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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흠 시인편 . Ⅱ>
베릿내에서는 별들이 뿌리를 씻는다 / 칠량에서 만난 옹구쟁이 /성스러운 밤 / 시위하는 경찰 / 적멸—탐진강 17 / 곰소에서 / 옥수수 곁으로 / 사계리 발자국 화석 / 남도 / 열아홉의 비망록 / 이중섭의 소 / 동낭치 부자 / 물무늬 손바닥 / 폭포 / 나다 / 젖 감전 / 오래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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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天冠) / 이대흠
강으로 간 새들이
강을 물고 돌아오는 저물녘에 차를 마신다
막 돋아난 개밥바라기를 보며
별의 뒤편 그늘을 생각하는 동안
노을은 바위에 들고
바위는 노을을 새긴다
오랜만에 바위와
놀빛처럼 마주 앉은 그대와 나는 말이 없고
먼 데 갔다 온 새들이
어둠에 덧칠된다
참 멀리 갔구나 싶어도
거기 있고
참 멀리 왔구나 싶어도
여기 있다
베릿내에서는 별들이 뿌리를 씻는다 / 이대흠
이 여윈 숲 그늘에 꽃 피어날 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작은 방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거기에서 당신의 무릎을 바라보며 세월이 어떻게 동그란 무늬로 익어가는지 천천히 지켜보다가 달빛 내리는 언덕을 쳐다보며 꽃의 고통과 꽃의 숨결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가만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먼 데 있는 강물은 제 소리를 지우며 흘러가고 베릿내 골짜기에는 지친 별들이 내려와 제 뿌리를 씻을 것이다 그런 날엔 삶의 난간을 겨우 넘어온 당신에게 가장 높은 난간이 별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그래서 살아 있는 새들은 하늘 한 칸 얻어 집을 짓는 것이라고 눈으로 말해주고 싶다
서러운 날들은 입김에 지워지는 성에꽃처럼 잠시 머물 뿐 창을 지우지는 못한다 우리의 삶은 쉬 더러워지는 창이지만 먼지가 끼더라도 눈비를 맞더라도 창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으니 뜨거운 눈물로 서러움을 씻고 맨발로 맨몸으로 꽃 세상을 만드는 저 동백처럼 더 푸르게 울어버리자고 그리하면 어둠에 뿌리내린 별들이 더 빛나듯 울 일 많았던 우리의 눈동자가 더 반짝일 것이라고
칠량에서 만난 옹구쟁이
이대흠
요새는 유약이라고 허제 요런 조런 색깔을 이삐게도 내 싸제 낯판 거친 술집 년이 화장빨만 세우는 격이여 기둥 썩은 집에 뺑끼 칠한 식이제
옹구쟁이 잿물은 딴 거 없어 솔가리 태운 재는 솔가리 태운 재대로 짚가리 태운 재는 짚가리 태운 재대로 뻣신 억새 태운 재는 또 그것대로 색깔이 적지금 달부제 옹구쟁이라 하먼 설익은 잿물은 안 쓰는 법이여 얼렁뚱땅 만든 잿물은 컽만 뻔지르한 법잉께 잿물이라먼 그래도 한 삼년은 삭어사써 그런 잿물로 그륵을 궈야 색에 뿌리가 생기제
사람도 그란 것이여
성스러운 밤
이대흠
객지 생활 삼십 년 넘게 떠돌아다닌 홀아비 만수 형님 갯일에 노가다에 쉰 넘어 바닷가에 집 한 칸 장만했는데요
엄니, 지가 집 사먼 제주도 오신닥 했지라이 이참에 제주도 한 번 놀러 와부씨요
그렇게 늙은 부모님 모시고 며칠을 지냈는데요 낮에는 화물차로 꽃구경 물 구경 사람 구경 다니고 밤이면 마당에서 기를 구워먹고 우영밭의 고추도 따먹고 지난 시절 얘기를 맛나게도 버무려 서로의 입에 넣어 주기도 했는데요
집도 있겠다 부모님도 계시겠다 콧노래를 달고 다녔던 만수 형님 어느 날은 술 잔뜩 마시고 흥얼거리며 새벽녘에 들어왔더니요 그때까지 도란거리던 노인들의 중늙은이 된 아들놈 잠자리까지 챙겨놔서 젖먹이 때인 듯 살포시 잠들었던 것인데요
