로 영웅이 되는 것이 그 이야기 이다.
그러나 초기의 행복한 순간과 달리 사울의 눈엣가시가 된 다윗은 머지안아 사울에 대해 공
모를 꽤했다는 혐의로 쫓겨 다니게 되고, 그를 동정한 제사장 아비아달, 갓, 요나단 을 통해
목숨을 부지한다. 그런 와중에 이런 종교지도자들이 다윗과 동행했다는 사실은 다윗이 야훼
종교의 입지위에 서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바이다. 블레셋 영토로 망명한 다윗은 사울 사후
왕으로 등극하기 힘들 것으로 보였으나 사울의 집안싸움에 의해 형제가 갈라섬으로 인해 이
스라엘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를 시기한 블레셋은 두 차례 중부 산지를 공격하게 되고 다
윗은 이들을 물리침으로 인해 사기를 북돋고 오히려 당시 가나안의 수중에 있던 여부스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파죽지세와 같은 모습으로 다윗은 국가와 종교 모두를 강력하게 키
워나갔으며 언약궤도 다시금 되찾아 온다. 이 사건은 유다 백성에게도 호전되어 야훼 종교
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결속을 강화하는 통합적 요소로 작용한다.
다윗은 사울과 달리 조직적인 군대를 형성했다. 이스라엘 서부 국경에 대한 블레셋의 진출
을 저지하고 모압, 암몬, 에돔을 잇따라 패배시킴으로 조공을 바치게 하는 등 그의 군대는
최강이었다. 넓어진 영토 속에서 국제적인 교역로를 통제함으로 이스라엘은 경제 강국이 되
었고,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정한 이후에는 두로왕 히람도 그와 무역을 시작한다.
그러나 국가의 경제적 발전과 상대적으로 중앙 행정 조직은 여전히 미성숙했다. 이로 중앙
집중화 된 국가체제는 솔로몬에 가서야 완성되었으며, 국가 내부적으로도 계승의 문제가 이
스라엘, 유다의 불안한 연합과 겹치면서 더 악화되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더군다
나 그의 입지 강화 전략이었던 정략적인 결혼 이후에 얻은 자식들 간의 경쟁으로 집안 내의
굴곡이 생기게 된 것이다. 후에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는 등 다윗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이다
요압장군에 의해 죽게 된다. 처절한 왕권 다툼은 다윗이 밧세바에게 솔로몬을 왕으로 지목
함으로 마무리 된다.
이와 같은 성서 전승에서 우리는 사실상 신명기적 사가들의 영향을 반영하는 첨가와 해설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객관적 역사의 평가는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 시대의 역사기록은 사건들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쓰였기 때문에 신뢰할 만한 증거
는 다분하다고 여겨지나 여전히 가장 어린 왕인 솔로몬 등극 기사와 대외 정책에 관한 의도
성은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실상 다윗의 정치 영역은 성서가 언급하는 의도적인
진술과 다소 달리 강력한 일인 통치에서 국가의 형태로 발전하는 형태로 이해 가능할 것이
다. 어떠한 건축물이라든가 고고학적 유적 역시 솔로몬에 가서야 크게 등장하는 점에선 위
내용을 입증하고 있다고 하겠다.
많은 한계가 있는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통치는 영광스런 시대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과 유다를 결합하고 예루살렘을 공통의 수도로 삼으면서 호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잠시나마
다윗은 고대 근동에 있어 당대 강국중 하나로 여겨졌을 것이며 히브리 신 야훼의 숭배를 뒷
받침할 종교적 제도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솔로몬 (기원전 970/969-931)
다윗은 주로 전쟁을 수행하고 영토를 확장하는데 주력하였다면 솔로몬은 먼저 자신의 입지
를 굳히고 그 영토를 공고히 하며 왕국의 행정을 조직하는데 그 관심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시행된 자신의 입지를 위해 솔로몬은 이전에 위협을 제거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
다. 아도니아, 요압이 처형되고 아비아달은 추방당했으며, 사울가문 시므이가 처형됐다.