꿈결인 듯 아닌 듯 파도 소리가 막 들려오더래요 처음엔 파도가 파도를 베끼는 소린 줄 알았다가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는 소린 줄 알았는데요 알고 보니 몸을 읽어가는 소리였는데요 칠십 줄 넘은 노인들이 한 오십 년 읽어왔던 서로의 몸을 다시 읽는 소리였는데요
처음에는 얼굴이 붉어졌는데 가만 생각하니 너무 성스러워 고맙고 고맙더래요 애 낳기에는 늦어버린 허공이 된 몸들이 애를 쓰고 있었는데 그 소리에 더 묻히다 보니 거기서 나오는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가 혼자 노는 게 아니더래요
그래요 그것은 우주가 알 스는 소리였는데요 우주의 숨을 낳고 기르다가 다시 우주로 돌려주는 것이었는데요
그것 참 그것 참 기가 막히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음악이었는데요 파도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스님의 새벽 독경 소리처럼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그 소리가 바람이 되어 파도가 되어 몇 굽이를 넘어가는 눈치였는데요
놀랍구나, 너의 얼굴은
이대흠
놀랍구나, 너의 얼굴은
어떻게 동그란 두 눈으로 세상을 다 보며
어떻게 조그마한 콧구멍으로 향기를 맡을 수 있단 말인가
놀랍구나, 너의 입술은
어떻게 그 열고 닫는 것만으로 즐거운 목소리가 나오며
어떻게 작은 속삭임으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놀랍구나, 너의 미소는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약간의 살결을 흔들어
슬픔과 기쁨과 행복감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놀랍구나, 너의 몸은
슬픔과 노여움 속에서도 살아있다는 기적을 만들며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일 수 있단 말인가
놀랍구나, 너는
너만으로도 충만이면서
사랑으로 넘치고 있으니
놀랍고 고맙다, 나의 사랑아
절대의 아름다움이여
내 우주의 중심이여
시위하는 경찰
이대흠
시위대 다섯 명 앞에 경찰 오백 명이 줄지어 섰다 완전무장을 한 경찰들은 진시황의 무덤에서 발굴된 군사들 같았다 지나가는 한 외국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시위 하나요?
네
내국인이 대답했다
경찰이 엄청 많네요 경찰이 도대체 무슨 시위를 하는 거죠?
적멸
—탐진강 .17 / 이대흠
뼈가 자라는
붉은 강이 있다고 늙은 여자가 말했을 때
여자의 입은
알 낳기를 멈춘 닭똥구멍 같았고
만개한 꽃 같았고
눈동자는 허공이 되어 있었다
녹슨 호미 날 같은 손가락으로
노을을 끄집어 당기며
슬픔의 세월을 다 삶아야 노을처럼 울 수 있는 법이라고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제 눈으로 제 얼굴을 볼 수 없다고
여자는 모래알처럼 서걱거렸다
이룰 것이 죽음뿐이라는
여자의 말을 귓바퀴에 감으며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순간
달개비 꽃이 피고
달개비 꽃이 지고
달의 수레바퀴가 또 덜컹거리는 소리도 없이
강이 되어 흘렀다
붉은 강에서 뼈가 자라는 동안
나는 다시 이슬 같은 몇 번의 생을
나비 날개에 적셨고
늙은 여자는 바닥이 되어
붉은 강의 허물을 빚고 있었다
곰소에서 / 이대흠
나무로 덧대어 만든 커다란 소금 창고는 기울어져 있었다 평생을 물에서 오신 소금을 모신 곳이었으니 여전히 물이 들어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물이 들어와 있을 때보다 썰물 때가 더 기울어져 있었다
내게 남은 것은 그대가 남기고 간 한 줌 소금 같은 그리움이니!
베인 상처에 갯물이 들 때처럼 마음 안이 쓰리고
그대 떠나고 나도 그대 쪽으로 기울어졌다
해가 질 것이고 바다 바람에 나는 낡아갈 것이다
조금 더 기울어질 것이다
옥수수 곁으로 / 이대흠
옥수수 알갱이는 종알거림을 참느라 앙다문 이빨 같다
젖비린내가 난다
아빠 빨리 집에 와 말해 놓고 일 년 넘게
아빠 얼굴을 보지 못한 딸아이의 어린 슬픔처럼
나는 옥수수처럼 그리움에 서걱거렸으나
옥수수에서 연한 살내만 떠올렸을 뿐
울컥울컥 돋는 설움이 도톨도톨 알맹이로 뭉쳐 굳어지도록
사계리 발자국 화석 / 이대흠
다녀가셨군요 당신
당신이 오지 않는다고
달만 보며 지낸 밤이 얼마였는데
당신이 다녀간 흔적이
이렇게 선명히 남아있다니요
물방울이 바위에 닿듯
당신은 투명한 마음 발자국을 남기었으니
그 발자국 몇 번이나 찍혔기에
화석이 되었을까요
다녀갈 때마다 당신은 또 얼마나 울었을까요
아파서 말을 잃은 당신
눈이 멀도록 그저 바라다보기만 하였을 당신
몹쓸 바람 모슬포 바람에 당신 귀는
또 얼마나 쇠었을까요
사랑이 깊어지면 말을 잃는 법이라고
마음 벼랑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를 데려와
당신의 발자국 위에 세워봅니다
소금 간 들어 썩지 않을 그리움
입 잃고 눈 먼 사랑 하나
당신이 남긴 발자국에 새겨봅니다
다녀가셨군요 당신
남도 / 이대흠
강물이 리을리을 흘러가네
술 취한 아버지 걸음처럼
흥얼거리는 육자배기 그 가락처럼
산이 산을
들이 들을
물이 물을
흐을르을 흐을르을
전라도에서 절라도까지
리흘리흘 리흘리흘
목숨 줄 감고 푸는 그 가락처럼
열아홉의 비망록 / 이대흠
몰래 마신 소주처럼 시간은 흘러갔다 무엇이든 하고 싶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나는 담 너머의 매화 꽃봉오리가 터지는 순간을 기다렸다
기대할 수 없는 내일만 많았던 겨울, 눈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 쌓였고
눈 덮인 산을 보면서 나는 차라리, 라는 말만 반복했다
해바라기야 해를 따라가라 달맞이꽃은 저 달을 품으렴
슬픔이 직업인 나는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 것이다
의지는 이치에 대한 배반이고 나의 좌절은 나를 치유하지 못할 것이다
꽃씨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고 늦은 밤에 나는 나의 성기에서 신을 죽였다
어딘들 꽃피우지 못하랴 허방이라도 땅을 삼을 것이니
속된 자여 네가 먼저 웃으리라
겨울은 길었고 삼월이 되어도 유월이 되어도 눈이 내렸다 나를 배반하는 게
쉽지 않아서 나는 머뭇거렸다 내 몸에서 끊어낸 살점을 징검돌로
삼을 수 있다면, 나는 죽음으로 건너려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꽃이여
모든 꽃이 울음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나에게 꽃잎의 향기 따위를
늙은이의 목젖에 붙은 햇살 같은 것이니, 나를 도려내 너를 심을 수 없으니,
나는 가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안개뿐인 세상으로 나를 던져
버리는 것이다. 꽃을
이중섭의 소 / 이대흠
자신의 뿔로 들어가기 위해 소는
뒷다리를 뻗는다 서귀포에서 부산에서
뿔로 들어가 단단한 힘이 되어
세상의 고름을 터뜨리리, 소는 온몸을
뿔 쪽으로 민다 소의 근육을 따라 툭툭
햇살은 튕긴다 앞다리 들어 펄쩍
들어가고 싶다 소가 뛰면
뿔도 뛴다 젠장 명동에서 종로에서
뿔로 들어가고 싶은데 뿔은 또