외부적으로는 파라오 시아문은 처음 솔로몬의 왕권 획득에 관여하려는 모습을 보이나 후에
정략적으로 자신의 딸을 주고 동맹을 맺음으로 솔로몬에게 블레셋 불침의 등가교환을 성립
한다. 이 정략 결혼은 특히 솔로몬이 많이 이용한 외교 정책이다. 암몬 여인 나아마와 결혼
하였고, 그 사이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다음으로 솔로몬은 왕실 내각을 굳건히 하기위해 일관적인 연속성을 나타내는 관료들을 임
명하고 복잡한 제도를 도입했다. 영토 역시 12개의 행정구역으로 세분화 되면서 행정의 중
앙집중이 이루어 진다. 여전히 솔로몬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딸을 총독과 결혼시
킴으로 중앙집중을 이루어 간다.
또한 평화로웠던 시기 솔로몬은 국제교역을 통해 국고를 채웠고, 그 중에서 페니키아와의
교역은 그의 찬란한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외교교역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벽을 세웠고, 하솔, 므깃도, 게셀의 세 요새를 건설했다, 7년간에 걸쳐 성전을 지
었고, 13년에 걸친 왕궁을 세웠다. 거대한 건축을 위해 솔로몬은 페니키아의 기술과 도움이
필요했고, 인테리어를 위해 갈릴리 땅의 성읍 이십을 히람에게 주기도 하였다. 자원조달을
위해 솔로몬은 요단 계곡의 숙곳과 사르단 사이에 있는 금속 주형을 사용했으며 여러 가지
자원을 해외에서 내수로 조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에 필요한 노동력은 강제적으로 소집
했기 때문에, (또한 군사력도 강제동원한 바에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솔로몬의 통치에
대해 대중적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반부에는 이 내부의 위협과 더불어 에돔과 엘리아
다의 아들 르손에 의해 외부적 위협이 생겨남으로 위기를 겪는다. 이스라엘 자체에서도 내
부적 불만이 여로보암을 선봉으로 반란으로 생겨남으로 솔로몬은 이를 죽이려 했다. 아무래
도 가장 큰 봉기의 원인은 정략적 결혼 때문에 이방신의 유입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열왕기상의 많은 부분에서 솔로몬은 전형적 현군으로 묘사된다. ‘솔로몬의 행장’이라는 솔로
몬 사후 곧 기록된 전승에서 많은 부분 인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과 함께 후대의 몇
전승이 열왕기의 연합 왕정, 솔로몬의 시기를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후대의 전
승들은 또한 여러 솔로몬의 건설 사업이라든가. 북부 시리아 원정에 대해 호도를 하고 있
다. 그러나 ‘레바논’과 같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과장도 담고 있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해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전 시기보다 성서 외적 고고학의 결과가 다소 두터운 모습을 보
이기 때문에, 솔로몬의 건축과 페니키아, 스바와의 관계에 대한 정보라든가,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부분 고고학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실상 이집트에 대한 언급은 적지
만, 실상 솔로몬이 이집트의 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은 그의 정략적인 이집트 공주와의 결혼
에서도 알 수 있다. 결혼의 시기는 12대 왕조 파라오로 추정되는 시아문 시대로 추정된다.
또한 이런 영향 속에 솔로몬이 나라를 12행정구역으로 조직한 것은 동시대의 이집트 행정
조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알스트룀은 야곱의 열두 아들, 이스라엘 12지파
문서 전승의 기원을 이 12구역 행정조직에서 찾고 있다. 문서전승은 페니키아와의 관계도
밝히고 있는데, 페니키아 연대기에 보존되어있던 이 전승은 여러 역사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솔로몬의 건축에 영향을 주었을 만한 건축기사가 담겨있는 이 전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니키아의 군사 원정, 건축 활동에(솔로몬에 기술적, 자원적 도움을
준,) 대한 두로의 공통된 기록을 사용한 흔적을 드러내기에 객관성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더
불어 당시 게셀월령이라는 명문은 고고학적인 자료로 기원전 10세기경 농업활동과 연관한
월력인데, 당시 이스라엘 역사 편찬도 이러한 식으로 동 시대에 진행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
을 불러 일으켰다. 이스라엘 역사 편찬은 체니키아 역사 편찬과 병행하여 일어났으며, 이는
아비아달 제사장이나 그와 가까운 사람이 기록한 다윗의 계승 역사와 더불어 시작됐을 것이
다. 나아가 여러 성소를 한데 묶어 연합 거대 왕정을 만드는 사관을 장려했을 것으로 보인
다. 더불어 이를 한데 묶은 것은 ‘J’ 야훼자료의 기자로 보이며, 부분적으로 이집트의 영향
을 받은 이스라엘이 왕정 이념과 관련한 히브리 문학의 태동을 촉발하였을 것이라 생각된
다. 역사의 문서화 작업이 많이 발생하였다고 여겨진다.