저만치 앞서 있다 참을 수 없어 소는
속력을 낸다 뿔은 또
멀리 달아나고 뿔로 들어가고 싶어
소는, 나는
일생을
동낭치 부자 / 이대흠
아버지 동낭치와 아들 동낭치는
그해 겨울에 처음 나타났다 매운 눈매가 탁앴다
두어달 전
우리를 윽박질러 쌀 한 되를 빼앗듯 가져간 자들이었다
들키는 날에는 또 어김없이 차또그륵을 헐어야 되리라
동낭치 부자는 토방에서 한참 동안
인기척을 하였다 나는 금방이라도 오줌을 재릴 것만 같았다
저들이 방문을 열면 소리를 치리라
호흡을 여러 번 가다듬었다 무어라 입 열려는 동생에게 꿀밤을 먹였다 그때
술 취한 아버지가 새립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사금파리에 찔린 듯이 일어섰다
그 동낭치들이라고 소리 질렀다
아버지가 호통을 쳐 그들을 혼내주리라
아들 동낭치의 눈동자가 쫓기는 고라니 눈 같아서
우리는 고함치듯 한 마디씩 더 했다
얼굴이 붉게 단 아버지는 신 신은 채 마루에 오르더니
이내 고방으로 향했다
고방에서 낫이나 몽둥이를 들고 나오리라
그러나 아버지 손에는 쌀바가지가 들려 있었다
동낭치 부자의 눈에서 한정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마당 가득 하늘 가득 별밭이었다
우리는 그날 저녁부터 시래기 국만 먹고 이틀을 살았다
우리사 하래 이틀 굶제만 그 사람들은....,
아버지는 어머니의 한숨 사이에 추임새를 넣었다
두어달 뒤 다시 온 아버지 동낭치는
옷차림이 달랐다 서울로 갈 거라며
엉거주춤 마루에 서 있던 아버지를 향해
토방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아, 눈물겨운 아버지들
물무늬 손바닥 / 이대흠
물낯엔 주름이 많다 바람과 새소리가
정이 되어 새겼을 저 얼굴 한숨과 아쉬움의 세월 속에
나도 저처럼 늙어가고 싶어서 강물에
내 안의 무거운 것들을 부려놓는 버릇이 생겼다
살아온 날은 살아갈 날의 답이 되지 못한다
맥없이 돌멩이 하나를 강물에 던진다
파장은 늘어갈수록 희미해지고 희망이나 정열은
기어이 흘러가는 물의 살에 섞여 지워지는 것
해가 지도록 내려가는 물줄기에 보폭을 맞춘다
아래로 갈수록 돌의 표면은 부드럽다
돌이 이토록 부드럽게 될 때까지
쉼없이 어루만졌을 물의 손바닥에도
굳은살이 박였을 것이다
물의 살이 내 살인 것만 같아서
다치지 않게 가만히 만져본다
어느새 내 손바닥에도 물무늬가 새겨졌다
폭포 / 이대흠
떨어진다는 것은
부수어짐
이전의 나를 버리고
다른 내가 된다는 것이다
삶의 여울을 돌아 나와
세월의 무서운 속도에 몸을 맡기고
뒤돌아볼 겨를이 없다
다시 살 수 없음이여
무서워 말라 상처를
만나면 새롭게 어나는 것을
그대 만난 나처럼
나다 / 이대흠
어머니는 내게 전화할 때 ‘나다’라고 하신다 말 하는 나와 말 듣는 나 사이가 구별되지 않는다 예전에 전화할 땐, ‘엄마다’라고 하셨는데 일흔 넘은 어머니는 ‘나다’란 말 외엔 하지 않는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몸이 어머니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육체가 가는 걸 느끼며, 나였던 모든 것을 생각하셨을까
나다, 나다, 나다, 라는 어머니의 말을 듣다보면 다른 집 아이들은 물론이고 강아지나 새 새끼, 병아리나 고도리, 두엄 더미의 민들레까지 다 나여서, 나는 어느새 어미가 되고 만다
탯줄이 잘리면서부터 나는
어미였던 기억을 잊으려 했구나!
오래 전부터 나인 태양이 뜨고 나인 바람이 분다 꽃인 내가 피고 물인 내가 흐른다 나는 돌이고, 날씨고, 사랑이다 목숨인 나는 죽음이다
어머니 가신 후 나는
널 속에 누워 이렇게 말하리
나다!