윌리엄 디버는 기원전 10세기의 건축물 유적은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 최초의 증거이며 웅
장하기에 인상적이라 하였다. 비록 586년 유다 멸망이후 바빌론에 의해, 제2성전은 로마인
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어니스트-마리 라페루사즈에 따르면 성전 언덕에 솔로몬이 세운 벽
면의 일부가 여전히 보인다고 한다. 더불어 이갈 실로가 주도했던 다윗성에 대한 최근 발굴
에선 다윗성의 일부로 보이는 계단식 석조구조물이 발견되었고, 캐년이 발굴한 성벽 조각역
시 다윗성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열상 9장에 나타난 바 솔로몬이 자기 왕국의 일부
가 된 세 가나안 도시 -하솔 므깃도 게셀-을 재건함에 있어서 이가엘 야딘과 많은 학자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세 유적 모두에서 포곽벽으로 둘러싸인 , 그
리고 관문 양편에는 세 개의 방이 있는 동식의 요새 구도가 발견된다는 점에 그 증거를 내
세웠다.
이 외에도 많은 구조물들이 발견되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많은 고고학
적 유물이 기원전 10세기 중반을 전후해 건설되거나 재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네겜
에 있는 초기 철기 시대 요새들은 솔로몬의 통치와 연관가능하며, 일부는 파라오 시삭의 기
원전 925년 원정에 의해 손실되었다고 보인다. 위와 같은 고고학적 유물로 확인된 당대 기
원전 10세기 중엽의 사회상은 급속히 발전하는 과도기적 사회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거주 지역에는 농부, 목축업자, 군대, 정부 행정조직에 일하는 자들, 상인, 관리들
이 살았던 것으로 보여, 재 도시화의 과도기였다고 여겨진다. 더불어 많은 공공기관 건물
유적은 국가적 모습을 갖춘 형태로 발전하는 사회상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중앙집권적
국가 건립을 위한 강제 노역이나 징집에서 인구 혼합이 일어나고 이에 의해 긴장이 초래하
면서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의 첨예한 긴장이 생겨나고 솔로몬 사후 후계자의 취약한 정치
지도력은 이 긴장을 극대화하여, 연합왕정에서 두 국가로 분리된 형태로 나뉘어 두 민족국
가로 발전하게 된다.
1. 고고학적 연구 방법론에 있어서 도자기류를 통해 식별하는 방법이 있다고 했는데, 당대
솔로몬 시대는 교역이 왕성하였기에 골동품 수집이나 외국의 도자기들을 사절단이 가지고
오는 등의 여러 가지 변수가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실상 도자기의 연대 추정은 구체
적인 10년 단위의 추정까지 가능하다고 여겨지는데, 여튼 구체적인 고고학적 방법론과 최신
의 방법론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2. 재도시화 과정에서 12행정구역으로 분류한 것이 12지파의 기원이고 투사라는 점에서 다
소 의문이 제기되는데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여겨지는 상황 하에서, 과연 이집트
에는 12 행정구역 설정의 어떠한 기원 설화라든가 그 이유가 있나 소개부탁 드립니다.
3.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연합왕정에 대해서, 포로시대 이후 다시금 국가적 면모를 갖
추고 강건해지길 바라는 희망의 투영으로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고 하는데, 교수님은 이
연합 왕정의 시대의 역사적 진위 여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