젖 감전 / 이대흠
공장생활을 하는 햇어미들은 아기 젖 줄 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퉁퉁 불은 젖을 감추고 일을 하는데 그래도 아기가 배고플 즈음이면 어미가 먹었던 밥이 모조리 젖으로 와서 강 흐르듯 자연스레 몸 밖으로 흘러나오는데
그 강에 닿아야 할 풀뿌리 같은 아기 입이 없어서 쏟아져 나오는 젖을 플라스틱 통이 먼저 맛보고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몇리나 떨어진 집에 있는 아기가 어미 젖 짜는 그 시간을 용케도 알아서 감전된 듯 감전된 듯 울어댄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긴 강은 미시시피강이나 아마존강이 아니라 어미의 젖내 흐르는 젖강인 것을
마흔 넘어 바다 건너온 내가 바닷가를 서성이는 것은
두고 온 늙은 어미의 젖내가 갯바람에 몰아쳐서 자꾸만 자꾸만 눈이 아려서
오래된 편지 / 이대흠
큰형은 싱가포르로 돈 벌러 가고
물레에는 고지서만 쌓였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신 어머니는
어깨너머로 겨우 한글을 깨쳤지만
혼자서 편지 쓰기에는 무리였다
보일러공인 큰형 덕분에 나는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어머니가 입으로 쓰시는 편지를
양면지에 옮기는 일을 하였는데
맞춤법도 없는 편지는 큰형을 곧잘 울리고
큰 악으야 여그도 이라고 더운디 노무 나라에서 얼매나 땀 흘림시롱 고상허냐? 니 덕분에 아그들 학비 꺽쩡은 읎다마는 이 에미가 니럴 볼 면이 읎따 늑 아부지도 잘 있고 아그들도 잘 있시닝께 암 꺽쩡 하들 말고 몸조리나 잘하그라 저번참 편지에 내 물팍 아푸냐고 물었는디 내 몸땡이는 암상토 안항께 꺽쩡얼 허들 말어라
그럴 때면 나는
편지에 계절 인사가 있어야 한다고 우겨댔는데
그러면 어머니는
속닥새가 우는 걸 봉께 밤이 짚었구나
샐팍에 있는 수국이 허뿍 펴부렀따
이러다가
그 까튼거 몰라고 쓴다냐
기냥 몸이나 안 아픈지 으짠지 고것이 더 중하제
느그는 성이 짠하도 안하냐?
뙤약벹에서 내 자석이 피땀 흘려 번 돈을
호박씨 까묵대끼 톡톡 끼리고 있짱께 중치가 멕힐락 함마이잉
이참 월급도 다 써불고
느그 성 나오먼 통장이나 한나 줘사 쓸것인디
에미 애비 있능 것이 도와주지도 못함서
하면서 이내 눈물을 글썽이셨는데
이쯤 되면 나는 어머니가 했던 말을 마음대로 버무려
편지를 썼는데
큰 악으야 에미다 더운 디서 일 하니라고 고상이 징상나게 많지야 여그도 이라고 더운디 니는 오죽하겄냐 근디 우째사 쓰꺼나 니 나오먼 통장 한나 둘라고 애끼고 애낀다마는 이참 월급도 아그들 납부금 내불고 농협 빚 조깐 쥐알려불고 낭께 읎어져부렀단마다 차말로 내가 에미제만 할말이 읎따 더운 나라에서 피땀 흘리고 이쓸 너를 생각하면 중치가 멕히고 숨이 멕힐락 한다마는 우짜것냐 벨 도리가 읎어분다 못짜리 할 때부텀 울던 속닥새가 또 운 것을 본께로 밤이 이상 짚었는 모냥이다 니가 작년 가슬에 싱게놓고 간 국화도 이상 커부렀다 깽벤 밭에는 감재랑 콩을 싱겠는디 아까 낮에는 아그들 데꼬 가서 밭을 맸다 날이 징상나게 더와서 아그들은 풀 조깐 매고 나서 뫼욕을 허드라 아그들 뫼욕한 거 보고 이씀서 오매 우리 큰악으는 더운디서 엄마나 고상할끄나 생각허닝께 눈물이 나드라 모쪼록 여그는 암상토 안항께 니 몸 한나 건사 잘하기 바란다 펜지를 쓴다고는 쓰제마는 니 낫을 볼 면모기 읎어서 우짜꺼나 못난 에미가 무담시 우리 큰악으만 고상시키고 있구나 니가 그라고 피땀 흘림서 번 돈을 한나도 모태도 못하고 우짤까 몰르겄다 아그들이 크먼 니 덕을 알랑가는 몰겄다마는
이쯤 쓰고 있노라면 어머니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나는 엄니가 불러준 대로 고대로 써부렀네이 하고는 편지 말미에
큰성 나 대흠인디, 엄니 시방 울고 있소. 큰성 이약만 나오먼 눈물부텀 흘린당께. 모쪼록 몸 성히 잘 지내시고, 나올 때게 샤프펜슬 꼭 잊지 마씨요이잉.
하고 두어 마디 붙이곤 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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